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촌수필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6
이문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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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 독서회 책. 잘 쓴 책. 그런데 하 많은 작가들이 다룬 시대라 다들 어디선가 읽은듯한 인물들. 수필형식이라 소설임에도 태백산맥 같이 인물들이 극적으로 형상화되지는 않음. 오히려 박완서와 가까운 듯. 다른 출판사의 번역본을 표현만 살짝살짝 바꿔 사기 출간한 책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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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탑 동물원 그리고 거북이
줄리아 스튜어트 지음 / 현대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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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자평 쓰는 김에 줄리아 스튜어트의 또 다른 책 <런던탑, 동물원 그리고 거북이> 올해 독서회의 첫 번째 책. 회원들 반응은 신통치 않음. 너무 많은 인물과 너무 잡다한 이야기들로 집중이 안된다고. 나는 좋았다. 상실을 받아들이고 견뎌내고, 씁쓸하나마 웃음을 찾아가는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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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민음사 모던 클래식 58
모옌 지음, 심규호.유소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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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별 기대는 하지 않았다. 먼저 읽은 회원들의 반응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고 중국 소설을 좋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개구리도 물론 좋아하지 않고. 그런데 책은 재미있었다. 처음 약간만 참고 넘기면 자연스럽게 빨려들어가는 흡인력이 있다. 가슴을 울리거나 머리를 한동안 멍하게 하는 그런 감동에 빠지지는 못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내게 나쁜 소설은 지루하거나 엉성하거나 너무 감각적인 것들이다.

 

  그런데 마음은 복잡해졌다. 우리말로 옮기면 진짜 비인간적으로 들리는 '계획생육' 이란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걸까?  어떤 책에서 보았는데, 멜서스가 구빈법에 반대한 이유가 경악스러웠다. 빈민들을 죽지 않게 도와주면 그것이 결국 빈민들에게 더 나쁘다는 것이다. 자식을 낳아 인구를 증가시키면 환경이 더욱 나빠진다. 일자리 구하기는 더 어렵고 입이 하나라도 더 있으면 돌아가는 식량이 더 적어지고 화장실 따위의 위생 환경도 더 나빠지고. 인구가 줄어야 살아있는 사람이 그 나마 더 나은 환경에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니 근근이 목숨만 붙여 자식이나 낳게하는 구빈법은 더 나쁜 정책이라는 주장이다. 현대의 우리 생각에는 악질적이고 비인도적으로 들리지만 그 당시에는 그럴듯하게 들렸던 것 같다. 구빈법 논쟁에서 반대자들이 승리했다는 것을 보면. 

  『개구리』의 '계획생육'도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발상이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한 세대 전만해도 실행했던 '산아제한' 역시 그렇다. "덮어놓고 낳다보면 거지꼴을 못면한다!" 라는 기발하면서도 어딘지 해학적인 표어가 참 인상적이었다. 중국의 '계획생육'은 지금도 실시하고 있는 주요 정책이라고 한다. 이 정책 때문에 무호적자도 엄청나고 혼외자식도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소설을 읽어보면 참 무지막지하게도 실행했다. 그만큼 중국인의 특히 중국 농촌의 반감이 극심했다. 그걸 보면 우리는 어떻게 그렇게 쉽게 '산아제한'에 적응했는지가 더 신기할 정도이다. 왜 그랬을까?

  새마을 정책으로 농촌이 단번에 해체되고 도시로 밀려든 산업노동자들이 많았기 때문일까? 좁은 땅덩어리의 우리나라는 중국 대륙보다 도시화가 훨씬 빨리 진행되었을 것이다. 살아오면서 느끼는 거지만 도시빈민은 농촌의 소작농 보다도 더 살기 어렵다. 제일 비참한 사람들이 도시 빈민이다. 서너 평짜리 토굴 같은 벌집 외에는 딱히 나가 숨쉴 곳도 없다. 아득바득 자식을 셋,넷 낳아야 할 필요가 없었을 것 같다. 그리고 도시는 상대적 빈곤을 피부로 곧바로 느낄 수밖에 없는 곳이다. 엄청난 빈부격차에 욕망은 터질듯이 부풀어 오르고 삶은 극심한 좌절 속에 빠진다.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하나만 낳아 잘 먹이고 잘 입히겠다 이를 깨물게 될 것 같다. 농촌은 거기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숨이 좀 트이지 않았을까? 사실 나는 잘 모른다. 농촌에 살지도 않았고 이런 현상을 깊이 생각해 본적도 없다. 그냥 그렇지 않을까 싶다. 특히 요즘의 극빈자 노인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더 든다. 빛도 들지 않는 한평짜리 어두운 방에서 겨우 숨만 쉬는 도시 노인들 보다는 똑 같은 독거노인이라도 들에 나가 야채라도 뜯는 노인들이 한결 건강해 보인다. 뭐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어떤 이유든, 도시화가 더 빨리 진행되었건 한국인의 욕망이 중국인들의 것 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든 하여튼 우리는 『개구리』에 나오는 그런 비극 없이 산아제한을 성공적으로 이루어 낸 것은 사실이다.

