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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평전 - 실존과 구원의 글쓰기 ㅣ 서강인문정신 16
이주동 지음 / 소나무 / 2012년 2월
평점 :
카프카 평전.
만약 우리가 읽는 책이 주먹으로 쳐서 우리의 두뇌를 일개우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책을 읽겠는가? 자네가 쓴 대로 책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맙소사, 만약 책이 전혀 없다고 해도 우리는 행복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그런 책은, 필요하다면 우리 스스로 쓸 수 있을 거야.
지금은 고인이 된 오규원 시인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특별한 경험이 있습니다. 물론 그 분 생전에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저 혼자만의 일방적인 경험에 지나지 않지만, 우연히 고인의 무덤가에 찾아가본 적이 있습니다. 꼭 들러야겠다, 라고 찾아가본 것은 아니고, 사진을 찍으러 강화도 전등사에 들렀다가 고인의 장례식이 수목장으로 치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고는 잠깐 들렀었지요. 시인의 마지막 시는 제자의 손바닥에 손톱으로 꼼꼼하게 적었던 4행시였고, 그 4행시의 마지막 행인 ‘나는 나무 속에서 자 본다’ 대로 시인은 전등사 어귀의 나무와 더불어 잠이 들었습니다. 제가 들렀던 때는 장례가 치러진 후 그리 오랜 시일이 지나지 않았던 때였기에 더욱더 저는 숙연한 기분에 휩싸였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터벅터벅 전등사로 걸어온 저에게 떠오르는 생각은 ‘인생무상’ 과 같은 생각이 아니라 고인이 된 시인의 시 ‘프란츠 카프카’ 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프란츠 카프카, 라는 제목을 달고 있는 오규원 시인의 시는 정말 특이합니다. 여러 학자들과 문학가들의 이름을 나열해두고 그들에게 가격을 매깁니다. 그리고 시인은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 와 함께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라는 이름이 붙은 커피를 마시지요. 사상가들은 비싼 가격(이라고 해도 1200원)이 붙어있었지만 여러 문학가들, 소설이나 시를 쓴 사람들은 싼 가격(800원)이 붙어있습니다. 아니, 카프카가 800원이라구? 전등사로 내려오면서 든 생각은 아이러니하게도 도대체 왜 카프카를 800원으로 설정했는가, 였습니다. 사실 지금 와서는 별로 그렇게까지 깊게 생각해야 할 주제는 아닌 것 같지만 이상하게도 그때는 그 생각에 집착했었습니다. 문학가들이 폄하 받는 현실을 그린 것이다, 라는 해석에서부터 시인이 그냥 카프카가 마음에 들었다는 건가, 혹은 카프카와 같은 길을 걷겠다는 의지인건가, 등과 같은 해석에까지 말이지요.
카프카라는 이름은 워낙 특이하기에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이전에 무라카미 하루키의 ‘해변의 카프카’ 와 같은 작품을 보면서 저는,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 본인이 카프카의 영향을 받았다고 자인을 하더라도, 자신의 작품이 독자들의 뇌리에 바로 남도록 하기 위해서 저런 이름을 붙인 것 아닌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였지요. 이 카프카라는 이름은 ‘까마귀’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던가요, 그러고 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카프카의 이미지와 정말 잘 들어맞는 이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왠지 혼자서 노는 것 같고, 왠지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그런 이미지 말입니다. 제가 읽은 그의 작품인 ‘변신’, ‘성’ 을 보면 정말 알 수 없는 불안과 뿌리 깊은 근원적인 고독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품들이 거의 다 미완이라는 점도 거들었지요. 그래서 제 속의 카프카에 대한 이미지는 항상 어딘가 도망치고, 불안해하는 그런 이미지였습니다.
