삼십오년 : 3.1혁명과 대한민국임시정부
박시백 지음 / 비아북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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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히지만 결코 쉽지 않은 우리역사. 누가 끌고 온 역사인지 누가역사의 주인공이어야하는지 ..친일청산이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현실이 부끄러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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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대리인, 메슈바
권무언 지음 / 나무옆의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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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는 권사님이시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대형교회의 여선교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사실 엄마를 교회로 인도한 건 어린 '나'였다. 동네 사찰의 보살님이었던 엄마는 동제를 지내던 무당이 나를 신딸로 주면 안되겠냐는 말에 혼비백산해서 이사를 갔고, 며칠을 안절부절 못하다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두렵고 두려워서 시작된 소위 '신앙생활'. 건너 건너 아는 사람들 손에 이끌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교회에 발을 디뎠고 웅장한 대성전에 압도되어 넘치는 은혜를 받았다. 줄곧 울고 소리치며 기도하는 엄마와 사람들이 겁이나고 무서웠다. 광기.

어쨌든 공부머리는 없어도 영악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나는 엄마의 신앙생활에 그럴듯한 악세사리였다.

엄마는 늘 빳빳한 신권으로 헌금을 준비했다. 선교헌금, 건축헌금. 십일조헌금. 감사헌금. ..

선교센터가 지어졌고, 교육관이 지어졌고, 지하성전이 넓어졌고 방송시설이 생겼고, 대학이 생겼고, 신문사가 생겼지만 엄마는 여전히 가난하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기도는 수십년간 이어졌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 사역을 하는데 부족함 없는 교회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도 끝이 없었다. 전세계 대표교회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빼먹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교회에 다닌다는 자부심은 생각보다 컸다. 마치 하나님은 다니는 교회의 크기대로 신도들에게 축복을 내리는것인양. 선택받은 자로서 사명감도 투철해졌다. '하나님 뜻'이라는 네글자는 너무나 영험(?)해서 네 글자로 열리지 않는 문제는 없었다. 너무나 거대해진 교회에서는 금전문제가 불거졌고, 탈세, 횡령, 담임목사의 부적절한 사생활들이 터져나왔지만 그것은 주님의 귀한 종을 음해하려는 마귀의 농간으로 치부되었고, 그 과정을 기도로 견뎌낸 이는 단련을 견뎌내고 더 크게 쓰임받을 준비를 마친 귀한 존재가 되어있곤 했다.

도무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집단, 혹은 구조.

교회를 비판하고 교회 지도부를 비판하는 소리를 엄마는 불편해했다. 그런 소리를 들은 날이면 더 간절히 새벽기도를 했고 철야기도회를 다녀오곤했다.

하지만..엄마는 더이상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 엄마 말로는 나이가 드니 힘이 들어서 그렇다고, 티비로도 예배드릴 수 있으니까 괜찮다고 하지만 엄마는 지쳐보인다. 엄마의 가장 힘든 시간을 의지해 온 '신앙'이라는 기둥에 균열이 생기고 곰팡이가 핀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하나님의 뜻' 보다 앞선 '사람의 뜻'을 눈치채버렸고, 성경을 오독하는 자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돈 앞에, 권력 앞에 성경과 하나님은 방패막이이며 그럴듯한 명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란걸 ..그래서 엄마는 혼자 예배를 드리고 혼자 기도하고 혼자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과 소통하고 있다.

말초신경부터 흥분이 되어 취한 사람처럼 뜨겁게 온몸을 흔들며 울고 소리지르지 않아도 조용히 찾아지는 하나님은 이전에 엄마가 알던 '징벌하는 하나님', '잘투하는 하나님', '복수하는 하나님'이 아닌 '사랑'의 하나님이며 '의지'의 하나님이며 '자비'로운 하나님이라고 했다. 폭신한 솜이불처럼 편안한 하나님이라고 엄마는 말했다.

 

신의 대리인 메슈바. 를 읽으며 나는 자꾸 엄마 생각이 났다. 엄마와 내가 함께 목격했던 메가처치의 모습이 고스란히 그려져있다. 더는 감출 수 없는 지경이 되어 터져나오는 목사의 성추행 문제나, 세습의 문제, 동성애 반대, 친자본적 포지션. .

그것이 비단 몇몇 목사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된 고착화된 모순이었음을 다시 확인한다. 이제는 어디가 머리고 어디가 꼬리이며 누구의 머리인지 팔인지도 알 수 없을 정도로 서로 뒤엉켜있는 권력과, 돈과, 기독교의 밀착관계는 극단적인 해결방법만 남은건가? 묻게 된다.

