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들의 대화

감당해야 할 그 모든 짐을 감수하고서라도, 아무리 생각해봐도 ‘솔직함’은 살아가는 데 장기적으로 ‘옳은 방법’인 것 같아. 솔직함을 포기하면 당장의 불편함이나 위기는 모면해도 가면 갈수록 근본적인 만족을 못 느끼고 ‘얕은 위안’으로 ‘겨우 연명’하거든.

다‘는 건 ‘그럼 이것만 하겠다‘와 전혀 다른 말이니까. 오히려 거꾸로 ‘난 이걸 할 거야‘라고 너무 강하게 집착하면 그게 더 무리해서 가능성을 좁히는 일이 돼버릴 수도있어. ‘이런 유형의 사람과는 관계를 맺지 않는다‘ ‘저런장소에는 가지 않겠다‘ 등, 아무튼 내가 하고 싶지 않은것들, 안 할 것들을 사소하게라도 조금씩 테두리를 정리해가다보면, 의외로 좋은 것들이 결과적으로 내곁에 남게 되고, 나만의 기준이 만들어지고, 저절로 나 시에대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 같아.
가끔 경우에 따라서는 ‘이건 하겠다‘나 ‘이건 안 하겠다‘를 넘어, ‘지금은 아무 선택도 하지 않겠다‘라는 선택지도 있어. 선택을 하지 않겠다는 선택. 지금은 이대로가만히 있겠다는 다짐도 어떤 상황에서는 대단한 의지와 중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더라. 특히 회사 같은 조직에 있다보면 비유를 하자면, 가끔 지진같은 상황이 벌어져서 사람들이 허둥지둥 난리가 나. 주변 눈치를 보는 이들, 아무개의 라인에서는 이들, 도망가는 이들 등등. 개중에는 그 소란에 초연해서, 담담히 그 상황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애들이 실은 알짜란다. 이런 게 또 은근 내공이 있어야 가능하거든.

아무튼 요조야, 나는 가끔 네가 조금 덜 퍼주고, 더 못돼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의 그런개방성이나 차별하지 않는 평등주의적 태도가 너만의어떤 부드러운 결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해.
생각해보렴. 만약 요조가 자신이 가진 자원을얄짤없이 관리하는 데 능한 사람이었다면, 너의 목소리는 결코지금의 그 나른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아니었을 거야. 남들보다 조금 더 마음이 헤퍼서 조금 더 손해보고 상처입는다 해도, 그래도 역시 ‘줄 수 있는‘ 사람, ‘주는 법을아는‘ 사람은 더없이 근사한 거 아닐까.

셋째, 강연 내용을 외울 때는 ‘시각적으로‘ 외워야 한다는 것. 강연에서 할 말을 보고 읽을 게 아니라면 어느 정도 머릿속에 외워둬야 하잖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방법은 이래. 강연록을 A4용지로 출력해서 반으로 잘라. 그런 다음, 강연할 때 들고 볼 수 있는 A5사이즈 인덱스 카드에 붙여 그 인덱스 카드를 돌려보면서 외우는데, 이때 중요한 건 거기 쓰인 문장을 하나하나 달달 암기하는 게 아니라, 각 인덱스 카드를 ‘시각적‘으로 ‘통으로‘ 기억해야 한다는 거야. 내용보다 ‘전체 구성‘ 혹은 뼈대를 순서대로 눈에 익혀버린다고나 할까. 그다음 단계로 각 인덱스 카드의 소제목, 핵심 단어, 핵심 문장을 머릿속에 익혀.

얼마 전에 어딘가에서 읽은 개념인데요. ‘점화효과‘라는게 있대요. 시간적으로 먼저 제시된 자극이 나중에 제시된 자극의 처리에 영향을 주는 촉진현상을 나타내는 인지심리학 용어라고 하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에게노출된 메시지들이 은연중에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거예요.

