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이 자라날 때 문학동네 청소년 4
방미진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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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등교는 7시 30분까지, 수업이 끝나고 야간자율학습은 10시 까지. 엉덩이 한번 옴짝거리기 불편한 의자와 팔도 다 뻗을 수 없이 좁다란 직사각형 책상이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하루 15시간동안 나는 그 작고 볼품없는데다가 불편하기까지 한 공간에 갇혀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열두 달, 삼년. 어떻게 그런 곳에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 싶지만 그 때는 모두가 그랬다. 내 옆에 않은 예쁜 아이도, 내 뒤에 앉은 똑똑한 아이도, 저기 창가에 앉은 부잣집 아이도, 맨 뒷줄에 앉은 가난한 집 아이에게도,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은 똑같았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질투, 우울과 공포도 아마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아직도 종종 여고시절의 꿈을 꾼다. 시험을 보는 꿈이라던가, 아무도 없는 교실에 홀로 앉아 있는 꿈이라던가, 텅 빈 복도를 쫓기듯 질주하는 꿈이다. 그 시절의 기억인지, 언젠가의 백일몽인지 알 수 없는 생생한 꿈을 꾸는 날이면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난다. 꿈속에서 나를 끄집어내는 것은 항상 뭔지 모를 두려움이다. 그 시절이 그렇게 견디기 힘들었던 것도 아니었건만 나는 꿈이라도 무서워서 달아나고 싶어 한다. 슬프게도 아무렇지 않은 것인 줄 알았지만, 퍽 괜찮고 때로는 유쾌한 줄 알았지만 사실 나는 그 시절이 조금은 괴로웠던 것 같다. 정말이지 슬프게도 말이다. 
 

사실 그 시절은 내 모든 콤플렉스가 자라나기 시작했던 때이다. 이전까지는 신경 쓰지 않으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돋보기라도 씌워진 듯 커다래지기 시작했다. 거울 속에 비춰지는 얼굴이 멍청해 보이기 시작하며 예쁘장한 짝을 곁눈질 하고 알 수 없는 절망과 분노를 느끼기도 했다. 당당하고 목소리큰 아이가 항상 중심에 서서 주목 받는 모습을 보며 내 몸이 스르르 녹아 시멘트 바닥으로 스며들어가 저기 가운데 있는 아이의 몸을 가르고 다시 태어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모의고사 점수가 크게 오른 아이가 비싼 과외를 받는 다는 소리를 듣고는 늦은 밤 집에 가는 버스에서 소리 없이 울기도 했다. 보이지 않던 나의 치부들이 점점 커다랗게 자라나는 반점처럼 내 몸을 뒤덮어 가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누군가 건들이기만 하면 울어버릴 것처럼, 할퀴어 댈 것처럼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이렇게 자괴하는 내가 유치하고 미웠다. 이런 못난 모습을 들켜버린다면 서른 명 남짓한 반에서 형성된 조그만 사회에서 내쳐질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습관처럼 나는 날카롭게 자라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 책은 다른 의미로 섬뜩했다. 마치 지난날 내가 어딘가 적어놓은 일기장을 펼쳐 보는 것만 같았다. 아니, 문자로도 차마 적지 못했던 내 불안하고 슬프고 미웠던 치부를 누군가에게 폭로 당한 것만 같아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화끈해 졌다. 그 시절 나는 피해자였고 가해자였으며, 누군가에게 끔찍하게 잔인했고, 비굴하게 이기적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너무나도 가깝게 닥쳐온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입시스트레스와 시험, 평가, 등수, 어른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내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게 될 것인지에 대한 기대감 보다는 당장에 옆 사람보다 잘나야 한다는 경쟁심리가 항상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교실에 있는 누구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터뜨려 내지 못하고 쌓여가는 불안과 우울이 의도적으로, 혹은 나도 모르는 새에 다른 누군가를 할퀴어 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머무는 사회는 고작 서른 명의 똑같이 어린 아이들이 복닥거리는 스무 평 남짓의 교실이었건만 그 속에서도 집단과 권력이 생겨나고 상하관계가 나뉘어져 갔다. 교실 어딘가에서 암약하는 그 모든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내 신경을 긁어대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아마도 우리를 더욱 이기적으로, 냉소적으로 몰아갔던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새에 나는 [하얀 벽]의 기주가 되고, 내가 되고, 희진이가 되어 교실 한편의 벽속으로 누군가를 밀어 넣고 있었던 지도 모르겠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적의를 품고서 다만 나보다 못한 공공의 희생양을 찾아 그렇게 누군가가 내게 공포가 되고, 내가 누군가의 공포가 되는 일이 정말 실제로 일어났던 것처럼 생생했다. 벽을 향해 독백하는 나를 단죄하기 위해 어깨를 잡고 끌고가는 부드러운 벽이 그 시절 내 등 뒤에도 있었던 것처럼 무서워 졌다. 
 

