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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 - 용산 걸어본다 1
이광호 지음 / 난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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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도시에 대해 생각해보자. 나는 한때 살았던 충청북도 영동에 대해 말해보자면, 그곳은 난계 박연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중학교 다닐 때 난계국악박물관으로 소풍을 자주 갔다. 그리 크진 않지만 학교에서 가깝단 이유로 걸어다녔다. 매해 박연을 기리는 축제를 한다. 난계국악축제. 감이 유명한 곳으로 감아가씨를 선발하기도 했지만 <포도밭 그 사나이>란 드라마를 황간에서 촬영한 후로, 포도 축제로 바뀌었다. 영동은, 현대사적으로 볼 때 가슴 아픈 곳이기도 하다.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 일었던 사건은, 아직도 그 흔적이 있다. 황간면으로 봉사활동을 갈 때 그 다리를 보았다. 총알이 박힌 자국이 남아 있다고 황간면에 살던 친구가 일러준 적이 있다. 이현수 작가님의 <나흘>에서도 노근리 사건을 다루고 있다. 어떤 도시건 그 역사는 길고도 어떤 상흔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내가 아는 용산은 호남선이 출발하는 곳이다. 작년이었나, 재작년이었나 노트북이 고장나 AS를 받겠다고 용산을 간 적이 있다. 용산전자상가가 유명하다고도 하고 AS 센터가 용산전자상가에 있다고도 하여, 구경도 할겸 방문했다. 용산역이 종착역이라 기차를 타고 그곳까지 간 후, 내렸는데 생각보다 큰 역의 모습에 놀랐다. 아니, 왜 의외의 모습이었다고 놀란 건지 모르겠다. 용산이 주는 이미지는 그렇게 부정적이었나 싶기도 하고. 서울역보단 작을 것이라 생각했던 탓일까. 극장도 있고 백화점도 바로 옆에 있는 것을 보고 솔직히 놀랐다.

하지만 번쩍번쩍한 용산역의 모습과 달리 전자상가로 향했을 때의 모습은 그다지 아름답단 느낌은 없었다. 전자상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건물과 건물을 잇는 통로는 참신했다. 햇빛이 강렬해 그늘로 다닐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다. '전자상가'라는 이름에 걸맞게 전자제품을 파는 곳이 많았다. 그러나 바로 거리 맞은편의 건물은 낡고 허름했다.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공존하는 곳처럼 느껴졌다, 용산이란 곳은. 어떤 건물은 화려하고 번쩍하지만 어떤 건물은 다 쓰러져갈 것만 같이 위태하다. 그런 이질감이 용산에 존재했다. 어찌저찌 AS센터까지 갔을 때도, 건물 근처에 롯데시네마의 건물이 있었다. 롯데시네마 바로 맞은편에는 글자의 페인트칠이 다 벗겨진 건물이 있었는데 그곳에만 몰락의 시간이 존재했다. 그런 이질감은 용산을 으스스하게 만들었다.

내가 아는 용산은 이게 전부다. 의외의 모습을 가지면서 어쩐지 모르게 으스스한 분위기를 가진, 그런 공간. 그렇기에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가 출간되었을 때, 이 책이 용산을 다룬다는 것을 알았을 때 호기심이 생긴 것은 당연했다. 용산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어마어마한 역사를 지녔고 다채롭고, 때론 어딘지 모르게 스산한 구석이 있었다. 책을 읽고 나서야 용산에 대해 이제 제대로 좀 알게 된 기분이었다. 어떤 곳은 낭만적이지만 어떤 곳은 낭만을 잃어갔다. 그런 정반대적인 성향을 지닌 곳이 용산이라고 생각했다. 한남동과 이태원의 분위기가 다른 것처럼.


용산.
모든 시간이 휘몰아치는 곳.
풍경이 지나가는 곳.
빛이 반짝이다 사라지는 곳.
그리움이 쌓여가는 곳.
낯선 시선이 느껴지는 곳.
역사와 역사가 만나는 곳.
서로 다른 세상이 맞물려 흘러가는 곳.
너와 나의 발걸음이 마주치다 스쳐가는 곳.
네가 사라지는 곳.
내가 사라지는 곳.

