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당해야 할 그 모든 짐을 감수하고서라도, 아무리 생각해봐도 ‘솔직함’은 살아가는 데 장기적으로 ‘옳은 방법’인 것 같아. 솔직함을 포기하면 당장의 불편함이나 위기는 모면해도 가면 갈수록 근본적인 만족을 못 느끼고 ‘얕은 위안’으로 ‘겨우 연명’하거든.
다‘는 건 ‘그럼 이것만 하겠다‘와 전혀 다른 말이니까. 오히려 거꾸로 ‘난 이걸 할 거야‘라고 너무 강하게 집착하면 그게 더 무리해서 가능성을 좁히는 일이 돼버릴 수도있어. ‘이런 유형의 사람과는 관계를 맺지 않는다‘ ‘저런장소에는 가지 않겠다‘ 등, 아무튼 내가 하고 싶지 않은것들, 안 할 것들을 사소하게라도 조금씩 테두리를 정리해가다보면, 의외로 좋은 것들이 결과적으로 내곁에 남게 되고, 나만의 기준이 만들어지고, 저절로 나 시에대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될 것 같아. 가끔 경우에 따라서는 ‘이건 하겠다‘나 ‘이건 안 하겠다‘를 넘어, ‘지금은 아무 선택도 하지 않겠다‘라는 선택지도 있어. 선택을 하지 않겠다는 선택. 지금은 이대로가만히 있겠다는 다짐도 어떤 상황에서는 대단한 의지와 중심을 필요로 하는 것이더라. 특히 회사 같은 조직에 있다보면 비유를 하자면, 가끔 지진같은 상황이 벌어져서 사람들이 허둥지둥 난리가 나. 주변 눈치를 보는 이들, 아무개의 라인에서는 이들, 도망가는 이들 등등. 개중에는 그 소란에 초연해서, 담담히 그 상황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애들이 실은 알짜란다. 이런 게 또 은근 내공이 있어야 가능하거든.
아무튼 요조야, 나는 가끔 네가 조금 덜 퍼주고, 더 못돼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너의 그런개방성이나 차별하지 않는 평등주의적 태도가 너만의어떤 부드러운 결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해. 생각해보렴. 만약 요조가 자신이 가진 자원을얄짤없이 관리하는 데 능한 사람이었다면, 너의 목소리는 결코지금의 그 나른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아니었을 거야. 남들보다 조금 더 마음이 헤퍼서 조금 더 손해보고 상처입는다 해도, 그래도 역시 ‘줄 수 있는‘ 사람, ‘주는 법을아는‘ 사람은 더없이 근사한 거 아닐까.
셋째, 강연 내용을 외울 때는 ‘시각적으로‘ 외워야 한다는 것. 강연에서 할 말을 보고 읽을 게 아니라면 어느 정도 머릿속에 외워둬야 하잖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방법은 이래. 강연록을 A4용지로 출력해서 반으로 잘라. 그런 다음, 강연할 때 들고 볼 수 있는 A5사이즈 인덱스 카드에 붙여 그 인덱스 카드를 돌려보면서 외우는데, 이때 중요한 건 거기 쓰인 문장을 하나하나 달달 암기하는 게 아니라, 각 인덱스 카드를 ‘시각적‘으로 ‘통으로‘ 기억해야 한다는 거야. 내용보다 ‘전체 구성‘ 혹은 뼈대를 순서대로 눈에 익혀버린다고나 할까. 그다음 단계로 각 인덱스 카드의 소제목, 핵심 단어, 핵심 문장을 머릿속에 익혀.
얼마 전에 어딘가에서 읽은 개념인데요. ‘점화효과‘라는게 있대요. 시간적으로 먼저 제시된 자극이 나중에 제시된 자극의 처리에 영향을 주는 촉진현상을 나타내는 인지심리학 용어라고 하는데, 쉽게 이야기하면 우리에게노출된 메시지들이 은연중에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는거예요.
뭐 이런 이야기인데요. ‘아니, 고작 단어 몇 개로 인간이 이렇게 홱홱 변한단 말이야? 인간이 그렇게 바보냐!‘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지만, 실은 인간은 바보잖아요. 정말 바보가 맞아요. 그래서 단어 하나에도 인간은 영향을 받죠.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는 방송, 우리가 듣는음악, 우리가 만나는 친구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영향을받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 점화효과라는 것은 지속력이 길지는 않아서 일정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자기 모습대로 돌아온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복적으로 노출된다면 은연중에 우리 태도의 일부가 되겠죠.
