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립자 열린책들 세계문학 34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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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쉘 우엘백은 이 소설을 통해 하나의 유토피아를 건설했다. 우엘백이 만들어난 유토피아는 너무나 현대적이어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삶에서도 그것을 받아 들일 수 있다. 우선 그는 우리가 어떻게 변화했는가(유토피아를 어떻게 필요로 하는가)에 대해 분석한 하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찰한 후에 하나의 유토피아를 건설하였다.

 

 '과학적'이라는 말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형이상학적 돌연변이'가 발생하기 이전에 우리는 과학을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의 발달도 하나의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에 지나지 않았고 과학이 낳은 합리주의와 개인주의는 우리가 유토피아를 더욱 더 절실히 필요하게 만든 요인일 뿐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왜냐면 이런 식으로 우리는 필요에 의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가 제시한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는 인간의 최초의 역사부터 지금까지 3번에 걸쳐 일어난다. 처음으로 일어난 것은 중세의 기독교 사싱이다. 중세에 종교가 부흥하자 로마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멸항했고 그 이후에 그들은 '신'이라는 개념을 그들의 삶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 후부터 그들은 신에게 요구하고 구하는 동시에 절제받고 억압받는 삶은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의 자유를 억압하면서 기쁨을 느꼈다. 그들에게 자유는 '마음대로 할 권리'가 아닌 '신이 정해주신 대로 살 권리'였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고 기독교 사상 역시 고전적인 것이 되기 마련이다. 종교는 너무나 많은 개인들에게 필요 이상의 것을 요구했고 그것에 불만을 가진 개인들이 집단을 이루기 시작했다. 단순화 해서 말하자면 그것이 과학화다.

 종교를 로마의 선례에 따르게 한 것은 과학이었다. 과학은 설명하지 못했던 많은 것을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힘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우리가 믿는 것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우리를 설득시킬 수 있는 힘도 뒤따랐다. 종교의 억압에 힘들어하는 자와 과학이 결합되어 개인주의가 나왔고 더 이상의 신비를 믿지 않고 눈에 보이는 것들만 믿는 자들이 과학과 결합되어 합리주의를 낳았다. 그들은 자신의 '개인적 삶을 유지 시켜주는 것은 돈, 저택, 교육 등등의 현실적인 것들이라고 믿었다. 여기서 유물론이 다시 발견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정답'으로 여겨졌다. 이제 우리를 억압하는 '신'은 존재하지 않고 우리는 우리의 의지에 따라, 혹은 능력에 따라 더 많은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 후에 수 많은 자유를 요구하는 사상, 문화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성 억압에서의 해방을 낳은 68운동이었다. 이런 현상들은 '정답'이 아니었다. 우리가 바라던 무제한의 자유는 방종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 왔다. 그 전에 것들이 그랬던것 처럼.

 소립자의 이야기는 여기서 시작한다. 2번째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의 현상의 최대의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브루노는 이 책의 등장인물이다. 그는 청소년기에 자유에 의한 피해를 심하게 겪었는데 그 중 하나가 이혼한 부모를 가진 자식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이유로 그는 굉장히 소심한 아이로 자란다. 그는 동년배의 친구들에게 모욕과 구타를 당하며 청소년기를 지낸다. 그들에게 맞는 다는 이유보다 성기가 더 작다는 이유로 수치심을 느낀 브루노는 장년이 되어서도 항상 성기에 콤플렉스는 가지고 있다. 콤플렉스는 반발성을 낳게 되고 사회적 흐름에 따라(68운동) 그는 항상 성적 욕망을 풀 대상을 욕망하며 살아간다. 또한 나이가 들 수록 작은 성기 뿐 아니라 늙어가는 몸 마저도 그에게 불행의 원인이 되고, 아이러니 하게도 그렇기에 그가 원하는 여자는 20대의 젊은 소녀들이다. 그의 삶과 시대에서 젊은이란 중요한 가치다. 젊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기 때문에 평등하지만 반면에 누구나 쉽게 잃어버리기에 또 한번 평등함을 낳는다. 평등함이란 자신이 유리한 곳에 있을 때는 그것이 가장 좋지만 불리한 곳에 있을 때는 가장 증오스러운 것이 된다. 부르노는 불평등한 불평등함을 꿈꾸며 젊음을 불멸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그것이 성적 욕망과  관계가 있음은 물론이고 사실 상 모든 사회 현상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사회 속에서 우리가 하나의 귀속된 존재였을 때 우리는 그 사회의 구성원에 불과했다. 그러나 주체가 개인으로 바뀐 후엔 우리는 '필요'에 의해 사회적인 관게를 형성한다. 젊음이란 사회적 관게를 맺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되고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더 많은 가치를 얻게된다. 브루노는 이미 누구에게도 소용이 없어졌지만 자신의 욕망은 더욱 더 커지는 것을 느끼며 불행해진다. 그러나 부르노는 크리스티안을 만나게 됨으로 인해 불행에서 탈피하고 행복해진다. 그녀는 그의 결점을 감싸줄 수 있었고 실제로 그들은 '사랑'을 함으로 인해 행복을 겪게 된다. 하지만 브루노의 말대로 사랑은 작은 위안이 되지만 희망이 될 수 없었다. 성관계를 너무나 많이 가진 크리스티안은 죽어버리고 그녀의 죽음 앞에 브루노는 무너져버리고 만다.