이 책 ‘카프카 평전’ 은 이런 카프카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서입니다. 다른 평전들과 마찬가지로 유년기, 청년기, 장년기를 거쳐서 말년에 죽음에 이르기까지를 서술하고 있지만, 저자가 카프카를 서술하는 태도는 다른 평전들에 비하면 상당히 열정적입니다. 데리다 평전, 에서처럼 건조하지도 않고, 다윈 평전, 에서처럼 객관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평전으로서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닌가, 라는 의문을 가져올 수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이 책에 있어서는 저자의 카프카에 대한 열정적인 태도가 매우 큰 장점으로 작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열정적이고 카프카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습니다만 그의 애정은 모두 이유가 있으며, 책 내에서 자신이 카프카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근거를 하나하나씩 논리를 펼쳐나가듯이 들고 있습니다. 근거가 있는 애정은 그 애정의 깊이를 더해줍니다. 저자가 그리는 책 속에서의 카프카는 어린 시절 권위주의적인 아버지로 인하여 마음의 상처를 입었지만, 그 마음의 상처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마음에 상처를 입히도록 놓아두지는 않았던 사람입니다. 늘 자신보다 안 좋은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미소를 베풀고 친근하게 대했던 사람으로 그려지지요. 주변의 다른 작가들이 민족주의의 흐름을 타고 있을 때 혼자서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던 관찰자였으며 글 쓰는 것만이 그 자신의 구원이었던 세속의 수도사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카프카에 대해서 균형적인 시각을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분명 카프카는 스스로의 연애에 있어서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였고, 그로 인하여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들에게 상처를 입혔습니다. 이 책에서는 그 모습을 편지와 서술을 통해서 가감 없이 밝히고 있지요. 그리고 카프카의 대표작들을 읽지 않은 사람들을 배려하여 그 내부에 주요 작품들의 서술배경과 해설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수많은 장점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책의 저런 장점들의 역할은 카프카의 모습을 좀 더 밝게 그려내어 독자들이 다가가기 쉽게 하는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자면, 예쁜 연예인들이 드라마를 촬영할 때 그 연예인들의 얼굴 아래에 반사판을 대어서 더 화사하게 나오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연예인들이 실물이 못생겨서 그러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연예인들이 다리가 짧아서 포토샵으로 후보정을 할까요? 그렇지는 않겠지요. 물론 예외도 존재할 수 있겠지만 보통은 연예인들을 실제로 보면 정말 예쁘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책도 마찬가지라서, 저런 책의 서술상의 장점들은 반사판에 지나지 않습니다. 카프카 본인의 이야기는 저런 장점들과는 별개로 마치 무한한 심연을 쳐다보고 있듯이 사람을 끌어당깁니다. 아마 그 이유는 카프카의 생 자체가 우리 인간들이 번민하고 방황하는 그런 ‘실존’ 적인 문제를 안고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추측해봅니다.
프란츠 카프카의 아버지인 헤르만은 매우 권위주의적이었고, 아들이 자신의 뜻에 따라서 행동하기를 바랐습니다. 물론 헤르만도 자신이 권위주의적이었다는 비판에 쉽게 변명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중산층으로나마 살아가려면, 독일과 체코 사이에 끼인 유대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얕보여서는 안 되었다는 점 등을 내세울 수 있겠지요. 그런 헤르만의 눈에는 아들의 유약함이 유난히 돋보였을 거라는 것을 추측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들 카프카에게는 그런 권위주의는 일종의 독이었고, 어린 시절부터 서서히 입기 시작한 상처는 김나지움을 거친 후, 이윽고 대학의 전공을 선택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이런 권위주의의 그림자만이 카프카를 괴롭힌 것은 아닙니다. 카프카의 생을 괴롭혔던 것은 어찌 보면 사랑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입니다. 그에게 영감을 주었던 펠리스 바우어와는 2번이나 약혼하고 또 파혼하는 과정을 거쳐서 이윽고 완전히 헤어져버렸고, 그 후에도 그의 사랑은 여정을 계속하여 율리 보리체크, 밀레나 폴락을 거쳐서 도라 디아만트를 마지막 종착역으로 삼습니다. 또한 건강문제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를 죽음에까지 몰아넣은 것은 결핵이었지요.