용산이란 이름의 시詩는 언제나 그곳에 존재했다. 어느 누군가가 적었기 때문에 시가 되었던 게 아니다. 용산은 처음부터 많은 시간과 그리움과 사람들의 발걸음이 스쳐지나갔다. 일제 감정기 때 일본군인이, 미군 부대가 있었을 때엔 미군이, 이태원의 외국인 골목에서 오고 간 수많은 이국적인 풍경들. 누군가 그 풍경을 오래도록 지켜볼 때 용산은 시로 태어나 시로 남았다.

이태원의 역사가 처음부터 이국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태원의 역사가 아직도 상흔처럼 남아있다. 비구니에게 잔인한 상처를 남겼던 곳이 외국인들이 오고 가는 장소가 되었다는 게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용산의 여러 장소는 근현대사의 상처가 산재해 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많은 사람들이 스쳐가는 곳이니 그 빠른 발걸음 속에서 용산의 깊은 상처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지나치게 산문적인 거리>는 용산이란 도시를 알기에 충분하다. 대한민국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일독하길 권한다. 단순히 '도시'라는 테마를 뛰어넘어 오랜 시간의 흔적을 찾아가는 문장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의 가슴에 어떤 감정을 남길 수 있는 책일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당신은 오래도록 용산을 잊지 못할 것이다. 용산에 들를 적에 책의 구절을 떠오를지도 모를 일이다.

파문을 일으키는 물은 시선에 오래 머문다. 용산이란 도시의 낯선 감각은 현재 존재하는 시간에 파문을 일으킨다. 그 파문은 고요하고 잔잔하지만 꽤 멀리 퍼졌다. 도시 아래 깊숙이 깔린 과거의 시간은 한번쯤은 뒤돌아보게 한다. 그게 역사의 현장이 될 때, 당신은 그 도시에 붙박힌 듯 존재하게 될 것이다. 실체가 존재하지 않아도, 당신의 마음은 용산에 머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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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의 의류 수거함 - 제3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40
유영민 지음 / 자음과모음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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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마법의 나라로 간 게 아니라, 밤에 괴도로 변신하는 이야기는 꽤나 구미를 당겼다.
도로시가 터는 것은 의류수거함. 사람들이 의류수거함에 놓고 간 옷은 의외로 상태가 좋았고 꽤나 쏠쏠한 수입 원천이 되었다. 외고 입시에 실패하여 호주로 가는 것이 꿈인 그녀는 열심히 돈을 모으기로 한다. 그녀의 지인에는 중고 옷을 사고 파는 마녀 님이 있는데 그녀는 의류수거함에서 훔친 옷을 마녀에게 판다. 그다지 수긍이 가는 분배는 아니지만 그녀는 의류수거함을 털면서 호주로 가는 꿈을 부푼다.

한창 공부를 하고 있어야 할 고등학생 소녀가 밤마다 의류수거함을 터는 모습을 상상하기라 쉽지 않다. 입시에 대한 좌절을 도둑질로 풀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하지만 그녀가 걸어가는 거리에서 만나는 사람들의 사연을 들쳐보면, 도로시가 '의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녀는 의류수거함을 털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노숙자, 북한에서 온 카스 삼촌, 마녀가 자주 가는 식당 주인 마마, 그리고, 그녀의 인생에서 어떤 확신을 안겨주었던 195. 거리에서 만난 인연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폐지를 줍고 다니는 할머니에게 선의를 베풀게 한다.

상냥한 마음을 안겨주는 글이란 무엇일까. <충사>나, <나츠메 우인장>을 보면서 늘 그런 생각을 했다. 이 만화들은 상냥함을 기억하게 한다고. <오즈의 의류수거함>이 그러했다. 각각의 사연을 펼치면 그다지 행복하지도 않지만, 그런 기억을 토대로 모두 저마다의 삶을 꾸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숙자 씨는 알코올 중독자인데, 술을 그만 마시라는 도로시의 말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봐, 무언가에 중독되지 않고서 어떻게 이 누더기 같은 세상을 버티겠어. 때로는 중독도 살아가는 힘이 된다구."(58p)