 또 다른 주인공 미쉘은 브루노와 반대의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새로운 형이상학적 돌연변이의 선구자로 불린다. 그도 역시 정상적인 삶을 살지는 못한다. 왜냐면 그는 욕망이 제거됬기 때문이다. 그는 너무나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받아 들였기 때문에 아예 욕망이라는 감각이 제거되어 버린다. 과학자라고 하는 직업을 하나의 사명으로 삼고 있던 그는 이나벨에 의해 새로운 흐름을 만들 생각을 하게 된다. 이나벨의 죽음으로 인해 미쉘은 젊음을 잃지 않는 세상을 과학적으로 제현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미쉘 우엘백은 새로운 유토피아를 제시한다. 우리가 이렇듯 욕망을 추구하면서 사는 것은 우리가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무한하게 바꾸자. 이것은 유전자의 조작으로 인해 현실이 되어 제 2의 인류가 탄생하게 된다. 우리는 역사에 의해 반성할 줄 알며 발전할 수 있는 동물이기에 우리를 희생하며 새로운 우리를 탄생시킨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은 소설이라는 것이고 유토피아의 어원은 '존재할 수 없는 곳'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역사에 의해 반성할 줄 알며 발전할 수 있다. 이 책은 현실을 역사처럼 만들었다. 개인을 통해 전체의 문제를 설파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하며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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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과 영광 열린책들 세계문학 146
그레이엄 그린 지음, 김연수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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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론자와 유물론자의 정의>

  역사적으로 인간의 모든 행동은 믿음에 기초한다. 그것은 신념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신념의 기초한 행동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하다. 여기 두 명의 인물이 있다. 사제와 경위. 둘 다 자신의 신념을 시행하기 위한 권력이 있다. 하지만 경위에 의해 사제의 신념은 제한을 받는다. 왜냐하면 경위는 사제의 신념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위는 그런 의미에서 유물론자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돈이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신과 싸울 수도 있고(왜냐하면 신의 존재를 믿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을 인질로 잡을 수도 있고, 더 나아가 죽일 수도 있다. 그가 보기엔 신이 ㅏ난한 자들을 ㅜ이해 해준 것이 아무 것도 없기에.

 반면에 사제는 다른 방법으로 가난한 자들을 위로한다. 사제가 말하길, '구원'은 죄의 사함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는 사제이기에 고해 성사를 통해 신도들을 구원해 줄 수 있다. 물론 돈을 받는다. 그에네는 돈보다 구원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이 둘은 가난한 자를 위해 희생하면서까지 도움을 주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방법이 다르기에 대치 할 수 밖에 없다. 이 대치점에서 이야기가 시작한다. 차페크의 말처럼 투쟁은 고상한 진실과 사악하고 이기적인 잘못 사이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진실에 그에 못지 않는 진실이 대립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배경이 멕시코라는 것이다.

 

