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술라디오] 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마술 라디오 - 오래 걸을 때 나누고 싶은 이야기
정혜윤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CBS 라디오 피디 정혜윤의 에세이 <마술 라디오>는​ 프롤로그부터 그녀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길게 펼쳐놓아 신선했다. 저자는 '듣고 묻는 자'가 라디오 피디라고 말한다. 라디오 피디는 묻고 들으면서 끝없이 살 방법을 찾아 헤매는 사람, 수많은 삶의 형태를 전하는 사람이다. 저자는 힘없는 사람들을 만나서 '의견'이 아닌 '이야기'를 나눈다. 우리는 마술 라디오를 통해서 여백에 새로운 주석을 달듯 자신들의 이야기를 채워나갈 수 있다. 깊은 대화를 나누는 순간, 마법처럼 사랑만이 남는다.

"이렇게 묻고 듣고 다니면서 제일 놀라운 것,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중요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려 한다는 바로 그 점이야.(...) 사람들은 왜 자신에게 큰 이득도 되지 않는 일을 할까? 왜 일개 라디오 피디인 내게 그 많은 시간을 쓸까? 왜 사람들은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할까? 그런데 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하는 영리하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을 세상답게 해. 세상을 마술적으로 바꿔."​

이 책에는 14개의 마술 라디오 사연을 읽을 수 있다. 이 책은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와 함께 어부와 사랑, 빠삐용의 아버지, 주먹맨, 두 갈래 길, 신은 나에게 그녀 대신 혓바닥을 주셨다, 사라진 라디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소원을 70퍼센트로 이룬 노인, 잘 듣는 할머니, 마지막 잎새 인간, 지상의 선물, 간월도의 달, 제일 부러운 사람, 야채 장수의 이중생활이라는 제목의 목차로 구성되어 있다.​

4장 '두 갈래 길'이라는 제목에 등장하는 내용의 글귀가 인상적이다. 특히 실망에 관한 이야기가 공감갔다. 실망으로 움츠려드는 것이 아니라, 실망을 통해서 무언가를 기억해내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또한 우리에게 만약 과거를 대하는 두 갈래 길이 있다고 할때, 하나는 과거를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강화시키는 길, 또 하나는 과거를 해석하는 길, 전자​에선 순응이 나오고 후자에선 자유가 나온다고 한다. 우리는 어떤 길을 선택할 수 있을까?

"실망을 감상적으로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어. 실망의 유일한 문제는 실망 때문에 어느 쪽으로도 가지 않으려 하는 것이겠지. 실망하지 않으려 애쓰지 마. 그 실망이 나에게서 왔든 바깥에서 왔든, 내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다른 데 있겠지. 나 스스로 뭔가를 기억하려는 거야. 내가 그렇게 전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모습을 연기할 수는 있겠지. 아주 기가 막히게 말이야. 그러나 어떤 역할을 기가 막히게 연기해낸다고 해서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지. 우리들은 사람들을 틀에 맞추고 분류하고 싶어서 안달이잖아. 그것이 다 자신을 위해서야. 편하게 이해하려고. 누구는 좋은 사람, 누구는 나쁜 놈. 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 여러 면이 섞여 있을 뿐이야. 남도 마찬가지고 나도 마찬가지고. 타인의 삶은 다 비밀이야."​

5장 '신은 나에게 그녀 대신 혓바닥을 주셨다'라는 내용에 등장하는 행복에 관한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다. ​'나는 행복해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뿐이야.'라는 말은 '행복에 대한 강박관념'을 덜어놓는 글귀였기 때문이다.

"행복은 무엇에 대한 보상으로 오는 것이 아니더라. 행복은 내 영혼의 깨끗한에 대한 보상도 아니고 내 외로움에 대한 보상도 아니었어. 나는 행복해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뿐이야. 행복에 대해서 나는 풋내기였어. 확실한 것은 나는 어떤 종류의 의지를 발휘하는 데도 게으르고 무능력하다는 거야."​

"신은 우리에게 허구를 상상하는 능력, 또 다른 현실, 더 나은 미래를 그려보는 능력을 주셨어. 신은 우리에게 기억력을 주셨고 그것을 말하는 능력을 주셨고 결핍을 느끼는 능력, 욕망하는 능력을 주셨어. 자기 인생을 상상 속에서 정산해보는 능력을 주셨어. 우리는 이런 것들로 우리의 불안정함을 견뎌나가고 있는 것 아닐까? 이런 것들이 있어서 우리는 간신히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런 점에서 우리는 소설가고 시인이야. 우리는 소설과 시를 사랑해. 신은 우리에게 혓바닥과 함께 뇌를 주셨어."​

5장에서는 존 버거의 <아픔의 기록>에 나오는 <길 안내>라는 시가 등장한다.​ 시는 사실 앞에서 무력하지만 연민과 사랑이라는 인간의 감정을 이야기한다.

