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버 라이
프리다 맥파든 지음, 이민희 옮김 / 밝은세상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혼부부 이선 - 트리샤는 외곽 지역의 집을 보러가던 중에 폭설로 발이 묶이고 그 곳에서 거대한 저택을 마주하게 된다. 알고보니 3년 전 실종된 정신과 의사 에이드리엔 헤일의 집이었고 트리샤는 누군가가 있는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과 함께 그 곳을 거쳐간 환자들의 기록을 찾아낸다. 이야기는 현재의 트리샤와 과거의 에이드리엔의 시점을 오가며 빠른 속도로 내달린다.


외국 소설을 읽다보면 수많은 백인들의 어리석은 선택을 마주하게 된다.
가령 와이파이도 안터지는 외딴 저택에 의심없이 들어가서 하룻밤을 보낸다거나
넓디 넓은 집에 누가 있는지 확인도 안한채 (들어가기 전부터 방에 불이 켜져 있었음에도) 아무도 없다며 이상한 확신을 하는 점이나
그 집에 혼자 살면서 보안 시스템 하나 갖추지 않은 채 나는 안전하다며 확신하는 점이나!

하여튼 그런 뻔하디 번한 백인들의 어리석은 선택이 가져오는 불길한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페이지를 넘겼다. 초장부터 이니셜을 보고 '아 진짜 뻔하다 너무 허술하구먼' 하고 읽었는데 예상한거 다 틀렸다. 솜사탕 물에 씻은 너구리처럼 당황스러워서 말을 이을 수가 없다. 정말 짜릿하다. 이런 책의 재미는 예상이 틀렸을 때 오는 충격이니까 진짜 한두개를 추측한게 아닌데 맞는거 하나도 없었다. 장담하는데, 이 책의 퀴즈를 맞춘 사람은 거의없을 거다.


솔직히 내가 좋아하는 결말은 아니다. 결말 자체는 호불호가 꽤 나닐것 같지만, 이런 여성들의 이야기, 이런 엔딩 하나쯤 있어도 되잖아? 진짜 엉망진창인데 그들이 사는 세계 그 자체라 황당하게 골 때리는 작품


+ 네버 라이? 당연히 거짓말 할 수가 없다. 근데 그 방법이 미쳤음. 이걸 말하면 너무 스포일러라 쓸 수가 없는데, 읽은 사람들끼리 이거 또라이 아니야?하고 책을 짤짤 흔들고 싶음. 진짜 첨부하고 싶은 문장이 있는데, 이것도 스포일러일까봐 말을 못하겠다. 출판사 카드 리뷰에도 있긴 하지만. 추리 소설 광인들은 이거 보고 추측할지도 몰라

++ 읽을 사람들이 있다면 후기도 안 읽고 그냥 들이박았으면 좋겠다. 이 놀라움 나만 경험할 수 없어.

+++ 영화제작 확정이 빠르게 된 게 이해가 되는 스릴러인데 이건 진짜 읽어야한다. 책이어야 충격적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독립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 어느 30대 캥거루족의 가족과 나 사이 길 찾기
구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캥거루족이다. 서른이 넘었고 직업이 있지만 부모님과 함께 산다. 글쎄, 서울에서 독립하면 잃을 것이 너무 많아 보인다. 나는 과연 독립된 개체가 될 수 있을까? / p.11


한국을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재되어 있는 시간 제한부 퀘스트가 있다. 10대는 공부, 20대는 취직, 30대는 결혼, 40대는 자녀 양육 뭐 이런. 본래 천성이 급하거나 주위의 속도에 조급함을 느끼는 타입이 아니라서 이게 내 속도겠거니 하고 나무늘보 마냥 느릿하게 살고 있고, 완전히 독립이라고 하기에도 뭐한게 본가와 걸어서 10분 거리에 따로 나와 살면서 시도 때도 없이 엄마 앞에서 뒹굴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어릴 때 따로 잘 살아놓고 이제와서 바득바득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는 꼴이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 뉴스에서 나이가 들었는데도 집에서 나가지 않은 청년들을 캥거루족이라고 한다. 아니 나 아직도 아기 캥거루 할 수 있는거야? 나이스. 그런데 캥거루족이 비단 지금 청년 개인의 문제는 아니잖아, 물가와 집값이 미쳐돌아가는데 거 좀 같이 살 수도 있지. 이전 세대의 평범한 속도를 꿈꾸기에는 세상은 너무 차고 가혹해요 ;ㅅ;



'영원할 줄 알았던 네버랜드의 시간이 흘러간다. 당연했던 나의 세계가 흔들린다.'는 부분에서 사실 조금 울었다. 나는 여전히 지금의 가족을 너무 좋아하는데, 시간은 빠르게 지나가고 부모님은 나날이 약해진다. 알고는 있는데 솔직히 외면하고 있었던 일이었지만, 얼마전에 아버지가 쓰러지셔서 병원에 입원하신 후에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내 세계에 분명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고, 이전보다 빠른 속도로 성큼 다가오고 있다고. 주말이면 다 같이 거실에 모여 앉아 있는 장면이 나 혼자 앉아 있는 장면으로 곧 바뀔 수도 있겠다는 구체적인 슬픔.