뭐 이런 이야기인데요. ‘아니, 고작 단어 몇 개로 인간이 이렇게 홱홱 변한단 말이야? 인간이 그렇게 바보냐!‘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지만, 실은 인간은 바보잖아요.
정말 바보가 맞아요. 그래서 단어 하나에도 인간은 영향을 받죠.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는 방송, 우리가 듣는음악, 우리가 만나는 친구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영향을받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 점화효과라는 것은 지속력이 길지는 않아서 일정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자기 모습대로 돌아온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노출된다면 은연중에 우리 태도의 일부가 되겠죠.

사람들은 왜 타인의 생각이 나와 같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할까. 상대의 ‘다름‘을 어째서 섣불리 ‘틀림‘으로 낙인찍는 걸까. 한데 요즘 같은 온라인 환경에선 우리는 너무나 많은 타인들을 너무나 가까이서 접하면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더욱 감당하기 버거워하는 것 같아. ‘톨레랑스‘ 즉 관용의 문제랄까. 나와타인 간에 생각의 차이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태도들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

는구나, 아, 그렇구나‘ 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그대로 두는 태도.
2. 나와 다른 부분이 조금 불편해서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
3. ‘왜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좀더 자세히알려줄래?‘라고 의견을 주고받거나 토론하는 것. 어느한쪽이 설득될 수도 있지만, 결론을 내린다거나 누가 이기는 것을 목표로 하는 건 아냐. 다만 서로의 관점을 좀더 깊이 이해하고 자신의 논리에서 부족한 부분을 자각하게 되는 효과는 있겠지.
한편 나와 타인의 생각에 차이가 있을 때 결코 보여서는안 되는 태도는 이런 거야.
‘너의 생각은 틀렸어. 그러니까………’뒤에 이어지는 말은 이래.
‘너의 생각은 틀렸어. 그러니까 입다물어.‘
‘너의 생각은 틀렸어. 그러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말해.‘
이건 분명히 폭력인데, 그 폭력성을 숨기기 위해 ‘정의‘나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명분을 빌려와서 휘두르는 부분이 가장 슬픈 것 같아

저는 지극히 경계하는 두 타입의 부류가 있어요하나는 극단적인 사람들이에요. 언니가 말한 ‘다름‘을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렇게 극단적인사람들 같다는 생각을 해요. 아무리 옳은 대의를 가지고있다고 해도, 아무리 정의로운 이론을 믿는 것이라 해도그것이 극단적이 될 때는 아주 위험해지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극단적 태도가 세상을 아주 단순하게 선과 악으로만 보게 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맞고 나랑 의견이다르면 너넨 다 적이야, 악이야, 이렇게 몰아가기 쉽고요.

저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을 참 좋아해요. 그리고그 말이 정말 어려운 말이라는 것도 알아가는 와중이에요. 늘 깨어서 세상을 바로 보고 옳은 편에 서야 하지만,
옳은 편에 서 있으면서도 깨어 있어야 해요. 옳은 편에 섰다고 안심하면서 내가 뭘 잘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옳은 편이라는 명분에 취해서옳지 않은 편에선 사람들보다 더 깜깜한 혐오 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 나자신을 의심하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지적받으면 괴로울 수는 있어. 하지만 그에 너무 상처받아서 자학하거나 공격하거나 징징대면 그건 프로의 자세가 아닌 것 같아. 적어도상대가 일리 있는 말을 하고 정확하게 문제를 짚어냈다면, 그것을 수용하고 문제를 바로잡고, 어서 털고 일어나 다시 또 걸어나가야지. 남탓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오로지 일이 잘되게끔 하는 일에만 집중하는 거지. 언제기회가 닿으면 일본드라마 <중쇄를찍자!>를 한번 봐봐.

