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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ㅣ 중국 당대문학 걸작선 1
옌롄커 지음, 김태성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1. 중국식 화장실 낙서
이야기는 아주 단순하다. 나이 많은 사단장이 젊은 싸모님을 당번병에게 맡기고 두 달씩이나 출장을 간다. 게다가 싸모님의 나이는 설흔 둘에 당번병의 나이는 스물 여덟. 사정이 이 모양이니 무슨 일이 안 벌어지면 오히려 이상할 노릇이다. 작가 스스로도 전체적인 얼개가 거의 화장실의 낙서 수준(나는 어제 친구네 집에 갔다. 그런데 친구는 없고 누나 혼자 자고 있었다...,)임을 아는 탓에 두 사람의 첫 합궁이 끝난 대목에서 다음과 같은 쑥스러우면서도 서사적인 고백을 남기고 있다.
"이쯤 되면 이 이야기에서는 이미 뜻밖의 즐거움을 찾을 수 없게 된다. 이야기의 시작과 전개, 절정은 모두 독자들의 총명한 상상과 예측 안에 존재하게 된다." - 102쪽
사실, 작가의 친절한 소개말이 아니더라도, 그리고 굳이 102쪽까지 가지 않더라도, 대부분의 독자들은 뻔할 뻔자의 스토리전개보다는 노골적인 묘사와 파괴적인 섹스행각에 대한 염치없는 기대를 진작부터 품고 있었을 것이다. 여주인공 또한 이러한 독자들의 기대를 모르지 않는다는 듯 사단장이 떠나자마자 별다른 준비동작 없이 곧바로 노골적인 유혹에 돌입하는 스트레이트한 자세를 보여준다. 싸모님 화이륑!
2. 그런데 사단장은 누구인가?
싸모님과 당번병의 금지된(혹은 예정된) 욕망을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이 소설의 제목임과 동시에 마오의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혁명슬로건이 새겨진 팻말이다. 사단장의 출장 이후 싸모님은 팻말이 애당초 있어야 할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주로 부뚜막으로) 옮겨놓는 것이 유혹의 사인임을 알린다.
" 팻말이 식탁 위에 없으면 내가 시킬 일이 있으니 위층으로 올라오라는 뜻이라는 걸 잊지 마."
결국 마오의 위대한 슬로건을 혁명의 언어체계에서 욕망의 언어체계로 탈바꿈시킨 것이 이 작품의 골자이자 소설을 읽는 기본적인 독법이 될 터인데.., 그런데 문제는 팻말이 놓여있는 자리이다. 싸모님의 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팻말은 원래 식탁 위에 있어야만 한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왜 반드시 팻말이 있어야만 하는 자리가 밥을 먹는 식탁이어야 하는 것일까? 아무리 혁명의 시대라고 하고 이념이 종교의 수준까지 도달했던 시대라고 하더라도 밥을 먹는 자리를 혁명구호가 차지하고 있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이를 식욕이라는 인간의 가장 생물학적인 기본욕구마저도 정치가 지배하려는 노골적인 책략이라고 풀이할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어딘지 모르게 과잉이라는 느낌은 살아남는다. 밥과 반찬과 대화 속에 존재하는 지나치게 어색한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 따라서 혁명에의 과잉욕망은 자연스럽게 섹스에 대한 과잉욕망으로 자신의 무대를 옮긴다. 싸모님이 이 과잉욕망된 팻말의 자리를 식탁의 모서리나 부뚜막 등으로 옮기는 순간, 정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체제의 욕망으로 불붙어서 이글거린다. 그래서 싸모님과 당번병의 욕망은 순수한 둘 사이의 욕망이라기보다는(사실, 순수한 욕망이 어디 있겠는가?) 과잉정치에 의해 촉발된 과잉조작된 욕망에 다름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과잉촉발된 욕망은 파멸과 죽음의 향기를 수반하는 향락의 소용돌이로 치닫게 된다.
그런데 두 사람의 욕망을 환기시킨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다름아닌 사단장이다. 그는 팻말을 가져온 사람이다. 게다가 그것을 식탁에 배치함으로써 불필요한 과잉을 유도한다.