그러면서도 나는 [손톱이 자라날 때]의 유지처럼 할퀴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손톱을 기르며 불안을 떨치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생물의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고누다]처럼 나는 진짜와 가짜로 나뉘어 불안과 우울과 열등감을 품고 있는 나와 교실안의 작은 사회에서 얼굴을 바꾸고 감정을 숨겨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누구에게나 호감을 얻고 싶어 하는 간교한 나로 갈리어져 갔을 것이다. 진짜 인지 가짜인지, 먹히는 나는 누구이며 먹는 나는 누구인지, 어느 내가 사라지고 어느 내가 살아남는 건지 알지 못한 체 말이다. [나는 네가 되고]의 주영, 지영 자매처럼, 너로 태어나기 위해 나를 죽이는 지영처럼 그 시절의 진짜 내 모습을 알지도 못한 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이해하려고도 않고 충분히 사랑해 주지도 못한 채 말이다. 
 

그래서 섬뜩하면서도 슬펐다. 이 다섯 가지 이야기 들은 그 시절 내가 느끼고 겪었고 상상했던 일들과 닮아 있었다. 어설프던 지난 일을 되새김질 하는 일은 항상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특히 이렇게 적나라하게 우울한 기억들은 지금의 나 까지도 우울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 시절의 불안과 때때로 공포였을지도 모르는 기억들은 지금 돌이켜 보면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 통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도 있을 것이나 역시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때때로 공포였을 지도 모르는 그 시절은 나는 그저 견디며 보냈다. 그 불안은 나에게도, 내가 할퀴어 대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누군가에도 공포가 되고 상처였을 것인데 그것을 돌아보지도 않고 핥아내지도 않고 말이다. 과연 우리는, 지금의 나는 그 상처를 보듬어 내며 ‘성장’한 것일까? 나는 그 시절 불안하고 옹졸하고 이기적인 어린아이에서 좀 더 나은 사람으로, 좋은 사람으로 어른이 되었나?
사실 아직도 나는 그 시절의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나의 사회는 좀 더 광범위해 졌고, 나는 무수한 관계와 권력과 상하 관계가 존재하는 다양한 집단과 마주하며 살고 있지만 그 시절과 같은 불안과 우울과 공포를 아직도 가끔 느낄 때가 있다. 다만 지금은 좀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 불안과 공포로 날이 선 내가 또 누군가를 할퀴어 대지 않도록 좀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없어지긴 했지만, 그러고 보면 아직도 나는 성장 통을 겪고 있는 어린 애인게 분명하다. 그래서 인지 이 이야기들이 무섭고 섬뜩하기만 하지 않았다. 슬펐다. 한편 으로는 부끄럽기도 했고. 올해 고등학교에 들어간 막둥이 내 동생, 어쩌면 나와 같은 혼란과 우울을 겪게 될지도 모를 발랄한 내 동생에게 꼭 쥐어주고 싶은 소설이었다. 섬뜩하지만 그게 어쩌면 너의 모습이고, 그 모습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몰라도 되도록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 보라고. 이건 나름의 속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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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시간 7일 모중석 스릴러 클럽 25
짐 브라운 지음, 하현길 옮김 / 비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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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보비는 이 모든 것의 경이로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컴퓨터 화면이 한번 깜빡거리는 순간에 상황이 이렇게나 뒤바뀔 수 있고,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벌어진 일들이 어떻게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자신의 고독한 침실까지 파고들 수 있는지 놀랍기만 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한 사내를 죽음에 이르도록 선고하는 것이 가정의 일상사가 됐다는 점에 더욱 입이 딱 벌어졌다. - p. 336
 
   

 

관음과 노출의 시대  


사회에 나갈 날이 멀지 않은 빈대 병아리 중의 한 마리로써, 가장 섬뜩했던 괴담이었다. 아는 이에게 건너건너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정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게 정말이야?’를 연발하며, 확인할 길 없는 낭설이었으나 한편으로는 그럴 법 했기 때문에 소름이 돋았다. 무슨 이야긴고 하니, 일부 규모 있는 회사에서는 입사를 희망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지원 서류와 면접 등의 표면적인 절차 이외의 것도 행한다는 내용의 이야기였다. 그 ‘표면절차 이외의 것’이 상당히 흥미로운데, 이를테면 아이디를 추적해서 자주 들렀던 인터넷 사이트나 남긴 글, 댓글들 까지도 일일이 찾아본다는 것이다. 무슨 구시대적인 사상검열이냐고 실소할 만한 상당히 황당하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생각해 보면 그건 불가능한 일이 아니고, 불가능한 일이 아니기에 실지로 그럴 법한 이야기로 들렸다.
 

