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와 하녀 -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이너리티의 철학
고병권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뭔가를 찾으려고 이뤄내려고 했던 나의 조급함에 뒤통수를 때리는 루쉰의 편지와 고병권의 해석

편집자 친구가 보내준 문장은 루쉰이 그의 연인 쉬광핑에 보낸편지에서 따온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연인에게 보낸 것은 아니고, 이 편지로부터 그들의 연애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루쉰은 1923년 가을에서 1925년 봄까지 북경여자사범대학에서 강의를 했는데, 그의 소설사 수업을 듣던 학생 중의 하나가 쉬광핑이었다. 당시 쉬광핑은 군벌과 결탁해서 학교를 수구적으로 이끌어가던 총장에게 맞서 싸우던 학생들의 대표였다. 처음에 학생들은열심히 싸웠으나 곧 학교 측의 회유로 분열되고 말았다. 쉬광핑은당시 교육계의 타락, 그리고 졸업 후 안정된 지위에 연연해서 쉽게타협하는 학생들의 처신에 울분을 토하며, 평소 누구보다 강직하다고 믿었던 선생 루쉰에게 긴 편지를 썼다. 게다가 모호한 답변은 사양이라며 선생을 꽤나 곤혹스럽게 했다.
삶의 나침반이 되어주기를 청하는 학생, 그것도 중국 사회의 불의에 대한 울분과 동료에 대한 낙담을 토로하는 학생에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루쉰은 교육계에 대한 쉬광핑의 울분에 공감하

면서도 자신이 건넬 말이 미래에 대한 거짓 위로, 즉 성직자가 고통받은 이들에게 건네는 ‘내세에서의 구원‘ 같은 것이 될까 염려한다.
그러면서 사실은 자기 역시 쓰디쓴 현실을 위로해줄 ‘설탕’ 같은 것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니 "백지 답안지를 내는 수밖에 없겠다"고고백한다. 그의 답변은 언뜻 어떤 포기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라는 게 금세 드러난다. ‘별수 없다‘는 답변을한 뒤 루쉰은 "이제부터는 그럭저럭 세상을 살아가는 나만의 철학에 대해 말하려고 하니 참고하라고 적었다. 설탕의 도움 없이 쓴맛을 쓴맛 그대로 느끼며 나아가는 루쉰의 문장, 그것은 이렇게 시작된다.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우리가 쉽게 부딪히는 난관이 두 가지있습니다. 그 하나는 갈림길, 즉 기로에 서는 겁니다. 갈림길 앞에서 목적(자) 선생은 슬피 울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라면결코 울며 돌아가지 않을 겁니다. 우선 갈림길 입구에 앉아 잠시 쉬거나 한잠 자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연후에 내가 갈 길을 정하여 다시 출발하겠습니다. 길을 가는 도중 자비로운 이를 만나면 그의 음식으로 허기를 채울지언정 결코 그에게 길을 묻지는 않겠습니다.
그 역시 앞길을 모르는 건 마찬가지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만약호랑이를 만난다면 나무 위로 기어 올라가 호랑이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호랑이가 꼼짝 않고 서서 가지 않으면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로 나무에서 내려오지 않을 겁니다. 나무에 허

리띠로 몸을 묶어서 설령 그대로 죽는다 해도 호랑이가 내 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나무가 없다면? 그러면 별수 없지요. 호랑이에게 통째로 삼켜진다 한들 어쩌겠어요.
두 번째 난관은 ‘막다른 길‘에 다다르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 완적(위나라 시인)은 통곡을 하며 돌아섰다고 합니다. 하지만 나는 결코그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막다른 길 또한 갈림길에서와 마찬가지로 가시밭길이라 할지라도 헤쳐 나가야지요. 온통 가시덤불로 뒤덮여 도저히 갈 수 없을 정도로 험난한 길은 아직 본 적이 없으니까요. 나는 이 세상에 본디 막다른 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확신합니다. 게다가 운 좋게도 이제껏 그런 난관은 아직 겪어보지 못했던것 같군요."
참고로 내가 인용한 문장은 《루쉰의 편지》에서 가져온 것인데내 벗이 보낸 번역은 조금 달랐다. 그 번역에서 몇 문장은 아주 어색하여 책과 비교하면 전체적으로 훨씬 거칠었다. 그러나 몇 군데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자비로운 이를 만나 그의 음식으로 허기를 채울지언정"이라는 부분을 "음식을 빼앗아서라도 허기를 면하겠다"로 옮겼고, "호랑이가 내 몸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겠다"는 부분은 "시체조차 호랑이에게 먹히지 않을 것이다"라고 번역했다. 모두 루쉰의 독기가 잘 묻어나는 번역이다. 게다가 나무가 없다면 호랑이에게 먹힐 수밖에 없다는 내용 뒤에는, 내가 읽은 책에는 없었던 문장 하나가 더 들어가 있었다. "나무가 없으면 방법이 없다. 잡

아먹으라고 하는 수밖에. 하지만 호랑이를 한 번 물어도 괜찮을 것이다." 편지를 원문으로 읽지 못한 터라 어느 번역이 옳은지 판단할 수 없지만, 호랑이에게 먹히는 순간에도 "호랑이를 한 번 물어보는" 그 근성이 역시 루쉰의 기질에 잘 맞는다고 생각한다.
어떻든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괴롭다면 일단 한숨 자고 생각해보라는 것, 길을 걷다 배고파 죽을 지경이면 음식을 빼앗아서라도 살아남으라는 것, 호랑이를 만나 죽게 생겼으면나무 위로 피하고, 결국에 죽을 것이면 시체라도 넘기지 말 것, 별수 없이 호랑이에게 먹힌다면 그래도 한 번쯤은 호랑이를 물어보라는 것, 그야말로 모두가 사람을 오싹하게 만드는 말들이다. ‘막다른 길‘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다. ‘막다른 길‘이란 그것을 앞에 두고 울며 돌아가는 사람에게만 ‘막다른 것‘일 뿐 그것을 헤쳐 나가는사람에게는 그렇지가 않다. 루쉰 스스로는 ‘운이 좋아‘ 그런 막다른길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막다른 길을 만나지 않은 것은 그가 어떤 길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막다른 곳이라고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벗이 보내준 루쉰의 글에는 다 담기지 않았지만, 사실 루쉰은쉬광핑에게 한마디를 더 건넸다. 쉬광핑에게 그는 ‘무작정 앞서는용사들일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참호 안에서 때로는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시며 노래도 부르고 카드놀이도 하다가" "불시에 총성이 울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 즉각 적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그런

‘참호전‘이라는 것도 있다고 했다. 이는 결코 나약한 태도가 아니다. 뭔가를 단번에 해결 지으려는 태도야말로 어떤 나약함과 관련이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초조함은 죄를 짓는다. 조금 여유를 갖고 다만 포기하지 않는 것. 이것이 초조함에 대한 루쉰의 답변이 아닐까생각한다. 그러니 당신이 길을 걷다가 난관에 봉착했다면 한숨 자는 것도 괜찮다. 애초에 먼 길을 갈 것이라고, 좀처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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