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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틸다
빅토르 로다토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성장은 수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현실에서 어른과 아이를 나누는 기준은 자로 잰 듯 반듯하고 명확하지만, 가끔은 기준이 어른을 만들어 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단지 19가 20이 되고, 고유번호가 적힌 빳빳한 카드 한 장씩을 받아 드는 것 이상의 무언가 인데 말이다. 단순한 절차 속에서 어른딱지는 어느 날 갑자기 쥐어진 것이어서, 성장이니 성숙이니 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솔직히 내게 어른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얻어진 것이어서 나의 성장도 그와 같이 그냥 얻어지는 것 인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어른일까? 나에게도 그 어떤 성장통이 있었던가? 나는 성장 했던 것일까?
“끔찍한 짓을 하고 싶어.”
소녀 마틸다는 생각이 너무 많다. 그녀의 작은 머리통을 가득 메운 생각들은 어쩌면 무기력하고 우울한 집안에서 스스로를 격리시키려는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3년 전 그녀의 완벽한 언니 헬렌이 열차에 치어 죽었다. 언니 헬렌의 죽음으로 평범했던 마틸다의 가족들에게는 짙은 그늘이 드리운다. 헬렌을 누구보다 사랑했던 엄마는 여전히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고 아빠는 그런 엄마가 마틸다 보다도 걱정이다. 오직 마틸다를 상대해 주는 것은 늙고 멍청한 개 한 마리 뿐. 그래서 일까? 마틸다는 끔찍한 짓이 하고 싶다. 이 숨 막히는 슬픔과 상실의 공기에서 벗어나고 싶다. 실수인척 접시를 깨는 것은 애교이다. 저주받은 보물인 냥 꽁꽁 묻어둔 헬렌의 흔적들을 보란 듯이 끄집어내놓고, 그녀의 기일에 맞춰 기절초풍할 엽기적인 이벤트를 계획하기도 한다.
마틸다의 발버둥은 안쓰럽기 까지 하다. 그녀 또한 누구보다도 헬렌을 사랑했기 때문에 헬렌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깊은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를 마음깊이 돌보는 이는 아무도 없다. 마틸다의 몸과 마음은 어떤 형태로든 변화하려고 하는데 아무도 마음을 들여다 봐 주는 사람이 없다. 상담처라고는 헬렌이 남자친구들과 주고받은 메일들뿐이다. 사춘기, 상처와 혼란 속에 홀로 내던져진 마틸다는 끊임없이 생각한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또 생각하며 주변을 관찰하고 분석한다. 그리고 의심한다. 어리고 어설프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의지하고 따라하고 때로는 시기하기도 했던 완벽한 이상이 거짓말같이 사라진 현실에 대해 원망하기만 하지 않고 의심하며 진실을 파헤치려 한다. 그것이 혼란과 상처를 극복할 유일한 방법인양 말이다.
헬렌의 죽음과 그녀의 사생활, 그리고 그녀의 고민과 진정한 내면은 마틸다에게 적지 않은 충격과 자책감을 안겨주는 것들이었지만, 그녀는 결국 잔인한 진실을 받아들이고 이해한다. 무엇에 대한 이해라고 묻는다면 조금 복잡하지만 말이다. 헬렌에 대한 것 일수도 있고, 그녀의 엄마에 대한 것 일수도 있고, 숨겨졌던 편치 않은 진실에 대한 것 일수도 있고, 마틸다 자신에 대한 것 일수도 있다. 의심하던 것들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된 마틸다는 결국은 헬렌과도, 그녀 자신과도 화해하게 된다. 마틸다는 이제 헬렌을 떠나보낼 수 있을 것이다. 상처입고 이리저리 힘없이 허공을 부유하던 소녀가 비로소 한 단계 ‘성장’한 것이다.
“성장은 뒤돌아보지 않는 거야.”
어쩌면 성장이란 모든 것의 유한성과 불완전성을 깨닫는 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모든 시작에는 반드시 그 끝이 있음을 인지하는 것이다. 완벽해 보이는 이 순간도, 혹은 너무나도 불안하고 우울해 보이는 순간이라도 시작과 끝의 법칙이 적용된다. 밝음의 뒤에는 어두움이 있고, 즐거움의 뒤에는 슬픔이 있고, 완벽함의 뒤에는 금방이라도 바스라 질 것 같은 위태로움이 있음을. 모든 것의 한시성과 불완전함을 깨달아 가는 과정 속에서 ‘성장’이라는 부산물이 생겨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이나 ‘영원한’ 같은 멋진 거짓말에 마음을 뺏기기 보단, 부족하고 찌질 하더라도 지금 내가 발 딛고 있는 여기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뒤돌아보지 말고, 후회하지 말고, 부끄러워하지도 말고, 슬퍼하지도 말고, 그저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성장’할 수 있고, 그제야 ‘어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누구보다 직설적인 마틸다가 루이스에게 거짓말을 둘러대는 모습을 보며 그녀가 진정 ‘성장’하였음을 느꼈다. 한편으로 어른딱지를 손에 쥔 채 아직도 자라지 못한 내 모습을 새삼스레 발견한 것 같아 알 수 없는 기분이었다. 되돌아보면 엉성하고 한심하고 부끄러운 과거들이 떠오른다. 그것이 가끔은 너무도 창피하고 어수룩해서 얼굴이 벌게질 정도다. 하지만 뒤돌아보거나 후회하지 않아도 된다. 더 이상 미련을 두며 메어있지 않아도 된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가진 유한한 순간들을 생각한다. 언젠가 내게 닥칠 모든 것이 완벽하게 끝나버릴 그 어느 순간을 생각하며, 완벽하지도 그렇다고 불안하지도 않은 지금을 살아야겠다. 멋지지도 훌륭하지도 똑똑하지도 합리적이지도 못한 나라도 이해하고 용인할 것, 그리고 남들도 나와 같이 인정하고 이해하고 사랑해야겠다고. 마틸다가 꿈에서라도 헬렌을 만난다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 괜찮다고, 원래 그런 거라고. 스스로를 이해하고 용인하고 화해하라고. 제법 어른스러워진 마틸다가 그렇게 속삭일 것 같다. 그 말은 헬렌에게 위로와 격려가 될 것이다. 물론 나에게도 이것은 대단 위로였고 격려였다. [마틸다]를 집어든 또 다른 누군가에게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우울하지만 유쾌하고,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깊이 있는 소설을 만났다. 머리가 울리는 묘한 여운을 느끼며 책장을 덮었다. 이 기분이 꽤 오랫동안 지속 될 것 같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