요즘은 뭔가 이슈가 되면 화제의 중심에 선 인물에 대한 신상정보가 쉽게 까발려진다. 인터넷이라는 거대한 통신망 안에는 무수한 개인들의 정보가 여과 없이 흘러넘치고 있는 고로 일명 ‘신상 털기’는 그렇게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누구라도 가능하다. 얼마 전에는 한 검색엔진의 모양새를 딴 ‘신상 털기’전문 사이트가 등장해 황당한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이건 전혀 우스운 이야기가 아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간 무자비한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었고, 그렇게까지 일을 몰고 간 뒤에는 인터넷망을 이용한 ‘신상 털기’가 크게 한 몫을 했던 것이다. 개인정보가 그저 심심풀이로 털어지고 까발려 지는 무서운 세상이다.

소통이 쉬워질수록 개인의 사생활은 점점 그 영역이 좁아지고 있다. 이것을 긍정적으로 볼 것인가 부정적으로 볼 것인가의 가치판단은 일단 차치하고, 이러한 세태가 사람들을 어떻게 몰아가고 있는가는 한번 고민해 볼 만한 문제다. 이미 지나치게 비대해져 버린 타인에 대한 관심과 비정상적인 간섭은 그간 얼마나 많은 사건들을 야기해 왔던가. 또, 그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이상 현상에 제 한 몸 내던져 관심의 중심에 서고자 했던가. 그 관심이란 것은 대부분 악의를 품고 있으며, 개인의 일상을 한낱 가십거리로 여기며 조롱하기에 바쁘고, 그런 관심 속에서라도 화제의 중심에 서고자 하는 사람들의 병적인 심리는 이해할 수 없는 과잉행동으로 나타났다. 온라인상의 관음증과 노출증은 이미 그 도를 넘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타인의 삶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오락프로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요즘은 리얼을 표방하지 않은 오락프로를 찾기 힘들 정도로 사람들의 기호는 명확해 졌다. 각본이 없는 상황과 그 상황 속에서의 배우들의 대처는 날것 그대로 전파를 타고, 그 과정 속에서 배우 개개인의 시시콜콜한 개인사가 헤쳐진다면 더욱 열광한다. 24시간 타인의 삶을 관찰한다는 설정의 프로그램도 공중파에서만 나오지 않는 다 뿐이지, 이미 케이블에서는 인기리에 방송되고 있다. 놀랍게도 이러한 추세는 세계적으로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온라인에서의 관음증이 점차 무섭게 현실로 퍼져나가고 있는 것만 같다. 개인의 삶이 한낱 일회성의 오락에 지나지 않고, 그 속에서 쇼 아닌 쇼를 벌여야 하는 사람과 그것을 보고 즐기는 사람들이라니. 정말 그 끝은 어디며, 그 결과는 무엇일까? 소름 끼치는 세상이다. 

<24시간 7일>, 최후의 생존자를 가린다!

아마 그 끝이며 결말은 이런 모습이 아닐까? 물론 이런 결말이라면 최악 중에 최악이겠지만 말이다. TV 리포터와 뉴스진행자를 오가며 20년 동안 방송계에서 일 해온 짐 브라운이 그간 방송현장에서 쌓은 지식들을 살려 평소 좋아하던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소재로 한편의 스릴러 소설을 내놓았다. 

<24시간 7일>은 2백만 달러의 상금과 평생 이루고 싶은 단 한 가지 소원 이라는 부상을 내걸고 벌이는 외딴 섬에서의 서바이벌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다. 그들의 섬생활은 방송 내내 24시간 전파를 타고 대중에게 보여지고, 대중은 그들 가운데 탈락자를 선정한다. 쇼에 참가한 사람들은 제각각이 가진 공포를 이겨내는 미션을 수행해야 하는데, 미션 수행 결과 시청자의 탈락자 투표율을 감해줄 수 있는 안전석을 확보할 수 있다. 이러한 소재와 설정은 낯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미 이와 유사한 외국산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시청한 바 있다. 다만 끔찍한 것은, <24시간 7일>의 탈락자는 실제로 죽음을 맞는 다는 것이고, 그 모든 것이 실제상황이라는 점이다.

