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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정호승.안도현.장석남.하응백 지음 / 공감의기쁨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책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는 정호승, 안도현, 장석남 시인 세사람과 하응백 문화평론가 한 사람이 오래도록 연모해온 시에 대한 사랑의 고백이자 연애편지다. 그들은 이 책의 연애편지들은 시를 읽는 수많은 방법 중 하나이며 각각의 개성으로 시를 바라보는 눈이기도 하다라고 말한다. 

 

"자유롭게 시를 읽고 자유롭게 시를 하고해야 한다. 방향을 정해놓고 시를 읽을 필요는 없다. 인생과 사랑에 정답이 없듯 시를 읽는 것에도 정답이 없다. 시를 읽는다는 것은 가장 자유롭게 상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첫번째로 정호승이 사랑하는 시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최승호 시인의 <자동차에 치인 눈사람>을 읽었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내가 어릴 때 만든 눈사람은 햇볕이 나면 햇살에 녹아서 죽었지, 이렇게 자동차게 치여 죽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 눈사람의 죽음에서 인간 삶의 자연스러움과 당연함을 배운 것 같다. 눈사람은 햇살이 나면 자연스럽게 녹는데, 그것은 눈사람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자연스러운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을 사는 눈사람은 차에 치여 죽는다. 이 얼마나 슬프고 당혹스러운 일인가. 눈사람마저 차에 치여 죽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 슬프다.

눈사람이 태어나지 않는 21세기. 인간을 복제하려고 노력은 하지만 눈사람은 만들려고 하지 않는 21세기. 설혹 눈사람이 태어난다 해도 자동차에 치여 죽어버리는 그런 세기의 삶은 불행하다."

 

정호승 시인은 신경림 시인의 <봄날>에 나오는 아흔의 어머니와 일흔의 딸은 꼭 자신의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보는 듯하다고 말한다. 그는 사랑한다는 백 마디 말보다 말없이 새벽에 일어나 손자가 자는 방에 군불을 지피는 것이 바로 사랑의 원형이 아닐까라고 이야기한다. 사랑은 그리 호들갑스러운 것이 아니다. 사랑은 평범한 일상 속에서 이러한 은근한 희생을 수반한다.  

 

"나는 사랑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희생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희생이 바탕이 되지 않은 사랑은 사상누각에 불과하다. 자기의 몸을 온통 자식들에게 먹이로 제공한 뒤 일생을 마치는 거미도 있다고 한다. 사랑에서 희생의 본질은 그런 높이까지 다다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책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에서 두 번째로 소개되는 시인의 이야기는 안도현이 사랑하는 시이다.

안도현 시인은 황동규 시인의 <방파제 끝>이라는 시를 이야기한다. 그는 황동규를 읽으면 시가 묘사의 양식이라는 것을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지독할 정도로 들여다보고, 냉정할 정도로 묘사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는 황동규 시인의 시를 많이 읽어보고 싶다.

 

"시를 공부하는 문학청년들이 황동규라는 이름을 통과해야 하는 이유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시 <즐거운 편지> 때문이 아니다. 그 아릿아릿한 연가풍의 시를 읽는 일도 즐거운 일이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황동규 시인의 매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언어의 절제력을 잃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문학공부한 무엇인가. 그것은 말과 감정을 절제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시를 청므 쓰기 시작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시를 고백의 양식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가슴속에 묻어 놓았던 감정의 응어리들을 백지 위로 토해 놓으면 다 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시는 자아도취의 산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한테 빠져들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냉정하게 검증해서 거기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뒤따를 때, 비로소 시는 제대로 된 꼴을 갖추기 시작한다. 무한정 고백만 늘어놓을 일이 아니라, 세상과 사물을 묘사하는 법을 연마하는 게 중요하다."

 

안도현 시인은 1997년에 나온 미당의 <80소년 떠돌이의 시>를 이야기한다. 그는 이 시의 감동은 시집의 제목이 시사하는 바와 같이 여든을 훨씬 넘긴 노시인이 놀랍게도 소년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데고 온다고 말한다.

 

"미당의 오감은 날이 갈수록 소년을 닮아간다. 어른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세상사에 대해 이것저것 따지고 분석하는 사람이다. 소년은 단순하게 세상을 읽으려고 한다. 삶의 갈등과 고뇌에 물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래 미당의 시에 나타나는 단순성은 이 세상을 한 바퀴 휘휘 돌아본 뒤에 마침내 다다른 시선의 경지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문학과 인생의 산전수전 끝에 미당은 천진함이라는 새로운 문학적 눈을 갖게 된 것이다." 