<플라톤의 동굴 또는 햄릿의 덴마크, 멕시코>

 그레이엄 그린이 묘사하는 멕시코의 모습은 이미 신이 사라진 도시와 같은 모습니다. 죽음으로 상징되는 독수리는 호시탐탐 죽어가는 사람들을 노린다. 그것에서는 수 많은 사람들이 고해 성사를 한다. 그만큼 죄가 많은 곳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멕시코를 떠나고 싶어한다. 치과 의사 텐지 씨가 멕시코에 남아있는 이뉴는 단지 이곳에 투자를 했는데 그만큼에 이익을 남기지 못해서이다. 그리고 수많은 사제들이 멕시코를 떠났다. 멕시코의 정권이 신을 거부했기에. 남은 사제는 단 두명. 호세와 위스키 사제 뿐이다. 그들은 멕시코에 남아 절망을 경험한다. 살아남기 위해 결혼한 사제인 호세는 신을 배교함으로서 아이들에게 까지 조롱받는 인물이다. 자신의 자만심으로 멕시코에 남은 위스키 사제는 유수같이 지나간 시간 속에서 범죄의 손짓에 순식간에 휘말리게 된다. 멕시코는 모든 사람들이 그림자를 바라보며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는 플라톤의 동굴 처럼, 혹은 자살 아니면 고통 속에 살아야하는 삶을 선택해야 하는 햄릿의 덴마크처럼 보인다. 사제는 덴마크에서 고뇌하는 햄릿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성자와 배교자의 사이>

 젊은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을 때, 사제는 야심만만한 사내였다. 그는 또한 자만하기까지 했다. 제대회에서 평신도가 주도권을 많이 가지지 않게 주의해야 한다는 말을 알았고, 그것을 지키면서 자신의 의견을 정확하고 권의적으로 피력할 수 있는 사내였다. 먹시코의 정권이 바뀌고 교회를 탄압하자 그늬 위치도 바뀌기 시작한다, 그는 이제 존경받는 사제가 아니라 경찰과 붉은 셔츠단을 피해 도망가야하는 도망자 신세로 전락한다. 그는 그곳에서 방황한다. 방황은 그의 신앙을 약하게 한다. 육욕의 유혹에 빠지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기도 한다. 그는 죄인이 된 것이다. 경찰은 그를 잡기 위해 마을에 인질을 잦는다. 이제 그는 이방인이 된다. 그에게 갈 곳은 없다., 그는 긿을 잃어버린 자가 된다. 또한 신앙까지. 그는 말한다. 기쁨은 언제나 고통 위에 서 있다고. 우리는 굶주림 후에 마침내 얼마나 음식을 누릴 수 있는 지 알게 된다고. 하지만 그것은 설교일 뿐 진실은 이것이다. 우리에게는 고통이 추하게 느껴진다는 것. 왜냐면 우리는 성인이 아니기 때문에. 그는 절대로 성인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죄를 지어서가 아니다. 육욕이 사랑으로 바뀌는 것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죄의 결과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고해 성사를 해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고해 성사를 할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처형이 있기 전날에 마지막 회개가 찾아온다. 자신이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빈손으로 하나님께 가야 한다는 사실이 좌절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성인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믿음, 그 선택의 기로에서>

 기독교에는 사효적 효력과 인효적 효력이 존재한다. 사효적 효력이란 범죄자가 해준 세례라도 정확한 규칙만 지킨다면 그 세례는 유효하다는 것, 반대로 성자가 해준 세례라도 규칙이 어긋난다면 그 세례는 무효라는 것이다. 인효적 효력은 사효적 효력의 반대되는 의미이다. 중요한 것은 교회는 인효적 효력을 부정하고 사효적 효력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호세에게 장례 미사를 부탁하는 것과 위스키 사제에게 고해 성사를 하는 것은 교회가 사효적 효력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논리라면 우리의 구원 - 죄의 사함이 - 범죄자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도 있는 것이다.

 위스키 사제가 경계를 넘어 마을로 갔을 때 그는 옛날 자만했던 사제로 다시 돌아간다. 그리고 그는 라스카사스로 가기 위한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해 성사의 값을 흥정한다. 그기 적당한 자금을 가지고 마을을 떠나려는 순간에 혼혈인이 나타나서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이 지점에서 갈등이 발생하는 것이다. 사효적 효력의 영향 아래서의 신앙 생활과 인효적 효력으로의 신앙 생활. 또는 덴마크 왕자의 선택 - '덴마크 왕자는 자살해야 할 지 그러지 말아야 할 지 궁금했다. 부왕의 모든 의심을 안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게 옳은 것인지, 아니면 일거에 -'. 사제는 혼혈인을 따라가는 것이 자살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다. 혼혈인은 유타이므로. 하지만 그 길이 자신의 죄를 마주하는 길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이것은 햄릿에 죽음, 자긍심의 죽음이다. 반면에 사제가 라스카사스로 간다면 그것은 자신의 죄에서 회피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햄릿의 삶, 즉 수치의 삶이다. 그는 이 갈림길에서 고귀한 죽음, 사효적 효력의 부정, 성인의 삶을 선택하게 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 이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믿음이고, 텐치 씨의 말처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도' 기도해 줄 수 있는 믿음이고, 자신의 죄를 사랑한다고 인정할 수 있는, 그래서 지옥으로 갈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다.

