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마코스 윤리학》의 시작 부분을 살펴볼까요? 제1권은 이른바 ‘좋음agathon‘에 관련된 질문입니다. ‘좋다‘는 게 뭘까요? 자주 쓰는 단어이면서도 정작 그 의미에 대해서는 곰곰이 생각하지 않은 채 습관처럼 사용하는 단어인데요, 아리스토텔레스는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삶에서 그냥 지나쳤던 ‘좋음‘을 《니코마코스 윤리학>을 시작하는 핵심질문으로 삼습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좋음‘을 다양하게 사용합니다. "그 사람 참

좋아"라든가 "이 의자는 좋습니다"처럼요. 이 일상 속의 진술을확대해나가보죠. 그 사람이 좋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잘생겼다는 뜻일까요? 돈이 많다는 뜻일까요? 권력이 있다는 뜻일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답합니다. 만약 우리가 ‘어떤‘ 사람에대해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에겐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그 무엇"이 있다고 판단내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좋음‘은 그것을 ‘마땅히‘ 그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음‘은 사람에게도 책상에게도 가능합니다.
좋은 책상이란 뭘까요? 책상 구실을 하는 책상이죠. 그게 좋은 책상입니다. 그것을 그것으로 만들어주고 있으니까요. 만약의자가 있는데, 의자 구실을 못 합니다. 사람이 앉았더니 무너져요. 의자는 마땅히 의자다워야 하는데, 당연히 의자로서 갖추어야 할 것을 겸비하지 못했으니 좋은 의자가 아니죠.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일까요? 인간다운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이래야 하며 인간이라면 이래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타인에 대한 연민을 갖고있는 사람을 우리는 사람다운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으로서의 덕목을 지키지 않고 심지어 부끄러워하지도 않는다면 "사람같지 않다"라고 평가내리지요.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은 사람으로 갖추어야 할, 사람을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요소를 갖고 있지못하기에 ‘좋은‘ 사람이 아닙니다.
‘좋음‘을 이렇게 정의하면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

니다. 세상에는 좋은 사람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좋은 사람도있고 좋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좋음‘과 ‘좋지 않음은 무엇에 의해서 결정되는지 당연히 궁금해집니다. 왜 어떤 사람은좋고 왜 어떤 사람은 좋지 않은지, 그 둘의 차이는 무엇인지, 왜어떤 국가는 좋고 어떤 국가는 좋지 않은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싶어집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면 그의 천성이 그를 좋은사람으로 만들어주었을까요? 아리스토텔레스의 대답에 따르면좋은 사람은 천성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좋음‘과 ‘좋지 않음을 갈라놓는 과정은 ‘탁월성‘ 혹은 ‘미덕‘이라고 번역되는 아레테are의 유무입니다. 탁월성은 일상생활에서 잘 안 쓰는 용어인데요. 좋음을 유지할 수 있는 품성 내지는 마음가짐 혹은 태도로바꾸어볼 수 있습니다.
어떤 것을 우리가 좋다고 이야기하려면 몇 가지 전제조건을만족시켜야 되는데, 첫번째 전제조건은 ‘궁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이다. 역시 일상에서 잘 안 쓰는 단어인데,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는 이를 "그 자체 때문에 추구할 가치가 있는것"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사랑에 비추어 이해해보죠. 사랑하니까 사랑한다고 말할 수있는 사랑이 궁극적 사랑입니다. 누구를 사랑하는데 그 사람이돈이 많아서도 아니고 잘생겨서도 아니고 권력자이기 때문도 아나고 오로지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가 그 사람이 그 사람이라서라고만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게 바로 ‘궁극적인 사랑인 것입

