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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
윤대녕 지음 / 현대문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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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은 작가 윤대녕이 월간 <현대문학>에 2011년 10월부터 2013년 9월까지 2년 동안 연재했던 글을 모은 것이다. 그는 연재를 시작할 무렵 쉰 살의 문턱을 막 넘어서고 있었고, 때때로 지나온 생을 돌아보게 되는 나이로 접어들었다고 말한다. 이 책의 쓰여진 윤대녕 작가의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다. 과거의 기억들을 복원하는 글쓰기'가 즐거움을 안겨주었다는 말. 이 책을 읽으면서 윤대녕 작가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동시에 나 자신의 이야기도 찾아가게 만드는 힘을 배운다. 이 책은 윤대녕 작가의 솔직한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글이기 때문이다.

"지나고 나면 삶은 한갓 꿈으로 변한다고 했던가. 돌아보니 정말이지 보든 게 찰나의 꿈이었던 것 같다. 그러니 나는 끄 꿈이라도 한사코 복원하고 싶었던가 보다. 연재를 하는 동안 나는 과거에 내가 머물렀던 곳들을 가끔 찾아가보았다. 짐작했듯 대부분의 공간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더 이상 자취조차 찾아보기 힘들었다. 다만 그곳에는 마음의 텅 빈 장소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매달 한 편씩 연재를 하면서 나는 무척 행복했던 것 같다. 파편적으로 흩어져 있던 과거의 기억들을 복원하는 글쓰기가 많은 순간 내게 즐거움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삶을 복원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더불어 삶이 내게 남겨준 것이 무엇인가를 비로서 알게 되었다."

이 책은 고향집(왜 하필 '거기'여야만 했을까?), 늙은 그녀(나라는 존재가 비롯된 아득하고 영원한), 휴게소 공항 역 터미널(우연과 필연이 마주치는 지점), 누군가 술을 마시다 떠난 지하 카페(은행잎이 쏟아져 내리던 날), 노래방(그림자처럼 머물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바다(영원의 순간과 마주하며), 유랑의 거처(글쓰기의 시간대), 술집들(폐허에의 환속), 골목길들(실루엣들이 서성대는 곳), 사원들(성스러운 사유의 집), 역전 다방(우리 모두가 남루한 행인이었을 떄), 경기장(함성과 고독 사이에서), 음악당(황활한 명상의 기쁨이 가득한), 여관들(별빛 속의 수많은 나그네들이 길을 가다가), 부엌(익숙한 슬픔과 낯선 희망이 한데 지져지고 볶아지는), 목욕탕(벌거벗은 몸뚱이로 참회하고 또한 참구하고저), 영화관(<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시절), 자동차(근대 이후의 유목민을 위하여), 도서관(유령들이 득실거리는 납골당), 우체국(제비들이 날아오고 날아가는 곳), 공중전화 부스(저쪽 연못에서는 붕어가 알을 까고), 병원(그래, 이제 좀 웬만하오?), 광장(<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 윤대녕 작가와 함께했던 시공간의 역사를 만나볼 수 있다.​​ 

'​휴게소, 공항, 역, 터미널'이라는 제목의 내용의 인상적이다. 윤대녕 작가는 마흔 무렵에 가난한 여행자였고, 미래가 불투명했으며 사람들과의 관계가 썩 좋지 않았던 우울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휴게소 식당에서 그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그는 삶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 전보다는 조금 겸허해지고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에 있어서도 얼마쯤 ㅍ녀견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그들이나 작가 자신이나 결국 한통속, 한종족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그 사건을 경험하고 나서 삶 자제츼 무게가 한결 가볍게 여겨지는 현상이 찾아왔다고 고백한다.

"휴게소 식당 문을 밀고 나오면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생은 다른 곳에'(밀란 쿤데라의 소설 제목)가 아니라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이 세상을 스쳐 가는 한갓 여행자에 불과하다는 것을. 또한 그것을 가장 잘 의미하는 공간은 이렇듯 휴게소, 공항, 버스 터미널, 기차역 같은 분기점에 위치한 임시적 장소라는 것을."​

"전에 제주도에 살 당시(2년을 살았다) 나는 사람이 그립거나 삶의 감각이 무뎌진다 싶으면 공항에 가서 몇 시간씩 앉아 있곤 했다. 대기실 의자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오랫동안 눈여겨 보다가 작업실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 일은 확실히 글을 쓰거나 삶을 살아가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여행자 차림의 사람들 모습을 보는 게 좋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흥분과 기대, 피로와 허무, 슬픔과 고통, 기쁨과 설렘 같은 삶의 온갖 감정들이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그들 또한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오가는 공항이 삶이 축소된 공간이라는 것을. 삶의 현장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을."

윤대녕 작가가 '바다'라는 공간​에 대한 이야기에 공감했다. 아이와 함께 바다에서 낚시를 하는 이야기 등 바다에 관한 사색이 담겨있다.

"겨울이 되면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바다다. 바다는 꿈에서 먼저 찾아온다. 마치 생리 현상처럼 거역할 수 없이 주기적으로 떠밀려 오는 것이다. 그리고 보리 싹이 팰 무렵이 되면​ 바다는 내게서 썰물이 되어 속절없이 빠져나간다. 그 지점에서 나는 이빨이 하나씩 뽑혀 나가듯 한 살씩 더 나이 들어가는 자신을 느끼며 응시한다. 바다는 순환을 통해 영원을 지속하지만 나는 저항하지 못한 채 늙어가고 차츰 병들어간다. 이것이 말하자면 바다와 나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상응하되 점점 멀어지는 관계 말이다."