 우리는 그의 선택을 영웅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이 선택은 이미 초반두터 암시되어 있는 것이었다. 한 아이의 어머니가 죽어갈 때 그는 이미 떠나는 것보다 아이의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는 것을 선택했으니까. 바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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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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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아가다보면 인생을 풍부하게 만들어주는 인생의 스승이 있다. 유명한 일례로 영화감독 팀 버튼에게는 에드 우드가 있었다. 헐리우드에서 성공적으로 살아남은 당대 최고의 상상력을 가진 감독에게, 실패한 영화를 만들고 실패한 인생을 살아간 에드우드가 인생의 스승이라니. 카잔차키스도 마찬가지다. 조르바의 표현대로 젊겠다, 돈이 있겠다, 건강하겠다, 사람 좋은 가잔차키스의 스승이 늙고 가난한 노동자 조르바라니. 그 연유가 궁금하여 팀버튼의 영화 '에드 우드'를 보니 다 이유가 있었다. 그렇다면 카잔차키스는 어떤 점에서 조르바를 위해 책을 쓰면서도 '조르바라는 위대한 자유인을 위해서 겨우 책 한권을 썼다'라고 표현했을까?

 

지문과 경험에 차이에서의 깨달음

 조르바를 만나기 전 카잔차키스는 친구에게 책벌레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는 그 친구의 말에 항변하기 위해 행동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크레타로 떠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남을 구하려고 애쓰는 노동을 하려고 계획한다. 그리고 그 여행 중간에 만난 조르바를 대리고 간다. 그가 처음으로 본 조르바는 야성의 영혼을 가진 사나이이자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다. 작가의 인생이 책의 지문으로 정의 된 인생이었다면 조르바의 인생은 행동으로, 경험으로 정의된 인성인 것이다. 작가는 인생을 삶과 경험을 통해 겪이 위해 그에 적합한 인생을 산 조르바와 동승한다.

 일을 시작한 카잔차키스는 조르바를 통해 배워가며 발전한다. 한 예를 보자. 작가는 젊은 나이에 많이 배워 똑똑한 사람이다. 그는 탄광 사업을 통해 하나의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한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편의를 봐주고 좀 더 그들에게 다가가는 인정 많고 훌륭한 자본가가 되려한다. 그 순간에 조르바가 그를 말린다. 조르바는 작가에게 말한다. 인간은 짐승이라고. 사납게 대하면 존경하고 친절하게 대하면 눈이라도 뽑아갈 것이라고. 또한  작가가 노동자들에게 비참한 삶에 대해 계몽을 하려는 순간에 조르바가 다시 한번 나선다. "사람들을 좀 그대로 나둬요. 그 사람들 눈 뜨게 해주려고 하지 말하야. 혹 눈을 떴다고 치면 당신은 지금의 암흑 세계보다 더 나은 세계를 보여줄 수 있어요?" 조르바는 현미경을 통해 물 속의 기생충을 보는 것 보다 현미경을 부수고 물을 먹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것을 몸으로 아는 사람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계몽의 불필요성을 삶으로 증명하는 자인 것이다.

 작가는 조르바에 대해 말한다. 조르바는 뱀과 같이 대지의 비밀을 배로, 꼬리로, 머리로 느끼는 자라고. 그리고 교육받은 우리는 공중에 나는 새처럼 골이 빈 것이라고.

 

쾌락의 자유

 조르바를 설명할 수 있는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여자다. 그는 여자 앞에서 꼼짝하지 못한다. 여자를 꼬시고 같이 자는 것이 인생이라고 표현하는 그는 자신의 말처럼 그 자유를 여과 없이 누린다. 그의 사랑에는 구속이 없다. 어떤 여자를 만나고 있어도 더 좋은 여자를 만나면 그 여자에게 몸을 내주고 자신이 만나는 여자가 다른 남자에게 가도 그저 슬퍼할 뿐 구속하지 않는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여자는 과부이다. 그런 면에서 그는 천성적으로 성자이다.(물론 자신의 표현이지만). 과부는 항상 남자를 원하며 그는 저 위대한 신 제우스처럼 과부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때문이다. 이처럼 조르바는 자신의 쾌락을 누리는 데에 있어서 인간이 만들어낸 도덕이나 관습, 더 나아가 신의 계명조차 버릴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인 것이다. 게다가 그는 마을의 과부와 서로 눈이 맞았으면서도 자지 않는 카잔차키스에게 그건 죄라고까지 말한다. 부끄러움과 관습에, 도덕에 의해 과부와 동친하지 않았던 작가는 어느날 우연히 과부의 집에 가 과부와 동침을 하고는 조르바의 말이 맞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만다. 이렇듯 조르바는 쾌락의 자유를 누리는 데에 있어 카잔차키스의 선구자 역할을 한다. 육체가 영혼의 감옥이라는 플라톤적 생각에서 육체 또한 영혼이라고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선 긋기