니다.
‘궁극적‘ 공부도 가능합니다. 공부를 하는 이유가 출세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면 궁극적인 공부가 아닙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에서 궁극적인 공부란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며 하고 있는 공부와 같은 것이죠. 지금 출세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공부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우리는 공부를 하고있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궁극적‘인 공부를 하고 있는 셈이에요.
어떤 것이 좋은 것이 되려고 하면 요구되는 두번째 조건은‘자족성’입니다. ‘자족성‘도 한자라서 조금 더 어렵게 느껴질 수있지만 우리 일상용어로 표현해보자면 "그것으로 충분하다"에해당될 것입니다. "당신은 왜 철학 책을 읽습니까? 철학 책을 읽어서 출세를 합니까, 돈을 법니까?"라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이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철학의 속성이 ‘궁극적‘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셈인데요. 더 나아가 이런 의문을 품는 사람은 ‘자족성‘
에 대한 개념도 없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철학 책을 읽으면서 내가 몰랐던 걸 깨닫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나 이거깨달았으니 승진시켜주세요, 로또에 당첨시켜주세요, 돈 주세요"
가 아니라 내가 깨달았다면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겁니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자족성‘입니다. 어떤 것이 궁극적‘
인 데다가 ‘자족성‘까지 겸하면 ‘완전성‘에 도달합니다.
자족성, 궁극성 그리고 완전성을 사랑을 통해 이해해볼까요?
누구나 꿈꾸는 ‘완전한‘ 사랑은 무엇일까요? ‘완전한‘ 사랑이 되기

위해서는 그 사랑이 무엇보다 ‘궁극적‘이고 ‘자족적‘이어야만 합니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하는 유일한 이유가 그 사람이어서라면그것은 궁극적인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면 그 사랑은 분명 자족적 사랑입니다. 궁극과 자족이 합쳐진 사랑은 완전한 사랑입니다. 완전한 사랑은 궁극적이고 자족적이니 ‘좋은‘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요.
행복eudaimonia 이라는 건 과연 뭘까요? 행복은 손에 쥘 수 있는 어떤 물질이 아니라 ‘좋음‘이 실현돼 있는 상태입니다. 행복은주관적 감정이 아니에요. 사람이 행복해지려고 하면 여러 가지조건이 필요합니다. 몸의 좋음도 필요하고, 혼의 좋음도 필요합니다. 몸의 좋음은 요즘 우리가 흔히 "몸 좋다"라는 의미와 다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로는 건강입니다. 이것이 내적 좋음이라면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외적 좋음도 필요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의미의 외적 좋음은 현대적 용어로 바꾸면 사회환경의 좋음에 가깝습니다. 한 사람이 외적 좋음으로 구성되어있는 사회 속에 있다면 그 사람은 좋음의 상태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이 높겠죠. 역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 외적인 좋음이없다면 그 사회 속 개인이 행복해지기 어렵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자이면서 동시에 사회학자의 면모를 지녔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한테는 항상 이 맥락이 등장해요. 한 개인이 좋음에도달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가 철학적 질문이라면,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좋음을 실현하려면 어떤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은 전형적인 사회과학적 질문이지요.

현대 학문 언어는 알레고리 언어가 아니거든요. 학문의 언어는 보편성을 지향하고 개별성을 지양합니다. 개념이 보편적이어야만 많은 걸 설명할 수 있다고 간주하는 게 학문 언어의 전제입니다. 보편적일수록 단어는 추상적이 되지요. 단어가 지나치게 추상적이면 설명할 수 있는 범위는 넓어지는데 설명의 설득력이 약해지는 약점이 있어요. 하지만 설득력에 한계가 생기는 것을 피하려고 구체적 사례로 하강하여 사례에만 머무르면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의 폭이 좁아집니다. 학문의 언어는 개념으로 설명할 수 있는 대상이 줄어드는 위험성을 피하려고, 구체성을 상실하더라도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추상적 개념을 주로 사용하죠. 추상의 힘이 커지면 상상력은 불가피하게 축소됩니다.
알레고리는 추상으로 상승하여 메타의 영역에 머무르면서 상상력이 축소된 학문의 언어와 달리 상상력을 자극하는 시적 비유를 적극적으로 수용합니다. 알레고리에서는 보편성을 추구하면서도 그 보편성이 지나쳐 구체성을 상실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보편을 위해 상승하는 힘과 구체를 위해 하강하는 힘이 교차합니다.
학자의 학문 언어와 달리 시적 언어는 알레고리를 능숙하게 사용합니다. 시적 주체의 언어에서 "바람이 휘파람 분다" "땅이 목마르다" "곡식이 살찐다" "물푸레나무가 눈물 흘린다"와 같은 비유 이외에도 "감각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관념을 사용하는"(새로운 학문, 292-293) ‘추한 가난‘ ‘슬픈 노년’ ‘창백한 죽음’과 같은 표현이 등장하는 것도 그 때문이죠.

