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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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무언가를 배우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배우는 걸까? 우리가 몰랐던 지식과정보일까? 스승은 우리에게 그런 것을 전해주는 사람일까? 1818년루뱅 대학의 한 프랑스 문학 강의실에서 벌어진 일은 우리의 이런생각을 무색하게 한다.
처음에는 선생도 학생도 참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당시덜란드령이었던 이 지역 학생들 대다수는 네덜란드어를 구사했다.
이들은 프랑스어를 전혀 몰랐다. 그런데 프랑스인 강사는 네덜란드어를 전혀 몰랐다. 학생은 선생의 언어를 모르고, 선생은 학생의 언어를 모르는데 무언가를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 가능할까. 그런데놀랍게도 그 수업을 마친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말하기 시작했고

프랑스어 문장을 거의 작가 수준으로 써냈다. 선생은 가르칠 수 없었지만, 학생들은 배울 수 있었던 것이다.
조제프 자코토! Jacotot. 당시 네덜란드어에 무지한 채로 네덜란드학생에 프랑스어를 가르쳤던, 아니 가르칠 수는 없었지만 배우게했던 선생의 이름이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 Ranciere는 자코토를
‘무지한 스승‘이라고 불렀다.(출처: 《무지한 스승>>> 학식 있는 선생이 그학식을 제자에게 전달한다는 통념에 비추어 본다면, ‘무지한 스승‘
이라는 말은 교육학의 통념에 관한 대단한 도발이 아닐 수 없다.
일단 자코토의 교수법, 즉 가르칠 수는 없었지만 배울 수는 있었던 그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살펴보자. 자코토는 자신과 학생들을 연결할 끈을 하나 찾았다. 당시에는 프랑스어-네덜란드어대역판으로 출간된 《텔레마코스의 모험》이라는 이야기책이 있었다. 이 책에는 프랑스어와 네덜란드어가 함께 실려 있었기에, 자코토는 학생들에게 네덜란드어 번역문을 참조해서 프랑스어를 배우게 했다. 그는 학생들로 하여금 텍스트 일부를 암송하게 하고 그것이 잘되는지만 확인했다. 자코토는 프랑스어 철자법도, 동사 변화도 도무지 가르칠 수 없었다. 네덜란드어를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생들은 자신이 아는 단어에 상응하는 프랑스어 단어를 보고는 이치를 깨달았다. 선생인 자코토는 여전히 네덜란드어를 말하지못했지만, 학생들은 어느 순간부터 프랑스어를 구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코토가 가르치지 않았고 가르칠 수도 없었던 프랑스어의

철자법과 동사 변화를 이해해버렸다. 재미있는 사실은, 스승인 자코토 자신도 학생들이 했던 체험을겪어봤다는 점이다. 1792년에 그는 중학교의 수사학 선생이었다.
그때는 프랑스 혁명 직후였기에 정세가 불안정했다. 그해에 무장봉기에 대한 호소를 듣고 그는 곧바로 포병대에 입대했다. 우연한 상황에서 동료의 추대를 받아 장교가 된 그는 별수 없이 포탄의 궤적을 이해해야 했는데, 놀랍게도 수준급의 포수 실력을 발휘했다. 수사학 교사이자 라틴 문헌학자였던 그가 대단한 포탄 사수가 된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화약을 다루는 부서에 얼마간 근무한 뒤에 군에 입대한 노동자에게 속성으로 화학을 가르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얼마 뒤에는 신설된 이공계 고등교육기관인 ‘에콜 폴리테크닉‘에서 행정직으로 근무하게 됐는데, 그와중에 수학자가되어 디종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쳤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그는 나중에 히브리어까지 가르쳤다. 항상 상황은 너무 위급했고 여러 경우에 그는 스승 없이 해내야 했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에게서 배우는 능력이 발휘된다는 걸 느꼈다.
언뜻 보면 대단한 능력자, 대단한 천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우리가 자코토를 천재라고 불러야 한다면, 천재성은 그의 화려한경력에 있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천재성은 자신의 경험 속에서도출해낸 결론, 즉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는 것, 인간은 모두 똑같은지적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 자신이 천재라면 모든 인간이 천재라