교양과 지식을 겸비한 숙자 씨의 삶은, 어딘지 모르게 피곤함이 묻어 있다. 아내와 함께 수의사가 되어 좋아하는 동물과 함께 살아갈 삶을 꿈꾸지만, 구제역으로 인해 살처분을 해야 했던 과거는 바로 현재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최근에 조류독감으로 인해 살처분을 당한 오리와 닮을 떠올렸다. 이 글을 보면서, 내가 살처분을 해야만 했던 사람들의 심정을 인터뷰한 기사를 떠올렸다. 그것은 사랑하는 것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것이었다. 좋아하던 동물과 이별을 하는 것이었다. 동물에 대한 강한 애정이 있기에 숙자 씨의 아내는 그렇게 세상을 떠난 것이겠지. 이별을 감당할 수 없어 숙자 씨는 거리를 전전하며 살아가는 삶을 택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는 바야. 아니, 이미 뇌가 없는지도 모르지. 하루하루 생각 없이 보내니까. 그런데 재밌는 건, 생각이 없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다는 거야. 나란 인간은 생각이란 걸 하게 되면 추락하게 되거든."(62p)

도로시가 만난 사람들은 모두 상처를 지니고 있다. 주인공인 도로시조차 그렇다. 입시의 좌절로 인한 자살충동. 그러나 자살조차 뜻대로 되지 않았던 그녀. 그러나 같은 상처를 가져도 밝고 희망찬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었다. 카스 삼촌이 그러했다. <자유로운 삶>에서 공산주의의 삶을 살짝 엿보았지만 <오즈의 의류 수거함>에서 다시 접한 북한의 실상은 동정을 뛰어넘어 분노마저 일었다. 계급이 아직 존재하는 세상, 맛있는 것도 먹지 못하고 굶어야만 했던 삶. 부잣집 친구 집에서 배 부르게 먹고 와서 그걸 모두 토해내 가족을 먹였다던 카스 삼촌. 그러나 남한도 그다지 행복한 세상은 아니었다. 돈이 없으면 멸시를 받아야 하는 일종의 계급 사회였다. 그렇지만 카스 삼촌은 자신이 먹고 싶은 라면이나 맥주를 맘껏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내 자신을 시키는 대로 일만 하는 기계라고 생각하면 됩네다. 기계는 아무것ㄷ 느끼지 못하잖습네까? 분노도, 슬픔도, 고통도."(88p)

한국의 현실을 무서우리만치 꼬집는 글이었다. 어딜 가도 계급은 존재한다. 학교에 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런 무서운 현실에서 뒤쳐지지 않으려고 바동거린다. 모든 것이 경쟁이고 약탈이다. 그런 세상에서 이 글은, 어찌 보면 작은 싹과 같은 글일지도 모르겠다. 상냥함을 틔우는 싹. 작지만 미미하지만 언제고 쑥쑥 자라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들 그런 상냥함 같은 글. 그렇기에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보듬어주고, 서로의 말을 들어주는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그리움마저 든다.

도로시가 의류수거함을 털다가 찾은 어느 자살예고자의 모습. 그것은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었다. 누군가의 목숨을 중히 여기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누군가 죽겠다고 하는데, 그것을 모르는 척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때에 따라 달라지겠고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도로시는 그를 찾아나섰다. 195를. 부족함 없이 자랐지만 마음에 자리잡은 공허함으로 약물중독이 되어버린 그는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도로시가 만나자고 하자 수수께끼를 냈다. 하얀 건물이 있고, 사람이 평생 두 번 드나드는 역. 그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도로시는 195에게 3달만 함께 의류수거함을 털자고 제안한다. 그는 흔쾌히 수락하고, 그러면서 그는 자연스레 의류수거함 멤버로 합류하게 된다. 잘생기고 공부도 잘한 그가 무엇이 부족하여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행복은 누군가 만들어주는 게 아니라는 것, 스스로 찾아나서야 한다는 것을 이 글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어느 누구도 내 행복을 결정짓지 못한다. 의류수거함을 털면서 도로시는 스스로의 길을 만들어냈고 스스로 행복함을 만들어냈다. 그 반짝거리는 것은 밤하늘의 별처럼 또렷하여 어떤 어둠에도 물들여지지 않는 확신과도 같았다.

195의 이야기로 빠져들면서 마마의 사연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195가 살기를 바랐고 그 진심이 그에게 전해졌다. 195는, 자존심만 강했지 자존감이 부족했었다고 조심스레 고백을 했다.

