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스트 라이터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3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4
로버트 해리스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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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스트 라이터를 읽고서 토니 블레어와 박헌영을 생각한다. 
블레어의 이야기는 로버트 해리스의 픽션인 까닭에  '설마 그럴리야..,'라는 생각이 든다.
박헌영은 엄연한 역사이긴 하지만 '설마 그랬을리야..,'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픽션 속의 블레어는 좀더 현실에 가까워보이고 
역사 속의 박헌영은 도무지 픽션처럼만 느껴진다.
박헌영은 8월 테제로 한반도를 뜨겁게 달구었고
블레어는 제 3의 길로 영국좌파의 희망을 말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둘 다 전쟁을 했다.
게다가, 미국과의 내통의혹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블레어가 미국의 똘마니이자 이라크 전쟁의 공모자라는 것이 상식에 속한다면 
오히려, 박헌영은 미국의 첩자가 아니라는 점(북쪽을 제외하고)이 상식에 속할 것이다.
그렇지만.., 
블레어는 내통은 했지만 스파이가 아니고 
박헌영은 내통은 안 했지만 스파이가 되어버렸다. 

이상하게도 '제3의 길'과 같은 화려한 언사에도 불구하고
블레어의 말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오줌'뿐이다.
수상 재직 당시 그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함께 남자들의 오줌싸기 습관에 대한 캠페인을 벌였다.
말인즉슨, 남자들의 소변은 비행거리가 길기 때문에 공기와의 접촉이 많아져서
여성에 비해 화장실 냄새가 심하게 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남자들도 '서서 싸는' 습관을 버리고 여성들처럼 '앉아 쏴' 습관을 몸에 익히면
화장실 냄새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영국남자들이 블레어의 이 말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원제가 유령(The Ghost)이다.
애당초 대필작가의 일상적 이야기쯤으로 생각했던 내게 뜻밖에 다가온 정치스릴러다.
하지만 단순한 유령작가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정치적 권력 속에 내재하는 유령과 그 주위를 배회하는 꼭두각시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이 소설은 공포소설 쪽에 더 가까워보인다. 
따라서 마지막 반전이 끝난 후에도
권력 속에 존재하는 유령이라는 진공지대가 주는 꺼림직함이 남는다.
그리고 한국현대사의 아픈 기억인 박헌영이라는 잊혀진 인물까지 덤으로 떠오른다.



 

 

 

 

 



* 언젠가 TV에서 박헌영과 주세죽 사이에서 낳은 딸이 나온 적이 있었다.
  (아마도 위의 사진의 인물인 듯???)
  아직도 러시아에 남아 있는 그녀는
  스탈린 시대의 고려인 강제이주와 처형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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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중국 당대문학 걸작선 1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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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식 화장실 낙서

이야기는 아주 단순하다. 나이 많은 사단장이 젊은 싸모님을 당번병에게 맡기고 두 달씩이나 출장을 간다. 게다가 싸모님의 나이는 설흔 둘에 당번병의 나이는 스물 여덟. 사정이 이 모양이니 무슨 일이 안 벌어지면 오히려 이상할 노릇이다. 작가 스스로도 전체적인 얼개가 거의 화장실의 낙서 수준(나는 어제 친구네 집에 갔다. 그런데 친구는 없고 누나 혼자 자고 있었다...,)임을 아는 탓에 두 사람의 첫 합궁이 끝난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쑥스러우면서도 서사적인 고백을 남기고 있다. 

   "이쯤 되면 이 이야기에서는 이미 뜻밖의 즐거움을 찾을 수 없게 된다. 이야기의 시작과 전개, 절정은 모두 독자들의 총명한 상상과 예측 안에 존재하게 된다." - 102쪽

사실, 작가의 친절한 소개말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굳이 102쪽까지 가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독자들은 뻔할 뻔자의 스토리전개보다는 노골적인 묘사와 파괴적인 섹스행각에 대한 염치없는 기대를 진작부터 품고 있었을 것이다. 여주인공 또한 이러한 독자들의 기대를 모르지 않는다는 듯 사단장이 떠나자마자 별다른 준비동작 없이 곧바로 노골적인 유혹에 돌입하는 스트레이트한 자세를 보여준다.  싸모님 화이륑!