고 하는 결론을 도출한 데 있다.
"물론 이것이 곧 스승이 쓸데없는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것은 배움의 과정 중에 스승이 어디쯤에서 어떻게 개입하는가이다.
분명 자코토는 아이들에게 학식을 전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무언가를 하게 했다. 굳이 말하자면, 그는 아이들을 어떤 상황 속에몰아넣었다. 배움의 의지가 발휘되어야 하고 또 발휘될 수 있는 상황 속에서 배우는 자들이 혼자 설 수 있도록 했다. 자코토 자신도그랬고, 나중에는 그의 학생들도 그랬다. 그가 개입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학식 쪽이 아니라 의지 쪽이었다. 그는 제자로 하여금 선생의 내면에 있는 지식에 도달하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제자 안에있는 것을 스스로 발견하게 돕는 선생이었다. 자코토는 입버릇처럼말했다고 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당신들은 무엇이든할 수 있다"고 당신과 동일한 지적 능력이 명사도 만들었고, 수학기호도 만들었으며, 책을 썼고, 그림도 그렸다고.
사실 지적인 능력을 포함해서, 인간의 ‘능력‘은 잠재적이어서 그것이 모두에게 똑같이 부여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우리가 잴 수있는 것은 단지 지적 능력이 실현된 결과일 뿐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한 인간의 성취가 차등적 능력 때문인지, 동일한 잠재 능력의 차등적 발현 때문인지 알 길이 없다. 따라서 ‘인간의 능력은 평등하다‘는 것,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당신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선험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믿음이다(물론 그 반대, 즉 ‘인간의 능력은

불평등하다‘는 것 역시 믿음에 불과하다). 내생각에 자코토의 위대함은 그런믿음이 아니라 그것을 입증하려는 노력에 있다. 그는 누군가가 어떤 능력을 발휘하지 못할 때 그것을 능력이 불평등한 증거로 삼지않았다. 대신에 능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현실적으로 돕고자 했다.
이것이 그가 평등을 입증하는 방식이었다.
아마도 자코토 역시 세상에 ‘바보들‘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가 내린 ‘바보‘의 규정은 남들과 다르다. 바보는 능력이 없는 자가 아니다. 바보는 다만 ‘욕구가 멈추어버린 자들‘, ‘의지가 꺾인 자들‘이다. 의지가 꺾인 곳에서 지능은 발휘되지않는다. 불평등의 현실을 본래 주어진 것으로 받아들일 때, 또 현실사회에서 우월한 자들이 실제로 자신보다 우월한 자들이라고 생각해버릴 때, 우리는 정말 ‘바보‘가 되고 만다. 그러니까 ‘바보‘는 자신의 부족함을 아는 겸손한 사람이 아니라, 현실적 차별을 그대로인정하고 심리적으로 수긍하기 위해 자기 능력을 부인하고 자신을무시하는 사람이다.
자코토의 철학(그리고 그에 대한 랑시에르의 해석)은 스승과 교육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문제는 식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지능에서 열등하다고 믿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고, 그들을 자신들이빠져 있는 늪에서 빼내는 것이다. 무지의 늪이 아니라 자기 무시의늪에서 말이다." 교육이란 학생의 머릿속에 무언가를 집어넣는 일이 아니라 그들을 각성시키는 일이다. 내가 아는 것을 그가 아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기 스스로 해방된 인간임을 아는 것, 그 자신이 능력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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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능을 익히는 방법을 만들고 익히게 하려는 것은 다른 이야기인가?
관찰을 하면 관찰하는 방법을 알게된다는 말인데
잘 하는 방법을 교사가 안내하는 것이 교사의 책무인 것인가?