  중국이 그렇게 무자비하게 '계획생육'을 하는 것은 우리 보다 훨씬 절박한 처지에 놓여있기 때문일 것 같다. 조금 먹고 살만해진 '고구마 세대'를 거치면서 20년 만에 중국인구가 3억명이 늘었다니, 멜서스의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는다는 학설이 맞는지 틀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생각하면 아찔하기는 하다. '계획생육'이 기본적으로 나쁜 정책은 아닌 것이다. 문제는 농민들의 의식이 그것을 수용하지 못한다는 것에 있다. 이성적 계도가 되지 않으니 강제적으로 시행할 수밖에 없고, 반감이 크면 클수록 하나의 예외도 어떤 정상도 참작할 수가 없다. 무자비한 원칙을 고수하지 않으면 제도 자체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극은 그 대상이 사람 그것도 산모와 태아에 있다는 것이다. '계획 생육'은 임신 자체를 제한하는 것에서 나아가 불법으로 임신한 태아를 강제 낙태시키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묵인하게 되면 너도 나도 불법 임신을 하게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 만큼 중국 농민들의 자식에 대한 특히 아들에 대한 집착은 강하다.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여기서 인도주의 정신을 들먹이는 것은 쉽다. 멜서스의 구빈법 반대가 경악스럽기는 하지만 거기에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분명히 있다. 아무 대책 없이 태어나서 아무 죄도 없이 죽어가는 수없이 많은 아프리카의 아이들이 오늘도 TV화면에서 인도주의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아이들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인도주의가 아니다. 그렇게 만든 구조적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가장 근본적인 것은 아프리카에 대한 서구 선진국의 구조적 수탈을 막아야 하는 것이겠지만, 아이들이 대책없이 태어나는 것 역시 방지해야 한다. 거기에다가 하느님이 주신 자식 운운하는 것은 죄악이다. 

  『개구리』의 '계획생육'의 문제는 그들이 이성을 거부하는 농민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에 있다. 몇 권 읽어 보지 않았지만, 중국 근현대사의 인민들은 유난히 무지하다. 아Q가 그들의 전형이다.  '계획생육'을 해서 더 나은 환경에서 살 것인가, 전통의 방식을 고수할 것인가는 선택의 문제이다. 전 지구적 인구 증가가 재앙이 될 수 있겠지만 일단은 그들의 선택이 우선이다. 선택을 하려면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이 필요하다. 중국 인민들에게 결여된 것은 이성이고, 이성을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 그런데 교육을 하려면 먼저 인구의 제한이 필요하다. 한정된 자원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인구를 교육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야할까? '계획생육'을 먼저 강제해야 할까? 인민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먼저 교육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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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 펭귄클래식 62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강석주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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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는 말은 언뜻 듣기에 참으로 불쾌하다. 제국주의가 무엇인지 몰랐던 어릴 때는 위대한 셰익스피어에 대한 멋진 비유로만 알았던 적도 있긴 했다. 그러나 칼라일의 제국주의적 망언을 그 맥락 속에서 읽어보면 그 느낌이 또 다르다. “만약 우리 영국인들에게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인도와 셰익스피어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면 무엇을 포기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할 것인가. 이것은 정말 큰 물음이다. 공직에 있는 사람들은 공식적인 말로 대답할 것은 의심할 것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렇게 말해야 하지 않겠는가. 인도야 있건 없건 상관없지만 셰익스피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인도는 언젠가는 결국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셰익스피어를 포기할 수는 없다.『영웅숭배론』”   이 표현에 보편성은 없다. 철저히 영국인의 입장에서 그 유용성을 따지고 있을 뿐이다. 영국에게 인도는 물적 대상, 그것도 약탈했기 때문에 언젠가는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대상이다. 그러나 셰익스피어는 영국인의 정신을, 영국인의 언어를 표상하고 있다. 칼라일의 말은 물질은 잃어버려도 그만이지만 정신은 잃어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듣는 인도인이나, 우리 제3세계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모욕적인 비유다. 하지만 1800년대 식민종주국 영웅숭배자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 흥분해서 무엇 하겠는가.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셰익스피어 역시 그런 점에서 껄끄러운 점이 없지 않다. 오셀로가 살짝 불편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여하튼 셰익스피어는 영국의 정신적 가치를 대변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셰익스피어는 무엇일까? 세계적 고전을 읽을 때 늘 갖게 되는 의문이다. 시대와 국경을 넘어서도 그 고전들은 여전히 가치가 있는 것인가? 아무 가치도 찾지 못한다면 그건 내 잘못인가? 고전을 읽는다는 것은 그래서 은근한 압박이기도 하다. 내 독해 능력을 의심하게 되고, 나의 이성과 감성을 질책하게 된다. 이럴 때는 조금 도움을 받는 것도 괜찮은 것 같다.

