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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 라디오 - 오래 걸을 때 나누고 싶은 이야기
정혜윤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고등학교 시절, 내게 라디오는 그냥 라디오 이상의 의미였다. 특히 스탠드 불빛으로 간신히 내 자리만 밝힐 수 있었던 어두컴컴한 독서실에서 참고서를 들여다보고 있을 때 라디오가 없었더라면 어떻게 버텼을까 싶다. 그때의 라디오는 내게 산소공급기나 마찬가지였다. 질식할 것 같은 하루하루를 버티게 해주었으니까. 그렇게 소중했던 라디오와 멀어진 것은 대학에 들어간 후였다. 휴대용 CD 플레이어가 생겼고, 술을 마실 자유가 주어졌고, 새로운 친구들이 생겼다. 더이상 산소공급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라디오를 잊어갔다.
라디오는 여전히 전파를 타고 있지만 라디오를 안 들은지 10년도 넘은 내게는 과거의 유물 같다. 그래서 『마술 라디오』라는 책의 제목이 무척 복고적으로 들렸다. 과거를 추억하기도 지쳐서였을까. 비슷비슷한 형식의 에세이에 질려서였을까. 처음에는 이 책이 그리 끌리지 않았다. 하지만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 손으로 쓸어가며 읽는 동안 마음에서 알 수 없는 물결이 일었다. 구어체로 쓰인 이 책은 맑은 밤하늘 아래에서 속내를 터놓을 수 있는 친구와 캔맥주 하나씩 손에 들고 나누는 이야기 같았다. 손수레로 외제차를 긁은 할머니에게 도리어 차를 잘못 세워둬서 죄송하다며 사과했다는 부부의 이야기가 눈물 날 만큼 감동적인 미담으로 읽히는 이 삭막한 시대에 한 방울 꿀과 같은 이야기들이 가득했다.
'마술'은 인간의 영역이고, '마법'은 신의 영역이라 했던가. 마술은 눈속임이므로 불완전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보는 사람의 믿음이 꼭 필요하다. 보는 사람도 마술을 마법이라 믿을 때 더 즐거울 수 있다. 믿으면 진짜가 되는 것, 그것이 마술이다. 마술을 즐기듯 마음을 활짝 열고 책을 읽다 보면 세상의 온도가 5도쯤 올라가는 것 같다. 애는 그냥 애일 뿐 특별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다고 말하는, 자폐증 아들을 둔 아버지가 나오는 「빠삐용의 아버지」, 낚시에 필요한 찌를 손수 만들어 주변에 선물하며 '돈 없어도 폼 나게 사는' 낚시꾼이 나오는 「지상의 선물」은 '살리고 살려내는 세상'을 만드는 이들의 이야기이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에게조차 책임감을' 느끼는 피폭자의 후손이 나오는 「주먹맨」이나 '소중한 존재들의 눈물 위에 세워진 어떤 천국의 입장권도 거부'하는 사람의 이야기 「마지막 잎새 인간」을 읽고 있으면 세상을 바꾸는 힘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무조건 앞에 나서서 외치고 투쟁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숨 쉬러 바다 위로 고개를 내민 사람들 머리를 물속으로 처박는' 짓은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 그렇게 인간답게 인간의 도리를 지키고 사는 것도 중요하다.
부자도 아니고 유명인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작지만 단단한 이야기들이 정혜윤의 손을 통해서 마음을 울리는 목소리로 다가온다. '실제로 살지 않은 삶에 영향을' 받는 게 인간이기 때문에 책의 존재는 더욱 가치있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답게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자신의 삶의 자세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충분한 것이다. '시작은 거창하였으나 끝은 미약'하더라도 '자신이 풀어야 할 질문'을 찾고 싶고 '한 인간으로서 내가 가진 것을' 알고 싶은 우리 모두에게 조용히 읽어주고 싶은 책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