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같은 일은 결코 가능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은 가해민족의 의식 속으로 아주 음험하게 파고들었다. 다시 말해 그 범죄 행위는 그것이 진행되는 동안에도 독일인들의 집단의식에서 깡그리 배제되어 있었다. 선의를 가진 사람조차 자신들의 추방된 이웃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깊이 생각하기를 거부했다는 사실은 오늘날까지도 인간종에 대한 신뢰를 바닥부터 뒤흔들어 놓는다. 물론 다수의 동시대인은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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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일기

그 무렵의 내가 찾던 것은 고요함과 순수한 몰두였고,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게끔 하는 쓸데없는 술자리와 허무한 연애로부터의 완전한 격리였다. - P12

남쪽에서

그 짧은 이야기가 너무 좋아서, 몸속에 흩어진 조각들이 맞춰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쓰는 여자가 있었다. 내가 모르게 무언가를 쓰고, 사라진 여자들이 있다. - P75

숙희가 만든 실험영화

그건 숙희가 발명한 것도, 숙희만의 것도 아니었다. 어떤 사회적 의무와도 같은 선택지로서, 제대로 된 티켓을 구하지 못한다면 억지로라도, 심지어 절차를 어겨서라도 반드시 그 물결에 올라타야만 한다고 여겨졌던 길이었다. - P140

시차와 시대착오

그는 눈과 귀를 닫았다. 그편이 살기에더 편했으므로 그는 그렇게 하는 쪽을 선택했다. 누가 자신을 감시라도 하듯 그는 앞장서서 강한 쪽의 입장을 옹호하고 스스로를 그와 동일시했다. - P172

그녀는 스스로가 만든 정교한 함정에 빠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너무나도 깊숙이 들어와버렸다. 자신이 인생에 무슨 일을 저지른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수록 그녀는 미로 속에서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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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네온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13
조이스 캐롤 오츠 지음, 이수영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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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로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이 글의 그로테스크함이 활자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동물계에 여성이나 다른 약자로 태어났다는 것도 이미 반쯤 접힌 거구요. 페미니즘을 성대결로만 인식하는 사고라면 이 책이 장르로 읽힐 수도 있겠네요. 약자임을 잊어버릴 만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되는 작가가 지속적으로 이런 글을 쓰고, 현실에 찰싹 들러붙은 감각을 가질 수 있다는 게 놀라워요. 그 입장에 서서 공감하는 것과 그 입장인 것은 또 다르지만, 그 입장이 되보려는 공감조차 형성할 수 없다면 이 작가의 감각은 영원히 제대로 못 읽히 겠죠. 스웨덴 학술원이 아직도 실재적으로는 강자의 감각에 잠겨 있다면 노벨문학상도 어렵겠지만, 수상을 기원해 봅니다. 깊숙히 서글픔이 느껴지는 글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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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네온

어스름, 가슴 아픈 시간. 
강물 위에서 천천히 기울던 빛이 
눈처럼 녹아내린다.
‘네온‘이 시작되는 시간. 
갑작스럽게, 미묘하게.
길고 눈부신 낮 내내 기다린 사람이 아니면 
알아채는 사람은 거의 없다. - P341

궁금한

호기심은 젊음의 습관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자 하는 절박함.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통제하기를 열망하는
청춘의 저주. 
반면 내 나이에는 
다른 사람은 고사하고 내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도 
거의 관심이 없습니다. - P81

원한다는 것

‘욕구‘가 얼굴에 뻔히 드러난 거다. 
흑요석이 희미한 빛 속에서도 번득이듯이.
그는 느긋하게 그녀에게 다가간다. - P143

친밀감

그렇게 가는 길에 난데없이 나타난, 
너를 기다리는 키 큰 형체.
"부인, 안녕하세요! 차까지 바래다줄게요. 이 근방이 안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당신처럼 혼자인 여자한테요." - P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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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들은 아랍 세계에서 추방되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 
사다리꼴을 이루고 앉아 있는 형제들, 
수프를 데우고 있는 어머니, 
이렇게 군주가 앞에 있거나 밖에 있거나, 
개같이 복종하는 인간들이 있어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 P31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주머니칼을 잡았다.
나는 웃고 있었다. 
나는 이 칼로 모든 것을 잘랐다. 
붙어 있는 책의 페이지, 
이드 세기르‘ 때 닭 모가지 (총 32회), 
이드 엘케비르‘ 때 양모가지 (총 10회), 
그리고 하미드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의 배를 한 번 잘랐다. - P50

그렇지만, 나는 의식하고 있었다. 
시력이 나쁘다는 것만 빼고, 군주는 내 안에서 완전하게 다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말이다 -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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