  강유원의 <라디오 인문학>을 듣고 그의 책을 몇 권 주문했다. 『역사고전강의』, 『인문고전강의』, 『서구정치사상고전읽기』다. 이런 책을 별로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강의 내용이 너무 좋아서 사둘만하다고 생각했다. 이 글은 독서회에서 읽기로 한 『오셀로』의 발제이다. <라디오 인문학>의 『멕베스』편과 펭귄 클래식 판 『오셀로』서문과 몇몇 검색 내용을 토대로, 셰익스피어의 시대적 배경과 그의 작품이 미친 영향 등에 대해 간추려 보려 한다. 이런 방법이 고전 읽기에 정말 도움이 될까? 독자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럼에도 아무 감흥이 없다면 그냥 그 고전 따위는 버려도 되지 않을까? 세상이 무엇이라 부르던, 그건 그냥 내겐 아무것도 아니니까.

 

 

 

 

  셰익스피어를 연극으로 본 적은 없다. 연극이란 형식 자체와 가까웠던 적이 없다. 20대에 두서너 번 대학로 소극장을 가보긴 했지만 그것이 전부다. 비싸기도 했고 번거롭기도 했고. 어떻든 우리에게 연극이 그리 대중적이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그런데 셰익스피어 시대에 연극은 대단히 대중적인 문화였던 모양이다. 주로 노동자들이 왁자지껄 모여들어 떠들고 즐기면서 연극을 보았다고 한다. 극장도 야외극장이다. 단정히 입어야 하는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 전당 같은 격식 있는 공연장과는 딴판이었던 것 같다. 셰익스피어는 연극 대본을 쓰는 극작가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무대에 서는 배우이기도 했고 극장주인지 극단주인지 하여튼 소유주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셰익스피어 시대에 이미 런던에는 많은 노동자들이 있었다는 것이고, 셰익스피어가 직접 쓴 것은 소설이 아니라 연극 대본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셰익스피어를 고전이란 이름 아래 묵직하게 읽고 있지만, 지금으로 치면 이 고전은  드라마의 대본 정도 된다. 그것도 공연마다 관중들의 반응을 봐가며 조금씩 고쳐 썼기 때문에 어떤 것을 정본으로 삼아야 할지 지금도 논란이 분분한 그런 대본이다. 네티즌 반응에 따라 결말도 바꾸고 배역의 비중도 바꾸는 지금의 드라마하고 닮은 구석이 있다. 그만큼 대중적이었다는 뜻일 것이다. 지금 우리처럼 엄숙하게 읽는 것을 보면 셰익스피어가 웃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셰익스피어를 읽는 좋은 방법은 무대의 배우처럼 크게 소리 내어 읽는 것이라는 조언도 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셰익스피어 시대의 관객이 그랬던 것처럼 연극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드라마 대본도 수백 년 후에 고전이 될 수 있는 그런 작품이 있을까?

 

 

 

  셰익스피어는 1564년에 태어나서 1616년에 죽었다.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와 얼추 비슷하다. 엘리자베스 1세의 가족사는 험악하다. 아버지 헨리 8세는 재혼을 하기 위해 로마의 카톨릭과 결별하고 영국 국교회를 설립했다. 어머니 앤 블린은 ‘천일의 앤’, 이복 언니 메리는 ‘블러디 메리’ 이다. 영화로도 몇 번 만들어진 유명한 가족이다. 헨리 8세가 국교를 바꿔 버리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며 어머니 앤 블린과 결혼했지만, 아들을 낳지 못했던 앤은 간통죄로 처형당하고 엘리자베스는 메리에게 목숨을 위협당하며 숨죽여 살았다. 그러나 신교를 무자비하게 탄압하던 메리가 죽고 나자 뒤를 이은 엘리자베스는 영국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여왕이 된다.

  그런데 이 소용돌이 속에 종교적 신념을 고집하다 참수당한 비운의 인물이 있다. 『유토피아』의 저자 토마스 모어다. 헨리 8세의 종교 개혁에 반대하다 반역죄로 처형되었지만 그 덕분에 카톨릭으로부터 성인 칭호를 받았다. 역설적이게도 토마스 모어는 대법관 시절 프로테스탄트를 무자비하게 화형대로 보내는 종교 탄압을 자행했다고 한다.