"어느날 사단장은 어디서 났는지 하얀 칠에 붉은 글씨가 새겨져 있고 ....(중략).... 나무팻말을 들고 집으로 돌아와서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당번병에게 나무팻말에 담긴 의미(!)를 알겠느냐고 묻는다. 성실하지만 그저 그렇고 그런 답변에 그쳤을 것이 뻔한 당번병의 이야기를 듣고서 사단장은 환한 얼굴로 말한다.
"훌륭하군, 아주 훌륭해. 우리 집 공무원 겸 취사원이 그들보다 깨달음의 수준이 훨씬 높군."
여기서 그들이 누구인지 깨달음의 수준이 무엇인지는 수수께끼로 남는다. 하지만 흰색 바탕에 붉은 글씨라는 혁명슬로건은 싸모님의 최초의 유혹에서 동일한 색채를 반복함으로써 그 의미를 더해간다. 혁명이 유혹이 되고 유혹에의 응대가 인민을 위한 복무가 된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어둠 속에 있는 싸모님 앞에서 당번병은 제법 당돌한 요구를 한다. "누님,불 좀 켜주세요." 잠시동안의 신경전이 끝난 후 마침내 싸모님은 불을 켜는데 이 때의 모습이 혁명슬로건과 동일한 반복이 된다.
"(싸모님은) 마치 옥을 조각해놓은 것처럼 열린 모기장 안에 몸을 웅크린 채 붉은색 담요 한 쪽 끝을 잡아당겨 허벅지에서 두 다리 사이의 중요한 부분만 살짝 가리고 있었다."
소설에서 사단장의 대사는 딱 두번뿐인데 위의 첫번째에 이은 두번째 대사가 더 가관이다. 당번병이 처음 사단장의 집으로 출근하던 날 사단장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내 아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한, 위층에는 한발짝도 올라가지 말게."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반대로 해석하자면 아내가 말을 하면 언제라도 올라가도 된다는 뜻이 아니던가? 그런데 밉살스러운 싸모님은 말없이 팻말의 자리만 이동시킨다. 이것은 사단장의 금지명령에 해당하는가? 아니면 금지를 위반해도 좋은 특별단서조항에 해당하는가?
결국, 이 소설은 우연한 기회에 사단장이 자리를 비움으로써 이 둘의 사랑이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사단장이 자리를 비워줌으로써 이 둘의 사랑이 비로소 시작되는 것임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성기능에 문제가 있어서 첫째 부인에게 버림받고 젊은 싸모님을 얻은 사단장의 출장 사유 또한 의미심장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공공부문 구조조정(군대까지 포함한)쯤에 해당할 법한 <편제 축소 개편운동>에의 참가가 그것인데 놀랍게도 사단장은 이 회의에 참석해서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전 부대원을 시범케이스로 해산하겠다고 말한다. 오직 거세된 자만이 거세를 할 수 있다.
따라서 소설의 결말에서 살신성인의 자세를 보여준 사단장이 군구사령관으로 승진하는 것도, 당번병과의 뜨거운 연애질 끝에 아이까지 밴 싸모님이 아무 탈이 없는 것도(당연한 말이지만 아이는 혁명이라는 구질서와 욕망이라는 새로운 질서의 혼혈아이다.) 모든 부대원이 일자리를 잃지만 당번병만이 특별대우를 받고 먹고 살만해지는 것도 전혀 이상한 결론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단장이 대타자이기 때문이다. 그는 혁명의 이름으로 금지를 말하는(팻말의 위치) 대타자임과 동시에 끊임없는 향락에의 참여(장기출장)를 유도하는 초자아이다. 이러한 사단장의 이중구속의 명령은 오늘날의 중국자본주의의 모습과도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십오년 후, 아직도 인민을 위한 복무에 고착된 상태인 당번병은 싸모님의 집으로 찾아간다. 그러나 싸모님은 얼굴을 마주하는 대신 간단한 쪽지만을 남긴다.
"돈이 필요한 거면 정확한 액수와 우편물을 받을 수 있는 주소를 적어줘."
이제 <인민을 위한 복무>의 추억은 끝났다. 오로지 <자본을 위한 복무>만 있을 뿐...,
3. 다른 나라의 표지들
중국표지가 나온 김에 다른 나라의 표지도 모아보았다. 사대주의인지는 몰라도 역시 프랑스라는 생각이 든다. 캬! 모택동과 씹하기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