아마 내 속도겠거니 했던 그 느릿함의 일부분은 두려움이었을 지도 모른다고 책을 읽으며 생각했다. 집을 떠나 홀로 설 수 없을 것 같아서, 진짜 혼자가 될 때의 공허함을 견딜 수 있을까 싶어서. 나는 여전히 이 네버랜드에 있고 싶었으니까.



이미 정해져 많은 이들이 밟고 지나간 길을 굳이 걷지 않더라도, 나만이 갈 수 있는 길을 찾게 되어도 결국 나는 혼자 서야한다. 오롯이 자립하지 못하고 의존하게 된다면 기댄 곳의 흔들림에 나 역시 흔들리게 된다. 타인이 제공하는 안락함이란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내 것이 아니므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독립 (獨立)'보다는 나 스스로 서는 '자립 (自立)'의 상태가 되었을 때 진실로 연결될 수 있다. 홀로 있는 상태가 아니라 나는 나의 위치에서, 상대는 상대의 위치에서 서로를 마주할 수 있는 의미로 나아갈 때 평온한 마음으로 맞는 얼굴들을 통해 개인의 세계는 더 넓어진다. 자립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좁은 나만의 세계가 이 책을 통해 서서히 열리고 있는 것 같다. 막연한 불안함이 밀려올 때 이정표 삼아 가보지 않았던 세계로 한 발씩 딛어보게 만드는, 두려움을 한 번 삼켜볼까 하는 다짐을 해보게 하는 책이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태고(太古)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 / 첫 문장


'우주의 중심에 놓인 곳', 마치 에덴 동산을 떠올리게 하는 마을 '태고'를 배경으로 올가 토카르추크의 신화적 상상력이 무한하게 뻗어나가는 작품이다. 창세기와도 같은 도입부를 포함해 84개의 조각글로 직조해 낸 세계에서 작가는 신화와 실제 사건을 균형있게 섞어 약간은 불경하게, 그렇게 그 웅장함과 장렬함이 색다른 방식으로 펼쳐지도록 그려낸다.


작가가 창조해낸 독특한 세계의 주된 이야기 줄기는 태고에 사는 니에비에스키 가족, 미하우와 게노베파 - 미시아와 이지도르 - 아델카에 걸친 삼대의 이야기이며, 마치 신과 같은 시점에서 전개되는 '~의 시간'이라는 소제목들이 가득하다. 그 시간은 매우 짧고 개별로 존재하는 것 처럼 흩어져 있으며 인간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각종 동식물,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 자신의 시간을 독립적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개개인의 시간을 다룬 다양한 조각이 마침내 거대한 세계가 될 때, 2차원의 납작한 이야기는 3차원의 입체적인 서사로 살갗에 닿게 된다. 



또 하나의 특징은 영웅이 기록된 남성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 비극적인 역사 앞에서 보통은 기록되지 않았던 여성들의 이야기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은 크워스카를 육체적으로도 괴롭혔다.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가슴이 신비한 기적의 모유로 가득 차올랐는데, 그 안에 신이 현존했다. (···) 이렇게 병을 고친 모두가 전쟁에서 죽었다. / p.195


가장 특징적으로 눈에 띄는 인물은 '크워스카'이다. 흔히 다뤄지는 너무나 가난하여 남성들에게 몸을 팔고, 숲속에서 아이를 낳는 뭐 그런 여성상. 그러나 크워스카는 그렇게 납작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몸을 파는 그 순간에도 크워스카는 자신이 스스로의 세계의 주체임을 강조했고, 이후 영험한 능력을 얻게 된 그녀는 가슴에서 나오는 신비한 모유로 사람들을 치유하지만, 모순적으로 그렇게 치유받은 사람들은 사람들은 모두 전쟁에서 죽게 된다. 마치 신은 거두어 갈 것은 반드시 거두어 간다는 듯이.


게다가 뱀과 인간 둘 다 사랑하고 사람의 형상을 하고 동물에 가까운 나쁜 인간과도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인간과 동식물, 신을 품고 있으면서 또한 저속한 면모까지 성녀 혹은 창녀 그 이분법적인 시선을 비웃듯 자유롭게 오가는 모습은 전형적인 남성 중심적 시각의 작품들을 부수는 쾌감이 느껴진다. 그녀는 성녀나 창녀, 선과 악 그 어느것이 아니라 그저 여성 그 자체로 오롯이 존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오래도록 세계를 지탱한 고정관념에 드는 작가의 반기이다.



