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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의 탄생
송호근 지음 / 민음사 / 2011년 11월
평점 :
품절
인민의 탄생.
1.
일전에 막을 내린 인기가 드높던 ‘뿌리 깊은 나무’ 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워낙 유명한 드라마라서 줄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의미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혹시 못 보신 분을 위해서 잠깐 한 줄로 요약하여서 이야기하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는데 어떤 고난을 겪었는가, 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이야 누구나 ‘한글’ 이라는 이름으로 훈민정음을 잘 이용하고 있지만 그 당시 시대, 그러니깐 세종대왕이 갓 훈민정음을 창제했을 당시만 하더라도 상당히 천대받던 문자였지요.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이야 훈민정음의 서문에서 볼 수 있듯이 우리말과 중국의 문자가 서로 맞지 아니하여 백성들이 널리 알 수 있도록 만들었지만 사대부들의 반대와 지도부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의 의식부족으로 실제로 한글이 조금씩 이용되게 된 시기는 반포 후 100년이 지난 뒤였고, 실제로 우리가 오늘날에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은 현대 한글의 아버지인 주시경 선생이 연구를 거듭하고 나서였지요. 하지만 이런 역사적 사실을 생각해보더라도 어쨌든 저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 는 드라마적인 과장이 섞여있기도 하지만 제법 준수하게 한글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동시에 어떻게 받아들여지지 않는가를 잘 드러내었던 수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뿌리 깊은 나무에서 제가 감명 깊게 본 부분은 바로 세종과 세종의 한글 반포를 막으려는 세력(극중에서는 밀본이라고 이름 붙여져있습니다만)의 수장인 정기준(극중에서는 정도전의 동생의 아들)과의 마지막 대화였습니다. 정기준은 세종에게 죽어가는 몸을 이끌고 겨우 말합니다. ‘그대가 준 문자를 통해서 백성은 지혜를 가지게 되겠지만 그만큼 더 지배층에게 쉽게 속게 될 것이다.’ 라고 말이지요. 세종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크게 웃으면서 정기준의 말에 반박합니다. ‘때로는 백성들은 질 것이고 때로는 이길 것이나 그것은 상관없다. 그것이 역사다. 네 말 대로 백성들이 속더라도 결국에는 글자가 가진 지혜와 더불어 싸우고 또 싸워나갈것이다’ 라고 말이지요. 정말 감명깊게 본 장면이었습니다만 볼 당시에는 감명깊다, 라는 생각만 했을 뿐 어떤 의미인지 깊게 생각해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 ‘인민의 탄생 - 공론장의 구조 변동’ 을 읽으면서 그 부분이 다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감히 말하건대 저 드라마의 마지막 대사가 이 책의 모든 내용을 포괄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2.
처음 이 책의 ‘책머리에’ 부분과 ‘서론’ 부분을 읽었을 때에는 기대가 상당히 컸습니다. 내용 자체도 흥미로웠으며 어떤 방식으로 역사와 사회과학을 교차시켜서 풀어나갈 것인지 기대가 되었었지요. 자신만만하게 저자는 이야기합니다. 서양산 이론에서 우리나라는 극복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과거를 죽였다고 말이지요. 그래서 저자는 근대가 과연 조선시대에서 어떻게 기원하였는지를 제대로 밝히기 위해서 탐색 여행을 펼치겠다고 합니다. 서론 중간 부분에 저자가 유길준의 자취를 더듬어 보았다고 언급하기에 ‘아, 저자는 마치 여행기처럼 유길준의 생을 더듬어 자연스레 근대의 인민의 탄생을 밝히려나보다.’ 라는 생각도 했었고 말이지요. 하지만 그런 저의 기대는 뒤의 ‘개화기 인민’부터 시작되는 챕터들을 하나씩 읽어나가면서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드는 생각은 저자에 대한 의구심이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이렇게 자신만만한 걸까, 라는 생각 말이지요. 사실 저자가 하고자 하는 연구는 두 권의 책으로 나누어져서 발간된다고 하여 실망감을 조금 덜어보려고 했었지만, 각각의 권에서 다루는 것이 '근대적 인민의 탄생 과정' 과 '인민의 시민으로의 전환 과정' 이니 이 책의 논리 전개나 나중에 나올 책의 논리 전개가 크게 차이가 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저자가 책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수많은 이론들을 적용시키지만) 결론적으로 하나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글을 해독할 수 있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사회변혁의 맹아가 틔워졌다.’ 라고 말이지요. 이 결론을 얻기 위해서 수많은 사료를 가져오지만, 중간에 저자는 기존 역사 연구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거시사와 미시사가 제대로 통합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합니다. 행간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대로 된 역사 연구가 지금껏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제 이르러 자신이 그 역할을 맡아서 연구를 하고 있다, 라고 말이지요. 하지만 이런 자신만만함에 비하여 책을 읽는 사람들을 이끄는 카리스마는 부족합니다. 그것은 그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그다지 독창적일 것도 없는 내용이며 대학에서 국사를 전공하는 학생들도 짐작할만한 이야기이기 때문이겠지요. 다른 나라와 비교해봐도 판단할 수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학생들이 제시할 수 있는 근거에 비해서 훨씬 풍부한 내용으로 책이 채워져 있지만 그 뿐입니다. 설령 저자의 주장이 독창적이고, 더 나아가서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난 특수한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라고 하더라도 책 내부에 이미 모순이 심겨져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인민의 탄생을 가져온 것이 책 읽는 인민의 탄생, 곧 문해인민의 탄생 때문이라면 왜 책에서는 외국의 예를 들어서 그들도 일정 시기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독해’ 라는 능력이 배양되지 못했다, 라고 이야기할까요?