인생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정돈해야겠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무엇이 나를 진심으로 행복하게 해주는지, 어떤 사람들을 가까이에 둘지, 대충 이맘때면 정리가 되어야 한다고 봐. 인생살이의 기본 방향성에 대한 방황은 더이상 질질 끌지 말고 아무리 늦어도30대에선 끝내야 하지 않겠니?
하지만 이렇게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심플하게 추린다고 해도 자신의 생각과 취향을 지나치게 고집하느라시야가 좁아지는 건 조심해야할 것 같아. 예를 들자면
"아, 난 이런 타입과 안 맞아"라며 바로 사람을 판단하고배제해버리거나, 나한테 어울린다고 믿는 옷스타일이나헤어스타일만 고수한다거나(이 대목에서 왜 나 찔리지?).
40대가 되어 자신의 핵심 가치를 추리면 그것을 단단한베이스로 두고 새로운 가능성과 변화를 모색해볼 수도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돼. 사소하게는 평소 안 가본장소에도 가보고, 안 입어본 색깔의 옷도 입어보고・・・・・

저는 정말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잘 모르겠거든요. 매 순간 저는 주변의 환경에 휘둘리기만 해요. 세상은 무의미하다는 소설을 읽으면 저도덩달아 삶은 무의미하다고 믿다가도, 감동적인 영화를보고 나면 삶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의미를 감각하게돼요. 어제는 좋았던 사람이 오늘은 갑자기 미워지기도하고요, 어제는 결코 동의할 수 없을 것 같던 의견을 오늘은 갑자기 이해할 수 있게 돼요. 이렇게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다보면 어떤 순간, 사람들이 저에게 ‘요조답다‘
‘신수진답다‘라고 말해요. 그럼 저는 언제나 기가 차서반문해요 나다운 게 대체 뭐냐고 나답다라고 말할 수있을 만한 어떤 태도가 나로부터 반복되고 있는 거냐고오늘날까지도 제 고민의 모이가 제가 마시는 맥주의

안주가 ‘나다운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지만, 여전히오리무중이에요. 다만 제가 겨우 아는 것은 나는 나를 모른다는 것, 그저 나도 어쩔 수 없는 나의 선택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나의 누적된 선택들이 나를 더욱 나로서 만들어준다는 것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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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총총 시리즈
황선우.김혼비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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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게 사는 멋진 사람들
일상에서의 작은 배려가 깃든 에피소드들을 읽으니
내 마음도 천천히 데워지는 기분

차올라 찰랑찰랑하던 여러 이유들에 마지막 한 방울이보태진 것뿐일거예요. 다만 여태 내가 쾌적하게 운동할수 있었던 환경에는 타인의 선의를 믿는 신뢰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구나 하는 점을 깨달았죠. 그리고 내가 수영을 그만둬도 당연히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는 점도요.
그건 요즘 제가 다른 운동에 빠져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마음먹으면 언제든 수영을 다시 할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일 거예요. 좀 쉬고 돌아가면 신경쓰이던 것들은 잊어버린 채 다시 다른 사람들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잠시 멈춘 것도 결국은 수영을 완전히 그만두지 않기 위해서라고요. 좀 이상한 말이지만 오래 지속하기 위해선 언제든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저도 북토크에서 그런 질문을 받아요. "작가님은 갓생을 살고 계신데 그러기 위해 어떻게 루틴을 유지하시냐"고 말이죠. 저는 그리 부지런하지도 못한 사람일 뿐이고 대체로 스스로에게 너그러우며 불규칙적으로 생활한다고 답합니다. 멀리 떨어진 타인의 일상이기에 매끄럽고일관되며 균형이 잘 잡힌 것처럼 보이는 착시일 뿐이라고요. 마치 다른 사람들 눈에 혼비씨는 회사 다니면서 꾸준히 지치지도 않고 글을 쓰는 듯 보이는) 것처럼 말이죠.