2. 그런데 사단장은 누구인가? 

 

 

 

 

  

싸모님과 당번병의 금지된(혹은 예정된) 욕망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이 소설의 제목임과 동시에 마오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혁명슬로건이 새겨진 팻말이다. 사단장의 출장 이후 싸모님은 팻말이 애당초 있어야 할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주로 부뚜막으로) 옮겨놓는 것이 유혹의 사인임을 알린다.    

   " 팻말이 식탁 위에 없으면 내가 시킬 일이 있으니 위층으로 올라오라는 뜻이라는 걸 잊지 마." 

   결국 마오의 위대한 슬로건을 혁명의 언어체계에서 욕망의 언어체계로 탈바꿈시킨 것이 이 작품의 골자이자 소설을 읽는 기본적인 독법이 될 터인데.., 그런데 문제는 팻말이 놓여있는 자리이다. 싸모님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팻말은 원래 식탁 위에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왜 반드시 팻말이 있어야만 하는 자리가 밥을 먹는 식탁이어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혁명의 시대라고 하고 이념이 종교의 수준까지 도달했던 시대라고 하더라도 밥을 먹는 자리를 혁명구호가 차지하고 있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이를 식욕이라는 인간의 가장 생물학적인 기본욕구마저도 정치가 지배하려는 노골적인 책략이라고 풀이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과잉이라는 느낌은 살아남는다. 밥과 반찬과 대화 속에 존재하는 지나치게 어색한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따라서 혁명에의 과잉욕망은 자연스럽게 섹스에 대한 과잉욕망으로 자신의 무대를 옮긴다. 싸모님이 이 과잉욕망된 팻말의 자리를 식탁의 모서리나 부뚜막 등으로 옮기는 순간, 정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체제의 욕망으로 불붙어서 이글거린다. 그래서 싸모님과 당번병의 욕망은 순수한 둘 사이의 욕망이라기보다는(사실, 순수한 욕망이 어디 있겠는가?) 과잉정치에 의해 촉발된 과잉조작된 욕망에 다름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과잉촉발된 욕망은 파멸과 죽음의 향기를 수반하는 향락의 소용돌이로 치닫게 된다. 

    그런데 두 사람의 욕망을 환기시킨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사단장이다. 그는 팻말을 가져온 사람이다. 게다가 그것을 식탁에 배치함으로써 불필요한 과잉을 유도한다.

   "어느날 사단장은 어디서 났는지 하얀 칠에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고 ....(중략).... 나무팻말을 들고 집으로 돌아와서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당번병에게 나무팻말에 담긴 의미(!)를 알겠느냐고 묻는다. 성실하지만 그저 그렇고 그런 답변에 그쳤을 것이 뻔한 당번병의 이야기를 듣고서 사단장은 환한 얼굴로 말한다.

   "훌륭하군, 아주 훌륭해. 우리 집 공무원 겸 취사원이 그들보다 깨달음의 수준이 훨씬 높군."

  여기서 그들이 누구인지 깨달음의 수준이 무엇인지는 수수께끼로 남는다. 하지만 흰색 바탕에 붉은 글씨라는 혁명슬로건은 싸모님의 최초의 유혹에서 동일한 색채를 반복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해간다. 혁명이 유혹이 되고 유혹에의 응대가 인민을 위한 복무가 된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어둠 속에 있는 싸모님 앞에서 당번병은 제법 당돌한 요구를 한다. "누님,불 좀 켜주세요." 잠시동안의 신경전이 끝난 후 마침내 싸모님은 불을 켜는데 이 때의 모습이 혁명슬로건과 동일한 반복이 된다.

  "(싸모님은) 마치 옥을 조각해놓은 것처럼 열린 모기장 안에 몸을 웅크린 채 붉은색 담요 한 쪽 끝을 잡아당겨 허벅지에서 두 다리 사이의 중요한 부분만 살짝 가리고 있었다."    

