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이기와 편가르기를 넘어 - 한국 근대 100년을 말한다
박노자.허동현 지음 / 푸른역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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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 최전선'과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에 이은, 박노자 교수와 허동현 교수의 격론을 담은 책.

'열강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기'는 사놓고 아직 읽지를 못해서 잘 모르겠지만, '우리 역사 최전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우리 역사 최전선'은 쟁점이 분명치 않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이번의 책은 그 단점을 최대한 보완한 것 같다.

그만큼 양 쪽 학자의 입장이 조금 더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 이 첨예함이 오히려 이 책의 취지에 맞는 것 같다.


  결국 우리가 알고 있는 담론으로서의 역사는 "해석"일 뿐이다. ……

  계급적 갈등이 존재하는 이상 좌우가 "하나가 되어" 서로 같은 역사 서술을 생산하는 일은 불가능하기도 하고 불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서로가 좌우 성향의 차이를 인정할 경우 미래를 항해 같이 나아가야 할 "시민" 모두를 위한 "총체적" 역사 쓰기는 가능하다. 현재적 이해관계와 이념의 차이를 숨기고 호도하는 역사가 아니라, 바로 이 차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토론을 통해 시민 스스로에게 "선택"의 권리를 주는 그런 "다원적" 역사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예전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두 학자가 서신을 주고 받는 형태로 되어있는데,
아무래도 두 학자의 성향상 박노자 교수의 글로 화제가 시작되고 있다.
때문에 논쟁의 형식적 구조상 박노자 교수가 불리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긴했지만,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니 이해는 갔다.
창 없이 방패부터 등장하는 것은 왠지 어색할테니.

조금은 거시적인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던 앞의 두 책과는 달리, '근대화'라는 큰 주제를 중심으로 주제가 세분화 되어 있다.
'지식인과 친일', '여성', '대중문화', '종교' 등. 때문에 독자들은 앞의 두 책과는 달리, 자신의 입장도 함께 정리해나갈 수 있을 듯 하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박노자 교수의 어휘 선택이나 관점 등이 조금은 과격해 보일 수가 있기 때문에 허동현 교수의 논지가 훨씬 더 안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물론 이것은 앞서 얘기했듯이, 서신을 주고 받는 순서의 문제를 무시할 수 없다).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칼날 같은 기준을 들이대던 박노자 교수가, 사회주의에 대해서는 포옹하는 '관용'을 보이는 것,
그리고 마르크스와 레닌을 '현대의 보살', 사회주의의 실천을 '보살행'으로 보는 것에 대한 허동현 교수의 지적은 '합리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던 것은 박노자 교수의 논지가 아니라 오히려 허동현 교수의 논지였다.
나는 허동현 교수의 주장 중 몇몇 '표현'들을 정확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광수를 '일관된 민족주의자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주장에서 '합리적'이란 단어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광수의 '민족'은 무엇인가? 그리고 민족주의자는 제국주의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인가?
('민족'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그렇게 물고 늘어지는 '자유주의자'들이, 오히려 이럴 때는 '민족'이라는 말을 아주 편하게 사용한다.)
나는 오히려, 이광수의 민족이 '집단적 '우리'에 대한 수사'라는 박노자 교수의 견해가 더 합리적인 것 같다.

가장 거슬렸던 부분은 허동현 교수가 자주 사용하는 '시민'이라는 단어였다.
 


이광수의 시대에 자본은 노동을 착취하고 국가는 개인을 억압하는 폭력만 행사했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오늘 우리의 시대에 존재하는 자본과 국가를 그렇게만 보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우리가 꿈꾸는 사회는 자본가와 노동자, 도시민과 농민, 남성과 여성, 정규직과 비정규직, 그리고 시민권자와 이주노동자처럼 지향과 이해를 달리하는 이들이 함께 살아가는 다원화된 시민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이광수의 시대에 제국주의에 맞서 싸운 이는 '민족'이나 '민중'과 같은 집단이었지만, 오늘 제국에 맞서 우리의 양심을 지킬 이는 각성된 개체이자 주체로서 시민이 아닐까 합니다.

 

  냉전 붕괴 후 들이닥친 신자유주의의 세상에서 살안마기 위한 우리 정치세력의 해법은 너무도 다릅니다. 좌파는 민족을 방패로 민중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아직도 꿈꿉니다. 허나 우리 사회는 이미 생각과 지행과 이해를 달리하는 이들이 함께 살아가야 할 다원화된 시민사회로 진화했습니다.

 

허동현 교수의 견해에 의하면 계급 담론은 이제 낡고도 낡은 구시대의 유물이라는 것인데,
과연 그렇게 쉽게 말할 수 있을까? 

문제는 그것이 아니라, 허동현 교수가 '현상'과 '당위'를 착각(혹은 의도적 혼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에 있다.
2009년 대한민국 사회가 현상적으로 다원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우리 사회가 '다원화된 사회'라고 볼 수 있는가?
그리고 집단이 아닌 '개체이자 주체로서의 시민'은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우리 모두? 그렇다면 '민중'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물론 자유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개인'의 중요성, 그리고 집단의 폭력성을 간과하자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허동현 교수가 이야기하는 시민은 오히려 '개인'의 중요성을 부각시키지 못하는 모호한 개념일 뿐만 아니라,
합리적이고 양심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있는 이들을 간단하게 배제해버릴 수 있는 폭력적인 개념이 될 수도 있다.
경제적인 문제로 기본적인 인성교육마저 받지 못한 사람은, 그렇다면 시민인가, 시민이 아닌가?
(간단하게 예를 들 수 있다. 가장 최근 부각됐던 용산의 일을 보자. '합리적' 시민의 입장이라면 그들은 화염병을 들고 옥상으로 가지 말았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그렇게 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구인가? 그리고 그들을 합리적이지 않게 만든 이들은 또 누구인가? 맞다. 계급은 낡고도 낡았다. 하지만 '낡았다'와 '존재하지 않는다'는 분명 다른 말이다.)
또한 박노자 교수의 '공격'에 그건 세상 어느 시대, 어디에나 있던 일이지 않습니까? 식의 반론은 썩 반갑지만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좀 어렵더라도 허동현-박노자 순의 순서를 짜보는 건 어떨까 싶기도 하다. 둘을 섞던지...)

서신을 주고 받는 이런 형식에는 일장일단이 있다.
여러 주제에 대해 서신을 주고 받는 형식이기 때문에 한 주제로 서로의 주장을 깊게 논박하는 것까지 기대하기는 힘들다.
이것이 일단.
반면 여러 주제에 대해 입장이 다른 이의 근거와 주장을 들어보고, 양 쪽의 의견 차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인해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일장.
그러나 '길들이기와 편가르기'가 만연하는 오늘, 이 책의 일장이 일단을 충분히 상쇄시킬 수 있음은 분명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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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 2013-05-21 15: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가볍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무겁지도 않은 유익한 서재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당

제가 읽어 보기도 하고 아는 책도 있어서 반갑기도 했고요~

종종 놀러가겠습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