"시는 사실 앞에서 무력하다. 무력하지만 인내력을 잃은 채 무력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시에 저항하기 때문이다. 시는 결과에 어울리는 이름을 찾지. 결정에 어울리는 이름을 찾지 않는다.

시를 쓰는 동안 우리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제외한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인다. 옷, 벗어 던진 신발, 그리고 머리 빗는 솔처럼, 시는 거기에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아니, 더 적절하게 말하자면 우리 앞에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7장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에서 저자는 자신에게 진짜 어두운 것은 심연이 아니고 표면이고 얕음이라고 말한다. '어떻게 깊어질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랑하는 것들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에 대한 대답이 인생의 질문 중 하나라고.​

"저한테는 참을 수 없는게 또 있어요. 저는 혼자 있을 때 드는 내 생각의 얕음에 가끔 어질어질해요. 사람들 속에 있을 때, 열심히 들을 때, 혹은 열심히 책을 읽을 때는 그렇지 않아요. 하지만 잠이 오지 않는 밤에 혼자 하는 제 생각은 가관이죠. 낮에 당한 모욕에 대한 반복적인 복수, 그때는 생각나지 않았는데 한참 뒤에야 생각나는 통쾌한 반박, 감상적인 소설에나 나올 법한 유치한 생각을, 그때는 내가 나를 할퀴죠.

오로지 나만이 나를 할퀼 수 있는 시간이 있지요. 내가 나의 적이죠. 그때는 무한히 표피적인, 무한히 얕은...... 그래서 저는 열심히 내가 들은 것, 내가 읽은 것을 생각해야 해요. 내 일상의 경험과 마음 속, 그 사이에 뭔가가 끼어들게 해야 해요."​

11장 '지상의 선물'에 등장하는 낚시꾼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거친 파도와 같은 인생에서 무게 제로 상태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낚시꾼의 답이였다. 낚시꾼의 이야기를 통해서 저자는 우리가 인생에서 타인에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시간을 나눠 갖는 것은 아닐까라고 말한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그 시간 속에서 고민과 이야기와 비밀과 눈물과 웃음을 나누다가 공동의 기억과 경험을 만들다가 그러다가 함께 변해가는 거지.'라는 의미에 공감한다.

"제 아내와 제가 사는 것, 혹은 제 친구들과 제가 사는 것이 그렇죠.​ 나무와 납이 균형을 이루어 무게 제로로 바다에 떠 있는 것이 가능하듯이 제 아내와 저도 서로 상대방이 지고 있는 무게를 압니다. 사람 사이의 조화란 게 서로의 무게를 아는 거예요. 그래야 가라앉지 않아요. 저는 낚시를 아무리 좋아해도 아내가 우울한 날은 가지 않아요.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요. 아내가 무거워지면 제가 가벼워지고 제가 무거워지면 아내가 가벼워지고."

"살다보니 알게 된 건 인생에 쓸데없는 것은 없다라는 거예요. 그걸 모아서 선물을 하려고 맘만 먹으면요. 다 소용이 있어요. 돈 없어도 폼 나게 사는 것 어렵지 않아요. 나는 가구들도 직접 만들어요. 거실 탁자, 아내의 서랍장. 다 버려진 나무 주워다가 내가 만들고 칠한 거예요. 이 거실 탁자에서 커피를 마시고 과일을 먹죠. 나한테 가장 소중한 것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들 줄 아니까 폼나게 살아요."​

 

