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이 자라날 때 문학동네 청소년 4
방미진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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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등교는 7시 30분까지, 수업이 끝나고 야간자율학습은 10시 까지. 엉덩이 한번 옴짝거리기 불편한 의자와 팔도 다 뻗을 수 없이 좁다란 직사각형 책상이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하루 15시간동안 나는 그 작고 볼품없는데다가 불편하기까지 한 공간에 갇혀 숨 한번 크게 쉬지 못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 열두 달, 삼년. 어떻게 그런 곳에서 그렇게 많은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 싶지만 그 때는 모두가 그랬다. 내 옆에 않은 예쁜 아이도, 내 뒤에 앉은 똑똑한 아이도, 저기 창가에 앉은 부잣집 아이도, 맨 뒷줄에 앉은 가난한 집 아이에게도, 우리에게 주어진 공간은 똑같았다. 우리가 느끼는 불안과 질투, 우울과 공포도 아마 비슷하지 않았나 싶다.
 

나는 아직도 종종 여고시절의 꿈을 꾼다. 시험을 보는 꿈이라던가, 아무도 없는 교실에 홀로 앉아 있는 꿈이라던가, 텅 빈 복도를 쫓기듯 질주하는 꿈이다. 그 시절의 기억인지, 언젠가의 백일몽인지 알 수 없는 생생한 꿈을 꾸는 날이면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난다. 꿈속에서 나를 끄집어내는 것은 항상 뭔지 모를 두려움이다. 그 시절이 그렇게 견디기 힘들었던 것도 아니었건만 나는 꿈이라도 무서워서 달아나고 싶어 한다. 슬프게도 아무렇지 않은 것인 줄 알았지만, 퍽 괜찮고 때로는 유쾌한 줄 알았지만 사실 나는 그 시절이 조금은 괴로웠던 것 같다. 정말이지 슬프게도 말이다. 
 

사실 그 시절은 내 모든 콤플렉스가 자라나기 시작했던 때이다. 이전까지는 신경 쓰지 않으면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돋보기라도 씌워진 듯 커다래지기 시작했다. 거울 속에 비춰지는 얼굴이 멍청해 보이기 시작하며 예쁘장한 짝을 곁눈질 하고 알 수 없는 절망과 분노를 느끼기도 했다. 당당하고 목소리큰 아이가 항상 중심에 서서 주목 받는 모습을 보며 내 몸이 스르르 녹아 시멘트 바닥으로 스며들어가 저기 가운데 있는 아이의 몸을 가르고 다시 태어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어느 날 모의고사 점수가 크게 오른 아이가 비싼 과외를 받는 다는 소리를 듣고는 늦은 밤 집에 가는 버스에서 소리 없이 울기도 했다. 보이지 않던 나의 치부들이 점점 커다랗게 자라나는 반점처럼 내 몸을 뒤덮어 가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잔뜩 날이 서 있었다. 누군가 건들이기만 하면 울어버릴 것처럼, 할퀴어 댈 것처럼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이렇게 자괴하는 내가 유치하고 미웠다. 이런 못난 모습을 들켜버린다면 서른 명 남짓한 반에서 형성된 조그만 사회에서 내쳐질 것만 같아서 불안했다. 그래서 그랬는지, 습관처럼 나는 날카롭게 자라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 책은 다른 의미로 섬뜩했다. 마치 지난날 내가 어딘가 적어놓은 일기장을 펼쳐 보는 것만 같았다. 아니, 문자로도 차마 적지 못했던 내 불안하고 슬프고 미웠던 치부를 누군가에게 폭로 당한 것만 같아 가슴이 뛰고 얼굴이 화끈해 졌다. 그 시절 나는 피해자였고 가해자였으며, 누군가에게 끔찍하게 잔인했고, 비굴하게 이기적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너무나도 가깝게 닥쳐온 미래에 대한 불안과 입시스트레스와 시험, 평가, 등수, 어른을 코앞에 둔 시점에서 내가 앞으로 어떤 인생을 살게 될 것인지에 대한 기대감 보다는 당장에 옆 사람보다 잘나야 한다는 경쟁심리가 항상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교실에 있는 누구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터뜨려 내지 못하고 쌓여가는 불안과 우울이 의도적으로, 혹은 나도 모르는 새에 다른 누군가를 할퀴어 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머무는 사회는 고작 서른 명의 똑같이 어린 아이들이 복닥거리는 스무 평 남짓의 교실이었건만 그 속에서도 집단과 권력이 생겨나고 상하관계가 나뉘어져 갔다. 교실 어딘가에서 암약하는 그 모든 보이지 않는 것들이 내 신경을 긁어대고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아마도 우리를 더욱 이기적으로, 냉소적으로 몰아갔던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새에 나는 [하얀 벽]의 기주가 되고, 내가 되고, 희진이가 되어 교실 한편의 벽속으로 누군가를 밀어 넣고 있었던 지도 모르겠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적의를 품고서 다만 나보다 못한 공공의 희생양을 찾아 그렇게 누군가가 내게 공포가 되고, 내가 누군가의 공포가 되는 일이 정말 실제로 일어났던 것처럼 생생했다. 벽을 향해 독백하는 나를 단죄하기 위해 어깨를 잡고 끌고가는 부드러운 벽이 그 시절 내 등 뒤에도 있었던 것처럼 무서워 졌다. 
 

