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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 지식인 지도
이경구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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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조선은 대외적으로 볼 때 '새로운 시기'를 맞이한 때였다. 그리고 대내적으로는 학문이 실천으로 그 범주를 넓히던 시기였다.

이런 현상은 그저 '발전'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처절함 속에서 구현된 하나의 '의무'라고까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국가 존립의 근거, 사회 재건의 방향과 구체적 정책, 사대부 개개인의 삶의 의미 등을 '학자가 탐구해야할 문제를 넘어 실천으로 실현해야 할 과제'로 보았다.

 

이에 이 책의 저자는 17세기 11명의 지식인들에 주목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사실 사상적 지형도는 그리기가 매우 힘들다. 게다가 과거의 학문, 즉 성리학을 바탕으로 한 사상적 지형도는 더욱 그러하다.

또 조선의 사상적 지형도는 정치적 지형도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복잡한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저자는 깔끔한 문체와 군더더기 없는 문제의식으로 독자를 이끌어 간다.

그의 말처럼 '비판적 안목을 기를 기회를 실종'시키지 않으면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김육의 생애였는데, '바라는 바는 민생이니 구름 잡는 글을 숭상하고 싶지 않다'는 그의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성현의 법은) 오로지 백성들에게 은택이 돌아가게 하는 것일 뿐이다. (세상의 학자들은) 모두 서책에 실린 것들을 주워 담아서는 '성의하고 정심하면 천하와 국가는 잘 다스려질 것이다'라고 입에 올리기만 한다. 그러면서 실무에 여념 없는 자들을 공리를 추구한다고 비웃는다. …… 이것이 어찌 마음을 합하여 나라를 위하는 도리인가. 나는 어리석고 생각이 얕아 학문이 어떠한 것인지를 잘 모른다. 다만 바라는 바는 마음을 바르게 가지고 일처리를 실질적으로 하는 것이니 절약하여 백성을 아끼고 부역과 세금을 줄이는 것이다. (나는) 공허하고 멀리 있는 것을 추구하여 구름과 같은 글은 숭상하고 싶지 않다.

 

이밖에도 유형원을 '다시' 조명해본 부분(물론 이 부분이 이미 선행되었던 부분이긴 하지만 잘 알려지진 못했다),

 

  유형원의 구상을 성리학의 대안으로 볼 수도 있고 그렇게 평가하는 학자도 많으나, 최근 그의 본의는 성리학을 보완하는 데 있다는 학설도 제기되고 있다. 그리고 실제 그 방향으로 그의 구상은 수용되었다. 영, 정조대에 국가의 공공성 확대를 통해 조선왕조를 유지하자는 보수적 개혁에 활용되었던 것이다. 그 정점에는 성리학 체제의 완성이 있었다.

 

또 남구만을 다룬 부분에서 '법'에 대한 서술은 오늘날에도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준다.

 

유교에선 '형벌'에 '상서로운 형벌[祥刑]'(<書經>)이란 모순된 이름을 붙였다. 벌은 서민에겐 관대하고 부귀한 이에겐 엄격하며 사람을 낚는 그물이 아니라 피하기를 바라는 경고일 따름이니, 궁극적으로 모든 이가 저촉되지 않는 경지에 다다르면 상서롭다는 의미였다. 즉, 법은 교화의 보조 수단이자, 없어지기를 기약하는 '필요악'인 셈이다.

  이 점은 법 집행이 먼저고 교화가 뒤따르는 오늘날 우리가 숙고해 봐야 할 문제다. '법대로'는 법의 출발점이자 목표인 인간을 때로 망각하기 때문이다. 조문을 적용할 줄만 알았지 전인적 가치와 사회의 공동선에 둔감한 법 관계자들 때문에 우리는 많은 가치 전복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법이 '지켜야할 그 무엇'이 아니라 '나를 지켜주어야할 그 무엇'이 되어버린 현실이 참으로 뼈아프다.

 

각 꼭지마다 뒤에 '키워드'로 묶어 중요한 개념들을 친절히 설명해주고 있고, 쓸 데 없는 각주를 생략해버린 편집도 맘에 든다.

꽤 많이 삽입된 도판이 읽는 내내 재미를 돋구워주고, 꼭지마다 정리해주는 도표 또한 이해를 도와준다.

짧은 '나오는 글' 하나가 좀 아쉽기는 하지만, 전통시대에 대한 막연한 관심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줄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적어도 머리말에 제기한 저자의 문제의식은 충분히 소화된 것 같다. 문장 또한 복잡하거나 길지 않아 이해하기도 쉽고 읽는 맛이 난다.