28세의 다나 커스틴은 심각한 근육퇴행위축증을 앓고 있는 딸을 둔 미혼모다. 경제적으로도 어려워 매일 각종 아르바이트에 치여 사는 그녀지만 그녀는 항상 딸이 걱정뿐이다. 그녀의 딸은 잘 버텨주고 있지만 오래 살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평생의 소원은 스위스에서 행해지고 있는 근육퇴행위축증 임상실험에 딸이 참가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는 그 소원을 이루기 위해 <24시간 7일>에 참가하게 된다. 뒤늦게 충원되어 설렜던 것도 잠시, 방송이 시작되자마자 진행자와 스태프들의 피부가 끓어오르더니 카메라 앞에서 처참하게 죽어나간다. 보고도 믿지 못할 상황에 우왕좌왕 하고 있는데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컨트롤이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은 지금 이 순간부터 진정한 리얼리티 쇼가 되었다. <24시간 7일>에 온 것을 환영한다. 너희들 인생의 종점에 온 것을 환영한다.” 쇼의 출연자들은 한순간에 사람을 죽이는 정체모를 바이러스에 감염되었고, 하루하루 백신을 투여 받지 못하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눈앞에서 고통스럽게 죽어간 진행자와 스태프들은 그들의 멀지 않은 미래였던 것. 출연자들은 백신을 건 쇼에 어쩔 수 없이 참여해야 하는 상황에 몰린다. 목숨을 건 진짜 쇼가 시작된 것이다.

<24시간 7일>의 대참사는 쇼가 진행되는 바사섬 곳곳에 설치된 수백 대의 카메라로 실시간 생중계되고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게 된다. 미국 정부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모야 이 엄청난 사태를 진압하고자 고심한다. 하지만 쇼의 진행자와 스태프를 한순간에 살해한 바이러스의 정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섬에 고립된 피해자들을 섣불리 구조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군함도 헬기도 섬 가까이 가면 무슨 이유에선지 파괴되어 버린다. 이 모든 상황이 인터넷을 통해 전국 각지, 세계 각지로 모두 중계되고 있는 상황이며 심지어 이 방송조차 중단시킬 수도 없다. 유래 없는 끔찍한 테러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24시간 7일>은 단번에 엄청난 열풍을 몰고 온다. 사람들은 날로 이 끔찍한 리얼리티 쇼에 열광하고 집중한다. 사람들은 제 할 일도 잊은 채 오직 24시간 섬에 고립된 출연자들을 관찰하는데 열을 올리고, 이런 사람들의 집단적 이상 집중은 도를 넘어 사람을 죽이는 투표에도 거리낌 없이 참여하기에 이른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참가자들을 투표를 통해 한명씩 죽어간다. 그 모든 것들이 중계되면서 날이 더 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이 사람을 죽이기 위해 한 표를 행사한다. 쇼가 벌어지고 있는 섬에서나, 쇼를 시청하는 본토에서나 <24시간 7일>은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온 것이다. 

<24시간 7일>사태는 섬에 고립된 출연자들뿐만 아니라 쇼를 시청하는 시청자들에게도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속수무책으로 범국민적 테러를 눈뜨고 볼 수밖에 없는 상황. 과연 이런 엄청나고 치밀한 계획을 실행시킨 [컨트롤]의 정체는 무엇일까? 섬에 고립된 사람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 까? 과연 최후의 승자는 누가 될 것인가? 

지금 누군가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24시간 7일>은 죽음 직전에 놓은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모습과 쇼를 지배하는 컨트롤과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출연자들의 대립 그리고 그것이 실제 상황임을 인지하면서도 점차 자극적인 쇼를 관람하듯 안방에서 살인을 종용하는 대중의 심리를 다양하고 실감나게 그려냈다. 살아남으려는 사람들과 그들을 구조하려는 움직임, 컨트롤의 실체를 파헤쳐가는 과정 등은 훌륭한 긴장요소로 작용하며 한순간도 책에서 눈을 떼기 힘들게 했다. 순간순간 공간을 옮겨가며 진행되는 드라마틱한 구성은 빠른 이야기전개에 스릴감을 더했다. 오랜만에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빠져든 괜찮은 소설이었다.

타인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심리일 것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그 당연한 심리가 상당히 왜곡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세상이 너무 영화 같아서 그런가, 가끔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우습지 않게 벌어지고 거기에 이제는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이지경이 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실제’라는 말 자체도 자극적인 것인데 자극적인 것이 숫제 널려다 보니 이제는 ‘더 자극적인’ 실제를 찾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이다. 유투브에 올라오는 폭력적인 또는 음란한, 엽기적인, 패륜적인 영상들이 심심찮게 화제가 되고 있고,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누군가의 삶을 해킹한다. 너무 쉽게 알 수 있게 되는 까닭일까, 우리는 타인의 삶을 너무 쉽게 본다. 쉽게 말하고, 쉽게 욕하고, 쉽게 비웃고. 누군가의 현실이 한순간 누군가의 가십이 되어 버리는 상황에서 누군가의 존엄은, 누군가의 인권은, 누군가의 가치는 순간 휴지조각만도 못한 것이 되어버리는 거다. 

