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은행나무 세계문학 에세 22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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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고(太古)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 / 첫 문장


'우주의 중심에 놓인 곳', 마치 에덴 동산을 떠올리게 하는 마을 '태고'를 배경으로 올가 토카르추크의 신화적 상상력이 무한하게 뻗어나가는 작품이다. 창세기와도 같은 도입부를 포함해 84개의 조각글로 직조해 낸 세계에서 작가는 신화와 실제 사건을 균형있게 섞어 약간은 불경하게, 그렇게 그 웅장함과 장렬함이 색다른 방식으로 펼쳐지도록 그려낸다.


작가가 창조해낸 독특한 세계의 주된 이야기 줄기는 태고에 사는 니에비에스키 가족, 미하우와 게노베파 - 미시아와 이지도르 - 아델카에 걸친 삼대의 이야기이며, 마치 신과 같은 시점에서 전개되는 '~의 시간'이라는 소제목들이 가득하다. 그 시간은 매우 짧고 개별로 존재하는 것 처럼 흩어져 있으며 인간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각종 동식물,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 자신의 시간을 독립적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개개인의 시간을 다룬 다양한 조각이 마침내 거대한 세계가 될 때, 2차원의 납작한 이야기는 3차원의 입체적인 서사로 살갗에 닿게 된다. 



또 하나의 특징은 영웅이 기록된 남성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 비극적인 역사 앞에서 보통은 기록되지 않았던 여성들의 이야기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은 크워스카를 육체적으로도 괴롭혔다. 어느 날 갑자기 그녀의 가슴이 신비한 기적의 모유로 가득 차올랐는데, 그 안에 신이 현존했다. (···) 이렇게 병을 고친 모두가 전쟁에서 죽었다. / p.195


가장 특징적으로 눈에 띄는 인물은 '크워스카'이다. 흔히 다뤄지는 너무나 가난하여 남성들에게 몸을 팔고, 숲속에서 아이를 낳는 뭐 그런 여성상. 그러나 크워스카는 그렇게 납작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몸을 파는 그 순간에도 크워스카는 자신이 스스로의 세계의 주체임을 강조했고, 이후 영험한 능력을 얻게 된 그녀는 가슴에서 나오는 신비한 모유로 사람들을 치유하지만, 모순적으로 그렇게 치유받은 사람들은 사람들은 모두 전쟁에서 죽게 된다. 마치 신은 거두어 갈 것은 반드시 거두어 간다는 듯이.


게다가 뱀과 인간 둘 다 사랑하고 사람의 형상을 하고 동물에 가까운 나쁜 인간과도 육체적 관계를 맺는다. 인간과 동식물, 신을 품고 있으면서 또한 저속한 면모까지 성녀 혹은 창녀 그 이분법적인 시선을 비웃듯 자유롭게 오가는 모습은 전형적인 남성 중심적 시각의 작품들을 부수는 쾌감이 느껴진다. 그녀는 성녀나 창녀, 선과 악 그 어느것이 아니라 그저 여성 그 자체로 오롯이 존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오래도록 세계를 지탱한 고정관념에 드는 작가의 반기이다.



작지만 분명히 하나의 세계인 태고에 사는 존재들은 인간으로서 충실하게 삶을 살고 사랑도 하다 죽음에 이른다. 그리고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난다. 계속되는 생명들에서 영원을 느끼지만 그 안에서 필멸하는 인간의 삶을 보면 이런게 역사가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이게 평범한 역사의 연대기처럼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자연스럽게 묻어있는 환상성에 있다. 「태고의 시간들」 은 신화인지 역사인지 정확히 정의내릴 수 없는 지점에 서 있는 작품이나, 사실 이야기가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환상인지 실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결국 인간들의 보편적인 삶이 모이고 흘러 신화가 되고 많은 생명이 순환하며 세계가 지속되는 것이므로.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읽은 뒤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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