작가는 이 글을 쓰며 위험할 거라는 것을 직감했다고 했다. 읽다보니 알겠다. 매우 위험할 수 밖에 없다. 왜곡된 신앙심으로 똘똘 뭉친 하나님의 최정예부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읽는다면 분명히 작가를 찾아내 해코지를 하려고 들지도 모를일이다. 그만큼 구체적이고 사실관계가 분명하다. 그래서 놀랍고 그래서 다소 걱정스럽기도 하다.

작가는 기독교인이었을까? 성경을 해석하는 눈 또한 명료하다. 모태신앙일지도 모르고 아니면 젊은 어느 때 치열하게 성경으로 논쟁을 벌였던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막연함이 아닌 구체화된 사건과 사람과 관계가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는 이야기.

결코 적지 않은 분량임에도 잘 읽힌다. 어쩌면 신앙이라는 공감대를 걸치고 있어서였을지도 모르지만,..

 

누가 메슈바인가?

메슈바는 등을 돌리다, 라는 뜻을 담고 있는 히브리어라고 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배신하고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사람들은 거리에서 죽어가고 있다. 살려달라고 소리치다 쓰러지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 하늘에 외치고 땅에 눈물 흘리고 있다. 서로를 속이고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를 혐오하며 내 것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가진 자는 더 가지겠다고 악다구니를 쓰고 없는 사람은 이제 조금씩 지쳐가고 있다. 구원의 증표를 내보여야 할 사람들이 앞다투어 '이단'의 낙인을 찍어댄다.

 

비자금을 관리하던 장로의 투신자살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한 순간도 어긋나지 않는다. 솜씨 좋은 목수가 손질 해 둔 조각을 아귀가 딱 맞게 끼워맞추듯 더함도 덜함도 없다. 살짝 거친부분은 있지만 나무란게 그렇지..나무를 만졌으면 가시가 한 두 개쯤 박히기도 하는거지. 하는 마음으로 읽으면 더할나위 없겠다.

종교의 문제라고 뭉뚱그려 말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명확히 '한국 기독교'에 대한 고발이며 동시에 고백이다.

 

나는 이 소설이 화제가 되었으면 좋겠다. 반론을 막 제기하고 그것에 대한 반론과 근거를 꺼내놓고, 그렇게 구석구석까지 배인 악취를 다 드러냈으면 좋겠다. 그래야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가 보일것 같다.

이 소설은 반기독교 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고 어디로 가야할지를 물어봐주는 작품이다.

너는 메슈바인가?

그렇다면 너의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시는가?

너는..하나님을 믿는것인가? 신의 대리인을 따르는 것인가? 라고..묻는다.

 

오랜만에 재미나게 읽었다. 눈이 먼저 달려가고 기억이 따라가고 현실을 짚어가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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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의 이름으로
이인휘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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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SNS 페이지를 넘기다 텀블벅 후원 게시물을 읽었다. 지난달에 농성 200일이 되었던 파인텍 노동자들의 고공농성에 마음으로 지지 응원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편지를 쓸 편지지와 몇가지의 리워드가 있었으나 꼼꼼히 리워드를 살피지는 않았다. 대신 사진으로 보도로 이어지는 그들의 눈물겨운 투쟁을 꼼꼼히 읽었다. 이미 여러경로를 통해 알고는 있지만 먹고사니즘에 치인, 과거의 열정만이 빛바랜 사진처럼 남은 사람에게 그들의 모습을 읽고 응원 연대하는 것은 저들과 나를 위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더 놓을 것이 없지만 더 놓아서는 안되는 그 마지막의 외침이 거기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꾸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1990년쯤 현대중공업에선 골리앗 크레인에 올라갔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 한진중공업싸움에서 85호 크레인. 그리고 그 후로도 이어진 수많은 고공농성들..최초의 고공투쟁이라 일컬어지는  강주룡의 투쟁. 무려 1930년대 평양고무공장 파업을 주도했던 그 이.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현실에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건 절박해서다. 내가 여기 있다고, 우리가 여기 있다고 알리고 싶은거다.

아슬아슬한 곳, 비도 바람도 추위도 더위도 막을 수 없는 곳으로 올라가는 건, 목숨을 걸었다는 것이다. 가난하거나 부자이거나 공평하게 주어진 하나. 목숨. 그것을 걸고 싸운다는 것.

 

소설은 그렇게 시작된다. 고공투쟁을 하고 있는 젊은 청년. 청년의 어머니, 그리고 한때는 불꽃같은 싸움의 한가운데에 서 있던 그의 아버지..