이 책에서 특히 윤대녕 작가의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그는 어린시절 잦은 이사로 이해서 노마드적 성격이 형성되었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글을 쓰기 위해 자취방에 은거할 때는 제외하고는 주로 여행을 다녔다고 말한다. 그는 30대 후반 유럽의 여행지인 시골  마을에서 독일 시인의 시를 읽고 눈시울이 붉어졌다고 고백한다. 그 시는 바로 한스 카로사의 <옛 샘>이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에도 나는 집필여행 삼아 수시로 여행을 떠났다. 등단 초기에는 주로 해남을 비롯한 전남지방으로 몸과 거처를 옮겨 다녔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소설들이 길에서 쓰여지고 허름한 여관방에서 완성되었다. 30대 중반부터는 하동을 비롯한 경남 지역으로 자주 내려갔다. 40대에는 제주도에 곧잘 머물렀으며 그곳에서 2년 동안 체류하며 글을 쓰기도 했다."

윤대녕 작가는 등단한지 10년 정​도가 된 30대 후반의 나이에 꾼 꿈을 소개한다. 밤마다 얼굴 없는 사람들이 나타나 목을 조르고 원망을 하고 고통에 찬 아우성을 치는 악몽이었다. 그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상처를 주었거나 고통을 준 사람들의 얼굴들이 차례로 떠올랐다고 말한다. 더불어 그는 자신이 매우 이기적인 사람이며 타인의 고통에 대체로 무감한 채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로 인해 그는 공황장애를 겪게 되었으며 술로 의지하다가 산사에 들어가 참구했다. 생각다 못해 그는 제주도로 거처를 옮겼고, 제주도에는 우주만한 거대한 목욕탕인 바다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바다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면 어김없이 목욕탕에 들러 몸을 씻으며 지난 생을 돌아 보았다고 고백한다.

"하나의 사소한 고백이 되겠는데 나는 매일 목욕탕에 간다.(...)한가지 더 고백을 하자면 나는 평소에 딱히 만날 만한 친구가 없으며 좀처럼 연락을 해오는 사람도 없다. 내자는 그런 나를 은근히 부끄럽게 여기고 또한 실망스럽게 바라본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무안하기 짝이 없다. 진심을 터놓고 얘기를 나눌 만한 사람 하나 없이 차차 늙음의 나이를 먹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내 눈에는 아주 오래전 아버지와 함게 처음 목욕탕에 갔던 날의 풍경이 선연하게 떠오르곤 하는 것이었다. 수행이라도 하듯 노예나 죄수처럼 벌거벗은 몸뚱이로 자신을 참회하고 참구하던 사람들의 엄숙하고 비장한 모습들이 말이다."

윤대녕 작가가 영화관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부분이 흥미롭다.​ 그가 영화를 위면서 휴식과 위로를 얻었다는 말 속에, 영화와 소설은 이야기라는 공통분모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극장에 갈 때는 조용히 혼자 갔다. 영화를 일컬어 사람들은 흔히 '꿈의 공장'이라는 표현을 쓴다. 나는 어둑한 사각형의 공간에서 온전히 혼자 꿈을 꾸고 싶어 영화관에 자주 드나들었는지 모르겠다. 그렇듯 꿈의 공간을 출입하면서 누구에세도 말 못할 상처와 괴로움을 치유하고 그럭저럭 10대의 날들을 살아내지 않았다 싶다."​

"현실이 되레 허구처럼 느껴질 때마다 나는 극장 안에 들어가 앉아 있곤 했다. 나는 그 사각형의 어둠에 익숙해 있었고 그것이 비록 꿈이거나 환상이거나 혹은 가공된 이야기라 할지라고 거기서 나름의 휴식과 위안을 얻었다. 이윽고 영화가 끝나고 밖으로 나왔을 때의 밝음에 당황하기는 매번 마찬가지였으나, 그렇게 문득 방향성을 상실한 채 거리를 걷다 보면 내게도 뭔가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절실함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때마다 내가 소설가라는 사실을 나는 구원처럼 받아들였다."​

윤대녕 작가는 도서관이라는 공간에 관해 '유령들이 득실거리는 납골당'이라고 표현한다.​ '글은 쓰여지면서 동시에 유서가 되고 저자는 자신이 쓴 글에 배반당하며 또한 적극적으로 소외되고 타자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둠이 내리면 도서관 내부는 조용히 웅성거리며 깨어나기 시작했다. 이것은 나만의 자각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즈음이 바로 유령들이 깨어나는 시간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돌연 긴장한 상태가 되어 사위를 두리번거리거나 거역하기 힘든 호기심에 이끌려 어두운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곤 했다. 말해 무엇하랴만 도서관은 죽은 말들의 세계였고 그러므로 밤마다 유령들이 출몰할 수 밖에 없는 공간이었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은 사실상 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책들은 이미 죽은 사람들에 의해 쓰여진 것이었고 혹은 저자가 살아 있다고 해도 글쓰기를 마치는 순간 필연적으로 유물로 변하게 바련이었다. 그렇다는 것을 나는 작가가 되어 글을 쓰면서 더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것이 어떤 종류이든 글은 쓰여지면서 동시에 유서가 되고 저자는 자신이 쓴 글에 배반당하며 또한 적극적으로 소외되고 타자화되는 것이었다. 이것이 다름 아닌 작가의 운명이며 그 되풀이되는 운명의 결과로 한 권의 책이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서관은 죽은 자들의 잠정적 현현으로 가득한 공간일 수밖에 없다."​

 '모든 존재는 시공간의 그물의 갇혀 살아가고 있다.'는 윤대녕 작가의 말처럼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도 시간과 공간의 존재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윤대녕 작가의 개인적인 삶을 읽어나가면서, 나는 어떤 시간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를 되짚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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