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에 흩날리는 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24
기리노 나쓰오 지음, 권일영 옮김 / 비채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명작의 귀환은 언제나 마니아들을 기쁘게 한다. 요즘같이 개성 넘치는 다양한 장르소설이 범람하는 때라도, 절판되어 이제는 전설처럼 그 이름만 전해지는 명작들에 대한 팬들의 아쉬움은 여전하다. 전에 읽어본 사람은 다시 보고 싶어 찾고, 전에 읽어보지 못한 사람도 입소문과 호기심에 찾는 명작들이나, 한번 절판된 책은 다시 구하기 어려운법. 이런 사정이니 헌책방에서조차 구해지지 않는 책들이 슬슬 재출간된다는 소식만큼 마니아들을 설레게 하는 소식도 없을 것이다.

『얼굴에 흩날리는 비』는 일본 하드보일드의 전설 기리노 나쓰오의 출세작이다. 나오키상과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상복 많은 작품이며, 일본 독자들은 물론 우리나라의 독자들에게까지 기리노 나쓰오라는 이름을 인상 깊게 알린 작품이다. 1994년 번역 출간된 이후 절판되어 그간 헌책방을 통해서만 거래되던 것이 이번에 재출간 되었다. 이미 『다크』를 통해 탐정 미로 시리즈를 접한 사람이라면 매우 반가울 것이고, 탐정 미로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시리즈의 시작편 격인 이 책을 반기게 될 것이다. 빠르고 거침없는 문장과 충격적인 이야기 전개, 거기다 추리소설적인 요소도 빼먹지 않고 갖추고 있어 충분히 매력적이면서 ‘재미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날 밤 그 전화를 받았더라면…….”

무라노 미로는 상처하고, 조사탐정인 부친이 쓰던 사무실에서 은거하며 하루하루 무료한 나날을 보내며 살고 있었다. 왠지 너무도 불길해서 받을 수 없었던 한밤의 전화 한통으로 인해 그녀의 무료하고 우울했던 일상은 화려하게 뒤엉켜 버린다. 논픽션 작가인 친구 요코가 애인인 나루세의 돈 1억 엔과 함께 행방불명되면서 야쿠자에게 의심을 받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 돈은 야쿠자 자본으로 중고차상을 하고 있는 나루세가 야쿠자에게 빌린 돈이었고, 미로는 졸지에 요코와 공모하여 야쿠자의 돈을 빼돌렸다는 누명을 쓰게 된 것이다. 미로는 나루세와 함께 일주일 내로 요코와 1억 엔을 찾아내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리고, 요코의 행적을 추적해 나가기 시작한다.

허영심 많고 출세욕이 강한 요코는 SM과 페티시즘에 대한 르포로 르포라이터로서의 명성을 쌓았으나, 한 단계 더 올라서고자 하는 욕망으로 고뇌하고 있었다. 거기에 경제사정까지 좋지 않아 위태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미로는 요코가 결백하다고 생각하지만 요코를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명확해지는 정황증거에 혼란스러워 한다. 그러던 중 요코가 화려한 재기를 위해 야심작을 준비하면서 베를린에 머물렀고 그 기간 동안 네오나치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위험한 취재를 시도했던 것을 알게 된다. 불길한 느낌이 드는 가운데 요코의 행적은 여전히 묘연하고 사라진 1억 엔을 찾을 어떠한 단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과연 요코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정말 그녀가 돈을 갖고 잠적한 걸까? 그날 밤 받지 않았던 그 전화는 미로에게 무슨 말을 남기려 했던 것일까?

매력적인 캐릭터와 파격적인 이야기. 색다른 재미의 감성 하드보일드

여성 작가가 쓰고, 여성 탐정이 주인공인 하드보일드 스릴러는 확실히 이전의 다른 스릴러물과는 차별화된 재미를 준다. 여리면서도 강하고, 감정적인 것 같으면서도 냉철한 탐정 미로의 캐릭터는 ‘하드보일드’와 ‘감성’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를 절묘하게 성공적으로 이어 붙였다. 그런 조금은 독특한 설정이 먼저 흥미를 돋웠고, 음침하고 어두운 배경에 눈을 뺏기고, 위태로운 미로의 탐정조사에 긴장하고, 너무나도 명쾌하게 맞아떨어지는 절묘한 구성에 감탄했다. 

시종일관 미로의 시선을 쫓으며, 아직은 탐정이 아닌 미로가 뜻하지 않게 사건에 휘말리면서 점차 탐정이 되어가는 과정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다크』를 먼저 접한 사람이라면 이런 미로의 모습이 낯설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그런 감정적이고 인간적인 면모는 비정한 사건의 전말과 묘한 대비를 이루며 강한 여운을 남긴다. 추악하고 노골적인 인간 군상들이 가감 없이 드러내는 욕망 덩어리들은 불편할 정도로 어둡고 씁쓸하지만 그 안에서 홀로 친구를 믿고 진실을 추적해 가는 미로의 활약은 그나마 이타적이며 순수하다. 어느 하나 믿을 수 없고, 끊임없이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며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머리를 울리는 마지막 반전은 충격적이면서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전체적으로 상당히 어둡고 삭막하지만 한편으로는 따뜻하고 감성적이다. 마치 이 책 전체가 매력적인 캐릭터 미로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 

조금은 거북한 묘사와 거친 설정 속에 미스터리와 추리요소가 적절하게 어우러지고, 거기에 개성 강하고 매력적인 캐릭터까지 갖춘 상당히 괜찮은 소설이다. 하드보일드 스릴러라는 장르가 사람에 따라서는 자칫 혐오스러울 수 도 있겠으나, 그런 것을 만회하고도 남을 인상적인 전개와 뚜렷한 캐릭터가 있다. 그리고 더욱 구미가 당기는 것은, 이것이 단지 시작편일 뿐이라는 것이다. 탐정 미로 시리즈는 앞으로 비채에서 모두 출간할 계획이라던데 본편을 재미있게 읽은 사람으로서 대 환영이다. 앞으로의 미로의 활약이 더욱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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