"굳이 설명하자면 자존감은 포용이란 토양에서 자라나고 자존심은 경쟁이란 토양에서 자라나지. 자존감이 이타심이란 열매를 맺는 반면, 자존심은 이기심이란 열매를 맺어."

사람에게는 언젠가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것을 버티고 나아가느냐, 아니면 주저앉아 모든 것을 포기하냐는 본인의 몫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느 누군가가 내밀어준 손이 때로는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195에겐 도로시가, 함께 의류수거함을 털면서 만난 사람들이 그래주지 않았을까. 혹은 도로시도, 마마도, 숙자 씨도, 마녀도, 카스 삼촌도 알게 모르게 지탱을 받지 않았을까. 그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선한 마음으로 폐지 할머니의 집을 고쳐주고 보일러를 놓아준 것도 이해가 되었다. 도움을 받았기에 도움을 주는 것, 그들은 그렇게 정했다. 비록 그들이 고급 주택에 있는 의류 수거함을 턴 건 옳은 방법은 아니었지만.

이 글은 크게 보면, 도로시의 여행과도 같다. 의류수거함을 털면서 만난 사람들, 그들의 이야기, 그들이 갖고 있는 상처. 그러나 작게 보면 어느 한 목숨이 구원받은 이야기였다. '자살'이라는 무서운 유혹을 뿌리치고 자신만의 길을 가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 생명을 중히 여기고 그 생명을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상냥함이란, 어쩌면 아주 작고 미미하지만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요괴에게 상냥한 나츠메가 요괴의 사랑을 받듯, 벌레에게 배려를 한 깅코가 벌레들의 배려를 받듯. 그들이 한 행동은 어찌 보면 사소할 수도 있지만 사소한 것 하나로 인해 많은 것이 변하기도 한다. 기적이란 작은 사소한 행동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게 아닐는지.

도로시가 밤길을 나서면서 만난 사람들, 그간 놓쳤던 풍경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도 나를 되돌아보게 되었다. 나도 내가 놓친 건 없는지,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상냥해질 수 있는지를 돌아보며 이 글을 쓴 작가에게 무한한 감사함을 느끼게 되었다.

청소년 문학이란, "전문 작가가 청소년을 독자대상으로 하여 청소년들의 삶의 문제를 직간접으로 다룬 문학작품"(315p)이라고 한다. 어찌 보면 이 글은, 사전적 의미 그대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글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청소년기를 거친 어른들도 읽어야 하는 글이 되지 않을까. 상냥함을 가진다는 것은 어른이 되어서도 필요하니까. 최근에 울산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을 보면서, 사람들이 점점 분노를 제어하지 못한단 느낌을 받았다. 누구든 삶에 극단적으로 몰려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조금 상냥해지자, 조금 나를 배려하자. 조금 남을 사랑하자.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문학엔 청소년 대상이든 청소년 대상이든 그런 경계는 필요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오즈의 의류 수거함>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글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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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수첩 박람강기 프로젝트 4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남궁가윤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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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검은 안개>라는 책이 있다. 모비딕에서 출간한 책으로 마쓰모토 세이초가 일본에서 있었던 굵직한 사건을 조사하여 기록을 한 논픽션 형태의 에세이다. 이 책을 완독하진 않았지만 조금 읽었을 때에는 무척 흥미로웠다. 형사들의 기록과 함께 법의학적인 접근도 함께 수록되었고, 마지막으로 마쓰모토 세이초의 추론이 들어가 있었다. 탐정이 어떤 사건을 꿰뚫듯, 마쓰모토 세이초 나름대로 찾아낸 진실의 조각이 수록된 책이었다. <일본의 검은 안개>의 축소판이라고 해야 할지, 그의 작품론이라고 해야 할지, 여하튼 <검은 수첩>은 마쓰모초 세이초의 작품과 더불어 추리소설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논픽션의 에세이다. 