 

책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에서 세번째로 소개되는 시인의 이야기는 바로 장석남이 사랑하는 시이다. 책을 읽으면서 장석남이라는 시인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감성과 스타일이 매력적이다. 어딘가 모르게 나와 닮아있는 감성을 발견한다.

 

"누구에게나 있는 것인지 모른다. 나는 숨어살기를 꿈꾼 적이 여러 번이다. 그것이 이 세상을 버린다는 것을 뜻하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아무튼 숨어사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가장 아름다운 삶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터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 나서보았단 말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그러나 가족을 포함해 사회적인 위상이라는 것은 작든 크든 있게 마련이어서 그 안에 한 개인의 일은 늘 얽혀 있게 마련이다. 내가 숨어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러한 위상에서도 좀 작게, 조그맣게 되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저 도잠의 귀거래를 운운할 만한 것은 못 된다. 그러나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요 어쩌면 그렇게 한다는,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더 큰 사회적인 의미망 속으로 깊이 얽혀드는 사회가 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내게는 아주 먼 이야기처럼 생각되었던 사랑이라는 것이 어느 순간 내게 와서 끊임없이 말을 걸고 있습니다(말을 거는 것이 누구인지 나인지 당신인지 사랑이라는 건지 알 수 없습니다) 내게는 그런 운명이 평생 없을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 도둑처럼 내 안에 들어와 나가지 않고 벌써 몇 달째 살림을 살고 있습니다. 듣던 음악도 그전에 듣던 음악이 아니고 바라보는 책상 모서리도 예전의 책상 모서리가 아닙니다. 생전 처음 보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볼 때가 많습니다.

이즈음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합니다. 당신이 걸어오는 말소리가 귓속에서 바람에 시달리는 전선줄처럼 웅웅거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자세히 들어보면 엄밀하게는 당신이 걸어오는 말은 아니지요. '내 속에 들어온 당신'의 말이지요. 그 말에 나는 아무런 응답도 할 수 없습니다. 우선 무슨 뜻인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저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곤 합니다.

순리에 대한 발견의 서글픔이요, 순명에 대한 발견이 설움인지도 모릅니다. 사랑의 문제도 그런 건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왠지 나는 당신과의 만남을 그저 순명으로만 돌리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그저 우리는 강가에 가서 안ㅇㅈ아 있는 수밖에 다른 도리란 없는 건인가요. 정말 그런가요.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겠습니다."

 

장석남 시인은 김수영의 시 <거미>를 이야기한다. 김수영이 말하는 고뇌가 인간의 보편적이고 내밀한 공간으로 동시에 육박해 들어간다.

 

"김수영이 사랑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한 시는 발견되지 않는다. <거미>는 아마도 김수영의 시들 중에서 가장 개인적인 시에 속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개인적이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김수영에게 가장 깊고 내밀한 세계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랑에 관한 한 김수영의 이 관찰과 경지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만큼 간절한 경지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사람의 생에서는 누구나 몇 번쯤 사랑에서는 다른 무엇에서든 거미가 된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또한 얼마나 비극인가. 나도 거미다!"

 

장석남 시인은 오규원 시인의 <분식집에서>라는 시를 이야기한다. 틈이 생긴 사랑 때문에 낙태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그 사랑이라는 것의 뒷맛이란 더할 수 없이 을씨년스럽다. 그것은 마치 폐허의 공토에 모여 수런대는 찢어진 비닐 봉지들의 집회 현장을 바라보는 느낌과도 흡사한 무엇일 것만 같다. 장석남 시인은 이 시를 매우 슬프다고 말한다. 이 시의 제목은 소박하기가 이를 데 없어서 눈물 겨울 지경이라고 말한다.

 

"창백한 여자의 얼굴을 두 손으로 받쳐들고 무중력 상태의 공중을 가듯 아무 말이 없이 걸어가는 거리. 결론도 없는 회의의 침묵. 이 세상 전분에 대한 죄책감. 절망이란 이 세상 전부에 대한 죄책감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일러 '꽃피는 절망'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오규원 시인의 <분식집에서>에는 맨 끝에만 마침표가 찍혀있다. 이상한 것은 그렇다면 왜 다른 마침 부분에는 그 점을 찍지 않고 맨 끝에만 찍은 것인가. 나는 절망이라는 단어에 혐의를 둔다. 그것은 내 착각일 수 있지만 미안하게도 즐겁다. 왜 미안한가. 절망에게 즐겁다고 해서다.