 

2. 울산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1990년대부터 지금까지의 투쟁의 역사이며 기록이다. 노조의 설립과 와해, 공권력과 지역 깡패들까지 끌어들인 폭력적 진압과 이간질. 생존을 담보로 한 위협과 피눈물을 흘리며 돌아설 수 밖에 없었던 회한이 있다.

절대 깨질 것 같지 않은 노동자들의 대오. 죽어도 배신하지 않을 것 같은 그들의 연대. 하지만 가진것 몸뚱이 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여지없이 깨지고 내동댕이쳐졌다. 그래도 다시. '살기' 위해서, 나와 내 가족과 나의 동지들이 살기 위해서 뭉치고 목숨을 건 사람들의 이야기. 결국 제 몸에 불을 놓아 피눈물로 심장에 새겨진 '양봉수 열사'의 이야기가 있다.

긴 이야기다. 긴 이야기지만 우리가 꼭 들어야 할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는 특정한 사람들의 특별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노동조합에선 비정규직을 받지 않는다고 했고, 어느 노동조합의 파업엔 '귀족 노조' 주제에 뭐가 아쉬워 파업을 하느냐는 비아냥이 따라붙기도 했다.

노동운동에 희망이 있냐고도 했다. 이제 식상하다고도 했다. 맨날 같은 싸움을 습관적으로 하는 것은 아니냐고도 했다. 폭력적인 싸움이 지겹다고도 했다.

희망이 없어서 싸우는거다. 이제 식상할만큼 누구나 알고 있는 노동자들의 권리는 아직도 보장되지 않는다. 회사의 이익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도 습관적으로 노동자들에겐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는다. 언론으로 구사대로 프락치로 다양하게 와해공작을 하는 회사의 자본과 인맥과 권력과의 유착 속에 두 주먹 두 다리 밖에 없는 사람들이 발버둥 치는 것이 폭력이라면 생계를 위협하는 자들을 살인자라고 하지 않는 이유는 뭔가 되묻고 싶어진다.

 

소설은 긴 고해성사처럼 읽힌다. 과오까지 뼈아프게 고백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있다고 이야기 한다.

노동자라는 귀한 이름이 오해되고 천시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3. 리뷰를 적는 중에 속보를 읽는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가 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2009년 해고 이후 30번째 희생자라고..

생활고를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노동자는 현장에 있어야 한다. 현장의 주인은 노동자여야 한다.

그곳에서 일하겠다고, 사람답게 일하겠다고, 정당하게 일하겠다는 요구가 무리한건가.

 

마지막 페이지까지 숨 죽이고 읽었다.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너의 이야기이거나 나의 이야기래도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너의 표정과 나의 표정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작품이라기보다 긴 보고서이자 고백이다.

아직도 끌어안아야 할 거리의 사람들, 현장에서 밀려난 사람들,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하고, 서로의 몸을 묶어 저항해야하고, 일상을 포기하고 거리로 나오는 사람들을 모르는 사람들이라 할 수 없다.

사회는 자본으로 버텨지는게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의 현장에 뿌리 내린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로 버텨지는거다.

공돌이 공순이라고 불리며 착취당하면서도  '산업역군'이라는 이름으로 버텼던 과거의 노동자들이 딛고 선 전태일의 이름.

울산 현대의 싸움 속에 놓아진 양봉수의 이름. 우리는 이 뜨거운 이름들을 징검돌처럼  딛고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부끄럽게도 말이다.

 

4. '노동자' 라는 이름은 어쩌면 아버지에서 아들로 대물림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종의 특성을 품은 DNA로 새겨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책을 읽으며 잘 웃지도 잘 울지도 않는다. 무서운 꿈을 꾸면 '어, 꿈이잖아'라고 생각하며 피식 하듯이 '책이잖아 울긴' 하고 넘기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으며 몇번인가 훌쩍거렸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고 외쳤던 사람이 있다.

초등학교때부터 노조를 배우고 대의원역할극을 하고 모의 노조를 만든다는 외국의 이야기가 있다.

노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어떻게 노조가 없을 수 있냐고 반문하는 타국의 지인도 있었다.

노동자들이 제대로 평가되지 않고 그들의 삶이 보장되지 않는 나라는 망국 (亡國)의 길로 접어든 것일지도 모른다.

경쟁력을 잃고 국내 경제도 피폐해진 국가. 그것을 다시 단단히 세울 힘은 어디서 오는가.

자본에게서? 권력에게서? 외국의 강대국에서?

나라를 바로 세우는 힘은, 건강한 척추 노동자에게서 나온다.