균형을 잡기 위해 기우뚱대는 과정은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벌어지잖아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치열하게 싸워야 하듯 일상의 항상성을 지키려면 계속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일-일-일-일이 아니라 일-쉼-일-놂이 될 때야 비로소 그런 변화의 리듬이 만들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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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주는 인생
이슬아 지음, 이훤 사진 / 디플롯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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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온 신간을 제일 먼저 읽는 기분은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맛있는 것을 먹는 기분
행복했다 그것만으로도!
이슬아 작가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좋아서 최근에 책 몇 편을 읽었는데 신간이 나와 또 집어들게 되었다.
늘 그랬듯 주변 사람들을 관찰하고 주변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담긴 글이다. 점점 그 범위가 확장 되는 듯 하다. 여러 일들에 과감히 도전하고 해내는 그녀가 멋지다. 그녀의 글을 읽고 나면 아랫배에 묵직하게 힘이 들어가는 느낌이다. 주변을 돌아보며 잘 살아보자고. 힘 내자고.

친구들은 최근에 본 시상식에 대해 수다 떨고 있다. 노래하는 여자가 김태리의 수상 소감을 회상한다.
"그렇게 큰 자리에서 진짜 자기 말투로 얘기하는 사람은 처음이었어. 그래도 되는 줄 몰랐는데."
친구들은 맞장구치며 김태리의 수상 소감을 성대모사한다. 절제되지 않은 흥분과 벅참과 우악스러운 몸짓을 흉내 내며 좋아한다.
"무대에서 자기 자신처럼 굴어도 된다고 믿을 수 있기까지 얼마나 어려웠을까?" 번역하는 여자의 질문이다. 나에

게나 남에게나 사랑스럽게 받아들여질 만한 나다움,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건지 모르겠는 그 자기다움을 지니는 것이 얼마나 도달하기 힘든 경지인지 다들 안다. 무대가 주는압력은 굉장하니까. 그 압력에 진땀을 흘리면서도 나 아닌것은 하지 않겠다는 자세로 버티는 사람을 보면 왠지 마음이 좋아진다.

부담과 해내고야 말겠다는 오기 속에서 그들은 훈련한다.
하루는 훈련을 마친 두 선수가 로커룸에서 대화를 주고받는다. 이 장면은 아주 짧게 슥 지나갈 뿐 영화의 하이라이트라고는 할 수 없다. 타자인 저스티스가 일루수인 해티버그에게 묻는다.
"뭐가 제일 겁나?(What‘s your biggest fear?)"
"공이 내 쪽으로 오는 거.(The baseball being hit in mygeneral direction.)"
저스티스가 피식 웃는다. 그도 그럴 것이 해티버그의포지션은 일루수다. 야구에서 공을 가장 많이 받고 잘 다루어야만 하는 일루수가 공이 자기한테 올 때 가장 무섭다고 대답한 것이다. 저스티스는 장난치지 말고 진짜로 말해보라고 재차 묻는다. 그러나 해티버그가 웃음기 없이 못 박는다.
" 농담 아니야. 진짜야.(No, seriously, that is.)"
그리고 이어지는 정희진 선생님의 목소리.
"제가 이 장면에서 엄청 울었어요. (…) 그러니까 이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이 감당이 안 된다는 얘기잖아요."
그러자 별안간 가슴이 미어졌다. 그러느라 신호가 바뀐 줄도 몰랐다. 뒤차가 클랙슨을 빵 울렸다. 슬퍼도 도로에 멈춰 있으면 안 된다.

