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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토텀
찰스 부코우스키 지음, 석기용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제목이 <잡역부, 막일꾼>이라는 뜻이다. 닥치는 대로 막일을 하며 살다보니(그렇다고 열심히 일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작가의 기억 또한 정돈된 형태보다는 마구잡이로 튀어나온다. 매끈한 스토리의 전개도 없고 소설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잘 빠진 클라이맥스도 없다. 그냥 더 중요하지도 덜 중요하지도 않은 그저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이 시간 순으로 배열되고 있을 뿐이다. 이상한 것은 이러한 평면적인 스토리의 나열이 역설적으로 소설의 표면을 울퉁불퉁하게 만들어버린다는 점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마르크스의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유명한 테제를 ‘존재가 의식의 구조를 규정한다.’로 살짝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막일꾼은 막일꾼이기 때문에 막일꾼의 의식구조를 지니며 살아간다. 잡역부는 잡역부이기 때문에 잡스러운 기억들의 연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막일꾼의 의식>이 아니라 <막일꾼의 의식구조>이다. 의식은 필연적으로 <막의식>일 수밖에 없으며 기억은 필연적으로 <막기억>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아무리 막가파식 삶(평론가들은 이러한 주인공의 삶에 안티 히어로라는 그럴듯한 상표를 붙여놓았다.)을 살더라도 이러한 삶을 지탱시켜 줄 말뚝은 있어야 하는 법이다. 부코우스키는 이러한 <마구잡이식 이야기>의 무대장치로 돈(직장), 섹스(여자), 술(환상)이라는 세 가지 말뚝을 제시한다. 따라서 이야기는 언제나 직장을 다니다가 짤리고, 여자를 만나다가 헤어지고, 술에 취해서 깽판을 치다가 깨어나는 형태를 반복한다. 아무리 막 나가는 삶이라고 하더라도 어차피 인생은 돌고 돌아야 하는 법이니까...,
피에르 바야르는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법>이라는 제법 선정적이고 다소 도전적인 책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우리의 사생활에서 돈과 섹스의 영역을 제외하고 독서의 영역보다 더 확실한 정보를 얻기 힘든 영역도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피에르 바야르의 돈과 섹스에 대한 지적은 부코우스키와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돈이 교환가치의 양적인 문제로 치부되는 데 반해 부코우스키의 돈은 오로지 먹고 사는데 필요한 질적인 사용가치의 문제로 다루어진다. 주인공이 추구하는 것은 오로지 돈의 사용가치일 뿐이다. 주인공에게는 미래와 축적, 그리고 성실한 노동에 대한 보상이라는 형태의 돈의 개념이 없다. 주인공 치나스키는 경마장의 사기행각을 통해서 계획적으로 동료들의 돈을 갈취하지만 이 부당한 소득을 미래를 위해 남겨두지 않고 곧바로 소진해버린다. 따라서 주인공의 소비는 잉여적, 기호학적 의미의 소비가 아니다. 그의 소비는 소비가 아니라 오히려 절실한 사용이 된다. 누가 절실한 필요에 의해서 마시는 술을 불필요한 소비라고 나무랄 수 있겠는가? 돈을 정당한 노동에 대한 대가라는 관념으로 바라보지 않기 때문에 주인공의 노동은 언제나 게으르고 땡땡이만 치는 저급한 사기의 수준에서 진행된다. 따라서 노동-화폐-시간이라는 자본주의의 필사적인 트라이앵글은 이 게으른 막일꾼(부랑자가 아니다.)의 나태한 도발 앞에서 역설적인 무기력함을 드러내고야 만다. 어차피 붙박이 노동자도 아니고 떠돌이 노동자인 주제에 미래는 무슨 얼어 죽을...,
섹스(여자) 역시 마찬가지다. 교양인의 수준에서 여자에 대한 소유가 주로 질적인 문제(금전적 배경, 인물 됨됨이, 지적 수준 등)로 성립하는 것에 반해 부코우스키의 여자는 오로지 섹스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양적인 문제로 전환된다. 그는 여자에 대해서 양적인 그리고 즉물적인 감각으로 대한다. 그가 연상의 여인 잔을 좋아하는 까닭은 그 누구보다도 섹스를 잘 하기 때문이다. 그녀에 대한 묘사는 인간성에 대한 자질구레한 설명 대신 오로지 섹스행위에 대한 기능적인 설명에 충실하고자 한다. 따라서 한 여인에 대한 헌신과 배려라는 여성 소유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신화는 부코우스키에게는 설 자리가 없다.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여자는 그냥 ‘따먹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주인공은 따먹고 헤어지고 따먹고 헤어지고를 반복한다. 마초이즘이라고 욕을 먹어도 좋고, 남성중심주의라고 비난을 당해도 좋다. 어차피 밑바닥 인생이란 그런 것이니까...,
그러나 피에르 바야르가 들고 있는 세 번째 요소인 독서만은 사정이 다르다. 사실 바야르 역시 <독서 vs 비독서>에 대한 치밀한 추적을 통해서 독서에 대한 신화가 교양인으로 훈육시키기 위한 속박의 형태임을 주장하고 있다. 어쨌거나 <독서 vs 술>의 대립구도는 <교양인의 지적 판타지 vs 밑바닥 인생의 육체적 판타지>로 치환된다. 엄밀히 말하자면 독서 역시 교양인의 음란물에 다름 아니다. 인쇄술의 발전과 더불어 등장한 순수하고 개인적인 독서행위의 탄생은 개인의 내밀한 판타지를 끊임없이 충족시켜 왔다.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은 사랑이라는 환상을,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는 혁명이라는 환상을,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은 토막살해라는 환상을, 스콧 스미스의 ‘폐허’는 공포라는 환상을 다룬다.) 하지만 독서는 외적으로는 교양이라는 위선의 탈을 쓰고서 나타난다. 은밀한 내적 만족과 공공연한 외적 만족을 동시에 달성시키는 수단으로서의 독서. 그러나 ‘술’이라는 밑바닥 인생의 독서 대용의 등가물은 내적으로는 몸이 망가지고 외적으로는 개망신을 당하는 불행한 판타지로 이어지기 일쑤이다. 그것은 언제나 망각에의 불안과(독서는 기억에의 불안이다) 오바이트에 대한 추억과(독서는 카타르시스에 대한 추억이다) 영문 모를 난투극 끝에 오는 상처(독서토론 역시 은밀한 난투극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지적 연대감이라는 탈을 쓰고 등장한다.)를 수반한다. 그러나 어쩌하겠는가? 판타지 없이는 살 수 없는 것을.., 그 누구도 자기 자신에 대한 나르시스적인 환상을 제거하고 살아가라고 말할 수는 없다.(그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지나치게 매정한 인간이다.) 따라서 밑바닥 인생에게 술을 끊으라고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차피 그들은 술을 마셔야 한다. 아무리 환상이 보잘 것 없고 쉽게 부서지기 쉬운 것이라고 할 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