  소설에서 사단장의 대사는 딱 두번뿐인데 위의 첫번째에 이은 두번째 대사가 더 가관이다. 당번병이 처음 사단장의 집으로 출근하던 날 사단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내 아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한, 위층에는 한발짝도 올라가지 말게."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반대로 해석하자면 아내가 말을 하면 언제라도 올라가도 된다는 뜻이 아니던가? 그런데 밉살스러운 싸모님은 말없이 팻말의 자리만 이동시킨다. 이것은 사단장의 금지명령에 해당하는가? 아니면 금지를 위반해도 좋은 특별단서조항에 해당하는가?   

   결국, 이 소설은 우연한 기회에 사단장이 자리를 비움으로써 이 둘의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사단장이 자리를 비워줌으로써 이 둘의 사랑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성기능에 문제가 있어서 첫째 부인에게 버림받고 젊은 싸모님을 얻은 사단장의 출장 사유 또한 의미심장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공공부문 구조조정(군대까지 포함한)쯤에 해당할 법한 <편제 축소 개편운동>에의 참가가 그것인데 놀랍게도 사단장은 이 회의에 참석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전 부대원을 시범케이스로 해산하겠다고 말한다. 오직 거세된 자만이 거세를 할 수 있다.    

   따라서 소설의 결말에서 살신성인의 자세를 보여준 사단장이 군구사령관으로 승진하는 것도, 당번병과의 뜨거운 연애질 끝에 아이까지 밴 싸모님이 아무 탈이 없는 것도(당연한 말이지만 아이는 혁명이라는 구질서와 욕망이라는 새로운 질서의 혼혈아이다.) 모든 부대원이 일자리를 잃지만 당번병만이 특별대우를 받고 먹고 살만해지는 것도 전혀 이상한 결론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단장이 대타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혁명의 이름으로 금지를 말하는(팻말의 위치) 대타자임과 동시에 끊임없는 향락에의 참여(장기출장)를 유도하는 초자아이다. 이러한 사단장의 이중구속의 명령은 오늘날의 중국자본주의의 모습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십오년 후, 아직도 인민을 위한 복무에 고착된 상태인 당번병은 싸모님의 집으로 찾아간다. 그러나 싸모님은 얼굴을 마주하는 대신 간단한 쪽지만을 남긴다.

   "돈이 필요한 거면 정확한 액수와 우편물을 받을 수 있는 주소를 적어줘."

  이제 <인민을 위한 복무>의 추억은 끝났다. 오로지 <자본을 위한 복무>만 있을 뿐...,

3. 다른 나라의 표지들

   중국표지가 나온 김에 다른 나라의 표지도 모아보았다. 사대주의인지는 몰라도 역시 프랑스라는 생각이 든다. 캬! 모택동과 씹하기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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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토텀
찰스 부코우스키 지음, 석기용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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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이 <잡역부, 막일꾼>이라는 뜻이다. 닥치는 대로 막일을 하며 살다보니(그렇다고 열심히 일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작가의 기억 또한 정돈된 형태보다는 마구잡이로 튀어나온다. 매끈한 스토리의 전개도 없고 소설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잘 빠진 클라이맥스도 없다. 그냥 더 중요하지도 덜 중요하지도 않은 그저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이 시간 순으로 배열되고 있을 뿐이다. 이상한 것은 이러한 평면적인 스토리의 나열이 역설적으로 소설의 표면을 울퉁불퉁하게 만들어버린다는 점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마르크스의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유명한 테제를 ‘존재가 의식의 구조를 규정한다.’로 살짝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막일꾼은 막일꾼이기 때문에 막일꾼의 의식구조를 지니며 살아간다. 잡역부는 잡역부이기 때문에 잡스러운 기억들의 연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막일꾼의 의식>이 아니라 <막일꾼의 의식구조>이다. 의식은 필연적으로 <막의식>일 수밖에 없으며 기억은 필연적으로 <막기억>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막가파식 삶(평론가들은 이러한 주인공의 삶에 안티 히어로라는 그럴듯한 상표를 붙여놓았다.)을 살더라도 이러한 삶을 지탱시켜 줄 말뚝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부코우스키는 이러한 <마구잡이식 이야기>의 무대장치로 돈(직장), 섹스(여자), 술(환상)이라는 세 가지 말뚝을 제시한다. 따라서 이야기는 언제나 직장을 다니다가 짤리고, 여자를 만나다가 헤어지고, 술에 취해서 깽판을 치다가 깨어나는 형태를 반복한다. 아무리 막 나가는 삶이라고 하더라도 어차피 인생은 돌고 돌아야 하는 법이니까...,  

