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 붕괴
해도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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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와 신뢰 관계를 쌓을 짝이 러브조이였는데 러브조이가 널 너무 좋아한 거지. 넌 그런 러브조이에게 연애 상담을 해버렸고." / p.61


이과가 써낸 SF 단편집은 어떤 모습일까. 물리학 전공자이며 천문학으로 박사 학위까지 받은 사람이 쓴 우주란. 


공장에서 만들어진 인공 뇌도 '진짜'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부터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사람이 있는 시간선을 무한히 타임루프 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까. 인간을 사랑하게 된 AI의 질투는 어떤 식으로 구현될지, 인간의 생기를 빨아들여 자기 몸을 완성하는 생명체 등 사랑과 동시에 배신과 좌절까지 다루는 여섯 편의 단편들은 무대만 미래이자 우주이고 배우들은 지극히 인간적이라 입체적이다. 


다른 SF와 차별화되는 특징 중 하나라면 우주과학 연구원이라는 작가의 특징이 진하게 묻어있다는 점이다. 마냥 두루뭉술하게 우주를 배경으로 독자적인 세계관을 잡아 펼쳐내는 가공의 세계가 아닌,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 강력한 설득력을 기반으로 펼쳐지는 이야기. 믿음직스러운 작가의 이력을 바탕으로 들려주는 단편들은 읽기만 해도 우주에 대한 '알쓸신잡'이 하나씩 생겨난다. 사람이 맨몸으로 우주에 노출되어도 피가 끓지 않는다던가. (근데 예전에 <알쓸인잡>에서 체온으로 피가 끓어서 증발한댔나 그런 얘기가 나왔어서 같아서 검색해보니 다른 사유로 죽을 수는 있어도 낮은 압력으로 인해 혈액이 끓어 피부가 팽창해 죽지는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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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은 어떤 픽션보다도 이과적 감성이 짙다. 지식이 가득하다는 단순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던지는 질문과 그 문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상당히 이성적이며 결론 도출 과정이 정교하다. 설명할 수 없는 인간만이 가진 감성으로, 그렇기에 가끔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판타지가 아닌 날카로운 질문이 가져오는 냉소적인 시선이 흔하다면 흔할 수 있는 주제를 흔하지 않게 만들어 낸다. 하드 SF만이 가져올 수 있는 잔혹함을 통한 묵직한 단편들은 어쩌면 여타 SF보다 가장 현실에 가까울 것이며, 픽션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언일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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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에 취하고 있었다. 유토피아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처럼 상미의 마음도 바꿔놓고 있었다. 매일 이어지는 고만고만한 행복은 과거의 고통이 잊히게 했고 미래에 대한 걱정도 사라지게 했다. (···) 유토피아는 사람들의 과거와 미래를 조금씩 재단하고 있었다. 과거의 고민과 철학을 잊고 현재의 안락에 빠져들어 미래의 파멸을 생각하지 못하도록. / p.130〈텅 빈 거품〉


필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유토피아와 가능성이 있는 미지로의 여행. 둘 중 선택하라면 나는 뭘 선택할까. 이 단편의 주인공은 종말을 알려주지 않는 유토피아란 결국 기만이라고 했지만 그게 꼭 나쁜 걸까. 스스로도 후손을 남길 생각이 없고 인류가 꼭 대를 이어 잔존해야 하나 하고 생각하는 편이기도 해서 행복하게 살다가 한순간에 죽으면 그 또한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약간...행복한 돼지가 되는거지... 물론 이 모든 것에 확실히 선택권이 있어야 한다고도 생각함. 유토피아를 선택할지, 여행을 선택할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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