 

재미있는 구성이 있다. 추리소설이 대중화된 것에서부터 출발한 이 이야기 중간에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메모가 수록되어 있다. 날짜와 연도별로 짤막하게 적혀 있지만 그의 메모습관을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좋았다. 그가 작품을 대하는 태도, 혹은 세상을 대하는 태도도 볼 수 있어서, 왜 일본에서 마쓰모초 세이초의 작품이 매년 드라마화되고 추리소설계로부터 우상화 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을 책보단 드라마로 먼저 접했다. 작년에 방영된 <얼굴>이란 드라마가 충격적이어서, 원작을 찾아 보게 되었는데 성별이 바뀌었다. 원작은 남자가 주인공이고 최근에 방영된 드라마는 여자가 주인공이다. 서로 뒤바뀐 성별이었지만 마지막에 보여지는 결말은 여전히 짜릿했다. 오히려 성별을 바꾸어 각본했기에 원작과 드라마 모두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그다지 기복이 크게 바뀌지 않는 잔잔한 배경의 드라마였지만 보는 내내 눈을 뗄 수 없었다. 주인공의 심리에 나도 모르게 빨려들어가버렸던 것이다. 마쓰모토 세이초가 보이는 범인은, 어떤 고뇌가 있었다. 그가 왜 사람을 죽여야만 했는지, 사람을 죽인 죗값을 왜 치러야 하는지에 대해서. 마쓰모토 세이초는 한 인간을 통해 어떤 세계를 보았던 것이 분명했다. 그런 그의 작품 세계는 <모래 그릇>과 <검은 복음>, <3억엔 사건>을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비록 나는 드라마로 그의 작품을 접했지만 <얼굴>이란 드라마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드라마가 원작을 크게 각본했을 것 같지는 않은 인상을 받았다. 특히 2013년도에는 일본에서 미해결사건으로 남은 '3억엔 사건'에 대해 재조명한 드라마가 유독 많았는데, 마쓰모토 세이초가 그나마 사실에 근접했고 가장 그럴싸한 추론을 보인 것만 같았다. 그가 대하는 작품의 방식은 사람을 대하듯 조심스러웠고 신중했다. 어느 것 하나도 그저 흘러보내지 않는 섬세함에 나는 충격을 받았고 이 작가의 작품이라면 믿고 봐도 되겠다 여겼다.

 

바로 그런 때에, 북스피어에서 마쓰모토 세이초의 작품세계를 담은 책을 출간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독자교정을 모집한다기에 잽싸게 신청을 했고, 운 좋게 출판사까지 찾아가 날것 그대로의 원고와 대면할 수 있게 되었다. 재미있는 것이 이 책에는 <일본의 검은 안개>에 수록된 사건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그런 기록을 보는 것이 흥미로웠다. 우리나라에서 범죄학의 대가인 표창원 교수님의 <한국의 연쇄살인>이 함께 떠올랐는데, 내 안에 숨어 있던 범죄에 대한 흥미를 일깨웠다. 마쓰모토 세이초가 형사의 자취를 쫓아가듯, 사건을 찾아내고 기록했던 글들은 그가 사회에 숨겨진 이면을 발견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가 쓴 작품이 허구라고 생각했는데 <일본의 검은 안개>와 <검은 수첩>을 보니 실제 있었던 사건을 재조명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실제 있었던 사실을 적었기에 그는 사회파 미스터리의 대가가 될 수 있었다.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을 읽고 불쾌하게 느껴졌던 것도 그런 '현실감'이었다. 언제 현실에서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범죄와 범죄를 바라보는 사람들. 그런 것은 지금 현실에서도 보여주고 있었기에 결코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무시할 수 없었다. 작년에 있었던 용인살인사건도 <모방범>을 읽고난 후 접하게 된 사건이라 무시무시하다고 느꼈다.

 

미스터리가 단순히 시간을 때우기 위한 유희에 불과하다는 편견을 깨워준 건, 바로 이 사회파 미스터리다. 탐정이 등장하는 것도 아니고 트릭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사회를 꼬집는단 사실 하나만으로도 미스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정말 봐야할 미스터리는 바로 사회를 고발하는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홈즈나 뒤팽과 같은 멋진 탐정이 있는 미스터리도 좋지만, 가끔은 경각심을 일깨워줄 사회파 미스터리도 찾아 읽어야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의 검은 안개>를 완독해야겠지. <검은 수첩>도 다시 재독해야겠다. 