리얼이 언제부터 한낱 오락꺼리로 전락해 버렸을까. 리얼리티와 대중의 왜곡된 관심에 대한 광적인 집착이 엽기적인 시절을 만들어 내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작가 후기에서 짐 브라운이 밝혔듯이, 리얼리티 쇼는 점차 더 자극적으로 변모해 갈 것이고, 사회적으로 성행하는 관음증은 심리적 사회적으로 앞으로 엄청난 영향을 끼칠 것이다. 타인의 현실이 오락이 되는 순간, <24시간 7일>의 악몽은 사실 단순한 소설의 소재로 치부하기에는 나름의 현실감을 가지고 있다. 이 소설은 결말이 있지만, 그런 현실이라면 결말이 있을까? 내용도 스릴이 넘치지만 작가 후기로 불현 듯 깨닫게 되는 현실이 더 소름 돋는 책이다. 

멍하니 자판을 두들기다가 드는 생각. 저기 저 웹캠 너머로 누군가가 멍청한 얼굴로 자판을 두드리는 내 얼굴을 감상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건 참 생각할수록 소름 돋는데…….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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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란도란 2010-11-18 18: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집오리님!^^ 알찬 서재 잘 구경하고갑니다
저는 이음출판사에서 나왔어요~
저희가 이번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를 연일 차지하여 화제가 되고있는 도서
<모터사이클 필로소피> 한국판 출판 기념으로 서평단을 모집하고있거든요^^
책을 사랑하시는 오리님께서 참여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 이렇게 리플 남기고가네요
저희 블로그에 방문해주세요~! :)
 
행복한 길고양이 행복한 길고양이 1
종이우산 글.사진 / 북폴리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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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고양이들의 행복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적당한 포만감과 따뜻한 햇볕, 편안한 잠자리만 있으면 세상 그 어느 것도 부러울 것이 없다. 그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지. 우리는 행복이라는 걸, 우월함과 착각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 p.18
 
   


 
저자는 자신의 사진 모델이 되어주던 늙은 고양이가 무지개다리를 건넌 뒤부터 길고양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은 떠나버린 늙은 친구에 대한 저자 나름의 애도였을 것이다. 길고양이들을 관찰하고 사진에 담으면서 길고양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던 저자는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을 하게 된다. 길 위의 위태로워 보이는 길고양이의 삶에도 우리가 생각치 못하는 여유가 있고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저자는 길고양이들의 사랑과 여유와 행복을 사진에 담았다. 이것을 보는 누군가가 고양이들과 같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행여라도 고양이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이 사진들로 조금은 그들을 덜 미워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말이다.

 사람들은 길 위의 고양이들에게 냉담하다. 기분 나쁜 소리로 운다고, 음식물 쓰레기봉투를 헤집어 놓는다고, 더럽다고, 그냥 싫다고. 길 위에 생명들의 삶이란 모두 하나같이 고달프고 처절할 것이겠지만 길고양이의 삶이란 아마 몇 배는 더 고되리라. 길에서의 위험과 사람에게서의 위험 속에 하루하루가 고양이들에겐 고달프다. 맘 놓고 배를 채울 곳도,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는 곳도, 편히 눈 부칠 곳도 마땅치 않은 것이 바로 길 위에 고양이들의 삶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것이 있다. 고양이는 발정기 때 기분 나쁜 소리로 울고, 굶주림에 지처 음식물 쓰레기 봉지를 뒤지고, 온갖 도시의 오염에 찌들어 더러운 몰골이지만, 누군가를 의지하고 기대고 싶어 한다. 그들도 가족을 꾸리고 무리를 거느리고 사랑하고 의지하며 살아간다. 길 위에서 누군가가 비극을 맞이하면 슬퍼하고, 남겨진 누군가의 자식을 거두어 키우고, 동료를 의지하고 가족을 사랑하며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낸다. 

 사람은 그들을 혐오하고 싫어하지만, 그들은 때로는 사람을 따르고 싶어 한다. 친절을 베푼 사람은 잊지 않고 반기고, 아닌 척 하면서도 주인처럼 믿고 의지한다. 빨간 지붕 위에서 재개발에 밀려 집을 버리고 떠난 친절한 이를 기다렸던 그 고양이도, 자기를 보살펴준 할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떠난 그 늙은 고양이도, 그저 사람을 유난히 잘 따랐던 독립문 상가의 검은 고양이도 사람을 좋아했고 또한 기대고 의지했다. 흔히들 고양이를 영악스럽고 자기밖에 모르는 짐승이라고 매도하지만, 그런 의식과는 상관없이 고양이는 정이 많은 동물이다. 다만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조금 남다를 뿐이라 오해를 받는 것이리라.
 

 고양이에 대한 오해와 편견, 그것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고양이의 모습들이 이 책에 담겨져 있다. 서로 의지하고 보살피며 길 위에 서 있는 고양이들의 여유와 익살과 호기심을, 때로는 그들의 권태와 슬픔과 애처로움까지도 마치 고양이 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 절묘하게 포착해 냈다. 고양이가 이렇게 다양한 표정을 갖고 있었나 싶을 정도로 참 생생하다. 그리고 거기에 관심 갖지 않으면 절대 모를 고양이들의 사정도 적어넣었다. 한마리 한마리에 이름을 붙이고 그들이 가진 사연을 전하는데 참 하나하나가 절절하다.  