데카르트는 진리를 얻기 위해 우리에게는 ‘모루’와같은 ‘사전준비‘가 반드시 필요하므로 그것을 얻는 데 주력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준비 없이 곧바로 진리를 얻는 일에 착수해서는 안된다고. 그에 대해 스피노자는 진리를 얻기 위한 사전 준비는 없다고 말한다. 준비는 그 ‘준비를 위한 준비‘의 문제를 계속 제기할 것이고, 마치 공부를 한다면서 연필만 깎고 있는 학생처럼, 인식은 지연되고 결국에는 회의주의자들처럼 우리에게는 인식할 수 없다고말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어떻든 사람들은 실제로 금속을 연마하고 사유를 한다.
하지만 스피노자 식으로 말하자면 삶을 생산하기 위한 선행조건 같은 것은 없다. 방법이란 공부의 선행물이 아니라 공부의 결과물이다. 예컨대 수영법을 알고 난 후에야 물에 들어가 수영을 할 수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물에 들어가 조잡하게라도 수영을 시작한뒤에 우리는 수영법을 알게 된다. 사실 ‘수영법을 안다‘는 말은 ‘수영을 할 수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 ‘수영을 하는 것‘과
‘수영을 하는 방법‘은 별도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수영을 할 수 있는 한까지 우리는 또한 수영하는 방법을 알고 있는 셈이다.
데카르트가 든 예시에 스피노자의 생각을 풀어보자면 이렇다. 아마도 처음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에게는 ‘모루‘같이 세련된 것이 곧바로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망치로 쓸 수 있는 것은 주변에 널린자갈에 지나지 않고, 집게라고 하는 것은 그저 나뭇가지에 지나지않았을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인식의 시작이고 공부의 시작이다. 우리가 그것들로 뭔가를 만들어내는 한에서 말이다. 그다음에는 부싯돌을 서로 부딪쳐 불을 만들어내고 그 불로 청동을 뽑아낸다. 청동으로 만든 망치로 철광석을 캐내서 철을 추출하고 결국에는 모루도 만들어내고 투구와 칼을 생산해낼 것이다. 투구와칼을 만드는 데 필요한 ‘모루‘는, 청동 망치가 그렇고 나중에 얻는투구와 칼이 그렇듯이, 삶의 과정에서 얻는 것일 뿐 무슨 절대적인사전 준비물이 아니다.
내가 가진 것이 자갈과 나뭇가지뿐이어서 아직 공부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공부를 늦추는 핑계일 수는있어도 공부에 대한 참다운 인식은 아니다. 공부는 언제든 할 수있고, 당연한 말이지만, 바로 시작함으로써만 시작되는 것이다. 공부란 자신이 가진 미약한 것에서 시작해서 계속해서 삶을 생산하고 더 나아가는 것이지, 어떤 방법을 알아내서 단번에 도달하게 되는 게 아니다. 진리에 이르는 방법은 따로 없고 진리가 가는 길이진리의 방법이다. 그리고 공부란 그 길을 스스로 내면서 나아가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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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를 찾으려고 이뤄내려고 했던 나의 조급함에 뒤통수를 때리는 루쉰의 편지와 고병권의 해석

편집자 친구가 보내준 문장은 루쉰이 그의 연인 쉬광핑에 보낸편지에서 따온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연인에게 보낸 것은 아니고, 이 편지로부터 그들의 연애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루쉰은 1923년 가을에서 1925년 봄까지 북경여자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했는데, 그의 소설사 수업을 듣던 학생 중의 하나가 쉬광핑이었다. 당시 쉬광핑은 군벌과 결탁해서 학교를 수구적으로 이끌어가던 총장에게 맞서 싸우던 학생들의 대표였다. 처음에 학생들은열심히 싸웠으나 곧 학교 측의 회유로 분열되고 말았다. 쉬광핑은당시 교육계의 타락, 그리고 졸업 후 안정된 지위에 연연해서 쉽게타협하는 학생들의 처신에 울분을 토하며, 평소 누구보다 강직하다고 믿었던 선생 루쉰에게 긴 편지를 썼다. 게다가 모호한 답변은 사양이라며 선생을 꽤나 곤혹스럽게 했다.
삶의 나침반이 되어주기를 청하는 학생, 그것도 중국 사회의 불의에 대한 울분과 동료에 대한 낙담을 토로하는 학생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루쉰은 교육계에 대한 쉬광핑의 울분에 공감하

면서도 자신이 건넬 말이 미래에 대한 거짓 위로, 즉 성직자가 고통받은 이들에게 건네는 ‘내세에서의 구원‘ 같은 것이 될까 염려한다.
그러면서 사실은 자기 역시 쓰디쓴 현실을 위로해줄 ‘설탕’ 같은 것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백지 답안지를 내는 수밖에 없겠다"고고백한다. 그의 답변은 언뜻 어떤 포기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라는 게 금세 드러난다. ‘별수 없다‘는 답변을한 뒤 루쉰은 "이제부터는 그럭저럭 세상을 살아가는 나만의 철학에 대해 말하려고 하니 참고하라고 적었다. 설탕의 도움 없이 쓴맛을 쓴맛 그대로 느끼며 나아가는 루쉰의 문장, 그것은 이렇게 시작된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우리가 쉽게 부딪히는 난관이 두 가지있습니다. 그 하나는 갈림길, 즉 기로에 서는 겁니다. 갈림길 앞에서 목적(자) 선생은 슬피 울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라면결코 울며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우선 갈림길 입구에 앉아 잠시 쉬거나 한잠 자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연후에 내가 갈 길을 정하여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길을 가는 도중 자비로운 이를 만나면 그의 음식으로 허기를 채울지언정 결코 그에게 길을 묻지는 않겠습니다.
그 역시 앞길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호랑이를 만난다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호랑이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호랑이가 꼼짝 않고 서서 가지 않으면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을 겁니다. 나무에 허