 작가가 외치던 <국가>와 <인간>의 개념은 또 한번 조르바에 의해 수정된다. 그것을 초월하는 <초국가>와 <인간성>의 인생을 사는 조르바가 작가 카잔차키스에게 하나의 교훈을 준 것이다. 그는 작가에게 이렇게 말한다. "조국이라고 했어요? 당신은 책에 쓰여 있는 그 엉터리 수작을 다 믿어요? 조국 같은 게 있는 한 인간은 짐승, 그것도 앞,뒤 헤아릴 줄 모르는 짐승 신세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조르바의 말을 증명할 수 있는 사건이 마을에서 발생한다. 두 번의 죽음이 마을을 덮친 것이다. 첫 번째 죽음은 파블리의 자살로 마을 전체가 자살의 원인이 된 과부를 증오한다. 그리고 죄악인 것을 알면서도 과부를 살해할 정도로 파블리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아쉬워한다. 하지만 외국인 오르탕스의 죽음에서 이들의 모습은 어떠한가. 죽기 전에 곡을 하기도 하고 무엇을 훔칠까 고민하는 모습을 보며, 비극적 죽음을 옆에서 바라보면서 낄낄거리는 크레타인을 보며, 작가는 이들이 인간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학 된다. 같은 국가, 다른 국가라는 마음의 선이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태도 마저 차별화 시킬 수 있음을 조르바는 진작에 파악한 것이다.

 

실패자의 성공

 조르바가 마지막으로 카잔차키스에게 일려준 것은 해방감이었다. 그들은 일획천금을 꿈꾸며 사업이 성공하길 빈다. 그들을 성공의 갈망으로 괴롭히던 사업의 승패가 마침내 판단의 기로에 섰을 때 그들은 실패를 경험한다. 즉, 빈털털이가 된 것이다. 작가와 조르바는 그곳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큰 자유는 느낀다. 그들은 실패를 통해서 영혼의 문에 자물쇠를 하나 더 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적을 막기 위한 문에. 그로 인해 그들은 외부적으로 참패하면서도 정복자가 되었고 그것은 지고의 행복으로 바뀐다.

 

 작가는 조르바를 통해 야만의 세계를 확인하고 자유를 느낀다. 그는 위대한 사상에서 행복을 찾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진정한 행복은 맑은 공기, 태양, 바다, 빵, 사랑과 같은 단순하고 영원한 것에 있다는 것을 터득한 것이다.

 이제 나에게 조르바는 단순히 늙고 가난한 노동자가 아니다. 자유를 아는 제대로 된 '인간'이자 언어, 예술, 순수성을 사랑하고 열정이 있는 자, 진리를 발견한 자가 된 것이다. 이런 그에게 작가가 말한 것처럼 책 한권은 '겨우'가 아닐까? 그를 위한 경배는 당연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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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랑베르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8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송기정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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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능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신을 증명할 수 있을까? 안셀무스는 신을 존재론적으로 증명하려고 했던 철학자다. 그에게 형이상학적인 존재인 ‘신’을 믿기 위해서는 신이 어느 곳이든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신에게 가장 적합한 곳은 ‘사유’ 속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신은 <우리가 그보다 더 위대한 것을 사유할 수 없는> 존재다. 즉, 신은 우리가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존재다.”라고 신을 증명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가장 위대한 존재이자 사유인 신을 증명하기 위해 그는 그 발판을 인간의 사유 안에 만들어 놓음으로써 신의 위대함을 추락시켰다. 이것이 바로 불가능함의 증명이다. 부정변증법, 즉 발전하면서 추락하기. 나는 안셀무스와 루이 랑베르의 가장 큰 공통점이 불가능함을 증명하려는 무모한 시도(랑베르식으로 말하자면 가장 높은, 혹은 가장 낮은)라고 생각한다.