에 멈춰 있으면 안 된다. 나는 운전대를 꼭 붙든 채로 선생님의 음성을 들으며 다시 차를 몰았다.
"직업이든 공부든 생계든 해야만 하는 일이 있잖아요.
회피할 수 없는 일, 회피하면 모든 게 무너지는 그런 일이누구한테나 있어요. 일루수한테 공은 그런 거죠. 그런데 그일이 자신감이 없는 거예요. 감당할 수가 없는 거예요."
잘 써야만 하는데 자신이 없는 원고를 마주할 때면 서툰 수영 실력으로 파도에 담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나는 놀랐다. 이 사람도 무서워한다는 것에 잘해야만 하는 소중한 일들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에 선생님에게도 글쓰기가 그런 공이라는 사실이 무지막지한 위안이 되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제안을 하나 드립니다. 약간 느슨한 협회를 만드는 거예요. 삶이 감당이 안 되는 사람들의 모임. 그런 모임을 만들어서 각자 상황을 얘기해보면 어떨까. (…) 세상의 모든일루수한테 마음을 조금 보내주는 거죠. 마음을 조금 보내는 게,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모르는 사람이어도 그 사람이 처한 상항을 서로 생각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것은 인생을 감당한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알고 보면 모두 각자의 삶에서 일루수다.

"요즘 ‘유래’라는 말을 계속 곱씹고 있어요. 예를 들어제 아이들인 예지와 예서의 유래는 당연히 진형과 순일이라생각해왔는데요. 오히려 저의 유래야말로 예지와 예서가아닐까, 저의 유래는 제 아내인 순일이 아닐까 싶은 거예요.
이런 세상 살아 무엇 하나 하는 사춘기적 우울을 여태 앓고있는 저에게, 삶의 지속가능성은 예지와 예서 그리고 순일로부터 유래하거든요.
유래는 존재의 기원일 텐데요. 제가 순남씨를 알게 된건 슬아 작가님 덕분이므로 적어도 저의 세계에서 순남씨는 슬아 작가님으로부터 유래하죠. 고양이 탐이도 작가님으로부터 유래하고요. 여성의 계보도 그렇습니다. 작가님이만들어가는 세상에서 잊힌 여자의 계보가 복원되죠. 우리는분명 누군가로부터 유래한 사람들인데요. 그가 저를 낳은사람일수도 있겠으나 저를 기억하게 만드는 사람들일 수도있겠어요."
그러자 이 책이 끝나도 끝나지 않으리란 걸 알게 되었다. 할머니의 삶이 끝났어도 나를 통해 선생님의 마음속에살아있듯이, 책이 내 손을 떠난 후에도 누군가에게는 이제막 시작되는 이야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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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해도 렌즈의 초점이 잘 맞지 않아 쌍안경을 다시 아버지에게 넘긴 참이었다. 나는 그 하얀 점이 백조인지 부표인지 아니면 더 흥미로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계속 응시하다가, 이유가 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갑자기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인생의 의미가 뭐예요?"
어쩌면 그 습지의 광활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습지의끝은 바다고, 바다의 끝은… 나로서는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이었는데-나는 돛단배가 기울어지다 넘어가는 어떤 가장자리를 머릿속에 그렸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우리 모두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걸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아버지는 쌍안경 뒤에서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씩 웃는 얼굴로 내게 돌아서면서 이렇게 단언했다. "의미는 없어!"
마치 내가 살아오는 내내, 그 질문을 할 순간만을 열렬히 기다려왔다는 듯 아버지는 내게 인생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통보했다.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어떤 식으로든 너를 지켜보거나 보살펴주는 신적인 존재는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낸 것일 뿐이니까.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란다."

"넌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은 아버지의 모든 걸음, 베어 무는모든 것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
아버지는 수년 동안 오토바이를 몰고, 엄청난 양의 맥주를 마시고,
물에 들어가는 게 가능할 때마다 큰 배로 풍덩 수면을 치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게걸스러운 자신의 쾌락주의에 한계를 설정하는 자기만의 도덕률을 세우고 또 지키고자 자신에게 단 하나의 거짓말만을 허용했다. 그 도덕률은 "다른 사람들도중요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이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라"는 것이었다.