하지만 저 모든 어려움을 뒤로 하고, 카프카는 글을 써내려갑니다. 아버지의 권위주의에 대한 성찰을 바탕으로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라는 원고를 쓰는가 한편, 펠리스 바우어와의 사랑에 빠져있을때는 ‘실종자’ 나 ‘변신’ 과 같은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남깁니다. 그녀와 파혼했을때는 그 아픔을 극복하고 ‘소송’ 과 같은 작품을 남기지요. 그를 괴롭히던 모든 외재적인 상황들, 현실의 비통함은 그에게 투영되어지고, 그 투영된 상은 잘 갈무리되어 이윽고 글쓰기를 통하여 내부에 빛으로 집약됩니다. 실존을 인간 존재 개개인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경험으로 정의한다면, 카프카에게 있어서 글쓰기야말로 그 자신의 실존을 유지시키는 수단이었습니다. 외부에서부터 던져진 수많은 위기들을 극복해내고, 거기에 더불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생생한 경험은 카프카에게 있어서는 오직 글쓰기뿐이었던 것이지요. 이런 맥락에서 생각했을 때는 앞서 조금 언급했었던 카프카의 연애에 있어서 우유부단한 면모와 같은 단점들에 대해서 면죄부를 줄 수 있을 듯 합니다. 그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 으로 있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은 결혼도 아니고 사랑도 아니었고 오직 글쓰기뿐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글쓰기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또한 이러한 시각을 통하여 면죄부뿐만 아니라 카프카가 그 스스로에게 죄책감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는 것들에 대한 더 깊은 이해도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다. 사랑하는 상대가 있어주기에 행복하지만, 그 상대로서는 도저히 ‘글’로서의 카프카 자신을 이해할 수도 없거니와, 그 상대에게 ‘글’로서의 자신을 이해하라고 강요하는 것이 얼마나 나쁜 일인지, 그 딜레마를 카프카 본인에 내재된 따뜻한 심성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다윈 평전, 과 함께 이 카프카 평전, 을 함께 읽다보면 묘한 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특히 결혼 부분이 대비가 되는데, 둘 다 결혼에 대해서 처음에는 탐탁치 않아했다는 점은 동일합니다. 카프카는 자신이 과연 글쓰기를 계속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워했고 다윈은 과연 결혼 후에도 이렇게 연구를 할 수 있을까 고민했었지요. 그런데 이후의 대처는 완전히 다릅니다. 찰스는 정말 그답게도 결혼의 장점과 단점을 열거해서는 끝내 결혼을 하자고 결론을 내리고는 그 후에는 그대로 그 결정을 밀고 나갑니다. 그런데 카프카는 다가설 듯 하다가도 다시금 뒤로 물러서고, 그랬다가도 다시금 상대방에게 한 발 내딛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말이지요. 아마 카프카의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사랑과 안정성에 대한 갈망과 자신의 실존과 관련된 글쓰기의 문제가 대립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왜 카프카는 다윈처럼 저렇게 단칼에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을까요? 장단점을 따져서 뭐가 더 중요한지를 깨달았으면 쉽게 내릴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해결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해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카프카에게 중요한 것은 오직 글쓰기였지만, 그렇다고 사랑과 결혼에서 부여되는 안정감 등을 포기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기 때문이지요. 누구나 자신이 행복해지기를 바랍니다. 카프카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카프카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앞서도 말했다시피 ‘그 자신’ 이기에 행복으로 이끄는 수단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그 자신’ 스스로 행복할 수 있다면 남자가 왜 필요하고 여자가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런 사람이야말로 독생자라거나 제 1원인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겠지요. 하지만 카프카는 우리와 같은 실존적 불안을 떠안은 인간이었기에, 그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어린 시절에 받았던 억압으로부터 자신을 이끌어줄 사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그의 전생애를 걸쳐서 어떻게든지 ‘그 자신’ 으로서의 글쓰기와 결혼을 조화시키려 했었고, 그렇기에 저렇게 갈팡질팡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지요. 앞서도 말했다시피 ‘글’ 로서의 자신을 상대방에게 이해시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카프카가 상대방들과 편지 교환을 열정적으로 했지만 막상 만나면 수줍어했다는 점, 그리고 그런 수줍음을 상대방들이 어색해 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 수 있습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따뜻한 육체를 가진 존재를 앞에 두고는, 그 존재보다도 그 존재의 ‘글쓰기’ 를 바라보아달라니, 상대방도 피와 살을 가진 존재인데 말이지요. 