간만에 정갈하고 맛있는 한식을 먹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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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 모티브북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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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우린 '계급'이란 말에 적지 않은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이것도 일종의 '레드 바이러스'인건가?

하긴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고, 가난하면 열심히 살지 않은 것으로 간단히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니.

 

사람들은 오랫동안 미국은 열심히 일을 하면 누구나 정상에 설 수 있는 계급 없는 사회라고 믿었다. 그런데 계급 없는 사회에 정상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본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모두가 평등한 사회, 모두가 평등한 '자유 경쟁'의 이미지는 너무나 성공적으로 유포되었다. 그것이 현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벨 훅스는 페미니스트 영문학자인데, 그는 이 책에서 '계급'에 주목한다.

(나의 선입관인지는 모르겠는데, 많은 페미니스트들 또한 '계급'이란 말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진보영역에서도 이제 성이나 인종에 비해 계급은 산뜻하지 않은 주제이다. 계급이란 말을 하면 왠지 먼지가 날릴 것만 같다.

그러나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오늘날에도 엄연히 계급은 존재한다.

벨 훅스는 계급이 없다는 인식을 유포시키는 광고나 대중문화를 경계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모든 사회문제가 성이나 인종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핵심은 바로 계급인 것이다.

 

  언젠가 친구와 지인들에게 데이비드 힐파이커처럼 강의를 그만두고 저술활동에 전념하겠다고 말하자 이구동성으로 큰 실수하는 것이라고 겁을 줬다. 모두들 일 년에 2~3천 달러 수입으로 어떻게 먹고사냐고 걱정을 했다. 실제로 4인 이상의 가구도 그 정도 수입으로 생활한다고 했더니 "그건 다르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바로 계급이 다르다는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원래 적은 돈으로 살아야 하고 (질 나쁜 옷, 공산품과 음식처럼) 수준 낮은 생활환경을 받아들이도록 사회화된 반면, 부자들은 더 많이 가져야 하며 갖고 싶을 때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믿도록 사회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상층계급으로 올라갈 기회가 있는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말살시켜야하는 것일까? 불타는 용산처럼?

 

가난한 이들을 은밀하게 공격해 말살시킨다면 부자들의 세계가 더 안전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착각이다. 더 강력한 도난 경보기를 달고, 더 많은 감옥을 짓고, 가난한 사람들이 잡혀온 것처럼 사는 포로수용소 같은 거주 단지를 구축하는 조치는 포위 같고, 충돌 같고, 전쟁 같은 일상을 반영할 뿐이다.

 

그렇다. 벨 훅스가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는 '단순한 삶', 나눔과 연대는 그들을 동정하기 때문에 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잘 살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그리고 그 방법을 위해서는 이 책의 원제처럼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명확하게 인지해야만 한다.

그 명확함은 '단순함'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 '지금의 가난은 성의 문제와 인종의 문제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성은 그렇다치고 인종은 우리나라 얘기가 아니라고? 글쎄, 과연 그럴까?

다문화 가정이 이미 소수가 아니며, 게다가 대한민국엔 사회적 인종이 이미 등장하고 있다.

강남인, 강북인, 지방인, SKY출신.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강남인은 강남인이 된다. 마치 흑인의 아이가 흑인인 것처럼.

 

벨 훅스는, 계급 문제를 거론할 때 성이나 인종을 부각시키고, 인종의 문제를 거론할 때 다시 계급의 이야기를 꺼내는 기만을 직시한다.

지배계급이 필요에 따라 갈등요소를 자의적으로 부각시켜 물을 흐린다는 것이다.

 

  백인이 백인에게 강도나 폭행을 당할 확률이 더 높다고 아무리 말해도 백인은 주택 문제에 대해서는 계급에 기반을 둔 인종 문제를 두려움의 원인으로 설명한다.

 

  계급 문제가 거의 혹은 전혀 이야기되지 않은 미국에서 부동산과 주택 분야의 인종차별이 거론될 때마다 백인들이 문제는 '인종'이 아니라 '계급'이라고 하는 사실이 참으로 흥미롭다.  내가 아는 백인들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 친구들조차 부동산 문제에서는 백인우월주의 사고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백인 주민들이 백인 우월주의의 침투를 강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집값을 걱정하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이 또한 미국만의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전략'은 2009년 대한민국에서도 유효하다.

