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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평점 :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최근에 신영복씨의 ‘강의’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동양의 고전을 주로 주제로 삼았던 그 책에서 신영복씨는 시경을 예로 들면서 소설을 읽는 것도 좋지만, 시를 읽는 것도 소설을 읽는 것 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여러 가지를 느끼게 해준다고 하였었지요. 같은 주제를 이야기하는데 있어 소설이 여러 장의 지면이 필요하다면 시는 손바닥만한 종이에다 함축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 저도 시를 가끔씩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중학교, 고등학교 교과과정을 제외한다면 그 이후에 시를 찾아 읽지 않는 이상은 접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도 마찬가지라서 주로 서점에서 서서, 혹은 문집을 도서관에서 읽을 때 같이 수록되어있는 시를 읽는 경우가 많았고, 그 외에 주변에서 정말 추천하는 시 정도만 읽었을 따름이지요. 물론 그렇게 시를 읽더라도 시의 감동이 어디 가는 것은 아니라서 짠하고 좋았었지만, 그 감동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다른 소설책이나 인문학책을 찾아 읽고 있었습니다. 삐딱하게 생각해보면 시가 감성을 자극해준다지만, 그 감성이라는 것은 너무나 모호한 것이라 어디를 어떻게 만지고 접근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특히나 소설에 비하면 시는 그 특성이 너무나 두드러지지요. 자의적 언어 사용은 모호함을 부추기고 각종 시적 허용은 그 의미를 더욱 아우라에 둘러싸이게 만듭니다. 그것은 분명히 존재하나 마치 실체가 모호한 유령과도 같아서 오래지 않아서 이성에 그 자리를 넘겨주게 됩니다. 이성만으로는 ‘어떻게든’ 살 수 있지만, 비록 그 삶이 팍팍할지라도, 감성만으로는 ‘현실적인 삶을’ 살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인간은 그 태생이 본질적으로 욕심쟁이라서 둘 중 어느 하나만, 특히 이성만 누리며 사는 것을 거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 책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은 저자 강신주의 전작인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과 마찬가지로 인간이 가진 두 측면, 이성과 감성을 어떻게 조화시키는가, 라는 일종의 욕심을 붙잡고 고민한 결과가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인간이 자신의 이성과 감성을 조화시키려는 이유는, 이미 앞 문단에 인간은 욕심쟁이이기 때문이라는 답을 적어둔 바 있습니다. 그러면 그 욕심의 근원은 무엇이기에 이렇게 책을 쓸 정도로 추구를 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감히 말하건대, 행복해지기 위해서입니다. 자, 그러면 행복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너무 막연하니까 좀 더 줄여보겠습니다. 우리가 어떤 상태라면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의 기본 3대 욕구가 충족된다면 행복해지는 걸까요? 아닙니다. 3대 욕구가 충족된다고 해도 또 다른 새로운 욕구가 고개를 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새로운 욕구를 또 충족시키면 행복해지는 걸까요? 글쎄요, 애초에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잠깐 제쳐놓는다고 하더라도 모든 욕구의 끝은 죽음, 자기 파멸과 같은 행복과는 거리가 아주 먼 단어로 귀결됩니다. 그 이유는 쉽게 말하면 욕구의 근원은 결핍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면 도대체 행복해지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사실 이 질문의 답은 어쩌면 쉬울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일시적으로라도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들을 포착해서 그 근원을 파악해보면 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언제 행복감을 느낄까요? 아마 다른 분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밥 먹을 때 행복해졌지요. 하지만 이보다 더 행복할 때가 있었으니, 바로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을 때 이었죠.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버스를 타고 가다가 잠깐 잠이 들었는데 머리를 제 어깨에 기대는 겁니다. 그럴 때 저는 정말 행복했었습니다. 물론 이성과의 관계에서만 이런 행복을 느낀 것은 아닙니다. 친한 친구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눌 때에도 정말 행복했습니다. 단순히 인간관계에서만 행복을 느낀 것은 아니었습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들을 때, 책을 읽을 때.. 그 수많은 행위들이 저에게 비록 조그만 행복일지라도 제 마음을 채워주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더 생각을 진전시켜보면, 음악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연주하거나 부른 것들입니다. 책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쓴 글이지요. 음식도 더할 나위 없으며 특히 인간관계는 타자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절대로 성립되지 않는 것이지요. 그러면 우리는 행복에 대한 질문에 답을 하나 내릴 수 있겠습니다. 행복은 타자와의 관계에 달린 것이다, 라는 답을 말이지요. 물론 위의 답이 정확한 것인지는 잘 모릅니다. 