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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 길 위에서 배운 말
변종모 지음 / 시공사 / 2014년 4월
평점 :
마음대로 쓸 수 있는 24시간을 가지고 있어도 불안한 미래와 허약한 통장 잔고 때문에 쉽사리 실행하지 못하는 것이 여행이다. 수많은 여행에세이에서 본 '무작정 짐을 싸고 갑자기 떠나는 여행'은 책 속에만 나오는 것이라고 애써 믿었다. 그렇지만 떠나고 싶을 때 떠나는 여행에 대한 열망과 부러움은 질긴 짝사랑처럼 마음에 박혀 있다. 나도 한 번 떠나볼까, 하다가도 역시나 현실의 벽은 높고 내 용기는 한없이 낮다는 것만 확인하고 만다. 그럴 때 또 어김없이 여행에세이를 꺼내든다.
『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는 여행작가 변종모의 여행에세이다. 이 책은 변종모 작가가 여행을 다니면서 길 위에서 만나고 스스로의 속에 담고 길 위에 두고 온 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래서인지 여행 이야기이면서도 마음의 이야기이고, 남 이야기지만 내 이야기 같기도 하다. 대화, 사랑, 산책, 밤, 꿈, 고백, 열정, 친구, 생활, 몸살, 실수, 거짓말 등 하루에 한 번 이상은 말하고 듣는 흔한 단어들이 여행길 위에서 새로운 의미를 짊어진 채 독자에게 다가온다. 내가 생각하던 단어의 의미와 책 속 의미를 비교하며 읽어도 좋을 것 같고, 그냥 글과 사진을 따라 정처없이 걷듯 읽어도 좋을 것 같다.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내가 지나온 여행길이 떠올랐다. 잊고 있던 기억까지 오버랩되며 떠오르기도 했다. 여행은 '마음과 생각을 더 순조롭게 움직일 수 있는 행위'라고 변종모 작가는 말한다. 맞다. 여행은 사람을 느긋하게 만들고 너그럽게 만든다. 나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을 만큼 색다른 나와 만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그래서 같은 일이라도, 같은 말이라도 일상생활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의미를 찾게 된다. 여행을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지만 여행을 한 번이라도 가본 사람이라면 분명 공감할 수 있을 이야기들, 이 책은 그런 이야기를 만나는 '길'과도 같다.
여행에세이지만 몇 가지 에피소드와 사진을 제외하면 여행지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다만 여행 속에서 일상을 새롭게 발견하는 일, 익숙한 감정을 다른 방향에서 바라보는 법에 대한 글들이 마치 새로운 풍경을 보듯 놀랍고 설렜다. 나인강의 안개처럼 희미하지만 분명 존재했던 기억들, 인도에서 다른 이들보다 일찍 아침을 당겨 쓰는 이들을 보며 새벽이란 '매일 매일 찾아오는 새로운 벽'임을 느낀 것, 이란의 시인 하피즈의 묘지 앞에서 우는 여인을 보며 누군가를 위해 울어본 적이 언제였는지 문득 깨닫는 순간 들. 여행은 낯익은 것들이 낯설게 느껴지는 시간이다.
태국의 평화로운 바닷가에서, 홍콩의 비 오는 거리에서, 마카오의 화려한 성당 안에서 나도 그런 것들을 느꼈다.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다시 가고 싶었던 제주도에서, 안개비인지 파도의 포말이 터진 물방울인지 모를 축축함마저 좋았던 강릉에서 나도 일상을 새롭게 맞이했다. 눈뜨는 것이 즐거운 아침, 발 닿는 곳마다 눈 닿는 곳마다 새롭다는 설렘, 나를 옥죄는 모든 것들이 저 멀리 사라져버린 듯한 해방감 들이 나를 다시 살게 했고, 새로운 다짐을 하게 했다. 그때 '다시 나의 마음이 뜨거워졌다'. 그랬다. 잊고 있던 그 기억이 책을 통해 부활했다.
당장 떠날 수 없다면 그 마음만이라도 다시 가져오는 게 맞을 것이다. 분명 내 마음 속 지도 어딘가에는 보물처럼 그 마음이 숨겨져 있을 테니까. 내가 잠시 놓치고 있었을 뿐일 테니까. 일상의 말들을 새롭게 볼 수 있다면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 순간도 여행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여행같은 일상을 살자. 일상처럼 여행을 떠나자. 책을 덮어도 끝은 아니다. 여행은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