 

<위대함의 부정변증법 - 형이상학과 현실 세계의 관계에 대해>

 

1. 사유의 위대함, 그리고 자유로움에 대해

 루이 랑베르는 일찍이 어린 나이에 보다 높은 것을 이해한 천재로 그려진다. 그는 숲에서 혼자 몽상을 하기를 좋아하고, 독특한 사유를 함으로써 ‘천재’라는 이름으로 불려진다. 그가 천재였다는 것은 그의 후견인인 스탈 부인과의 대화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스베덴보리의 책을 읽고 있는 그에게 스탈 부인이 묻는다. “너 이 책을 이해하니?” 랑베르는 대답대신 반문을 한다. “신에게 기도하시나요?” “물론이지.” “그러면 신을 이해하시나요?” 일찍이 그는 이해와 기도, 즉 독서를 통한 사유를 구분한다. 이것을 그가 집필하려다 실패한 <의지론>에 자세히 기술되는데, 간략하게 말하자면 행동과 반응의 관계이다. ‘행동’은 능동적 개념으로써 의지가 있어 그 의지로 인해 사유가 되는 것이다. 그에게 기도는 신에게 직접 답을 구하는 능동적 개념으로 진리를 ‘찾아감’, 혹은 ‘찾아나섬’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독서를 통한 사유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해는 그에 반해 수동적인 개념인 반응과 상응하는데, ‘텍스트를 보고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기계적 행동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고 그 결과 사유불가능성을 야기하여 수동적인 삶을 사는 개인들을 의미하게 된다. 비약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스탈 부인의 질문에 대한 반문으로서 그가 기도를 언급했다는 것이 그 근거가 될 것이다.

 

 이렇듯 그의 사유는 철저히 자유로움, 틀에 갇히지 않음에서 유발한다. 그는 숲에서 사유하고 글자들의 바다에서 사유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생산해내며 그것을 기술하고, 말하고(logos) 의견을 나눈다. 특히 형이상학적 사유, 즉 천사의 존재에 대한 것을 가장 많이 언급하는데 이 개념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랑베르를 보여줌으로써 그가 불가능을 사유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발자크는 그의 위대함에도 불구하고 화자를 통해 그가 만약 ‘규제를 받지 않았더라면 위대한 철학자가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함으로써 그의 천재성을 암시하는 동시에 제도 교육을 비판한다. 여기에서 그의 자유로움, 즉 사유의 가능성은 하나의 테제가 된다.

 

2. 반응과 반응, 그리고 반응. 즉, 규제의 역할에 대해

랑베르가 화자가 다니는 방돔 기숙학교에 온 것은 화자와의 만남을 이루어준 축복이자 그의 재능을 망가트리는 저주라고 화자는 말한다. 화자는 “학교란 자고로 각 개인의 지성이나 육체의 특성을 무시한 채 모든 학생을 규칙에 따르게 해 일괄적으로 규격화한다.”라고 말한다. 실제로 랑베르가 학교에 입학하고 그의 사유는 무뎌지고(그 전보다) 외부 요인에 방해를 받는다. 그는 바보, 혹은 귀족주의라고 불리며 끊임없이 비교당하고 착취당한다. 랑베르의 존재는 존재-자체로 있을 수 없으며 마치 언어처럼 누군가의 비교대상으로서 존재할 뿐이다. 그에게 교육의 발전을 약속했던 학교라는 공간이 오히려 그를 약하게 하고 무능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학교는 푸코가 말하는 규율권력과 비슷한 맥락에서 작동하는데, 그는 끊임없이 공간과 시간에 의해 억압받는다. 아마 화자도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으로 예측되는데 그들이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분명히 그들 고유의 사유를 잃어버렸을 것이다. 학교는 오로지 수동성만을 강조하는 삶, 그래서 반응하는 삶(여기에는 행동이 없고 오로지 좋은 반응과 나쁜 반응만 있을 뿐이다)만을 살게 하는 것을 가르치는 곳으로 그려진다. 이처럼 발자크는 학교라는 공간을 개인의 위대함을 망가트리는 장소로 규정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학교를 나간 후에도 계속되는데, 다만 그 대상이 바뀔 뿐이다. 랑베르가 절망의 끝을 기술하는, 삼촌에게 편지를 쓴 부분을 보면 그는 처음에 “돈 없이 지내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다.”라고 말함으로써 자본에 대한 규제를, 또는 군중의 시선을 언급한다. 자본과 군중, 즉 현실 세계 자체가 그에게 억압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랑베르의 테제에 대한 안티테제이다.

 

3. 부정변증법, 사랑으로 도피하기.