한 그 일에 대해 형이상학적 죄가 있다는 거예요. 나치가 범죄를저지르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나치를 막는 행위를 하지 않아 나치가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다면, 그 행위 하지 않은 사람은 형이상학적인 죄를 범한 것입니다.
우리가 시장경제 체제를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시장경제 체제에 죄를 묻는다면 우리는 직접적인 죄를 저질렀다고 할수 없겠지요. 그렇다고 우리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것일까요?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물건을 무조건 싸게 살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소비자로서 물건을 싸게 살 수 있었던 이유가 노동의 대가를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저임금 노동자의 희생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야스퍼스의 말을 들어보시지요. "내가 범죄를 방지하기 위해할 수 있는 바를 행하지 않았다면, 나도 그 범죄에 대해 공동의책임을 진다. 내가 타인의 살해를 막기 위해 생명을 바치지 않고수수방관하였다면, 나는 법적·정치적·도덕적 죄 개념으로는 적절하게 파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유죄임을 느낀다."(《죄의 문제》,
87쪽) 최종 소비자로서 우리는 직접적인 죄가 없으니 떳떳하다고주장한다면, 인간의 상호연관성에 대한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시장경제 체제는 그 속에 살고 있는 시장형 인간을 점점 더 윤리적으로 무감각해지게 만듭니다. 야스퍼스는 형이상학적인 죄에서벗어나기 위해서는 ‘전환‘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에겐 또 다른 두번째 ‘거대한 전환‘이 필요합니다. 첫번째거대한 전환이 우리를 탈윤리적인 시장경제체제로 이끌었다면,

시장경제 체제가 빚어낸 야만적 파국 앞에서 우리는 윤리적인
‘대전환‘을 상상해야겠지요. 폴라니는 비시장적 관계를 확장하는것, 그래서 고대적 의미의 살림살이를 확장해나갈 수 있는 것 그리고 공동책임 감각을 회복한 공동체에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단박에 두번째 ‘거대한 전환‘이 이뤄지지는 않겠지요. 그럼에도불구하고 우리가 두번째 ‘거대한 전환‘을 기대하는 선택을 지속적으로 해나가고 그 선택이 누적된다면 언젠가는 이루어지지 않겠습니까? 폴라니는 그 선택을 우리에게 숙제로 남겨주었네요.

알아보는 것입니다. 허영심이 강한 사람은 경쟁자의 욕망을 궁금해합니다. 경쟁자의 욕망을 모방해야만 직성이 풀리기 때문이죠.
반면 열정이 있는 사람은 타인에게 무관심합니다. 자신이 무엇을하고 싶은지가 중요하지 타인의 욕망은 참조 대상이 아니죠. 열정 있는 사람은 욕망을 암시받지 않습니다. 열정 있는 사람은 인상을 받습니다. 암시를 받는 사람은 타인의 눈이 어디를 향하는지 살피지만, 인상을 받는 사람은 타인의 눈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눈이 어디로 가는지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인상은 "자신이 스스로 가지게 된 느낌인 반면 암시는 타인이 자기에게 해주는 것"이기에 인상은 "자연발생적이고 암시는 "주어지는 것입니다.(<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 78쪽) 암시에 의해서 움직이는 사람이 허영심을 품는다면, 인상에 의해서 움직인 사람은 열정을향합니다.
유행은 서로가 서로의 욕망을 모방하는 것이 꼬리에 꼬리를물고 이어질 때 생깁니다.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갖고 있는 사람이 유행을 추종하는 사람을 유행의 노예라고 비꼰다고허영심이 세상에서 사라질까요? 유행을 따르는 사람을 속물이라고 냉소적으로 비난하지 않으면서도 상호 모방의 악무한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를 고양시켜줘 허영심과 속물적 근성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계기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요? 지라르는 ‘낭만적 거짓으로부터의 탈출 기회를
‘소설적 진실‘의 시간에서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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