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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ㅣ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책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는 주간잡지 <앙앙>에 연재된 '무라카미 라디오'의 일년치의 글을 엮은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 여행할때 있었던 일, 음악, 책 이야기, 하루키가 생각하는 소소한 생각들을 읽을 수 있는 에세이이다. 소설가 하루키의 성격이 느껴지는 에세이여서 친근하다.
책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소설쓰기보다 에세이 쓰기가 어렵다고 말한다. 그는 소설에 비해 에세이는 본업도 아니고 그렇다고 취미도 아니어서 누구를 향해 어떤 스탠드로 무엇을 쓰면 좋을지 파악하기 힘들다고 이야기한다.
"내게도 에세이를 쓸 때의 원칙, 방침 같은 건 일단 있다. 첫째, 남의 악담을 구체적으로 쓰지 않기(귀찮은 일을 늘리고 싶지 않다). 둘째, 변명과 자랑을 되도록 쓰지 않기(뭐가 자랑에 해당하는지 정의를 내리긴 꽤 복잡하지만). 셋째, 시사적인 화제는 피하기(물론 내게도 개인적인 의견은 있지만, 그걸 쓰기 시작하면 얘기가 길어진다)."
책에서는 '악마와 깊고 푸른 바다 사이에서'라는 제목이 등장한다. 영어에서 나오는 표현이기도 하고, 영국의 테런스 래티건이라는 극작가의 <바다는 깊고 푸르고>라는 희곡에서도 나오는 표현이다.
"영국의 테런스 래티건이라는 극작가가 <바다는 깊고 푸르고>라는 희곡을 썼다. 가스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젊은 여성에게 아파트 관리인이 물었다. "왜 그런 짓을 했나요?" 대답은 이렇다. "앞에는 악마, 뒤에는 깊고 푸른바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 몰리면 깊고 푸른 바다가 매혹적으로 보일 때가 있어요. 어젯밤 내가 그랬죠." 나는 대학생 때 이 희곡을 읽고 '그렇구나, 악마와 깊고 푸른 바다 사이에 끼게 될 때도 있구나' 하고 온전히 감동했다고 할까, 바싹 다가오는 악마와 낭떠러지 사이에 낀 나를 상상하니 몹시 실감났다. 나도 어느 쪽인가 선택하라고 한다면 바다에 뛰어들어버릴지도. 악마에게 잡혀먹고 싶진 않으니까.
악마도, 깊고 푸른 바다도 어쩌면 바깥이 아니라 내 마음 안에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한없이 깊은 해저의 웅덩이를 떠올릴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 그것은 늘 어딘가에서 잠재적으로 우리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인생이란 게 뭔가 두렵다."
하루키는 사람이란 나이에 걸맞게 자연스럽게 살면 되지 애써 더 젊게 꾸밀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나이에 관해 가장 중요한 것은 되도록 나이를 의식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하루키의 여유로운 태도가 느껴진다.
"내게는 '딱 좋다'가 인생에서 하나의 키워드가 되었다. 잘생기지도 않고 다리도 길지 않고, 음치에 천재도 아니고 생각해보면 괜찮은 구석이라곤 눈곱만치도 없지만, 그래도 나는 '이 정도면 그냥 딱 좋지 않은가' 하고 생각한다. 사실 여성에게 인기가 많으면 인생이 여러모로 시끄러워질 테고, 다리가 길어봐야 비행기에서 불편할 뿐이고, 노래를 잘하면 노래방에서 목을 많이 써서 목에 용종이 생길 뿐이고, 섣부른 천재였다가는 재능이 언제 다할까 안절부절못할 테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내 자신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특별히 이렇다 할 불편함도 없으니. 그런 경우에 '이쯤이 딱 좋네' 하고 여류롭게 생각하면, 자신이 아저씨(아줌마)든 어떻든 상관없다. 나이 같은 건 관계없이 그너 '딱 좋은' 사람일 뿐이다."
소설과 음악이 사람들에게 가르쳐주는 좋은 기능을 이야기하는 하루키. 그의 생각과 진심이 담긴 소설을 앞으로도 꾸준히 만나고 싶다.
"사람은 때로 안고 있는 슬픔과 고통을 음악에 실어 그것의 무게로 제 자신이 낱낱이 흩어지는 것을 막으려 한다. 음악에는 그런 실용적인 기능이 있다. 소설에도 역시 같은 기능이 있다. 마음속 고통이나 슬픔은 개인적이고 고립된 것이긴 하지만 동시에 더욱 깊은 곳에서 누군가와 서로 공유할 수 있고, 공통의 넓은 풍경 속에 슬며시 끼워넣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소설은 가르쳐준다. 내가 쓴 글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그런 역할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진심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