리띠로 몸을 묶어서 설령 그대로 죽는다 해도 호랑이가 내 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나무가 없다면? 그러면 별수 없지요. 호랑이에게 통째로 삼켜진다 한들 어쩌겠어요.
두 번째 난관은 ‘막다른 길‘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완적(위나라 시인)은 통곡을 하며 돌아섰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결코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막다른 길 또한 갈림길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헤쳐 나가야지요. 온통 가시덤불로 뒤덮여 도저히 갈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한 길은 아직 본 적이 없으니까요. 나는 이 세상에 본디 막다른 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게다가 운 좋게도 이제껏 그런 난관은 아직 겪어보지 못했던것 같군요."
참고로 내가 인용한 문장은 《루쉰의 편지》에서 가져온 것인데내 벗이 보낸 번역은 조금 달랐다. 그 번역에서 몇 문장은 아주 어색하여 책과 비교하면 전체적으로 훨씬 거칠었다. 그러나 몇 군데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자비로운 이를 만나 그의 음식으로 허기를 채울지언정"이라는 부분을 "음식을 빼앗아서라도 허기를 면하겠다"로 옮겼고, "호랑이가 내 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다"는 부분은 "시체조차 호랑이에게 먹히지 않을 것이다"라고 번역했다. 모두 루쉰의 독기가 잘 묻어나는 번역이다. 게다가 나무가 없다면 호랑이에게 먹힐 수밖에 없다는 내용 뒤에는, 내가 읽은 책에는 없었던 문장 하나가 더 들어가 있었다. "나무가 없으면 방법이 없다. 잡

아먹으라고 하는 수밖에. 하지만 호랑이를 한 번 물어도 괜찮을 것이다." 편지를 원문으로 읽지 못한 터라 어느 번역이 옳은지 판단할 수 없지만, 호랑이에게 먹히는 순간에도 "호랑이를 한 번 물어보는" 그 근성이 역시 루쉰의 기질에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어떻든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괴롭다면 일단 한숨 자고 생각해보라는 것, 길을 걷다 배고파 죽을 지경이면 음식을 빼앗아서라도 살아남으라는 것, 호랑이를 만나 죽게 생겼으면나무 위로 피하고, 결국에 죽을 것이면 시체라도 넘기지 말 것, 별수 없이 호랑이에게 먹힌다면 그래도 한 번쯤은 호랑이를 물어보라는 것, 그야말로 모두가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말들이다. ‘막다른 길‘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다. ‘막다른 길‘이란 그것을 앞에 두고 울며 돌아가는 사람에게만 ‘막다른 것‘일 뿐 그것을 헤쳐 나가는사람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루쉰 스스로는 ‘운이 좋아‘ 그런 막다른길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막다른 길을 만나지 않은 것은 그가 어떤 길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막다른 곳이라고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벗이 보내준 루쉰의 글에는 다 담기지 않았지만, 사실 루쉰은쉬광핑에게 한마디를 더 건넸다. 쉬광핑에게 그는 ‘무작정 앞서는용사들일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참호 안에서 때로는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며 노래도 부르고 카드놀이도 하다가" "불시에 총성이 울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즉각 적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그런

‘참호전‘이라는 것도 있다고 했다. 이는 결코 나약한 태도가 아니다. 뭔가를 단번에 해결 지으려는 태도야말로 어떤 나약함과 관련이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초조함은 죄를 짓는다. 조금 여유를 갖고 다만 포기하지 않는 것. 이것이 초조함에 대한 루쉰의 답변이 아닐까생각한다. 그러니 당신이 길을 걷다가 난관에 봉착했다면 한숨 자는 것도 괜찮다. 애초에 먼 길을 갈 것이라고, 좀처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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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과 꾸준함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창작을 할 테지만 나는 타고나지 않은 것에 관해, 후천적인 노력에 관해 더 열심히 말하고 싶다. 재능은 선택할 수 없지만 꾸준함은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10년 전의 글쓰기 수업에서도 그랬다. 잘 쓰는 애도 매번 잘 쓰지는 않았다. 잘 못 쓰는애도 매번 잘 못 쓰지는 않았다. 다들 잘 썼다 잘 못 썼다를 반복하면서 수업에 나왔다. 꾸준히 출석하는 애는 어김없이 실력이늘었다. 계속 쓰는데 나아지지 않는 애는 없었다.