   피에르 바야르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제법 선정적이고 다소 도전적인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우리의 사생활에서 돈과 섹스의 영역을 제외하고 독서의 영역보다 더 확실한 정보를 얻기 힘든 영역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피에르 바야르의 돈과 섹스에 대한 지적은 부코우스키와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돈이 교환가치의 양적인 문제로 치부되는 데 반해 부코우스키의 돈은 오로지 먹고 사는데 필요한 질적인 사용가치의 문제로 다루어진다. 주인공이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돈의 사용가치일 뿐이다. 주인공에게는 미래와 축적, 그리고 성실한 노동에 대한 보상이라는 형태의 돈의 개념이 없다. 주인공 치나스키는 경마장의 사기행각을 통해서 계획적으로 동료들의 돈을 갈취하지만 이 부당한 소득을 미래를 위해 남겨두지 않고 곧바로 소진해버린다. 따라서 주인공의 소비는 잉여적, 기호학적 의미의 소비가 아니다. 그의 소비는 소비가 아니라 오히려 절실한 사용이 된다. 누가 절실한 필요에 의해서 마시는 술을 불필요한 소비라고 나무랄 수 있겠는가? 돈을 정당한 노동에 대한 대가라는 관념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주인공의 노동은 언제나 게으르고 땡땡이만 치는 저급한 사기의 수준에서 진행된다. 따라서 노동-화폐-시간이라는 자본주의의 필사적인 트라이앵글은 이 게으른 막일꾼(부랑자가 아니다.)의 나태한 도발 앞에서 역설적인 무기력함을 드러내고야 만다. 어차피 붙박이 노동자도 아니고 떠돌이 노동자인 주제에 미래는 무슨 얼어 죽을...,    

  