그는 갈수록 더욱더 내 아버지와 비슷한 소리를 했다. 인간이살아가는 방법은 매번 숨 쉴 때마다 자신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거기서 자기만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어디를 들여다봐도 보이는 건 그것뿐이었다. 오만에 대한, 마술적사고에 대한 엄중한 경고. 예를 들어 진화론에 대한 강의 요강에서도, 우주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다룬 섹션 하나를 통째로 끼워 넣은 걸 볼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라고 그는 썼다. "자연에 참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자연의법칙은 바꿀 수 없으며… 그 법칙을 거스르는 자는 공기로 된 방망이를 휘두르는 셈이다." 나는 이런 언급들에 함께했을 열정적이고 통렬한 비난을, 공중으로 높이 치켜든 그의 주먹을 그저 상상만해볼 따름이다. 우주 앞에서 너무나 무력한 그 주먹을.

낌을 받았다.37 이미 그는 《물고기는 알고 있다: 물속에 사는 우리사촌들의 사생활What a Fish Knows: The Inner Lives of Our Underwater Cousins》이라는 책을 써서, 물고기들의 인지가 얼마나 폭넓고 복잡한지 보여주었다. 그에 따르면 물고기들은 우리보다 더 많은 색을 보며,
특정한 기억 과제에서 우리보다 더 나은 실력을 보이고, 도구를 사용하며, 바흐의 음악과 블루스를 구별할 줄 안다고 한다.38 게다가어떤 종들은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고도 한다. 나는 그에게농담하듯 물었다. "하, 이제 모두 어떻게 해야 할까요? 생선 먹기를그만둬야 하나요?" 그러자 그가 "예" 하고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아직 거기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그의 논지, 그러니까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는 그 생물들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인지적으로 훨씬 복잡하다는 점에 대해서는 분명히 동의한다. 그 "어류"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경멸적인 단어다. 우리가 그 복잡성을 감추기 위해, 계속 속 편히 살기 위해, 우리가 실제보다 그들과 훨씬 더 멀다고 느끼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다.
에모리대학의 유명한 영장류학자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은이것이 인간이 항상 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상상 속 사다리에서 정상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와 다른 동물들사이의 유사성을 실제보다 과소평가하는 것 말이다. 드 발은 과학자들이 나머지 동물들과 인간 사이에 거리를 두기 위해 기술적인언어를 사용함으로써 가장 큰 죄를 범하는 집단이라고 지적한다.
그들은 침팬지의 "키스"를 "입과 입 접촉"이라고 부르고, 영장류의
"친구"를 "특히 좋아하는 제휴 파트너"라고 부르며, 까마귀와 침팬지가 도구를 만들 수 있다는 증거에 대해서는 인류를 정의하는 종류의 도구 제작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러다가 물고기에 관해 생각한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은빛 물고기 한 마리가 내 머릿속에서 녹아 사라지는 모습을 그려본다.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이 세계에 관해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은 또 뭐가 있을까? 우리가 자연 위에그은 선들 너머에 또 어떤 진실이 기다리고 있을까? 또 어떤 범주들이 무너질 참일까? 구름도 생명이 있는 존재일 수 있을까? 누가알겠는가. 해왕성에서는 다이아몬드가 비로 내린다는데. 그건 정200 201말이다. 바로 몇 년 전에 과학자들이 그 사실을 알아냈다. 우리가세상을 더 오래 검토할수록 세상은 더 이상한 곳으로 밝혀질 것이다.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 안에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잡초 안에 약이 있을지도 모른다. 당신이 얕잡아봤던사람 속에 구원이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 내가 그 좋은 것들을 누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내가 얻으려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다. 파괴와 상실과 마찬가지로 좋은 것들 역시 혼돈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죽음의 이면인 삶. 부패의 이면인 성장.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않을 가장 좋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이 폭풍우는 짜증스럽기만 한 일일까? 어쩌면 그것은 거리를혼자 차지할 수 있는 기회, 온몸을 빗물에 적셔볼 기회, 다시 시작할 기회일 수도 있다. 이 파티는 당신이 예상하는 것만큼 따분할까? 어쩌면 그 파티에서는 담배를 입에 물고댄스플로어 뒷문 옆에서 당신을 기다리는 친구가 있을지도 모르고, 그 친구는 앞으로수년간 당신과 함께 웃고 당신의 수치심을 소속감으로 바꿔줄지도 모른다.
내가 세계를 이런 식으로 보는 데 익숙하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나의 확실성을―그러니까 나의 테디베어를ㅡ꼭 붙잡고 있고,
원망은 늘 그대로 남아 있으며, 나의 두려움은 늘 빵빵하게 차 있고, 지구는 납작하다. 하지만 그러다가 나는, 이를테면 인체에서
"사이질interstitium"3이라는 새로운 기관이 발견되었다는 기사를 읽는다. 늘 거기 있었지만 어째선지 수천년 동안 사람들이 놓치고 있었던 것. 그러면 세계는 조금 더 벌어지며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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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해도 렌즈의 초점이 잘 맞지 않아 쌍안경을 다시 아버지에게 넘긴 참이었다. 나는 그 하얀 점이 백조인지 부표인지 아니면 더 흥미로운 무엇인지 궁금해하며 계속 응시하다가, 이유가 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갑자기 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다. "인생의 의미가 뭐예요?"
어쩌면 그 습지의 광활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습지의끝은 바다고, 바다의 끝은… 나로서는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이었는데-나는 돛단배가 기울어지다 넘어가는 어떤 가장자리를 머릿속에 그렸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우리 모두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걸까‘ 하는 궁금증이 생겼다.
아버지는 쌍안경 뒤에서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씩 웃는 얼굴로 내게 돌아서면서 이렇게 단언했다. "의미는 없어!"
마치 내가 살아오는 내내, 그 질문을 할 순간만을 열렬히 기다려왔다는 듯 아버지는 내게 인생에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통보했다. "의미는 없어. 신도 없어. 어떤 식으로든 너를 지켜보거나 보살펴주는 신적인 존재는 없어. 내세도, 운명도, 어떤 계획도 없어. 그리고 그런 게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믿지 마라. 그런 것들은 모두 사람들이 이 모든 게 아무 의미도 없고 자신도 의미가없다는 무시무시한 감정에 맞서 자신을 달래기 위해 상상해낸 것일 뿐이니까. 진실은 이 모든 것도, 너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란다."