무책임한 말일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굳이 변명하라면 60억의 사람이 있다면 60억의 행복에 대한 정의가 있다는 말로 대신하겠습니다. 이 책 ‘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에서도 비슷한 말을 합니다. ‘그들이 남긴 시나 철학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여겨 외우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여러분이 느끼고 고민했던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도록 노력하세요’ 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행복에 대해서는 이 책을 쓴 강신주씨나 저나 비슷한 생각을 한 듯 합니다. 그것도 그럴 것이 강신주씨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사유하며 몸부림치던 14명의 철학자와 14명의 시인을 불러들였으니깐 말이지요. 그가 불러낸 철학자들은 보드리야르, 바르트, 마르크스 등등 굳이 설명이 필요없을정도로 자신들의 사상을 갈고 닦아서 이윽고 보석에 이를 정도로 단련시켜왔던 철학자들이며, 그가 불러낸 시인들은 한용운, 백석, 이성복 등등 우리 나라 문학계를 주름잡았던 자신 나름대로 스스로를 표현해왔던 아름다운 시인들입니다.
그런데 저는 책에서 다룬 철학자들과 시인들 중에 한 명씩에게 주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김종삼과 블랑쇼입니다. 저는 어쩌면 이 책의 모든 알맹이는 이 김종삼과 블랑쇼를 다루는 챕터에 집약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품게 되었는데, 그렇게 생각하게 된 이유는 ‘죽음에 직면했을 때에만 삶도 분명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이 문장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피상적으로 보면 별 것 아닌 당연한 사실을 서술해놓은 문장이지만 조금만 파고 들어가면 많은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사실은 죽음은 삶과 겹쳐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 문장은 죽음의 반대편으로서 삶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특질을 드러내기 위해서 죽음을 가져온 것이지요. 무라카미 하루키가 여기에 대해서 ‘상실의 시대’에서 멋들어지게 적어두었습니다. ‘죽음은 삶의 대극으로서가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라고 말이지요. 이 것을 삶과 죽음이 이루는, 서로가 배타적이지 않으나 인접해 있고 동시에 떨어져 있는 그 관계에 집중해서 그 범위를 넓혀보면 나 자신과 ‘타인’ 이 이루는 관계가 바로 그것이 되겠습니다. 나는 타인과 다른 존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서로는 서로의 일부입니다. 타인과 내가 이루는 관계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 를 한다고 할 수 있으며 역설적으로 타인이 있기 때문에 그 타인과 구별되는 특질을 가진 ‘나’ 라는 존재가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 타인의 범위를 넓혀서 타자로 보아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러면 블랑쇼나 김종삼은, 더 나아가서 책에서 언급된 수많은 철학자들은 저 타인과 내가 이루는 관계에서 무엇을 깨닫고 싶은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게 됩니다. 여기서 이 책에서는 블랑쇼의 말을 인용합니다. ‘죽음으로 존재에 이른다’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이 문장은 다른 수많은 경구들이 그렇듯이 그 속에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합니다. 책에 따르면 이는 결과적으로 언어의 한계, 생생한 정물을 포착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를 드러내는 동시에 생생한 존재를 드러내는 언어의 기능을 드러낸 말이라고 하지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타자는 나의 존재를 드러내는데 필수적인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타자가 그 스스로가 덩그러니 놓여있고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 나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더 이상 타자가 아니게 됩니다. 즉, 타자는 나와의 관계를 전제로 했을 때 쓰일 수 있는 말이라는 이야기지요. 제가 앞에서 서로가 서로의 일부이다, 라는 말도 그런 의미에서 쓴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관계를 맺는데 필요한 것은 작용입니다. 언어든, 비언어적인 행위든, 혹은 일방적인 정동이든, 사유든 그 어떤 것이든 말입니다. 즉, 블랑쇼나 김종삼시인은 이 책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언어의 기능과 그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과 함께 타자와 나의 관계 사이에서 일어나는 작용으로 존재를 가두고 죽여야만 (그 존재를 의식에 내가 인지할 수 있게 포착하였을 때) 존재에 이르는 작용(인식에 이르는) 자체의 불완전성을 노래한 것입니다. (애초에 인식할 수 있는 것만을 인지하였기 때문에 불완전 할 수밖에 없지요.) 마치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논고의 마지막 문장을 떠올리게 하는 이 결론은 비단 블랑쇼 - 김종삼의 관계에 그치지 않고 이 책에서 다루는 모든 철학자 - 시인의 관계에 적용됩니다. 그리고 이 관계에서는 철학과 시는 각각이 담당하는 이성이나 감성과 같은 영역을 뛰어넘고 서로를 보완합니다.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성과 감성을 함께 아우르는 이런 작업이 쉬울 리 없습니다. 그 사이에는 수많은 오류와 함정이 존재하는 법이지요. 