  섹스(여자) 역시 마찬가지다. 교양인의 수준에서 여자에 대한 소유가 주로 질적인 문제(금전적 배경, 인물 됨됨이, 지적 수준 등)로 성립하는 것에 반해 부코우스키의 여자는 오로지 섹스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양적인 문제로 전환된다. 그는 여자에 대해서 양적인 그리고 즉물적인 감각으로 대한다. 그가 연상의 여인 잔을 좋아하는 까닭은 그 누구보다도 섹스를 잘 하기 때문이다. 그녀에 대한 묘사는 인간성에 대한 자질구레한 설명 대신 오로지 섹스행위에 대한 기능적인 설명에 충실하고자 한다. 따라서 한 여인에 대한 헌신과 배려라는 여성 소유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신화는 부코우스키에게는 설 자리가 없다.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여자는 그냥 ‘따먹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인공은 따먹고 헤어지고 따먹고 헤어지고를 반복한다. 마초이즘이라고 욕을 먹어도 좋고, 남성중심주의라고 비난을 당해도 좋다. 어차피 밑바닥 인생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러나 피에르 바야르가 들고 있는 세 번째 요소인 독서만은 사정이 다르다. 사실 바야르 역시 <독서 vs 비독서>에 대한 치밀한 추적을 통해서 독서에 대한 신화가 교양인으로 훈육시키기 위한 속박의 형태임을 주장하고 있다. 어쨌거나 <독서 vs 술>의 대립구도는 <교양인의 지적 판타지 vs 밑바닥 인생의 육체적 판타지>로 치환된다. 엄밀히 말하자면 독서 역시 교양인의 음란물에 다름 아니다. 인쇄술의 발전과 더불어 등장한 순수하고 개인적인 독서행위의 탄생은 개인의 내밀한 판타지를 끊임없이 충족시켜 왔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은 사랑이라는 환상을,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는 혁명이라는 환상을,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은 토막살해라는 환상을, 스콧 스미스의 ‘폐허’는 공포라는 환상을 다룬다.) 하지만 독서는 외적으로는 교양이라는 위선의 탈을 쓰고서 나타난다. 은밀한 내적 만족과 공공연한 외적 만족을 동시에 달성시키는 수단으로서의 독서. 그러나 ‘술’이라는 밑바닥 인생의 독서 대용의 등가물은 내적으로는 몸이 망가지고 외적으로는 개망신을 당하는 불행한 판타지로 이어지기 일쑤이다. 그것은 언제나 망각에의 불안과(독서는 기억에의 불안이다) 오바이트에 대한 추억과(독서는 카타르시스에 대한 추억이다) 영문 모를 난투극 끝에 오는 상처(독서토론 역시 은밀한 난투극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지적 연대감이라는 탈을 쓰고 등장한다.)를 수반한다. 그러나 어쩌하겠는가? 판타지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을.., 그 누구도 자기 자신에 대한 나르시스적인 환상을 제거하고 살아가라고 말할 수는 없다.(그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지나치게 매정한 인간이다.) 따라서 밑바닥 인생에게 술을 끊으라고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차피 그들은 술을 마셔야 한다. 아무리 환상이 보잘 것 없고 쉽게 부서지기 쉬운 것이라고 할 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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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이름이 없다
위화 지음, 이보경 옮김 / 푸른숲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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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남자 다섯 + 여자 셋, 그러니까 합이 팔인분의 저녁이 모여서 식사를 한다. 위화의 말처럼 '남자들의 말솜씨는 유창했고 여자들의 교태는 사랑스러"웠던 저녁, 유독 말없이 식사에만 열중하고 있는 한 남자가 있다. 이름이 마얼이라나? 뭐라나?(최소한 인명만이라도 한자를 병기해주면 어떨까?) 마얼은 이제 여섯번째 새우를 입에 넣고 있는 참이다. 갑자기 대화가 끊긴 탓인지 모두들 마얼의 식사장면을 주목하게 되고.., 놀랍게도 마얼의 입속에 통째로 들어갔던 여섯번째 새우가 다시 튀어나온다. 비록 알맹이는 모두 마얼의 위장 속으로 사라진 뒤였지만 껍데기만은 여전히 '조금도 부서지지 않은 완전무결한 새우 한마리'의 모습으로 식탁 위에 다시 남아있다. 이제, 내용은 없고 형식만이 남는다. 아니, 알맹이는 사라지고 포장(껍데기)만이 남아 있다. 남자 다섯 명, 그러니까 오인분의 식사한도를 넘어선 여섯번째 새우요리 덕분인지 마얼은 남은 세 명의 여자 가운데 한 명인 뤼위안의 남편이 된다. 어쩌면 '뤼위안이 마얼의 아내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숫자 6을 둘러싼 위화의 이상한 계산법 탓에, 둘은 '정확하게' 여섯달 뒤에 결혼식을 올린다. 당시 식사모임에 합석했던 나머지 두 명의 여자들 또한 결혼을 하지만 그들의 결혼상대는 이 날의 저녁모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다. 결국 이 멋진 단편에서 8인의 저녁회동은 마얼과 뤼위안이라는 두 명의 '애프터 결혼스토리'를 예고하기 위한 전경에 지나지 않게 되는데..., 하지만 새우의 알맹이를 꿀꺽 삼켜버린 마얼에게 남겨진 것은 오로지 지나치게 말끔한 새우껍질밖에 없다는 불행한 역설. 남아 있다라는 말이 던져주는 어딘지 모르게 이상한 배경스러움 혹은 껍질스러움. 위화는 다시 1996년 6월 30일이라는 은근한 숫자의 장난질을 치면서 이 둘의 결혼생활의 알맹이를 추적해들어간다. (그런데 도대체 진짜로 1996년 6월30일에 중국 어쩌면 상하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거지?)


 

 

 

 

 

 