독립문 상가의 사람을 유난히도 잘 따르던 검은 고양이는 어느 날 누군가에게 붙들려 수염이 불타버리고 난 뒤로는 사람을 피한다. 봉정암의 까만코는 엄마고양이와 형제고양이들을 길 위에 먼저 보내고 혼자가 된 후 어느 무리에도 속하지 못하고 겉돌기만 했다. 길 위에서 가족을 잃은 상처가 너무도 컸던 것이다. 길 위에서 어미를 잃은 금동이도 분양된 이후로 한동안 동거인과 정을 붙이지 못했다. 그 상처가 오죽이나 컸을까?

그네들의 삶을 들여다본다면 구구절절이 신파가 아닌 것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의 고양이들은 행복하다. 아프고 슬픈 고양이가 아니라 행복한 고양이다. 닭둘기 만도 못한 취급을 받는 고양이 들인데 그들은 마냥 불행하지만은 않다. 오히려 가끔은, 아니 종종 행복하다. 싫어하는 사람이 열이라도 한둘은 이들을 위해 주는 사람이 있어 행복하고, 누군가를 길 위에서 잃어도 보듬어 주는 동료와 가족들이 있어 행복하고, 그저 따뜻한 볕이 내리쬐기만 해도 행복하다. 이게 참, 뭐랄까. 묘한 감동을 준다. 고양이 사진을 보면서 코끝이 뜨거워 질 줄은 몰랐는데, 참으로 묘하다. 

 

 

 

 마지막 장의 사진.  

행복의 길로 걸어가는 고양이가 뒤돌아본다. 따라 오라는 걸까? 아니면 어딜 졸래졸래 따라오느냐고 시비라도 거는 것일까? 이 책을 보며 조금은 뜨거웠고, 또 조금은 행복했던 것 같다. 길 위의 고양이들이 오늘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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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다
빅토르 로다토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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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은 수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현실에서 어른과 아이를 나누는 기준은 자로 잰 듯 반듯하고 명확하지만, 가끔은 기준이 어른을 만들어 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단지 19가 20이 되고, 고유번호가 적힌 빳빳한 카드 한 장씩을 받아 드는 것 이상의 무언가 인데 말이다. 단순한 절차 속에서 어른딱지는 어느 날 갑자기 쥐어진 것이어서, 성장이니 성숙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솔직히 내게 어른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얻어진 것이어서 나의 성장도 그와 같이 그냥 얻어지는 것 인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어른일까? 나에게도 그 어떤 성장통이 있었던가? 나는 성장 했던 것일까?
 

“끔찍한 짓을 하고 싶어.”
 

소녀 마틸다는 생각이 너무 많다. 그녀의 작은 머리통을 가득 메운 생각들은 어쩌면 무기력하고 우울한 집안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키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3년 전 그녀의 완벽한 언니 헬렌이 열차에 치어 죽었다. 언니 헬렌의 죽음으로 평범했던 마틸다의 가족들에게는 짙은 그늘이 드리운다. 헬렌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엄마는 여전히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고 아빠는 그런 엄마가 마틸다 보다도 걱정이다. 오직 마틸다를 상대해 주는 것은 늙고 멍청한 개 한 마리 뿐. 그래서 일까? 마틸다는 끔찍한 짓이 하고 싶다. 이 숨 막히는 슬픔과 상실의 공기에서 벗어나고 싶다. 실수인척 접시를 깨는 것은 애교이다. 저주받은 보물인 냥 꽁꽁 묻어둔 헬렌의 흔적들을 보란 듯이 끄집어내놓고, 그녀의 기일에 맞춰 기절초풍할 엽기적인 이벤트를 계획하기도 한다.

마틸다의 발버둥은 안쓰럽기 까지 하다. 그녀 또한 누구보다도 헬렌을 사랑했기 때문에 헬렌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를 마음깊이 돌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마틸다의 몸과 마음은 어떤 형태로든 변화하려고 하는데 아무도 마음을 들여다 봐 주는 사람이 없다. 상담처라고는 헬렌이 남자친구들과 주고받은 메일들뿐이다. 사춘기, 상처와 혼란 속에 홀로 내던져진 마틸다는 끊임없이 생각한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주변을 관찰하고 분석한다. 그리고 의심한다. 어리고 어설프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의지하고 따라하고 때로는 시기하기도 했던 완벽한 이상이 거짓말같이 사라진 현실에 대해 원망하기만 하지 않고 의심하며 진실을 파헤치려 한다. 그것이 혼란과 상처를 극복할 유일한 방법인양 말이다. 
  