 

한 번 더, 사회를 진득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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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스
어빈 웰시 지음, 김지선 옮김 / 단숨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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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에서 온갖 쓰레기 봉투가 쌓인 더미를 본다. 그 안에는 누군가 먹다 버린 음료수도 있고 누가 씹다 뱉어버린 껌도 있고, 어느 누군가가 몰래 싸지르고 간 토사물도 있다. 꾸깃해진 과자 봉지 사이로 삐져 나온 잔해들. 그 쓰레기를 떠올리면서 나는 <필스>를 읽었다. 그 쓰레기처럼 브루스 로버트슨도 그것과 다를 바가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자기중심적이고 비열하고, 타인을 향한 배려심이 전혀 없는 안하무인과 후안무치인 모습을 보면서 통쾌하기보다는 불편함을 느꼈다. 거북함과 동시에 혐오감이 덕지덕지 새어나오고 있었다. 자신이 경위에 오르기 위해서 동료를 이용하고 동료를 모함하고, 심지어 친구마저 배신하는 그 모습에서, 얼마나 아연실색을 했는지. 그는 인간쓰레기였고 경찰이라기 보다는 범죄자에 가까운 인상이었다. 그가 여자와 하는 그 수많은 행위들, 남자를 조롱하고 친구를 비웃고, 여자들의 품격마저 떨어뜨리는 그 기가 막히는 말과 행동들.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그 모습에서 나는 실망과 더불어 경악마저 느끼게 되었다.

 

그렇지만, 내가 내내 불편했던 것은, 나 또한 그처럼 될 수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그가 보여주는 그 추악한 모습들. 누군가를 모함하고 누군가를 깔보고 누군가를 매도하는 그 모습들은 언제라도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할 수도 있는 행동들이었다. 형법에서 '잠재적 범죄자'라는 용어를 본 적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범죄자가 될 수 있고 사람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잠재적 범죄자'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다. 나 또한 그 잠재적 범죄자에 해당되는 것이리라. 비록 브루스의 모습을 보면서 치를 떨지만 한편으로는 그 행동에 공감을 하게 되는, 그런 모습들. 누군가를 헐뜯고 누군가를 비난하고, 어쩔 때에는 누군가를 나쁘게 몰아가는 나쁜 근성들. 나는 그것과 조우하기 싫었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것이 불편했던 것이다.

 

브루스는, 어떤 한 남자를 살리려고 했다. 심장질환으로 인하여 거리에 쓰러진 한 남자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는 죽고 말았고, 그는 절망한다. 왜 그는 절망했는가? 왜 그는 그렇게 눈물을 흘렸는가? 왜 그는, 자기 자신을 그렇게 슬픔에 잠기게 두었는가?

 

그가 '인간적'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가 그 수많은 악행을 뒤로 하고 오직 하나의 점처럼 숭고하게 빛나는 착하고 선한 브루스의 모습이었다. 그 하나의 모습으로 인하여, 그의 매력이 반전되었다. 인간쓰레기가 아니라 불쌍히 봐야할 대상으로. 그리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사악한 면을 가졌다고 해서 그것을 혐오하거나 싫어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나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브루스가 해야 할 것은 바로 그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행동들이었다. 그가 사람을 살리려고 한 것은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한 발판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남자는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고 그가 죽음으로 인하여 브루스는 '나은 인간'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모두 잃고 말았다.

 

몰락할 수밖에 없는 인생. 뿌린 대로 거두리라.

왜 이 글의 제목을 마지막에 가서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는지 나는 뚜렷하게 알게 되었다. <필스>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가 아니라, 브루스 로버트슨이라는 하나의 인물을 통해 보여주는, <필스>라는 단어. 브루스는 항상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강하고 절대 남의 말에 넘어가지 않고 오히려 남을 조죵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캐럴을 잃어버리면서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기 때문에 그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 자신은 그것을 늦게 깨달았을 뿐이다. 아주 늦게. 자기 자신이 중독자가 되어 다른 사람의 동정을 사게 될 때까지 몰랐을 뿐이다. 어쩌면 그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중심적이고 자존심이 무척 강하고, 나르시즘에 심취한 사람이었으니까.

 

나약하기 때문에 망가질 수 있던 한 인간의 추락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약해지지 않으려고 그는 얼마나 버텼던가. 버티고 버텼지만, 그는 결국 고꾸라졌다.

 

그가 몰락하고 나서야, 비로서 웃을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그 다음엔 이런 질문을 받겠지.

 

'어떤 기분이 들었습니까?'

 

 

 

 

오물filth

다른 것은 짐승.

 

ㅡ누가 진짜 오물인가를 보여주었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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