거사를 치러내는 한 어른의 흔적이 아이의 글에 적혀 있다. 글쓰기 수업에서 문득 떠올렸을 것이다. ‘그때 엄마가 뭐라고 했더라?‘
하며 엄마의 대사를 되살렸을 것이다. 틀리게 옮기지 않으려 과거를 유심히 돌아봤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작업이 글쓰기의 가장 좋은 점일지도 모르겠다. 무심코 지나친 남의 혼잣말조차도다시 기억하는 것. 나 아닌 사람의 고민도 새삼 곱씹는 것. 아이들이 주어를 타인으로 늘려나가며 잠깐씩 확장되고 연결되는 모습을 수업에서 목격하곤 한다.

동물을 가장 많이 귀여워하는 시대이자 동물을 가장 많이 먹는 시대를 살고 있다. 외면하는 능력은 자동으로 길러지는 반면,
직면하는 능력은 애를 써서 훈련해야 얻어지기도 한다. 무엇을보지 않을 것인가. 무엇을 볼 것인가 스스로에게 그리고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며 수업에서 나온다.

스물여덟 살의 나에게 원고지를 제출하고 긴장된 자세로 서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나는 이해할 수 있다. 일기장을 낸 뒤 콩닥콩닥하던 내 가슴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글을읽어내려가는 나의 옆얼굴을 조심스레 살핀다.
그런 기색을 느끼며 나는 아이들의 글을 읽는다. 듬뿍듬뿍반응하며 읽는다. 말로는 하지 않는다. 그가 문장을 쓰는 데 들인 수고에 비해 내 말은 너무 쉽고 가볍기 때문이다. 볼펜을 들고 아이의 마지막 문장 아래에 코멘트를 적는다. 코멘트를 적다가 금세 불안해진다. 신형철 평론가가 썼듯 글쓰기가 아주 느리게 말하는 일이라면, 느린 말하기 한 편을 완성하기까지 아이가들인 노력을 교사는 헤아려야 할 텐데, 자꾸 중요한 걸 놓친 기분이 들어서다.

보여줄 수 있는 일기를 쓴날들이 쌓이면 언젠가는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일기를 쓰게될 테니까. 보여줄 수 없는 일기를 쓴 날들이 쌓이고 또 쌓이면 다시 모두에게 보여줄 수 있는 글을 완성하게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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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니어링이 실천한 삶의 태도

1. 어떤 일이 일어나도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라.
2. 마음의 평정을 유지해라.
3. 당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아라.
4. 집, 식사, 옷차림을 간소하게 하고 번잡스러움을 피해라.
5. 날마다 자연과 만나고 발밑에 땅을 느껴라.
6. 농장일 또는 산책과 힘든 일을 하면서 몸을 움직여라.
7. 근심을 떨치고, 하루하루 살아라.
8. 날마다 다른 사람과 무엇인가 나누어라. 혼자라면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무엇인가 주고, 어떤 식으로든누군가를 도와라.
9. 삶과 세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라. 할 수 있는한 생활에서 유머를 찾아라.
10. 모든 것에 내재해 있는 하나의 생명을 관찰해라.
11. 모든 피조물에 애정을 가져라.

스콧 니어링, 그는 "간소하고 질서 있는 생활을 할 것. 미리 계획을 세울 것. 일관성을 유지할 것. 꼭 필요하지 않은 일을 멀리할것. 되도록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할 것. 그날그날 자연과 사람 사이의 가치 있는 만남을 이루어가고, 노동으로 생계를 꾸릴것. 자료를 모으고 체계를 세울 것. 연구에 온 힘을 쏟고 방향성을지킬 것. 쓰고 강연하며 가르칠 것. 계급투쟁 운동과 긴밀한 접촉을 유지할 것. 원초적이고 우주적인 힘에 대한 이해를 넓힐 것. 계속해서 배우고 익혀 점차 통일되고 원만하며 균형 잡힌 인격체를완성할 것"을 꿈꾸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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