 마지막 장에서는 그가 폴리라는 여인을 만남으로써 사랑을 예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랑베르가 폴리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는 너무나 진부해서 왜 이런 부분을 넣었나 싶을 정도였다. 나는 이 부분을 랑베르가 폴리를 ‘천사’라고 말하는 부분을 보고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랑베르가 앞 장에서 언급했던 ‘천사’와 폴리라는 ‘천사’가 과연 같은 것인가를 비교해본 결과 후자의 천사가 그에게 주는 만족은 너무나 적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루이 랑베르> 그는 현실 안에서 형이상학적 ‘천사’(테제)를 찾다가 현실 세계의 억압(안티테제)에 부딪쳐 결국 사랑이라는 이름의 허상(진테제, 그러나 변증법을 물구나무 세운)를 발견한 랑베르의 부정변증법을 발견했다. 발자크는 이 책에서 결국 외부요인에 굴복할 수 없는 천재를 이야기함으로써 스스로 진짜 형이상학자가 되었다. 필연적으로 랑베르는 광인이 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여기에서 광인은 화자가 언급한 것처럼 현실을 뛰어넘은 후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미친 천재-광인의 모습이 아닌 현실을 도피한 패배자의 모습일 것이다). 랑베르의 모습을 신을 증명하기 위해 신을 인간의 사유 안으로 추락시킨 안셀무스의 유사성에서 찾는다는 것은 심각한 오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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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놀이 - 공지영의 첫 르포르타주, 쌍용자동차 이야기
공지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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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러한 사태가 발생한 것일까를 끊임없이 질문한 책. 펼쳤다 덮었다를 반복하며 잃은 책은 이 책이 처음인 것 같다. 너무나도 극심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지만 그 분노에 매장되기 전에 왜 이러한 사태가 발생했는가를 분석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느끼기에 최대한 객관성을 가진 채로 글을 써 보기로 마음먹는다. 우선 이 사태를 발생시킨 원인은 무엇인가? 즉 가해자는 어떤 자인가를 생각해보고, 이들은 어떻게 피해자가 되었나를 생각해보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생각해보았다. 또한 왜 우리가, 혹은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고 보호해야 하는 민주주의가 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에 무능할 수 밖에 없었는가를 생각해보았다. 가장 많이 참고한 책은 조르조 아벤감의 호모 사케르이다.

 

<주권자, 통치와 폭력 사이에서>

 주권자의 역설이라는 것이 있다. 주권자는 법질서의 외부와 내부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주권자는 헌정을 결정할 결정권을 가짐으로써 법 외부에 존재할 수 있다. 또한 그가 법을 지켜야하는 것임이 당연하기에 내부에 존재한다. 이 같은 역설은 “나 주권자는 법의 외부에 위치하면서 법의 외부란 없다고 선언한다.”라고 표현된다.(호모 사케르 56p) 이러한 구조를 예외의 구조라고 한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6월, 불법 시위를 근절하기 위해 엄정한 대처를 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그의 결정은 법 외부에 존재하지만, 그 법 자체는 아직 예외적인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그가 내린 결정의 내면에는 합법의 준수라는 측면에서 긍정성을 띄기 때문이다. 단지 엄정 대처라는 문장에서 폭력을 수반하는 하나의 예외를 발견할 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기본적으로 법이 갖는 특성이기 때문에(국가 주권의 적절한 정의는 제재나 처벌의 독점이 아니라 결정의 독점에서 발생한다, 같은 책 57p) 묵인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그의 결정은 국민‘들’ 전체의 행복이 가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에 발생한다. 그가 말하는 ‘국민들’이라는 추상적인 의미의 대상을 위해 개별적인 국민 몇몇이 법의 폭력에 노출되었다는 점, 그것이 그가 결정한 법이 ‘규칙’이 아닌 ‘예외’가 되는 상황을 발생케 했다. 바꿔 말하자면 주권자인 그는 예외 상태를 통해 법이 유효하기 위해서 필요한 “상황을, 잘못된 방법으로 창출했던 것이다.” 그 결과 특정 개인들은 법 외부에 위치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그들은 국민 일반에게 호모 사케르가 되어버렸다. 이 사건이 용산 사태 다음에 일어났다는 것, 그리고 용산 사태의 피해자들과 같은 방식으로 발생했다는 점을 자세히 보면 시사할 바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벤감이 우려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곳에서 예외가 규칙이 되는 과정이 존재한다.”