13장 '제일 부러운 사람'에 등장하는 노점상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감동적이다. 저자는 '슬픈데도 행복하니까 강한 인간이다'라며 노점상 할머니들이 자기 삶을 사랑하는 방식에 ​놀랐다고 말한다. 저자는 원래 책 읽는 것을 좋아했던 자신이 그걸로 뭘 하려는 이유도 없이 그것들을 좋아하기 시작했던 마음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우리를 사로잡았던 것을 갈망하고 동경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직접 가든 우회로로 가든 길을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서 계속 새로워질 수 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강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단테는 연옥과 지옥을 거쳐서야 결국 천국에 도달했어. 이것을 우리 삶으로 바꿔 말할 수도 있을까? 우리는 수많은 일을 겪어내고야, 무수히 많은 노력을 하고 난 뒤에만 행복을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행복은 용기와 관련이 있을꺼야. 분명한 것은 행복은 사랑과 관련이 있다는 거야. 행복은 있어. 함께 있는 것에."​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많은 것들조차도 ​자신의 결핍을 메우려고, 기껏해야 자존감이나 경쟁력을 높이려고 수단시하는 우를 범하곤 해. 그렇게 해서 고작해야 성공이나 이득이나 인정, 안정에만 관심을 갖게 되고 결국엔 쓸쓸해지고 마는 거지. 우리는 사랑할 때도 그런 실수를 해. 왜 사랑을 하지? 쓸쓸할까봐? 외로울까 봐? 그렇지만 기름 냄새가 존 버거에게 그림을 파는 걱정에서 벗어나게 해준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도 덩달아 깨끗한 종이 냄새로 돌아가게 되고 내가 그저 책 읽기를 좋아했던 사람임을 기쁘게 기억해낼 수 있었어."

14장 '야채 장수의 이중생활'에서는 야채 장수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녀가 우울증을 극복한 세 가지 방법이 소개되어 눈길을 끌었다. 그녀가 우울증을 이겨낸 첫번째 방법은 일기를 쓰기였고 두 번째 방법은 동화책을 읽기였으며 세번째 방법은 자신이 제일 아끼는 컵으로 커피나 차를 마시며 자연을 바라보는 것이였다.

이 책의 ​에필로그에 등장하는 저자의 음악하는 친구의 이야기가 인상적이다. 우리는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란 것도 소중한 사람이란 것도 모른 채로 살아간다.

"우리는 우리가 아주 작은 사람인 줄 알아요. 중요한 사람이란 것도 소중한 사람이란 것도 몰라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한 말이 지금 생각나요. 아무도 감히 모든 힘을 다해 제 운명을 살지 못한다고. 우리는 어중간한 데서 멈춘다고. 일평생 내내 사랑과 이데아를 속여 손바닥 위에 놓인 저울의 이익을 얻으려고 몸부림을 친다고. 우리는 너무나 몸을 사리기 때문에 시시한 사랑으로 상처받고 평범한 욕망으로 괴로워하고 우리 자신의 모험을 하지 못한다고. 그렇게 우리는 자신이 누구일 수 있었는지 알지 못하게 되죠. 우리가 거울을 봐야 하는 이유는 자신의 망가진 모습을 직기하기 위해서란 말도 있어요."​

저자가 '완벽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귀가 눈에 띄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것이 아니라 '열려 있음과 받아들임'이라는 사실이다.​ 라디오 피디인 저자는 어떤 것을 알고 알리는 것이 필요하고 가치있는 일인지를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입사한 첫해 전파 방정식을 종이에 베껴서 코트 주머니에 넣고 한강으로 갔어(...) 나는 그동안 무엇을 방송해야 하는지 몰랐었어. 완벽한 사람이어야 방송을 할 수 있는 줄만 알고 있었어. 완벽한 사람이 아니란 것이 들통 날까 봐 두려웠어. 그러나 중요한 것은 완벽함도 확신도 자신감도 아니었어. 심지어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는 것도 아니었어. 내가 중요해지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어. 중요한 것은 열려 있음과 받아들임이었어. 나는 어느 날은 나라는 존재는 없다는 듯이 무언가를 반사하고 싶어 할 테고, 또 어느 날은 반대로 나를 통해 잘 비춰 보이고 싶어 하기도 할 테지만, 그 사이를 오락가락 하겠지만...... 어쨌든 나에게는 타인들이 '빛'일 거란 것은 분명했어."

"모든 사건들이 치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 세계들 중 최선의 세계라면 그 세계 안에서 나의 행동도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겠지. 방송을 하면서 쓰지 않는 단어가 생겼어. 나는 아이템이라는 말을 쓰지 않게 되었어. 쓰지 못하게 되었다가 맞겠지. 우리에게는 방송의 소재인 어떤 것이 누군가에게는 삶이기 때문이야. 우리에게는 몇 분짜리 아이템에 불과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평생 계속될 사건이야. 내가 아이템이란 말을 쓰지 못하게 된 것은 세상 모든 일이 나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나의 모든 행동도 세상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