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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에 관한 검은책
에마뉘엘 피에라 외 지음, 권지현 옮김, 김기태 감수 / 알마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검열에 관한 검은책.
이 검은 책을 읽으며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왜 검열을 하는가?’ 이었습니다. 책에서 나오는 검열의 많은 주체들, 정부나 종교 단체들, 그리고 언론들은 왜 검열을 할까요? 이는 아마 두려움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검열을 하지 않았을 때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 말입니다. 검열의 대상이 된 내용이 그대로 사람들에게 전파되었을 때 예상될 수 있는 전개들에 대해서 말이지요. 물론 단순히 두려움이라고만 해둔다면 너무 두루뭉술하겠지요. 여기서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대해서 분석을 해봅시다. 우리는 두려움을 언제 느끼게 될까요? 스피노자가 두려움에 대해서, 그리고 여러 감정들에 대해서 분석을 한 적이 있습니다. 두려움은 그에 따르면 자신이 두려워하는 큰 악을 더 작은 악으로 피하려는 욕망을 갖도록 자극되는 슬픔이라고 하지요. 일단 저는 이 스피노자의 분석을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에 따라 과연 검열이 두려움 때문에 일어나는가, 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겠지만, 일단 두려움 때문에 일어난다고 가정한다면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검열은 더 작은 악, 에 해당하며, 검열당하는 주체는 큰 악이 될 수 있을 거라는 것이지요. 작은 악이나 큰 악이나 ‘악’ 이니 옳지 않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겠지만, 단순히 악이라고 뭉뚱그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 또 의문이 생길 수 있겠지요.
책에서는 각 장에서 검열에 대한 사례를 들어가면서 그 결론을 ‘정말 미묘하고 어려운 문제이긴 하지만 검열은 좋지 않다’ 로 매듭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 전반적으로 밝히고 있듯 검열이 정말 필요하지 않은가, 라는 문제에 다다르면 다시금 위의 큰 악과 작은 악의 관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검열을 하지 않는 게 과연 좋을까요? 표현의 자유는 언제나 허용되어야 하는 것일까요? 도리어 검열을 하지 않음으로써 더 큰 맹수를 풀어놓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혹은 애초에 두려움 때문에 검열을 한다는 전제자체가 옳지 않은 것일까요? 하지만 그 검열 대상이 꼭 ‘자유’와 같은 지배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는 계층의 입맛에 맞지 않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소아성애’와 같은 것은 특히 미국에서는 엄격하게 처벌을 하고, 엄격하게 검열을 시행합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리뷰의 형식을 빌려 책에서 나누어 놓은 검열의 분류에 대해서 그 사례를 될 수 있는 대로 (여간하면 우리나라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찾아서 기입해보려고 합니다.
1. 자기검열.
자기검열의 정의는 ‘아무도 강제하지 않지만 위협을 피할 목적 또는 타인의 감정이 상하지 않게 할 목적’ 으로 자신의 표현을 억제하는 행위입니다. (위키피디아) 이런 자기검열의 예는 멀리서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 글을 쓰는 중인, 그리고 다른 글들을 써왔던 저 자신만 해도 많은 자기검열을 하니 말입니다. 일단 저의 글을 지금껏 읽어오신 분이라면 알겠지만 저는 책에서 내용을 부분 발췌하는 것도 피하는 편입니다. 저의 경우에는 저작권 위반이 두려워 그렇게 하는 편이지요. 물론 이렇게 부분 발췌한다고 해서 실제로 고소가 들어갔다거나 하는 사례는 본 적은 없지만 말입니다. 또한 넷 상에 올리는 글은 여간하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요. 제 글로 인하여 타인의 감정이 상할 가능성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저로서는 이 정도는 괜찮겠지, 라고 여기더라도 상대방은 그렇지 않을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상처의 감수성이 모두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굳이 상대방을 언급해야 한다면 표현을 최대한 정제하여 쓰려고 노력합니다. 넷에서 글을 올린다는 것은 현실에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과 달리 오직 글 하나로만 상대방에게 대화를 건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현실에서 얼마나 많은 비언어적인 의사소통 수단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볼 때) 이야기를 나누는 데 있어 조심스러워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자기 검열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와 알 권리를 조금씩 좀먹고 있다고 말이지요.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이 그르지는 않습니다. 언론의 예만 들어도 자신들의 기사에 대한 후폭풍이 두려워 검열을 하는 경우가 많을테니 말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하나 더 생깁니다. 언론과 같은 단체와 개인의 자기검열이 동일하게 취급되어야 하는가? 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지요. 동일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개인이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넷 상에서 표현해도 옳은가, 라는 의문도 남습니다. 타인의 감정이 두려워 자기검열을 하는 것을 가식이라고 불릴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런 가식이 싫다면 활동할 수 있는, 정말 가식 없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지요, 디씨인사이드와 같은 사이트 말입니다. 그렇다면 언론은 자기검열을 하지 않아도 될까요? 광고주나 권력의 눈치를 아예 안 보는 것이 사실 이상적이겠지만, 현실에서는 그러기가 어렵기도 하니 말입니다.