"넌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은 아버지의 모든 걸음, 베어 무는모든 것에 연료를 공급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너 좋은 대로 살아"
아버지는 수년 동안 오토바이를 몰고, 엄청난 양의 맥주를 마시고,
물에 들어가는 게 가능할 때마다 큰 배로 풍덩 수면을 치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아버지는 언제나 게걸스러운 자신의 쾌락주의에 한계를 설정하는 자기만의 도덕률을 세우고 또 지키고자 자신에게 단 하나의 거짓말만을 허용했다. 그 도덕률은 "다른 사람들도중요하지 않기는 매한가지지만, 그들에게는 그들이 중요한 것처럼 행동하며 살아가라"는 것이었다.

그는 갈수록 더욱더 내 아버지와 비슷한 소리를 했다. 인간이살아가는 방법은 매번 숨 쉴 때마다 자신의 무의미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거기서 자기만의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말이다.
어디를 들여다봐도 보이는 건 그것뿐이었다. 오만에 대한, 마술적사고에 대한 엄중한 경고. 예를 들어 진화론에 대한 강의 요강에서도, 우주 앞에서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다룬 섹션 하나를 통째로 끼워 넣은 걸 볼 수 있다. "자연은 인간의 사정을 봐주지 않는다"라고 그는 썼다. "자연에 참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자연의법칙은 바꿀 수 없으며… 그 법칙을 거스르는 자는 공기로 된 방망이를 휘두르는 셈이다." 나는 이런 언급들에 함께했을 열정적이고 통렬한 비난을, 공중으로 높이 치켜든 그의 주먹을 그저 상상만해볼 따름이다. 우주 앞에서 너무나 무력한 그 주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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