그러면 똑같이 ‘글쓰기’ 가 존재 자체인 상대를 만나면 되지 않겠는가, 라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카프카는 자신과 똑같은 상대를 결국 만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였으며, 어쩌면 설령 그런 상대를 만나면 고독함이 두 배로 늘어날 뿐 전혀 행복하지는 못했으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국 카프카는 다윈과 달리 실존적인 고통을 안고 평생을 살아갈 운명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꽤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정신분석을 한 번 받아본 적이 있습니다. 분석가의 남는 시간에 잠깐 받은 것이기도 하고, 아무래도 첫 면담(이자 마지막 면담이었기에)이라서 저 또한 방어기제 때문에 제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를 거의 털어놓지 않아서 그다지 신뢰도가 높은 편은 아닐 것 같지만, 분석가가 이야기한 것 중에 하나가 제가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사물들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일도 마치 제 3자의 일처럼 멀리서 바라보고 있다고 말이지요. 최대한 객관적으로 감정이 개입되지 않게 말입니다. 그래서 저도 그 말에 동의를 했었습니다. 감정이 개입되면 상대방을 바르게 보기가 힘들고 설령 상대가 올바른 말을 하더라도 그 말을 제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라고 말하면서 말이지요. 그러자 분석가는 제가 ‘두려움’ 때문에 사물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그저 감정들이 두렵기 때문에 감정에 휩쓸릴까봐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는 거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덧붙이기를,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감정을 인정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하였지요. 우습게도 그때 떠오른 생각도 바로 카프카의 생각이었습니다. 카프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면 과연 무슨 말을 했을까, 라고. 내가 지금 안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 계층적 불안들을 그저 두려움, 이라는 말로 뭉뚱그려서 이야기할 수 있는 거냐고. 그리고 집에 돌아와 카프카의 ‘성’ 을 읽었습니다. 마치 아무도 알아주지 못하는 내 마음을 오직 카프카만이 이해해줄 수 있다고 여긴 것 처럼 말이지요. 그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저는 여전히 불안합니다. 앞으로 내 삶이 어떻게 될지, 와 같은 문제에서부터 권위주의에 대한 문제, 그리고 사회에 대한 불안 들은 더 커졌으면 더 커졌지 조금도 해소되지 않았지요. 그리고 여전히 카프카를 꺼내 읽고 있습니다. 시대를 너무 앞서 갔기에 생존 당시에는 그리 인기를 얻지 못했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모든 실존적 불안을 안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그의 작품을 읽고 있으면, 누군가 나의 불안을 함께 하고 있구나, 내가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이 어딘가 잘못된 것이 아니며,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나 다 겪을 수 있는 일이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커졌던 불안을 들어서 잠깐 옆에다가 놓아둡니다. 이 때 카프카의 글은 불안을 가지고 있던 ‘나’ 의 의식과 융합되어 이윽고 내가 카프카가 되기도 하고, 카프카가 나인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나'도, 그리고 '나'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사람들도 행복해지기를 원하겠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것입니다. 누구나 고통을 한아름씩 안고 살아갑니다. 등 뒤에 매달린 문제들은 사소한 것에서 부터 이번 선거 결과에 이르기까지 다양합니다. 그런 고통들이 과연 모두 해결될 수 있을까요? 이 불안이 과연 모두 해소될 수 있을까요? 아마 힘들겠지요. 하지만 비록 이런 불안들은 카프카가 그의 소설들을 대부분 미완성으로 남긴 것처럼 끝내 해소되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한 가지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결국 제자리에 돌아오겠지만, 사랑에 빠진 순간에는 이런 불안들을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지요. 그러니깐 적어도 그를 읽는 순간은, 그의 글들과 사랑에 빠진 순간에는 그런 것은 어찌 되었든 좋다, 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책, 카프카 평전, 은 그런 카프카에 대한 사랑고백이며, 이 글은 그런 카프카를 좋아한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또한 이 글은 여러분에게 공개적으로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카프카를 좋아하세요? 혹은 나를, 좋아하세요?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큰 고통을 가져다주는 재앙 같은 우리가 우리 자신보다 더 사랑했던 누군가의 죽음과 같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숲 속으로 추방된 것 같은, 자살과 같은 느낌을 주는 그런 책이지. 책이란 우리 마음속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해. 나는 그렇게 생각해.
p. s. 회색 부분은 프란츠 카프카의 편지에서 인용.
(불안과 고통과 더불어 살아가는 카프카같은) 나를, (혹은 여러분을) 좋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