2. 인터넷 검열.
인터넷에서의 자기검열은 앞서 자기검열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어느 정도 적은 듯 하고,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중국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중국은 (반어적으로) 정말 대단한 나라입니다. 인터넷을 검열하는 나라이니 말이지요. 물론 중국도 중국 나름대로 청소년들을 유해 정보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분이 있겠지만 천안문 사태와 관련된 천안문과 같은 키워드가 중국에서 쓰이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리 설득력이 있지는 못합니다. 인권이라는 말도 필터링된다고 하지요. 이 책에서는 정작 포르노에 관한 규제는 느슨하다고 합니다. 인권은 적어도 표현의 자유라는 측면에서 볼 때는 포르노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고 있는 것이지요. 이런 중국에 현재 대항하고 있는 포탈이 구글이긴 합니다만, 결국 구글도 무릎을 꿇게 됩니다. 결국 2010년에 이르러 구글은 검열에 항의하면서 사업 일부를 철수하기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구글의 회장이 최근의 CeBIT 기조연설에서 밝혔다시피 온라인 검열은 실패할 것입니다. 사실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하지 말라고 하면 꼭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지요, 하하. 그런데 이 ‘하지 말라고 하면 꼭 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라는 말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 마라, 라고 규제를 한다고 해서 꼭 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는 즉, 규제를 지키는 것은 결과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을 수 있다, 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이는 정부의 검열이 앞으로는 주체가 되지 않을 것이며 민간으로 그 검열권들이 넘어갈 것이다, 라는 의미를 내부에 함축적으로 담고 있으니 말입니다. 앞으로 사람들은 아마 법이나 어떤 당위성으로 인하여 표현을 자제하는 일은 점차적으로 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의 검열관이 되는 것이지요. 서로가 자신들이 선택한 행동에 대해서 판단하는 그런 사회가 도래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여겨봅니다. 정말로 책에서 말한 것 처럼 ‘검열자의 역할도 민주화된’ 것이지요.
3. 경제적 검열.
경제적 검열에 대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예는 스마트폰 갤럭시 S II에 관한 이야기를 들 수 있겠습니다. 어느 기사에서 보도한 바에 따르면 삼성의 광고대행사인 제일기획은 김 모씨가 리뷰한 갤럭시 S II의 단점 9가지에 관한 글이 명예훼손이라는 사유로 삭제를 요청했다고 되어있지요. 그런데 사실 이 기사만 가지고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김 모씨가 리뷰한 단점 9가지가 과연 객관적인지는 이 기사만 보고 판단하기 어렵지요. 그리고 파워블로거들에 관한 문제들도 빼놓을 수 없고 말이지요. 제 개인적인 사견을 먼저 밝히자면, 사실 저 김 모씨의 글은 잘 이해가 안가는 편입니다. 갤럭시 S II와 아트릭스를 비교하여 갤럭시 S II를 비판하고 있습니다만, 가장 먼저 단점으로 지적되는 디스플레이에서, 갤럭시 S II의 이전 모델인 갤럭시 S가 펜타일 방식을 채택하였을 때 많이 비판받은 적이 있는데 이번에는 그 펜타일 방식을 채택하지 않았다고 비판을 받고 있지요. 반면 펜타일 방식을 채택한 아트릭스는 상대적으로 뛰어난 것처럼 적혀있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는 일단 제 사견이며, 본 주제인 경제적 검열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광고대행사인 제일기획은 성급하게 반응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적법한 절차를 밟았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의견에 대해서 결과적으로 검열한 모습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지요. 물론 좋지 않은 소문이 퍼지게 되면 판매량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고, 그 소문의 출처가 소위 말하는 파워블로거라면 더욱 더 주의할 수밖에 없었다, 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만, 앞서도 말했다시피 앞으로의 검열은 개인과 개인간의 판단의 문제로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이 되며, 분명 얼마 지나지 않아서 반박하는 의견이 올라오고 논쟁이 일어났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결국 저 사건은 삼성이 파워블로거들을 초대하여 제대로 된 리뷰를 하기로 한 것으로 마무리 지어졌다고 합니다.