또한 한 가지 꼭 언급하여야 할 것이 있습니다. 저자는 ‘책 머리에’에서 밝혔다시피 서양에서 들어온 사회과학의 무분별한 적용이 우리나라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막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주장하기 위해서는 소위 말하는 서양산 사회과학이 아닌 다른 준거틀을 사용하여서 우리나라의 근대를 분석하는 게 옳겠지요. 그러나 책의 전반적인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버마스부터 시작해서 베네딕트 앤더슨, 미셸 푸코 등 담론장 혹은 공론장과 관련된 서양 학자들을 모아서 그들의 이론으로 자신의 주장을 강화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는 상당한 모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서양산 사회과학을 벗어나기 위해서 쓴 책에 서양산 사회과학으로 주장을 펼친다니 말입니다.
3.
사실 이 책이 이런 한계, 혹은 모순점을 가지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근대라는 개념과 인민이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서구에서 들어온 것이기 때문이지요. 서구에서 들어온 개념을 가지고 그 개념에 맞추어 우리나라의 ‘근대’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를 파악하겠다는데 서구의 이론이 적용되지 않으면 다르게 해석할 방법이 없습니다. 애초에 야심차게 말했던 서양산 사회과학이 찢어놓은 한국 사회를 제대로 분석해내겠다는 논지는 처음부터 내부에 오류를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어떻게 분석되어지는 게 옳을까요? 물론 이렇게 비판을 한다고 해서 그러면 근대가 어떻게 맹아를 틔웠는지 알기 위해서 유교적 틀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내부에 속해 있는 사람은 외부를 보지 못하는 법이며, 좀 더 자세히 수학적으로 부연한다면 A와 B라는 두 집합이 있고, 집합 사이에 B는 A라는 집합의 부분집합이라는 과계가 있다고 할 때, B로 A의 모든 면을 판단하는 것은 그르다고 할 수 있겠지요. 마찬가지로 이미 15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당시 조선이라는 집합에 포함되어있는 유교라는 집합을 가지고 조선을 분석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답은 두 가지입니다. 처음부터 주어진 명제 ‘서양산 사회과학이 무분별하게 적용되었다’ 가 잘못되었다고 여기고 서양산 사회과학을 적용하여 우리나라에서 백성들이 어떻게 근대의 인민으로 탄생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던가, 아예 새로운 틀을 찾는 것이 옳겠습니다. 새로운 틀은 서양산 사회과학적 이론들처럼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이론이어서는 안 되며 조선의 유교처럼 내부에 이미 속해있던 틀도 안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어느 틀이든 소위 말하는 서양산 학문의 영향을 아예 안 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근대화, 혹은 현대화는 일종의 서양화, 와 동일시 된지 오래며, 이런 현상은 우리뿐만 아니라 주변 대부분의 국가에서 모두 일어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주변 국가들의 예를 끌어들여오면서 동등한 위치에서 비교하는 것이 그나마 최상의 방법으로 여겨집니다. 이 책의 중간부분에 보면 베트남이나 일본을 비교대상으로 가져와서 함께 분석하는 부분이 있지만 아쉽게도 그 부분에 그치고 맙니다. 그러고보면 사실 정말 이 책에서 필요한 근본적인 것은 ‘무엇이 근대인가?’ 라는 질문에 먼저 엄밀히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이미 ‘근대’ 라는 개념을 서양에서 들어온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니 내용이 제대로 진행될 수가 없겠지요. 뿌리깊은 나무, 를 앞서 언급하였지요. 세종이 말했습니다. 백성은 지고 또 지겠지만 문자가 가진 지혜와 더불어 싸워나갈 것이라고. 제가 이 글의 앞부분에서 이야기했던가요, 저 대사 안에 이 책의 모든 내용이 다 포괄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고 말입니다. 저 대사야말로 근대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근대를 살아가는 인민이 어떤 존재인지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았던, 그리고 살아가고 있는 근대는, 그리고 현대는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 등과 같은 어려운 말은 모두 옆으로 제쳐두고, 우리가 우리의 말과 함께 편지든, 블로그든, 트위터든 어떠한 것이든지 자유로이 우리의 말을 쓰며 싸워나가는 것에서부터 시작해나가는 시대, 라고 말이지요.

p. s. 아이구 추워죽겠네요..
p. s. 2 위르겐 하버마스의 저서 중에도 이 책의 부제와 똑같은 '공론장의 구조변동' 이 있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