'나'는 계단 위에 오래 앉아 있는 사람이다. 그는 내려가는 것이 희망인데 무엇이 내려가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그것은 내가 보기에 계단 그 자체다. 그 위태로움. 계단은 상징적이든 지시적이든 오르내리는 인간의 편리의 산물인데 한 번 오르기 시작하면 목적한 바까지 끝까지 올라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끝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아니 끝까지 올라가는 것을 포기하고 차라리 내려가는 것이 희망이다. '나'의 삶은 계단 위에(이 계단은 급경사의 계단이다!) 오래 앉아 머물고 있는 위태로운 삶이다. 삶이 힘에 겨우면 가벼워져야 한다.

나무는 그 성장을 위한 자본인 나뭇잎이 무겁다. 당연히 그 나무는 바람이 불어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이 희망이다. 반대로 바닥에게는 낮은 창문도 희망이다. 여러 희망이 서로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로 섞여 있다.

그렇다면 이 도시의 분식집에서 만나는 희망들이란 어떤 것들인가. 그것은 떼어버리는 것이 희망이다. 낙태를 하고 분식집에 와서 라면을 먹는 아이는 불량하고 몸 생각을 안해서 라면을 먹는 것이 아니다. 돈이 없어서 먹는 라면일 수 있다. 어제까지만 해도 몰랐던 여자와 아침까지 잔 남자아이는 진짜로 모르던 여자가 아니고, 한 진지한 여자로서, 말하자면 한 여자를 발견한 그래서 새롭게 보이는 여자와 아침까지 잔 남자이다. 그들이 낙태를 한 것은, 그들이 그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그 둘 사이의 사랑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그 둘에게 닿는 사랑이 너무나 척박해 생긴 그런 지경인 것이다. 그들은 낙태를 할 정도로 애정에 굶주린 영혼들인 것이다. 그들의 희망은 꽃피는 절망이다. 그들에게 이 도시의 라일락꽃은 절망일 수밖에 없다. 웃는 꽃이 아닌 우는 꽃, 시든 꽃은 빨리 떨어져야 하는데 바람이 불지 않으니 그걸 보는 것도 난감하다."

 

책 <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에서 네번째로 문학평론가 하응백이 사랑하는 시를 이야기한다.

 

문학평론가 하응백은 이성복 시인의 <편지,1>에 대해 말한다.

 

"첫째 의미 문장 '처음 당신을 사랑할 때는 내가 무진무진 깊은 광맥 같은 것이었나 생각해 봅니다'부터 생각해보자. 대개 사랑에 빠진 연인은 상대에게 무엇이든 주고 싶다. 친구 사이라면, 대개 주고받기의 관계다. 오늘 내가 짬뽕을 사주었다면, 내일 너는 나에게 짜장면을 사주어야 한다. 오늘도 짬뽕을, 내일도 짜장면을, 모레도 볶음밥을 내가 너에게 사주어야 한다면, 나흘 후에는 나는 너를 만나지 않겠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이라면 그렇지 않다.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또 그다음 이어지는 수많은 날도, 아무리 주어도 아깝지 않다. 그래서 시인은 '무진무진 깊은 광맥'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이 다 그렇다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은 없다. 사랑도 그렇다. 사랑도 변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사랑은 어려워진다. 내가, 혹은 당신이 변할 수도 있고, 궁합이 맞지 않다고 헤어짐을 강요당하는 수도 있고.... 그래서 시인은 '당신 사랑이 어려워지고'라고 표현한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혹은 당신이 나를 사랑하는 것이 다 어렵다. 시인은 괴롭다. 기껐 내 사랑이 이 정도라니. 시인은 훌쩍 여행을 떠나본다. 이때 여행이란 당신에게서 벗어나기지만 한편으로는 현실에서 벗어나 당신에게 가까이 가기다.

옆에서 보면 사랑은 다 그렇다. 측은하고 유치하고. 그러나 자신이 해보면 또 다 그렇다. 위대하고 결정적이고 운명적이고... 사랑은 불연속적인 두 개체가 하나로 합치는 것이다. 이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지만 혼자 있는 것도 불가능하다. 심심하고, 외롭고, 허전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하나로, 오락가락하다가, 그 힘든 시소놀이를 하다가 사람은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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