그러니 " 망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작은 국토 구석구석에서 외치는 함성들이여 단결하여 연대하라.

노동자의 이름으로!

 

5. 매우 두껍고 긴 소설이다.

눈알이 빡빡해지고 설풋 따갑기도 했지만 쉬이 놓아지지 않았다.

내 삶의 얼마만큼은 저들에게 빚지고 있다는 생각때문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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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18-06-27 1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공감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하기에 빚진 마음이 늘 있네요. 꼭 읽어볼게요.
 

미투 운동(?) 이 번지고 있다.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나오고 고발이 진행되고 마치 전쟁터가 된 것 같다.

피해자들이 얼굴을 드러내고 스스로 상처를 헤집는 일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패닉.

한 검사의 고발에 나는 망연해졌다. 어느 시인의 이야기에 역겨웠고, 어떤 예술인의 고백에 한참을 울었다.

비슷한 상처. 누군가는 깊이 베이고 찔렸으며 누군가는 슬쩍 스쳤을 수도 있지만 같은 무기에 의한 상처를 품은 이가 너무나 많았다. 어쩌면 이런 상처 없는 사람을 찾아내는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

 

알 수도 있는 사람. 페이스북 뉴스피드 사이에 뜬 프로필과 이름들 속에서 알 수 밖에 없는 사람을 보았다.

한 겨울에 맨발로 뛰쳐나가 밤새 거리를 방황하게 했던 선배. 그 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자기를 거절한 댓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눈에 힘을 주던 선배. 동기들은 발설하지 말라고 했고, 선배의 친구들은 세상 사는 법을 모른다며 힐난했다.

그 때, 자취방에 틀어박혔던 나는 이러다 죽지 싶어서, 이러다 죽이지 싶어서 오래도록 두려워했다.

그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고 그 기억은 딸아이를 단단히 단속하는 것으로 발현되었고, 아들녀석을 감시 하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그 때는 세상이 그랬으니까, 유교적인 전통이 있어서..남존여비가 팽배했잖아 따위의 말같지 않은 말들을 들었다.

그런가?

성폭력을 당한 남자는 없냐고 누가 그랬다. 있겠지. 있을 거다.

이 터져나오는 사태는 젠더의 문제라기 보다. '권력'의 문제다. 지배와 소유의 문제며 불평등과 억압의 문제다.

남자는 여자와 달라서 따위의 말로 퉁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거다.

 

선배는 안정되어 보였다. 예전보다는 덜 날카로워 보였지만 여전히 단단한 눈매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았고, 전체적으로 '안녕'한 것 같았다.

비슷한 이름만 들려도, 비슷한 뒤통수만 봐도 머리카락이 쭈뼛 서고 소름이 돋는 건 내가 예민해서만은 아닐거다.

결국 도망을 쳤음에도 이렇게 데인 상처를 만지듯 소스라치는데, 도망조차 치지 못했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의 무력감은 얼마나 치명적일까.

 

누구는 음모라고도 한다. 누구는 벌써 지친다고 한다. 누구는 여자들 무서워서 회식도 못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누구는 '나는 그런 사람 아니'라고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유로울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가해자일 수도, 피해자일 수도 있다. 인식하고 있을 수도 있고, 인식조차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선배의 '안녕함'을 발견한 이후로 일상이 진정되지 않는다.

책도 읽히지 않고, 생각도 모아지지 않고, 일도 자꾸 까먹고, 멍하니 먼 곳만 보게 된다.

그 때, 어두운 방에 허깨비 처럼 앉아 마른 울음을 삼키던 그 여자애처럼 자꾸 시선을 잃는다.

 

힘겨운 싸움이 될거다. 아니라고 발뺌하고 윽박지르고 조롱하며 2차, 3차의 피해들로 협박할거다.

이건..'권력'의 싸움이니까.

이젠 숨지 않아야 할텐데. 상처는 자꾸만 벌어지는데 꽃 같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데..

어째서 당신들은 '안녕'한 건지..자꾸 되묻고 싶다.

그래도 되는거냐고?

'안녕'할 수 있냐고?

 

책을 사 놓고 읽지 못하는 시간이 자꾸 길어진다.

하루 하루를 '겨우' 살아내는 것 같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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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3-07 23: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펜스 룰‘은 남성이 ‘착한 남자‘로 스스로 규정하는 수사입니다. 아내 이외의 다른 여자를 상대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남자들은 자신을 ‘성폭행, 성차별과 무관한 남자‘로 드러내는 것이죠. 펜스 룰은 여성 운동의 본질을 흐려뜨려요.
 