작지만 분명히 하나의 세계인 태고에 사는 존재들은 인간으로서 충실하게 삶을 살고 사랑도 하다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난다. 계속되는 생명들에서 영원을 느끼지만 그 안에서 필멸하는 인간의 삶을 보면 이런게 역사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이게 평범한 역사의 연대기처럼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자연스럽게 묻어있는 환상성에 있다. 「태고의 시간들」 은 신화인지 역사인지 정확히 정의내릴 수 없는 지점에 서 있는 작품이나, 사실 이야기가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환상인지 실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국 인간들의 보편적인 삶이 모이고 흘러 신화가 되고 많은 생명이 순환하며 세계가 지속되는 것이므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공 붕괴
해도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너와 신뢰 관계를 쌓을 짝이 러브조이였는데 러브조이가 널 너무 좋아한 거지. 넌 그런 러브조이에게 연애 상담을 해버렸고." / p.61


이과가 써낸 SF 단편집은 어떤 모습일까. 물리학 전공자이며 천문학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은 사람이 쓴 우주란. 


공장에서 만들어진 인공 뇌도 '진짜'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부터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이 있는 시간선을 무한히 타임루프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까. 인간을 사랑하게 된 AI의 질투는 어떤 식으로 구현될지, 인간의 생기를 빨아들여 자기 몸을 완성하는 생명체 등 사랑과 동시에 배신과 좌절까지 다루는 여섯 편의 단편들은 무대만 미래이자 우주이고 배우들은 지극히 인간적이라 입체적이다. 


다른 SF와 차별화되는 특징 중 하나라면 우주과학 연구원이라는 작가의 특징이 진하게 묻어있다는 점이다. 마냥 두루뭉술하게 우주를 배경으로 독자적인 세계관을 잡아 펼쳐내는 가공의 세계가 아닌,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 강력한 설득력을 기반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믿음직스러운 작가의 이력을 바탕으로 들려주는 단편들은 읽기만 해도 우주에 대한 '알쓸신잡'이 하나씩 생겨난다. 사람이 맨몸으로 우주에 노출되어도 피가 끓지 않는다던가. (근데 예전에 <알쓸인잡>에서 체온으로 피가 끓어서 증발한댔나 그런 얘기가 나왔어서 같아서 검색해보니 다른 사유로 죽을 수는 있어도 낮은 압력으로 인해 혈액이 끓어 피부가 팽창해 죽지는 않는다고 한다.)


-

최근 읽은 어떤 픽션보다도 이과적 감성이 짙다. 지식이 가득하다는 단순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던지는 질문과 그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상당히 이성적이며 결론 도출 과정이 정교하다. 설명할 수 없는 인간만이 가진 감성으로, 그렇기에 가끔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판타지가 아닌 날카로운 질문이 가져오는 냉소적인 시선이 흔하다면 흔할 수 있는 주제를 흔하지 않게 만들어 낸다. 하드 SF만이 가져올 수 있는 잔혹함을 통한 묵직한 단편들은 어쩌면 여타 SF보다 가장 현실에 가까울 것이며, 픽션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언일 지도 모른다.


+


유토피아에 취하고 있었다. 유토피아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처럼 상미의 마음도 바꿔놓고 있었다. 매일 이어지는 고만고만한 행복은 과거의 고통이 잊히게 했고 미래에 대한 걱정도 사라지게 했다. (···) 유토피아는 사람들의 과거와 미래를 조금씩 재단하고 있었다. 과거의 고민과 철학을 잊고 현재의 안락에 빠져들어 미래의 파멸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 p.130〈텅 빈 거품〉


필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유토피아와 가능성이 있는 미지로의 여행. 둘 중 선택하라면 나는 뭘 선택할까. 이 단편의 주인공은 종말을 알려주지 않는 유토피아란 결국 기만이라고 했지만 그게 꼭 나쁜 걸까. 스스로도 후손을 남길 생각이 없고 인류가 꼭 대를 이어 잔존해야 하나 하고 생각하는 편이기도 해서 행복하게 살다가 한순간에 죽으면 그 또한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약간...행복한 돼지가 되는거지... 물론 이 모든 것에 확실히 선택권이 있어야 한다고도 생각함. 유토피아를 선택할지, 여행을 선택할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희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죽음을 뜻하는 한자 '사(死)'는 '부서진뼈 알(歹)' 자와 '사람 인(人)'자를 합쳐 만든 글자이다. 백골이 된 시신 앞에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는 형상이다. 죽는 이 옆에는 사람이 있다.