생존권을 위해 옥상으로 올라갈 수 밖에 없었던 이들과 명령을 받고 현장에 투입되는 경찰이 가장 치열한 순간에 충돌했다.

그 비참한 현장에 있는 이들과 실질적으로 다른 계급에 속하는 이들은 쏙 빠져있다.

처참한 현장에 있는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그것을 볼 수 밖에 없는 우리는, 저 '충돌'이 누구와 누구의 충돌인지 순간 알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비난은, '옥상에 올라간 테러리스트'들과 '강경진압으로 일관한 경찰특공대원'들에게 쏟아지게 된다.

아니, 비난을 하는 '우리'조차 서로 엉겨붙어 싸우게 된다.

자, 한 발 떨어져 바라보자. 이것이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이게 누구와 누구의 싸움이었던가?

(이런 의미에서 '경찰노조' 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한홍구 교수의 견해는 충분히 동의할만 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현대사회에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가? 정말로?

혹자는 그럴 것이다. 설사 계급이 존재한다하더라도 계급이동의 가능성이 열려있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아. 그래. '자유경쟁'의 시대였지.

누구는 100만원짜리 과외를 받아가며 학습하고, 누구는 경제생활에 힘든 부모를 두어 혼자 컴퓨터 앞에 하루 종일 있을 뿐이고.

그런데 이것도, 그 아이들의 능력 때문인건가?

(실제로 아이들이 학습성취도와 부모의 소득이 상관관계가 있다. 그에 대한 심각한 연구 결과들이 널려있다.)

나도 '다양한 계급을 넘나드는 것이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무척 어렵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먼지가 좀 날리더라도 다시 '계급'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누차 강조하는 것이지만, 그 계급은 성이나 인종의 문제를 배제한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실타래처럼, 아니 오늘 날엔 마치 거미줄처럼 촘촘히 드리워있는 계급을 인지하고, 과연 내가 어디 서있는가를 생각해야할 때다.

그러니 지금은, '계급에 대해 말'해야만 할 때다.

 

22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이고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많이 이야기하고 있어서, 별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중간 부분엔 너무 뻔한 소리를 반복하고 있어서 흥미가 좀 떨어졌기 때문인 것 같다.

나눔, 단순한 삶... 이런 것들이 옳기는 하지만, 나는 저자가 강조하는 '계급의 문제'가 개인적 행동으로만 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개인행동의 방향이 좀 더 정치적인 방향, 정책적인 방향을 지향해야 좀 더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개인적인 삶에 있어 사소한(?) 선택 하나하나도 중요하다고 믿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거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는 조금 아쉬웠다. 강한 주장에 비해 구체적인 대안의 제시가 부족하달까,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가 이야기하는 계급 이야기가 신선했던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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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 - 한국 근대 100년을 말한다
박노자.허동현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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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최전선'과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에 이은, 박노자 교수와 허동현 교수의 격론을 담은 책.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는 사놓고 아직 읽지를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우리 역사 최전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우리 역사 최전선'은 쟁점이 분명치 않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이번의 책은 그 단점을 최대한 보완한 것 같다.

그만큼 양 쪽 학자의 입장이 조금 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 이 첨예함이 오히려 이 책의 취지에 맞는 것 같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담론으로서의 역사는 "해석"일 뿐이다. ……

  계급적 갈등이 존재하는 이상 좌우가 "하나가 되어" 서로 같은 역사 서술을 생산하는 일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불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서로가 좌우 성향의 차이를 인정할 경우 미래를 항해 같이 나아가야 할 "시민" 모두를 위한 "총체적" 역사 쓰기는 가능하다. 현재적 이해관계와 이념의 차이를 숨기고 호도하는 역사가 아니라, 바로 이 차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토론을 통해 시민 스스로에게 "선택"의 권리를 주는 그런 "다원적" 역사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예전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두 학자가 서신을 주고 받는 형태로 되어있는데,
아무래도 두 학자의 성향상 박노자 교수의 글로 화제가 시작되고 있다.
때문에 논쟁의 형식적 구조상 박노자 교수가 불리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긴했지만,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니 이해는 갔다.
창 없이 방패부터 등장하는 것은 왠지 어색할테니.

