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훅스, 계급에 대해 말하지 않기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 모티브북 / 2008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언제부턴가 우린 '계급'이란 말에 적지 않은 거부감을 갖게 되었다. 이것도 일종의 '레드 바이러스'인건가?

하긴 열심히 일하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고, 가난하면 열심히 살지 않은 것으로 간단히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니.

 

사람들은 오랫동안 미국은 열심히 일을 하면 누구나 정상에 설 수 있는 계급 없는 사회라고 믿었다. 그런데 계급 없는 사회에 정상이란 것이 있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본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까.

 

모두가 평등한 사회, 모두가 평등한 '자유 경쟁'의 이미지는 너무나 성공적으로 유포되었다. 그것이 현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벨 훅스는 페미니스트 영문학자인데, 그는 이 책에서 '계급'에 주목한다.

(나의 선입관인지는 모르겠는데, 많은 페미니스트들 또한 '계급'이란 말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진보영역에서도 이제 성이나 인종에 비해 계급은 산뜻하지 않은 주제이다. 계급이란 말을 하면 왠지 먼지가 날릴 것만 같다.

그러나 나도, 당신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오늘날에도 엄연히 계급은 존재한다.

벨 훅스는 계급이 없다는 인식을 유포시키는 광고나 대중문화를 경계해야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모든 사회문제가 성이나 인종만으로 설명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핵심은 바로 계급인 것이다.

 

  언젠가 친구와 지인들에게 데이비드 힐파이커처럼 강의를 그만두고 저술활동에 전념하겠다고 말하자 이구동성으로 큰 실수하는 것이라고 겁을 줬다. 모두들 일 년에 2~3천 달러 수입으로 어떻게 먹고사냐고 걱정을 했다. 실제로 4인 이상의 가구도 그 정도 수입으로 생활한다고 했더니 "그건 다르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바로 계급이 다르다는 말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원래 적은 돈으로 살아야 하고 (질 나쁜 옷, 공산품과 음식처럼) 수준 낮은 생활환경을 받아들이도록 사회화된 반면, 부자들은 더 많이 가져야 하며 갖고 싶을 때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믿도록 사회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아직까지 상층계급으로 올라갈 기회가 있는 우리는, 가난한 이들을 말살시켜야하는 것일까? 불타는 용산처럼?

 

가난한 이들을 은밀하게 공격해 말살시킨다면 부자들의 세계가 더 안전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건 착각이다. 더 강력한 도난 경보기를 달고, 더 많은 감옥을 짓고, 가난한 사람들이 잡혀온 것처럼 사는 포로수용소 같은 거주 단지를 구축하는 조치는 포위 같고, 충돌 같고, 전쟁 같은 일상을 반영할 뿐이다.

 

그렇다. 벨 훅스가 입이 닳도록 이야기하는 '단순한 삶', 나눔과 연대는 그들을 동정하기 때문에 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바로 '우리'가 잘 살기 위한 방법일 뿐이다.

그리고 그 방법을 위해서는 이 책의 원제처럼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명확하게 인지해야만 한다.

그 명확함은 '단순함'으로 해결될 수는 없다. '지금의 가난은 성의 문제와 인종의 문제를 모두 내포하고 있다.'

성은 그렇다치고 인종은 우리나라 얘기가 아니라고? 글쎄, 과연 그럴까?

다문화 가정이 이미 소수가 아니며, 게다가 대한민국엔 사회적 인종이 이미 등장하고 있다.

강남인, 강북인, 지방인, SKY출신. 이 모든 것이 무엇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강남인은 강남인이 된다. 마치 흑인의 아이가 흑인인 것처럼.

 

벨 훅스는, 계급 문제를 거론할 때 성이나 인종을 부각시키고, 인종의 문제를 거론할 때 다시 계급의 이야기를 꺼내는 기만을 직시한다.

지배계급이 필요에 따라 갈등요소를 자의적으로 부각시켜 물을 흐린다는 것이다.

 

  백인이 백인에게 강도나 폭행을 당할 확률이 더 높다고 아무리 말해도 백인은 주택 문제에 대해서는 계급에 기반을 둔 인종 문제를 두려움의 원인으로 설명한다.

 

  계급 문제가 거의 혹은 전혀 이야기되지 않은 미국에서 부동산과 주택 분야의 인종차별이 거론될 때마다 백인들이 문제는 '인종'이 아니라 '계급'이라고 하는 사실이 참으로 흥미롭다.  내가 아는 백인들 중에서 가장 진보적인 친구들조차 부동산 문제에서는 백인우월주의 사고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백인 주민들이 백인 우월주의의 침투를 강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다만 집값을 걱정하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이 또한 미국만의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전략'은 2009년 대한민국에서도 유효하다.

생존권을 위해 옥상으로 올라갈 수 밖에 없었던 이들과 명령을 받고 현장에 투입되는 경찰이 가장 치열한 순간에 충돌했다.

그 비참한 현장에 있는 이들과 실질적으로 다른 계급에 속하는 이들은 쏙 빠져있다.

처참한 현장에 있는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그것을 볼 수 밖에 없는 우리는, 저 '충돌'이 누구와 누구의 충돌인지 순간 알 수 없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의 비난은, '옥상에 올라간 테러리스트'들과 '강경진압으로 일관한 경찰특공대원'들에게 쏟아지게 된다.

아니, 비난을 하는 '우리'조차 서로 엉겨붙어 싸우게 된다.

자, 한 발 떨어져 바라보자. 이것이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이게 누구와 누구의 싸움이었던가?

(이런 의미에서 '경찰노조' 조직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한홍구 교수의 견해는 충분히 동의할만 하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보자. 현대사회에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가? 정말로?

혹자는 그럴 것이다. 설사 계급이 존재한다하더라도 계급이동의 가능성이 열려있기 때문에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아. 그래. '자유경쟁'의 시대였지.

누구는 100만원짜리 과외를 받아가며 학습하고, 누구는 경제생활에 힘든 부모를 두어 혼자 컴퓨터 앞에 하루 종일 있을 뿐이고.

그런데 이것도, 그 아이들의 능력 때문인건가?

(실제로 아이들이 학습성취도와 부모의 소득이 상관관계가 있다. 그에 대한 심각한 연구 결과들이 널려있다.)

나도 '다양한 계급을 넘나드는 것이 설령 가능하다고 해도 무척 어렵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먼지가 좀 날리더라도 다시 '계급'을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누차 강조하는 것이지만, 그 계급은 성이나 인종의 문제를 배제한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실타래처럼, 아니 오늘 날엔 마치 거미줄처럼 촘촘히 드리워있는 계급을 인지하고, 과연 내가 어디 서있는가를 생각해야할 때다.

그러니 지금은, '계급에 대해 말'해야만 할 때다.

 

220페이지 정도 되는 책이고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많이 이야기하고 있어서, 별 부담없이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중간 부분엔 너무 뻔한 소리를 반복하고 있어서 흥미가 좀 떨어졌기 때문인 것 같다.

나눔, 단순한 삶... 이런 것들이 옳기는 하지만, 나는 저자가 강조하는 '계급의 문제'가 개인적 행동으로만 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아니, 개인행동의 방향이 좀 더 정치적인 방향, 정책적인 방향을 지향해야 좀 더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개인적인 삶에 있어 사소한(?) 선택 하나하나도 중요하다고 믿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거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는 조금 아쉬웠다. 강한 주장에 비해 구체적인 대안의 제시가 부족하달까, 그런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페미니스트가 이야기하는 계급 이야기가 신선했던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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