4. 미풍양속에 대한 검열 및 청소년 보호와 권력에 의한 검열
일전에 G20 정상회담이 있었지요. 그때 그 회담의 홍보포스터에 쥐 그림이 그려진 사건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 그림을 그려 넣은 대학 강사는 처벌을 받았는데, 검사는 법정에서 ‘우리 국민들과 아이들로부터 청사초롱과 번영에 관한 꿈을 강탈’ 한 것이 그 원인이라고 주장했지요. G20 방해의도가 숨어있다는 주장도 했었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 부분은 의문이 남습니다. 쥐 그림이 그려져 있다고 해서 과연 아이들의 번영에 관한 꿈을 뺐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과연 방해의도가 숨어져있었던 것일까요? 과연 쥐, 가 의도하는 상징의 의미가 저렇게 미풍양속을 해치는 의미만 있는지 갸웃거릴 수밖에 없지요. 우리나라 문화권에서 쥐는 일종의 번영의 상징으로도 해석이 되는 경우도 있으니 말입니다. 물론 청소년 보호에 대한 검열이나 미풍양속에 대한 검열이 꼭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포르노 등과 같은 성인 매체에 청소년들이 무분별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놓아두는 것은 글쎄요, 고개를 가로저을 수밖에 없지요. 청소년들에게 모든 정보를 열어두고 ‘자, 너희들이 알아서 판단하도록 해라’ 라고 한다면 과연 적합한 것일까요. 그러지 않아도 성에 대한 관심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사춘기에서 청소년들은 성인의 주민번호를 빌려서 포르노 사이트에 접속하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 말입니다. 그나마 그 장벽마저도 없어진다고 상상해보면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지요. 그런데 여기서 또 반대되는 사례가 있으니 이전의 MBC의 게임과 폭력성에 대한 뉴스데스크의 보도입니다. 기자는 PC방에서 컴퓨터의 전원을 모두 내리고는 이렇게 이야기하지요, 게임과 폭력성과 상관관계가 있다, 라고 말입니다. 정말 많이 다뤄진 이야기이니 간략하게만 이야기하자면 저 사례만으로는 게임과 청소년 폭력성과는 관계가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고 여겨집니다. 이를 근거로 청소년들을 위한다는 전제 하에 게임에 대한 검열을 강화할 수는 없지요. 최근 논란이 된 셧다운 제도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5. 종교로 인한 검열과 소수자 집단.
고등학교에 재학할 때 어느 친구가 저에게 살만 루시디의 악마의 시, 를 보여주었습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이슬람교에 대하여 상당한 비판을 가하지요. 고교 재학시절에는 이 책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잘 몰랐고, 왠지 제목이 악마의 시, 라기에 무언가 ‘있어 보이는’ 느낌에 조금 읽어내려 갔습니다만 뒤에 이 책에 얽힌 이야기들을 읽고 한편으로는 섬찟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현재도 사형 선고가 내려져 있지요. 물론 지금에 이르러서는 사형 선고는 유야무야되어있지만 말입니다. 이는 종교로 인한 검열의 사례로 충분히 볼 수 있겠지요. 또한 이 책에도 제시되어 있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영화와 같은 매체나 방송 매체, 그리고 예술의 표현의 자유와 종교의 대립은 이 뿐만이 아닙니다. 이전에 이단, 이라는 화가가 자신의 누드와 불교 문화재를 오버랩하여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 때문에 조계종의 항의를 받기도 하였고, 인기 소설이었던 다빈치 코드에 대해서는 기독교계의 항의가 거세었지요. 이전에 텔레비전에서 대형 교회의 세습에 관한 문제를 방송한 적이 있었던가요, 그런 사건에 대해서도 항의가 끊이지 않습니다. 소수자 집단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래도 소수민족에 관한 문제는 Melting pot이라고 불리는 외국의 사례들에 비하면 적겠지만 외국인 근로자들에 관한 문제, 동성연애자들에 대한 문제 등과 같이 소수집단에 연관된 문제가 없다고 할 수는 없는 실정입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정말 미묘한 문제라 한 쪽의 검열을 정당화하면 다른 쪽의 권리가 침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모든 상황을 고려해보고 다시금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겠습니다.
공중 보건으로 인한 검열 부분도 있지만 그 부분은 줄이겠습니다. 담배와 같은 경우가 그런 검열의 사례라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검열에 관한 사례들을 살펴보면 어느 문제든지 모두 미묘하고 경계에 걸쳐있다고 여겨집니다. 또한 이 검열에 대한 생각도 앞으로 자라면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이는 표현의 자유가 얼마나 허용되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로 넘어가기도 할 것이고 말이지요. 어려운 문제이지만 전혀 생각을 하지 않을 수도 없지요. 이런 예들을 볼 때 이 책의 의의는 이런 것을 다시금 떠올리게 하는 것에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p. s. 솔직히 글을 쓰는 것에 의욕이 좀 없어서 고생했네요.
신간평가단 마지막 도서였는데 홀가분한 기분이 들어야 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