 

<그들, 호모 사케르>

 아감벤이 내린 호모 사케르의 정의는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생명”이다. 법은 그들을 카프카의 단편 <법 앞에서>의 시골 사람처럼 추방령을 내려버린다. 그들에게 법은 효력을 가지지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리고 법에 의해 버려진 그들은 국가에 의해 보호받지 못하게 됨으로써 현대 국가에서 누구에게도 보호받지 못하게 되는, 범법자로 낙인찍히게 되어버린다. 그들은 국가의 주관적 해석에 의해 낙인찍힘으로써 말 그대로 살해할 수 있는 생명, 그러나 희생물로 바쳐질 수는 없는 생명이 되어버린다. 국가가 폭력을 금지하면서도 예외적으로 국가에 의해 폭력이 용인되는 자들, 그럼으로써 주권자에 의해 예외가 되어버린 자들, 즉 추방령을 선고받은 자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들, 잠재적 호모 사케르>

 그렇다면 왜 그들은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됐는가? 이것이 우리가 그들의 상황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불손한 사상을 가진 자들도 아니고 국가가 용인하는 차원 이상으로 범법을 저지른 자들도 아니다. 그들은 우리와 같으면서도 단지 국가가 결정짓는 특정 이익이 그들의 이익과 대치되기 때문에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서 싸운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싸움 역시 객관적으로 봤을 때 불법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살인자를 욕할 수 있다. 정신병자들을 배척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와 다른 ‘인간’이라고 자위하면서 그들을 우리의 ‘밖’에 위치시킬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쌍용 자동차의 피해자인 그들은 우리 ‘안’에 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같음과 다름의 문제는 피상적인 문제이다) 따라서 우리가 그들을 우리의 밖에 위치시키는 순간, 우리 또한 언젠가 그들과 같아 질 수 있는 잠재성을 띄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그들 위로 떨어지는 폭력을 묵인하는 순간 언젠가 우리에게도 닥쳐질 폭력을 묵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지금 침묵하고 있는가?

 

<언젠가 나에게도 도래할 폭력에 대한 침묵>

 

1. 민주주의는 얼마나 무능한가, 혹은 왜 민주주의는 그들을 보호해주지 못하는가에 대한 문제

그것은 그들이 단지 법의 외부에 존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정부는 그들을 불법자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주력했다. 특히 그것을 강조하게 위해 우리나라의 치명적인 ‘빨갱이 콤플렉스’를 동원했다(이러한 측면에서 우리는 정부와 우리의 무능력함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정부는 미디어를 통해 그들이 빨갱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들이 돈도 많이 벌면서 자신들에게 가해지는 불가피한 피해를 막기 위해 불법적으로 파업을 시도하는 귀족 노조들이라고 이중적인 비판을 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절대로 같은 범주 안에 묶일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부는 그렇게 말했고, 우리는 그것에 속았다). 가장 폭력적인 범주인 "우리" 밖으로 그들을 몰아냈기 때문에 그들은 법뿐만 아니라 "우리"의 외부에 존재하는 호모 사케르가 된 것이다. 이것은 민주주의 사회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치명적 약점, 아니 민주주의 자체의 치명적 약점을 드러낸다. 이미 '민주화가 완성되었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무한한 희망을 품게 하는 동시에 그것을 비판할 수 있는 발판을 없애버렸다고 할 수 있다. 쌍용 자동차 사건은 진정한 민주주의는 소수의 의견을 들어주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어느 나라에서도 민주주의는 도래해야 할 이데올로기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2.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어떤 환상을 보여주는가에 대한 문제.

 다큐멘터리 <용산>을 봤을 때가 떠올랐다. 용산 참사에 왜 우리가 침묵하는가를 묻는 다큐멘터리였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침묵해야만 하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보이는 안타까움이었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죄송스러움이었다. 가족을 부양하는 그들은 자신들의 삶뿐만 아니라 그들이 부양하는 가족들의 삶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고 있었다. 그들은 분노했지만, 진정으로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나 부양가족이 없는 우리들도 그러한가? 왜 우리들은 거리에 나와서 이것은 분명 정부의 잘못이라고, 무능력이라고 말하지 못할까? 왜 우리는 그들이 부당한 피해자라고 말하지 못하는 것일까?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일찍이 환상을 보여주었다. 열심히 하면 누구나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쫒아 달려갔다. 그리고 결국 그 환상에 반응할 수밖에 없는 우리를 발견한다. 우리는 다른 희망을 만들어낼 수도, 환상을 깨부술 수도 없다. 단지 환상을 보고 그것에 맞춰 우리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가 보여준 환상과, 그 환상 자체가 허상인 현실에서 우리가 분노할 방법은 무엇일까? 진지하게 고민해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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