 2. 언젠가 어디선가 노먼 메일러의 <요가를 연구한 사나이>라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지금 알라딘에는 없다.) 인터넷으로 대충 찾아보니 바벨의 도서관이라는 출판사에서 2004년 발매한 적이 있고 이북라이브러리라는 곳에서 전자책 형태로 대출가능하다고 적혀 있다. 어쨌거나 얼핏 제목만 보면 상당히 웰빙스러운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가는 정직하게 말하자면 요가가 아니라 포르노이다. 아마도 60년대(혹은 50년대인지도 모른다. 기억이 가물가물~) 미국의 정치적 긴박감을 살포시 배경으로 깔고 있는 이 소설은 금지된 포르노를 집단으로(그것도 부부동반으로)  보는 행위가 가져오는 두려움, 설레임, 죄스러움, 해방감, 연대의식등을 절묘하게 버무려놓은 걸작으로 기억한다. 어쨌거나, 여섯번째 새우요리가 맺어준 중국인 부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이 단편의 제목이 <왜 음악이 없는 걸까?>인 이유 역시 포르노에서 출발한다. 아마도 잘 나가는 아내일 것이 분명한 뤼위안이 상하이로 출장을 간 사이(위화는 등장인물들의 직업을 밝히지 않고 있다.) 마얼은 자신의 친구이자 아내의 숨은 정부인 궈빈으로부터 심심파적용 포르노 테이프를 입수하게 된다. 그러나 <요가를 연구한 사나이>의 포르노가 느슨한 집단의식에 기초한 관람용 포르노였던 것에 반해 <왜 음악이 없는 걸까?>의 포르노는 아내와 숨은 정부인 궈빈의 섹스장면을 담은 셀카포르노라는 점에서 사뭇 다르다. 그리고 아직 셀카포르노의 등장인물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남편인 마얼이 중얼거리는 대사가 이 단편의 제목이 된다. 마얼은 두 사람의 섹스장면을 보면서 중얼거린다. "왜 음악이 없지?", 다른 말로 하자면 '왜 배경이 없지?', '왜 껍질이 없지?' 그리고 또 한심하게 중얼거린다. "황색 비디오에는 음악이 원래 없는 걸까?" 결국 남편이라는 껍데기, 부부라는 껍데기, 그리고 삶이라는 껍데기만이 잔존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뱉어버린 새우요리의 껍질로 남아 있는 삶. 그렇다고 그것마저 삼킬 수도 없는 노릇이고..,   



 

 

 

 

 

 

 

 

 3.  셀카 포르노 속의 등장인물인 아내는 자신의 정력이 남편보다 세냐?는 정부의 정력중심주의적 질문에 웃으며 대답한다. "그 사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아."  만약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를 마얼의 아내인 뤼위안이 읽고서 짖궂은 장난을 쳤다면 이런 식이 될지도 모른다. "마얼, 너는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어쩌면 마얼은 여섯번째 새우요리를 먹던 그 순간을 제외하고는 단 한번도 뜨거운 사람으로 행세한 적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순간마저도 우연이 가져다준 뜻밖의 선물일 뿐, 자신의 열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을지도 모르고. 그렇지만 배경이자, 빈 껍데기이자, 속빈 강정이자, 불한번 붙여보지도 못하고 부서진 시커먼 연탄부스러기일지도 모르는 마얼이 외친다. "사실, 나도 움직였다고...", "제일 중요한 순간엔 나도 움직였어!" 그리고.., 그러나.., 그리하여서..,그렇지만..,그걸로 끝이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외침은 외침으로만 끝난다. 어쨌거나 두 사람의 뜨겁지 않은 부부사이는 여전히 계속될 것이고 도시의 가장 먼 곳에 산다는 마얼의 친구이자 아내의 정부 또한 여전히 이 집구석을 들락거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빌어먹을 삶은 그래도 계속된다는 것이다. 알맹이는 가고, 껍데기는 남고, 다시 껍데기가 알맹이가 되고, 알맹이는 다시 껍데기가 되고, 배경음악 없는 포르노는 너무너무 알맹이같아서 도리어 껍데기처럼 보이고, 중요한 순간의 움직임이라는 외침은 부질없는 삶의 맥락 속에서 오히려 허황된 비누거품처럼 보이고, 천안문 사태가 되었건 광주가 되었건 그 누구의 가슴에도 뜨거운 핏덩이 하나쯤은 움켜쥐고 살았을텐데, 열정에도 서열이 서고, 분노에도 레벨차가 있고, 자유에의 기억은 회고조의 폭력이 되고.., 그러니까 위화선생님의 주의주장은 밥이나 잘 먹고 잘 살아보자는 말씀. 그나저나 오늘따라 중국음식이 땡기는데 저기 있는 저 천안문 식당은 어드메쯤 있는 식당이려나?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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