그러면서도 나는 [손톱이 자라날 때]의 유지처럼 할퀴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손톱을 기르며 불안을 떨치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을 것이다. 끊임없이 생물의 진짜와 가짜를 나누는 [고누다]처럼 나는 진짜와 가짜로 나뉘어 불안과 우울과 열등감을 품고 있는 나와 교실안의 작은 사회에서 얼굴을 바꾸고 감정을 숨겨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누구에게나 호감을 얻고 싶어 하는 간교한 나로 갈리어져 갔을 것이다. 진짜 인지 가짜인지, 먹히는 나는 누구이며 먹는 나는 누구인지, 어느 내가 사라지고 어느 내가 살아남는 건지 알지 못한 체 말이다. [나는 네가 되고]의 주영, 지영 자매처럼, 너로 태어나기 위해 나를 죽이는 지영처럼 그 시절의 진짜 내 모습을 알지도 못한 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이해하려고도 않고 충분히 사랑해 주지도 못한 채 말이다. 
 

그래서 섬뜩하면서도 슬펐다. 이 다섯 가지 이야기 들은 그 시절 내가 느끼고 겪었고 상상했던 일들과 닮아 있었다. 어설프던 지난 일을 되새김질 하는 일은 항상 유쾌한 것만은 아니다. 특히 이렇게 적나라하게 우울한 기억들은 지금의 나 까지도 우울하게 만들어 버린다. 그 시절의 불안과 때때로 공포였을지도 모르는 기억들은 지금 돌이켜 보면 어른이 되어가는 성장 통이라고 치부해 버릴 수 도 있을 것이나 역시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때때로 공포였을 지도 모르는 그 시절은 나는 그저 견디며 보냈다. 그 불안은 나에게도, 내가 할퀴어 대고 있었을 지도 모르는 누군가에도 공포가 되고 상처였을 것인데 그것을 돌아보지도 않고 핥아내지도 않고 말이다. 과연 우리는, 지금의 나는 그 상처를 보듬어 내며 ‘성장’한 것일까? 나는 그 시절 불안하고 옹졸하고 이기적인 어린아이에서 좀 더 나은 사람으로, 좋은 사람으로 어른이 되었나?
사실 아직도 나는 그 시절의 감정을 느낄 때가 있다. 나의 사회는 좀 더 광범위해 졌고, 나는 무수한 관계와 권력과 상하 관계가 존재하는 다양한 집단과 마주하며 살고 있지만 그 시절과 같은 불안과 우울과 공포를 아직도 가끔 느낄 때가 있다. 다만 지금은 좀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 불안과 공포로 날이 선 내가 또 누군가를 할퀴어 대지 않도록 좀 더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이 없어지긴 했지만, 그러고 보면 아직도 나는 성장 통을 겪고 있는 어린 애인게 분명하다. 그래서 인지 이 이야기들이 무섭고 섬뜩하기만 하지 않았다. 슬펐다. 한편 으로는 부끄럽기도 했고. 올해 고등학교에 들어간 막둥이 내 동생, 어쩌면 나와 같은 혼란과 우울을 겪게 될지도 모를 발랄한 내 동생에게 꼭 쥐어주고 싶은 소설이었다. 섬뜩하지만 그게 어쩌면 너의 모습이고, 그 모습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몰라도 되도록 좋은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 보라고. 이건 나름의 속죄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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