조금은 거시적인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던 앞의 두 책과는 달리, '근대화'라는 큰 주제를 중심으로 주제가 세분화 되어 있다.
'지식인과 친일', '여성', '대중문화', '종교' 등. 때문에 독자들은 앞의 두 책과는 달리, 자신의 입장도 함께 정리해나갈 수 있을 듯 하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박노자 교수의 어휘 선택이나 관점 등이 조금은 과격해 보일 수가 있기 때문에 허동현 교수의 논지가 훨씬 더 안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물론 이것은 앞서 얘기했듯이, 서신을 주고 받는 순서의 문제를 무시할 수 없다).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칼날 같은 기준을 들이대던 박노자 교수가,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포옹하는 '관용'을 보이는 것,
그리고 마르크스와 레닌을 '현대의 보살', 사회주의의 실천을 '보살행'으로 보는 것에 대한 허동현 교수의 지적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던 것은 박노자 교수의 논지가 아니라 오히려 허동현 교수의 논지였다.
나는 허동현 교수의 주장 중 몇몇 '표현'들을 정확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광수를 '일관된 민족주의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주장에서 '합리적'이란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광수의 '민족'은 무엇인가? 그리고 민족주의자는 제국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인가?
('민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그렇게 물고 늘어지는 '자유주의자'들이, 오히려 이럴 때는 '민족'이라는 말을 아주 편하게 사용한다.)
나는 오히려, 이광수의 민족이 '집단적 '우리'에 대한 수사'라는 박노자 교수의 견해가 더 합리적인 것 같다.

가장 거슬렸던 부분은 허동현 교수가 자주 사용하는 '시민'이라는 단어였다.
 


이광수의 시대에 자본은 노동을 착취하고 국가는 개인을 억압하는 폭력만 행사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오늘 우리의 시대에 존재하는 자본과 국가를 그렇게만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꿈꾸는 사회는 자본가와 노동자, 도시민과 농민,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리고 시민권자와 이주노동자처럼 지향과 이해를 달리하는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다원화된 시민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이광수의 시대에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이는 '민족'이나 '민중'과 같은 집단이었지만, 오늘 제국에 맞서 우리의 양심을 지킬 이는 각성된 개체이자 주체로서 시민이 아닐까 합니다.

 

  냉전 붕괴 후 들이닥친 신자유주의의 세상에서 살안마기 위한 우리 정치세력의 해법은 너무도 다릅니다. 좌파는 민족을 방패로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아직도 꿈꿉니다. 허나 우리 사회는 이미 생각과 지행과 이해를 달리하는 이들이 함께 살아가야 할 다원화된 시민사회로 진화했습니다.

 

허동현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계급 담론은 이제 낡고도 낡은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것인데,
과연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허동현 교수가 '현상'과 '당위'를 착각(혹은 의도적 혼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에 있다.
2009년 대한민국 사회가 현상적으로 다원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우리 사회가 '다원화된 사회'라고 볼 수 있는가?
그리고 집단이 아닌 '개체이자 주체로서의 시민'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우리 모두? 그렇다면 '민중'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물론 자유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개인'의 중요성, 그리고 집단의 폭력성을 간과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허동현 교수가 이야기하는 시민은 오히려 '개인'의 중요성을 부각시키지 못하는 모호한 개념일 뿐만 아니라,
합리적이고 양심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이들을 간단하게 배제해버릴 수 있는 폭력적인 개념이 될 수도 있다.
경제적인 문제로 기본적인 인성교육마저 받지 못한 사람은, 그렇다면 시민인가, 시민이 아닌가?
(간단하게 예를 들 수 있다. 가장 최근 부각됐던 용산의 일을 보자. '합리적' 시민의 입장이라면 그들은 화염병을 들고 옥상으로 가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을 합리적이지 않게 만든 이들은 또 누구인가? 맞다. 계급은 낡고도 낡았다. 하지만 '낡았다'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분명 다른 말이다.)
또한 박노자 교수의 '공격'에 그건 세상 어느 시대, 어디에나 있던 일이지 않습니까? 식의 반론은 썩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좀 어렵더라도 허동현-박노자 순의 순서를 짜보는 건 어떨까 싶기도 하다. 둘을 섞던지...)

서신을 주고 받는 이런 형식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여러 주제에 대해 서신을 주고 받는 형식이기 때문에 한 주제로 서로의 주장을 깊게 논박하는 것까지 기대하기는 힘들다.
이것이 일단.
반면 여러 주제에 대해 입장이 다른 이의 근거와 주장을 들어보고, 양 쪽의 의견 차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일장.
그러나 '길들이기와 편가르기'가 만연하는 오늘, 이 책의 일장이 일단을 충분히 상쇄시킬 수 있음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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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 2013-05-21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가볍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은 유익한 서재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당

제가 읽어 보기도 하고 아는 책도 있어서 반갑기도 했고요~

종종 놀러가겠습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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