사람들은 왜 타인의 생각이 나와 같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할까. 상대의 ‘다름‘을 어째서 섣불리 ‘틀림‘으로 낙인찍는 걸까. 한데 요즘 같은 온라인 환경에선 우리는 너무나 많은 타인들을 너무나 가까이서 접하면서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더욱 감당하기 버거워하는 것 같아. ‘톨레랑스‘ 즉 관용의 문제랄까. 나와타인 간에 생각의 차이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태도들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이렇게 생각하는데 너는 조금 다르게 생각하
는구나, 아, 그렇구나‘ 하고 차이를 인정하고 그대로 두는 태도. 2. 나와 다른 부분이 조금 불편해서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 3. ‘왜 너는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다. 좀더 자세히알려줄래?‘라고 의견을 주고받거나 토론하는 것. 어느한쪽이 설득될 수도 있지만, 결론을 내린다거나 누가 이기는 것을 목표로 하는 건 아냐. 다만 서로의 관점을 좀더 깊이 이해하고 자신의 논리에서 부족한 부분을 자각하게 되는 효과는 있겠지. 한편 나와 타인의 생각에 차이가 있을 때 결코 보여서는안 되는 태도는 이런 거야. ‘너의 생각은 틀렸어. 그러니까………’뒤에 이어지는 말은 이래. ‘너의 생각은 틀렸어. 그러니까 입다물어.‘ ‘너의 생각은 틀렸어. 그러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말해.‘ 이건 분명히 폭력인데, 그 폭력성을 숨기기 위해 ‘정의‘나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명분을 빌려와서 휘두르는 부분이 가장 슬픈 것 같아
저는 지극히 경계하는 두 타입의 부류가 있어요하나는 극단적인 사람들이에요. 언니가 말한 ‘다름‘을인정하지 않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이렇게 극단적인사람들 같다는 생각을 해요. 아무리 옳은 대의를 가지고있다고 해도, 아무리 정의로운 이론을 믿는 것이라 해도그것이 극단적이 될 때는 아주 위험해지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그 극단적 태도가 세상을 아주 단순하게 선과 악으로만 보게 하잖아요. 그러니까 내가 맞고 나랑 의견이다르면 너넨 다 적이야, 악이야, 이렇게 몰아가기 쉽고요.
저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을 참 좋아해요. 그리고그 말이 정말 어려운 말이라는 것도 알아가는 와중이에요. 늘 깨어서 세상을 바로 보고 옳은 편에 서야 하지만, 옳은 편에 서 있으면서도 깨어 있어야 해요. 옳은 편에 섰다고 안심하면서 내가 뭘 잘못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옳은 편이라는 명분에 취해서옳지 않은 편에선 사람들보다 더 깜깜한 혐오 속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계속 나자신을 의심하고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물론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지적받으면 괴로울 수는 있어. 하지만 그에 너무 상처받아서 자학하거나 공격하거나 징징대면 그건 프로의 자세가 아닌 것 같아. 적어도상대가 일리 있는 말을 하고 정확하게 문제를 짚어냈다면, 그것을 수용하고 문제를 바로잡고, 어서 털고 일어나 다시 또 걸어나가야지. 남탓하지 않고 불평하지 않고오로지 일이 잘되게끔 하는 일에만 집중하는 거지. 언제기회가 닿으면 일본드라마 <중쇄를찍자!>를 한번 봐봐.
인생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정돈해야겠지.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무엇이 나를 진심으로 행복하게 해주는지, 어떤 사람들을 가까이에 둘지, 대충 이맘때면 정리가 되어야 한다고 봐. 인생살이의 기본 방향성에 대한 방황은 더이상 질질 끌지 말고 아무리 늦어도30대에선 끝내야 하지 않겠니? 하지만 이렇게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심플하게 추린다고 해도 자신의 생각과 취향을 지나치게 고집하느라시야가 좁아지는 건 조심해야할 것 같아. 예를 들자면 "아, 난 이런 타입과 안 맞아"라며 바로 사람을 판단하고배제해버리거나, 나한테 어울린다고 믿는 옷스타일이나헤어스타일만 고수한다거나(이 대목에서 왜 나 찔리지?). 40대가 되어 자신의 핵심 가치를 추리면 그것을 단단한베이스로 두고 새로운 가능성과 변화를 모색해볼 수도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돼. 사소하게는 평소 안 가본장소에도 가보고, 안 입어본 색깔의 옷도 입어보고・・・・・
저는 정말 제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잘 모르겠거든요. 매 순간 저는 주변의 환경에 휘둘리기만 해요. 세상은 무의미하다는 소설을 읽으면 저도덩달아 삶은 무의미하다고 믿다가도, 감동적인 영화를보고 나면 삶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의미를 감각하게돼요. 어제는 좋았던 사람이 오늘은 갑자기 미워지기도하고요, 어제는 결코 동의할 수 없을 것 같던 의견을 오늘은 갑자기 이해할 수 있게 돼요. 이렇게 이랬다가 저랬다가 하다보면 어떤 순간, 사람들이 저에게 ‘요조답다‘ ‘신수진답다‘라고 말해요. 그럼 저는 언제나 기가 차서반문해요 나다운 게 대체 뭐냐고 나답다라고 말할 수있을 만한 어떤 태도가 나로부터 반복되고 있는 거냐고오늘날까지도 제 고민의 모이가 제가 마시는 맥주의
안주가 ‘나다운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이지만, 여전히오리무중이에요. 다만 제가 겨우 아는 것은 나는 나를 모른다는 것, 그저 나도 어쩔 수 없는 나의 선택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나의 누적된 선택들이 나를 더욱 나로서 만들어준다는 것뿐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