헬렌의 죽음과 그녀의 사생활, 그리고 그녀의 고민과 진정한 내면은 마틸다에게 적지 않은 충격과 자책감을 안겨주는 것들이었지만, 그녀는 결국 잔인한 진실을 받아들이고 이해한다. 무엇에 대한 이해라고 묻는다면 조금 복잡하지만 말이다. 헬렌에 대한 것 일수도 있고, 그녀의 엄마에 대한 것 일수도 있고, 숨겨졌던 편치 않은 진실에 대한 것 일수도 있고, 마틸다 자신에 대한 것 일수도 있다. 의심하던 것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된 마틸다는 결국은 헬렌과도, 그녀 자신과도 화해하게 된다. 마틸다는 이제 헬렌을 떠나보낼 수 있을 것이다. 상처입고 이리저리 힘없이 허공을 부유하던 소녀가 비로소 한 단계 ‘성장’한 것이다.

“성장은 뒤돌아보지 않는 거야.”

어쩌면 성장이란 모든 것의 유한성과 불완전성을 깨닫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모든 시작에는 반드시 그 끝이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다. 완벽해 보이는 이 순간도, 혹은 너무나도 불안하고 우울해 보이는 순간이라도 시작과 끝의 법칙이 적용된다. 밝음의 뒤에는 어두움이 있고, 즐거움의 뒤에는 슬픔이 있고, 완벽함의 뒤에는 금방이라도 바스라 질 것 같은 위태로움이 있음을. 모든 것의 한시성과 불완전함을 깨달아 가는 과정 속에서 ‘성장’이라는 부산물이 생겨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이나 ‘영원한’ 같은 멋진 거짓말에 마음을 뺏기기 보단, 부족하고 찌질 하더라도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여기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뒤돌아보지 말고, 후회하지 말고,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슬퍼하지도 말고, 그저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성장’할 수 있고, 그제야 ‘어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누구보다 직설적인 마틸다가 루이스에게 거짓말을 둘러대는 모습을 보며 그녀가 진정 ‘성장’하였음을 느꼈다. 한편으로 어른딱지를 손에 쥔 채 아직도 자라지 못한 내 모습을 새삼스레 발견한 것 같아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되돌아보면 엉성하고 한심하고 부끄러운 과거들이 떠오른다. 그것이 가끔은 너무도 창피하고 어수룩해서 얼굴이 벌게질 정도다. 하지만 뒤돌아보거나 후회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미련을 두며 메어있지 않아도 된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가진 유한한 순간들을 생각한다. 언젠가 내게 닥칠 모든 것이 완벽하게 끝나버릴 그 어느 순간을 생각하며, 완벽하지도 그렇다고 불안하지도 않은 지금을 살아야겠다. 멋지지도 훌륭하지도 똑똑하지도 합리적이지도 못한 나라도 이해하고 용인할 것, 그리고 남들도 나와 같이 인정하고 이해하고 사랑해야겠다고. 마틸다가 꿈에서라도 헬렌을 만난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괜찮다고, 원래 그런 거라고. 스스로를 이해하고 용인하고 화해하라고. 제법 어른스러워진 마틸다가 그렇게 속삭일 것 같다. 그 말은 헬렌에게 위로와 격려가 될 것이다. 물론 나에게도 이것은 대단 위로였고 격려였다. [마틸다]를 집어든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우울하지만 유쾌하고,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깊이 있는 소설을 만났다. 머리가 울리는 묘한 여운을 느끼며 책장을 덮었다. 이 기분이 꽤 오랫동안 지속 될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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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에 흩날리는 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4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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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귀환은 언제나 마니아들을 기쁘게 한다. 요즘같이 개성 넘치는 다양한 장르소설이 범람하는 때라도, 절판되어 이제는 전설처럼 그 이름만 전해지는 명작들에 대한 팬들의 아쉬움은 여전하다. 전에 읽어본 사람은 다시 보고 싶어 찾고, 전에 읽어보지 못한 사람도 입소문과 호기심에 찾는 명작들이나, 한번 절판된 책은 다시 구하기 어려운법. 이런 사정이니 헌책방에서조차 구해지지 않는 책들이 슬슬 재출간된다는 소식만큼 마니아들을 설레게 하는 소식도 없을 것이다.

『얼굴에 흩날리는 비』는 일본 하드보일드의 전설 기리노 나쓰오의 출세작이다. 나오키상과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상복 많은 작품이며, 일본 독자들은 물론 우리나라의 독자들에게까지 기리노 나쓰오라는 이름을 인상 깊게 알린 작품이다. 1994년 번역 출간된 이후 절판되어 그간 헌책방을 통해서만 거래되던 것이 이번에 재출간 되었다. 이미 『다크』를 통해 탐정 미로 시리즈를 접한 사람이라면 매우 반가울 것이고, 탐정 미로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시리즈의 시작편 격인 이 책을 반기게 될 것이다. 빠르고 거침없는 문장과 충격적인 이야기 전개, 거기다 추리소설적인 요소도 빼먹지 않고 갖추고 있어 충분히 매력적이면서 ‘재미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날 밤 그 전화를 받았더라면…….”