원래 행복에 이르는 길은 가시덤불을 넘고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는 길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이 책에서도 수많은 함정을 피하고 가시를 피해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 있습니다. 먼저 아쉬운 점은 시인의 시를 너무 적게 소개하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 시인의 시를 함께 모두 찾아 읽으면 좋겠지만 그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의심을 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미리 철학을 준비해두고 그 철학에 맞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비슷하게 해석할 수 있는 시를 골라서 주제를 풀어나갔다고 말이지요. 이런 의심을 풀기 위해서는 시가 더 많이 수록되었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당연히 철학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미리 시를 골라놓고 입맛대로 철학을 뽑은 것 아닌가, 하는 점도 제기할 수 있고 말입니다. 사실 이 책은 읽기에 좋고 문체가 대화식이라 시와 철학의 소개에 정말 적합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서로의 합작을 위해서는 철학의 깊이에서는 작가의 전작인 ‘철학 vs 철학’ 과 같은 책들에 비해서는 조금 떨어지는 편입니다. 시 해설의 부분에서는 ‘신경림의 시인을 찾아서’ 와 같은 책들에 비하면 부족한 편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서로의 일부분을 희생한 것이지요. 게다가 철학자들이나 시인들의 주장 모두를 개괄적으로 다룬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이 책으로 보는 철학자들과 시인의 주장들은 삼차원 구체를 면으로 잘랐을 때 보이는 그런 단편적인 부분들에 지나지 않는 단점이 있지요. 김수영 시인에 대한 끊임없는 예찬도 아쉬운 부분이라면 아쉬운 부분이겠지만, 이는 저자 자신의 취향에 관련된 것이니 더 이야기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가장 아쉬운 부분이 남아있습니다. 어느 개념을 소개하는 데 있어 그 개념의 단어를 분석해서 이끌어낸다는 점입니다. 책의 예를 들자면 책에서 대화는 이렇게 소개됩니다. 두 사람의(dia) 이야기가(logos)가 역동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dia+logos는 dialogue가 됩니다. 대화의 영어 단어이지요. 이 뿐만이 아닙니다. 무아경, 엑스터시에 관해서 소개하는 대목에서는 엑스터시의 라틴어 어원인 ekstasis를 가져오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한지 엑스eks=ex와 스타시스stasis와 같이 분석까지 해서 그 뜻이 ‘자신이 없다고 느껴지는 경지나 상태’ 라는 것을 밝힙니다. 책 내에서 읽을 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갈 수 있는 대목이지만 사실 이런 식의 분석은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접두사, 접미사 구분해서 외우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지요. 그런데 우리는 영어 단어를 외우려고 이 책을 읽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개념을 설명하는 것은 ‘개념으로 개념을 설명하는’ 순환논증에 빠지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독자들에게, 특히 영어라면 치가 떨리도록 열심히 공부했을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는 매우 친숙하게 다가오는 설명법이겠지만 진정으로 개념을 설명하고자 했다면 그 개념의 역사적 연원부터 시작하여 어떤 변천을 거쳐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밝히는 것이 옳았으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책은 아름다운 변주곡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름다울 뿐만이 아닙니다. 복잡하게 공부를 하면서 들어야 되는 어려운 변주곡들도 아닙니다. 어떤 클래식들은 나를 들으려면 이 정도는 알아야지 하면서 대위법이나 화성의 변화 등을 들이대기도 하지만 이 변주곡들은 눈감고 가만히 그 흐름에 맡기면 되는 곡들입니다. 굳이 따지자면 이 변주곡들은 바흐의 클래식과 유키 구라모토의 뉴에이지 그 어딘가에 흐르고 있겠습니다만 (유키 구라모토의 곡들이 아주 뒤떨어진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철학은 철학 따로, 시는 시 따로 다른 부문 각각을 따져가면서 그것도 공부하면서 머리 싸매고 외우는 것보다 그 둘을 한 번에 묶어서 그것도 듣기 쉽게 해주고 그리고 그로 인하여 감성의 날카로움과 이성의 우아함을 겸비하게 해준다면 이런 곡들을 마다할 이유가 없겠지요. 책은 저자 강신주 본인의 경험으로 마무리 지어집니다. 지리산에 별을 보면서 숭고의 감정을 느꼈다고 하지요. 저도 저 숭고의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잘 압니다. 저 또한 산에 올라서 바위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하늘이 ‘열리며’ 별들이 정말 쏟아질 것만 같이 가득 보이는 경험을 했었으니깐요. 그때 불현듯 눈물이 났었습니다. 너무 기쁘기도 하고 너무 슬프기도 하고 뭐라고 정말 형언할 수 없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숭고의 감정이라는 표현을 쓴 사람은 서구 이성의 거목 칸트입니다. 차갑게만 보이는 그런 철학자들도 아름다움에 취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이지요. 아니, 어쩌면 철학을 하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 반대의 상황도 있을 수 있겠고요. 누나 가슴에 삼천 원 정도는 있다고 어느 드라마에서 했었던가요, 하하, 누구나 가슴 속에 시 한 소절과 철학 한 문단 정도는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