p.16


죽음이란 가깝고도 멀다. 말은 늘 가까이 있었고 실감은 언제나 느리게 다가온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빠르게 확산되는 동안 실제로 죽음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영혼의 존재나 사후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남아있는 자들의 '죽음 다음'의 이야기. '나의' 죽음보다는 '타인'의 죽음 뒤를 이토록 많이 생각해 본 적이 없어 읽는 내내 새롭고 슬펐다. 이제 슬슬 나도 내가 아는 자들을 떠나보낼 준비를 해야 하므로, 상상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없다'와 '있었다' 사이의 시차와 간극을 메우는 일이 슬픔이라는데, 저자가 그 슬픔의 모양이 어떤 형태여야 할지를 궁금해한 데에서 이 여정이 출발했다. 사람마다 슬픔의 모양은 다르겠지만 나도 저 질문을 가장 꼭대기에 둔 채로 책을 읽어나갔다. 내 곁에 있는 사람이 떠났을 때 저 간극을 어떤 모양으로 메울 수 있을까 떠올려가며.



저자는 장례 산업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듣고 실제로 그 현장에 뛰어들어 피부로 느낀 장례 문화를, 고인의 사후 남겨진 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책에 싣고 있다. 사람은 죽으면 끝이 아니다. 장례식장에서 곡을 한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남겨진 자들은 고인의 죽음을 '법대로', 절차대로 정리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온전히 고인을 기리고 남겨진 자들의 감정을 도닥이던 장례 문화는 산업화되어 간다. 왜 그런 의식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채, 말 그대로 허례허식처럼 남아 모든 순간에 금액이 산정된다. 장례를 치르는 데 천만 원 단위의 돈이 든다니 요즘은 준비 없으면 죽는 것도 쉽지 않다.


뭐 어쨌든, 간 사람은 갔고 정리해야 하는 사람은 정리해야 하는데 사실 닥치지 않으면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어디에서 사람의 장례 절차를 알려주겠는가. 사망진단서는 얼마나 뽑아야 하는지, 장례식장과 상조 회사의 차이는 무엇인지, 빈소 대여비니 안치실 요금이니 각종 요금은 어디에 지불해야 하는지... 기대하지 않던 가이드라인이 여기에 있었다. 죽음을 이야기한다면 사실 빠질 수 없는 이야기이지만, 타인의 죽음에 늘 엄숙해야 함을 내재적으로 습득하게 만드는 문화에서 죽음과 돈 문제는 말하기 쉬운 문제는 아니다. 특히 남겨진 자들은 늘 감정 문제에 초점이 맞춰지기 마련이니까. 저자는 죽음에 필요한 이야기를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현장에서 느낀 말들을 균형감 있게 적은 글들은 죽음 자체보다 그 이후 사람들의 삶을 새롭게 보여준다. 장례 문화에 대해 이토록 종합적이고 현장에 뛰어든 사람이 전할 수 있는 생생함이 전달되는 르포를 이 책 외에서 또 찾을 수 있을까. 



어떤 소설들을 읽으며 나의 죽음 뒤를 그려본 적이 있었다. 항상 바라는 바는 비슷했다. 내가 간 뒤에 나를 아는 사람이 많이 슬퍼하지 않기를, 내 삶의 마지막을 스스로 정리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기를, 그리하여 나의 흔적을 깨끗하게 지우고 정돈한 뒤에 떠날 수 있기를. 이승의 연이 '죽음'이라는 이벤트로 끊어질 수 있기를 바랐다.

어디엔가는 죽음이 삶의 모든 것을 털고 훌훌 떠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죽음 그 너머에까지 생의 연은 지속된다. 나의 죽음으로 슬퍼하는 사람이 있고, 타인의 죽음을 곁에서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죽음' 그 한 장면에 무수한 삶이 별빛처럼 반짝이고 얽힌다. 그저 슬픔과 상실의 죽음이 아니라 그 사건을 맞는 사람들과 노동, 각종 절차 그리고 다양한 위치에서 나름의 방법으로 애도하는 마음으로 맞이하는 '죽음'은 읽는 이의 감정에 하나의 단어로 정의되지 않는 파문을 일으킨다. 그저 죽음을 삶의 끝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이다. 죽은 이의 가는 길과 남은 것들을 산 자들이 정리해야 하므로. 결국 이 모든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역설적으로 사(死)가 생(生)을 이야기한다. 어쩐지 모르게 밀려오는 북받치는 감정을 꾹 참고 읽게 되는 묵직함이 책을 덮은 후에도 형태 없이 남아 긴 여운을 남긴다.




살아갈수록 ‘나’라는 명칭이 1인칭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님을 알게 된다. 나는 나를 만들어온 토대와 관계 속에서 규정되고, 장례는 우리가 생전 만들어온 유대와 관계, 정치와 가치관을 드러내고 재생산하는 장이다. 그러니 나를 나로서 만들어온 것들을 살펴 이별할 준비를 하고 싶다. 그 준비를 완수하고 싶다.


p.375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