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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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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을 처음 읽었을 때의 충격은 지금도 생생하다. 우리나라에 이런 소설을 쓰는 작가가 있었다는 사실에 거듭 감탄했다. 최근작 『28』도 『7년의  밤』만큼은 아니지만 역시 놀라웠다. 다음 소설은 언제쯤 나올까 기다리던 중 뜬금없이 정유정의 여행에세이 출간 소식이 들렸다. 조금 의아한 마음으로 찾아본 책의 제목은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기대감이 한순간에 사그러들었다.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라는 것도 별로였는데(에세이 내용이 『7년의  밤』이나 『28』 같을 리는 절대 없으니까) 히말라야라니. 산이라면 해발 100미터도 안되는 동네 뒷산도 기피하는 내게 히말라야는 그저 사진으로 보고 '와, 멋지다' 하며 즐기는 게 딱 맞는 장소였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일을 계속 미뤄왔다. 


그런데 이 에세이는 여느 여행에세이와는 달랐다. 히말라야를 여행하며 얻은 깨달음과 감동을 유려한 언어로 엮어놓은 책일 줄 알았는데 웬걸, 그야말로 히말라야에서 눈물콧물 쏙 빠지게 고생한 이야기였다. 『7년의  밤』보다 공포스럽고(?) 『28』보다 박진감 넘치는(??) 정유정의 히말라야 여행기에 빠져드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최선을 기대하며 최악에 대비하라. 나의 신 '스티븐 킹'께서 하신 말씀이다. (22쪽)
시작부터 좌충우돌이었던 정유정의 여행준비기는 나의 첫 해외여행을 떠오르게 했다. 친구의 제안에 충동적으로 오케이했던 태국 여행. 숙소 및 여행코스는 친구에게 모두 맡겨버리고 나는 내 비행기표 예약과 짐 꾸리기만도 벅차서 허둥대던 기억, 인터넷을 박박 뒤져서 티켓팅 과정을 속속들이 예습했던 기억, 막상 공항에서는 싱거울 정도로 빠른 수속 때문에 맥빠졌던 기억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그때처럼 헤매도 좋으니 다시 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미친듯이 올라왔다. 죽어버린 몸과 마음을 깨워 심장을 벌컥벌컥 뛰게 하는 여행을. 당장 자리를 박차고 비행기표부터 알아보고 싶어서 손가락이 근질근질했다. 

자, 진정하고 다시 책으로. 이 책은 에세이라기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 같았다. 무모한 초보 트레커 정유정과 살뜰한 조력자 김혜나, 베테랑 가이드 검부, 날다람쥐 포터 버럼의 안나푸르나 모험기 말이다. 일단 캐릭터가 살아있다. 오기와 싸움꾼 기질로 똘똘 뭉쳤지만 외국어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주인공 정유정, 예쁘장하고 유순해 보이지만 강한 승부근성과 타고난 붙임성을 가진 김혜나, 뷰(view)에 목숨 건(?) 무뚝뚝한 아저씨지만 마살라 때문에 굶다시피 한 정유정을 위해 직접 볶음밥을 만들어주기도 하는 속정 깊은 프로 가이드 검부, 까자, 까꽁, 뭐라꼬를 배운 지 2주 만에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영리한 젊은 포터 버럼. 읽다 보면 어느새 그들의 팬이 되어버릴 것 같다(실제로 나는 순수하고 건강한 청년 버럼의 팬이 되었다. 그의 꿈이 꼭 이루어지면 좋겠다).

'눈의 거처'라는 의미를 지닌 히말라야에 대한 환상으로 시작된 정유정의 첫 해외여행은 기대만큼 아름답지 않았다. 공복으로 트레킹을 하게 만든 마살라 향과의 사투, 고산병과 저체온증, 변비와의 사투, 수천 개는 족히 되는 거대한 계단과의 사투, 밑창 떨어진 신발과의 사투, 미친 소 같은 날씨와의 사투 등 이건 여행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몸부림으로 보인다. 덕분에 하루에도 몇 번씩 정유정은 내적 갈등을 겪는다. 소설의 핵심은 역시 갈등 아니겠는가. 게다가 기승전결의 구조도 훌륭하다. 해발 5416미터 쏘롱라패스를 올라갔다 내려오는 과정 자체가 기승전결이다. 역시 여행은 무엇보다 훌륭한 '이야기'이다. 

이 나이가 돼서야 세상 밖으로 나온 건 비단 바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의식적인 두려움도 한몫했을 터였다. 내게 있어 새로운 세계로 들어선다는 건 '깨진다'와 동의어였으므로. 
검부의 말대로, 이제는 새로운 세계를 즐기고 싶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겐 죽음과 맞대면하며 5416미터를 넘어온 맷집이 있지 않은가.(204쪽) 
과장이 아니라 정말 죽을 뻔한 위기를 여러번 넘기고 정유정과 일행이 쏘롱라패스에 도착하는 순간, 마치 내가 함께 올라간 듯 가슴이 벅차올랐다. 주인공과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에세이는 참 오랜만이었다. 정유정의 에세이는 자신의 소설과 닮아 치열하고 치밀했다. 하지만 소설보다 진솔하고, 안타까운 상황을 웃음이 터지도록 묘사한 정유정의 글솜씨는 에세이에서도 정말 매력적이었다. 여행기도 이렇게 재미있는데 다음 소설은 오죽할까. 쏘롱라패스를 정복한 당찬 트레커 정유정의 다음 소설이 정말로 기다려진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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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4 12:5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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