무라노 미로는 상처하고, 조사탐정인 부친이 쓰던 사무실에서 은거하며 하루하루 무료한 나날을 보내며 살고 있었다. 왠지 너무도 불길해서 받을 수 없었던 한밤의 전화 한통으로 인해 그녀의 무료하고 우울했던 일상은 화려하게 뒤엉켜 버린다. 논픽션 작가인 친구 요코가 애인인 나루세의 돈 1억 엔과 함께 행방불명되면서 야쿠자에게 의심을 받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 돈은 야쿠자 자본으로 중고차상을 하고 있는 나루세가 야쿠자에게 빌린 돈이었고, 미로는 졸지에 요코와 공모하여 야쿠자의 돈을 빼돌렸다는 누명을 쓰게 된 것이다. 미로는 나루세와 함께 일주일 내로 요코와 1억 엔을 찾아내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고, 요코의 행적을 추적해 나가기 시작한다.

허영심 많고 출세욕이 강한 요코는 SM과 페티시즘에 대한 르포로 르포라이터로서의 명성을 쌓았으나, 한 단계 더 올라서고자 하는 욕망으로 고뇌하고 있었다. 거기에 경제사정까지 좋지 않아 위태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미로는 요코가 결백하다고 생각하지만 요코를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명확해지는 정황증거에 혼란스러워 한다. 그러던 중 요코가 화려한 재기를 위해 야심작을 준비하면서 베를린에 머물렀고 그 기간 동안 네오나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위험한 취재를 시도했던 것을 알게 된다. 불길한 느낌이 드는 가운데 요코의 행적은 여전히 묘연하고 사라진 1억 엔을 찾을 어떠한 단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과연 요코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정말 그녀가 돈을 갖고 잠적한 걸까? 그날 밤 받지 않았던 그 전화는 미로에게 무슨 말을 남기려 했던 것일까?

매력적인 캐릭터와 파격적인 이야기. 색다른 재미의 감성 하드보일드

여성 작가가 쓰고, 여성 탐정이 주인공인 하드보일드 스릴러는 확실히 이전의 다른 스릴러물과는 차별화된 재미를 준다. 여리면서도 강하고, 감정적인 것 같으면서도 냉철한 탐정 미로의 캐릭터는 ‘하드보일드’와 ‘감성’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를 절묘하게 성공적으로 이어 붙였다. 그런 조금은 독특한 설정이 먼저 흥미를 돋웠고, 음침하고 어두운 배경에 눈을 뺏기고, 위태로운 미로의 탐정조사에 긴장하고, 너무나도 명쾌하게 맞아떨어지는 절묘한 구성에 감탄했다. 

시종일관 미로의 시선을 쫓으며, 아직은 탐정이 아닌 미로가 뜻하지 않게 사건에 휘말리면서 점차 탐정이 되어가는 과정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다크』를 먼저 접한 사람이라면 이런 미로의 모습이 낯설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그런 감정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는 비정한 사건의 전말과 묘한 대비를 이루며 강한 여운을 남긴다. 추악하고 노골적인 인간 군상들이 가감 없이 드러내는 욕망 덩어리들은 불편할 정도로 어둡고 씁쓸하지만 그 안에서 홀로 친구를 믿고 진실을 추적해 가는 미로의 활약은 그나마 이타적이며 순수하다. 어느 하나 믿을 수 없고,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며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머리를 울리는 마지막 반전은 충격적이면서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전체적으로 상당히 어둡고 삭막하지만 한편으로는 따뜻하고 감성적이다. 마치 이 책 전체가 매력적인 캐릭터 미로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조금은 거북한 묘사와 거친 설정 속에 미스터리와 추리요소가 적절하게 어우러지고, 거기에 개성 강하고 매력적인 캐릭터까지 갖춘 상당히 괜찮은 소설이다. 하드보일드 스릴러라는 장르가 사람에 따라서는 자칫 혐오스러울 수 도 있겠으나, 그런 것을 만회하고도 남을 인상적인 전개와 뚜렷한 캐릭터가 있다. 그리고 더욱 구미가 당기는 것은, 이것이 단지 시작편일 뿐이라는 것이다. 탐정 미로 시리즈는 앞으로 비채에서 모두 출간할 계획이라던데 본편을 재미있게 읽은 사람으로서 대 환영이다. 앞으로의 미로의 활약이 더욱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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