히브리 민중사
문익환 지음 / 정한책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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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계 올림픽이 한창이다. 남북한 단일팀이 구성되고 한반도 기가 펄럭인다. 북의 공연단이 공연을 했고, 고위 간부들이 방한했다. 분단과 전쟁의 위협만이 살길인 자들은 평화의 의미를 깎아내리는데 혈안이 되었지만 조금은, 아주 조금은 '통일'이라는 말이 사람들의 대화 사이에 끼어들게도 되었다.
통일 논의, 통일.
북한의 사람들은 얼굴이 빨갛고 머리에 뿔이 달렸을거라 생각했던 유년의 나는 대학생이 될 때 까지 '통일' 이라는 것이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남한 사람을 보면 죽창을 찌르고 목을 따버린다는 그들이 이웃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으니 말이다.
통일은 책에나 있는 단어였고, 의연한 척 내뱉는 단어였다.
불쌍한 사람들을 품어야 한다는, 내 민족 한겨레 라는 내재된 의미따위는 없었다.
통일은 불가능한 희망사항이었다.
하지만 지금, 북의 사람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만나고 어색하지만 웃음을 나누기까지 통일논의가 싹을 틔우고 줄기를 세우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이 있었나 생각해보게 된다.
그 한 가운데 '문익환'이라는 이름이 있다.
통일을 이야기할 때면 늘 선생의 모습이 먼저 떠오른다.
어떻게 해서든 통일을 일구는 씨앗이 되겠다 작정한 그 형형한 눈빛이 말이다.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던 '히브리 민중사'가 그가 세상에 온 100주년을 기념하여 복간했다고 했다.
초판이 세상에 나왔을 때, 변변하게 책 한 권 사 읽을 수 없었던 나는 '하루만 빌려주면 안돼?' 라며 책을 가진 친구에게 부탁했고 하루만에 다 읽어야 했다. 순식간에 읽어낸 책. 정확히 기억되는 부분은 없었지만 가슴이 뛰었고, 예언자들의 이야기에서 수많은 열사들의 얼굴이 스쳤다.
책을 덮고 긴 한숨을 몰아쉬며 울었던 것 같다. 우리의 투쟁들이 우리의 바람들이 기어이 이루어질 날이 있겠구나. 있어야겠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을거다.

히브리 민중사는 단지 그들의 역사가 아닌 작금의 우리들과 닮아있다. 궁중사가들의 번지르르한 지배자의 서술을 뒤엎는 민중의 시선, 예언운동의 본질. '해방'이라는 말의 뜨거움을 온전히 읽게 된다. 생전에 선생이 강연하시던 모습이 떠오를만큼, 요즘 말로 '음성지원'이 되는 듯한 책을 온전히 내 것으로 붙들고 읽었다. 사흘에 걸쳐 천천히 읽어내며 마음을 다잡는다.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2018년 대한민국을 사는 우리들에게 위로처럼 격려처럼 읽히는 것이다.
통일을 자꾸 미루며 자신들의 이익셈법에 몰두하는 정치인들과 한반도를 전쟁터로 만들려는 강대국들의 속셈과 아직도 건재한 국가보안법, 삶의 터전인 땅을 더는 돌볼 수 없는 농민들과 현장을 떠나 높은 굴뚝에 오르고 거리에 노숙을 하는 노동자들, 한데로 밀려나 목소리 조차 내지 못하는 사람들. 이 모두 히브리의 민중들과 닮아있는 것이다.

뜨거운 사랑으로 싸우고 울었던 호세아.
온몸으로 사랑이었던, 온몸으로 예언자였던 호세아( p 207)
호세아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목사님의 모습이 자꾸 겹쳐졌다.
발바닥으로 살겠다던 목사님의 음성과 표정이 살아오는 기분.
어쩌면 이 끔직한 세상을 더는 볼 수 없었던 하느님이 '가라!' 명하신 예언자는 아니셨을까? 그 명령에 온마음으로 복종하신 건 아니었을까?
사람을 사랑한 인생이 그대로 아픔인 민중들을 사랑한 선생의 이야기가 히브리 민중들을 투영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건 아닐까.

'나는 거룩한 신으로 너희 가운데 와 있지만
너희를 멸하러 온 것이 아니다.
이 백성은 사자처럼 소리치는 나의 뒤를 따라오리라.
내가 소리치면
내 자손은 서쪽에서 달려오리라.
에집트에서 참새처럼 날아오고
아시리아에서 비둘기처럼 날아오면
나는 내 백성을 저희 집에 살게 하리라.(호 11:8~11)'

백성 모두가 '저희 집'에서 살게 되는 것.
그것이 해방의 모습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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