  거리의 인문학자 강유원은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한마디로 ‘양에 관한 책’ 이라고 표현했다. 당시 영국은 인클로저(enclosure) 운동의 결과로, 막대한 경작지가 양을 기르는 목장으로 바뀌었다. 농작물에 비해 커다란 이익을 가져다주는 양모생산을 위해 지주들은 소작농들을 쫒아냈고, 쫓겨 난 농민들은 런던 등의 도시로 흘러들어가 공장 노동자가 되었다. 토마스 모어는 이것을 두고 ‘양이 사람을 잡아먹는다.’고 비난했다. 이 때 이미 영국은 산업 혁명이 시작되었는데, 땅을 잃은 농민들의 값싼 노동력은 산업 혁명을 가속화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더불어 도시에는 빈민가가 형성되었고 위생 등의 도시 문제가 발생했다. 우리나라의 6~70년대와 거의 비슷한 양상인 것을 보니, 농촌의 붕괴와 산업화, 도시 빈민의 문제는 항상 경제 성장이라는 이름 아래 구조적으로 발생하는 것 같다.

  여하튼 여기서 등장한 도시 노동자들이 바로 셰익스피어 연극의 관객이었다는 소리다.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쌍안경을 들고 발코니 박스 석에 앉아 관람하는 오페라와는 완전 달랐던 것이다. 그런데 거꾸로 요즘에 와서 셰익스피어가 종종 이런 대접을 받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으로는 들여보내 주지도 않는 그런 품격 있는 공연으로 셰익스피어의 서민성을 지워버린다. 물론 영국에서는 지금도 한여름 밤 셰익스피어의 야외공연이 벌어진다고는 하지만 작업복 입고 영국까지 날아갈 수는 없으니.  

  토머스 무어의 『유토피아』는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를 보여 준다. 근대의 특징 중 하나는 ‘탐욕’ 이다. 인간에게 탐욕이 없던 시대는 없지만 그것을 추구하는 방식이 시대의 특성을 나타낸다. 자본주의의 발전과 사적 소유의 강화는 탐욕을 당당한 시대정신으로 격상시켰다. 인클로저란 소유권이 불분명한 공유지나 사적 소유권의 경계가 애매하던 경작지에 울타리를 치고 소유권을 주장한 것에 유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소작농이야 굶어죽든 말든, 돈만 많이 벌면 그만이라는 탐욕적 태도다. 탐욕이 부끄럽지 않은 세상, 드러내 놓고 탐욕을 추구하는 세상, 탐욕적인 태도가 훌륭한 자본가적 태도로 숭상 받는 세상이 된 것이다. 지금 우리 모습의 원형이 바로 이 16C 유럽이었다. 16C 유럽은 기독교 분열, 국가 기구의 강화, 부익부 빈익빈 현상, 이윤추구의 논리가 형성되고 있는, 변화의 소용돌이 그 자체였다.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엘리자베스 1세 시대는 한마디로 자본주의의 태동기였다. 셰익스피어의 인물들이 낯설지 않다면 우리가 그 시대의 기본 틀 안에 여전히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 근대와 중세의 결정적 차이는 '신'에 대한 태도이다. 중세적 세계관은 모든 것이 신의 의지다. 세계를 창조한 것도, 지금 모습대로 있게한 것도, 고난과 고통의 이유도 모두 신에게 있다. 근대란 이런 신으로부터 인간의 독립이다. 신의 섭리보다 인간의 의지를 우위에 놓는 인본주의 정신이다. 셰익스피어의 위대한 인물들 역시 이런 근대적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극들의 배경은 중세적 모습이 상당하지만, 그 속의 인간들은 신이 아니라 자신의 뜻에 따라 탐욕을 불태우고 실존을 고민한다. 「맥베스」는 신성한 질서 속의 자신의 위치를 거부하고 스스로의 욕망으로 왕의 자리에 오른다. 「햄릿」의 “To be or not to be" 는 삶과 죽음에 대한  실존적 고민이다. 중세에서 자살은 신에 대한 범죄이다. 신이 준 생명을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햄릿은 살아야 할 타당한 이유가 없다면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한다. 셰익스피어가 의식했건 하지 않았건 그는 이미 중세를 벗어나 근대적인 인간의 모습을 고민했던 것이다. 그의 성공한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근대성과 씨름하는 인간들이다.

 

 

  우리에게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지만, 셰익스피어가 그토록 영국인들에게 소중한 이유 중 하나는 영어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는 신조어를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말하자면 저잣거리의 속어 따위도 적극적으로 대본에 사용하여 역동적인 영어를 만들어 냈다. 지금은 관용구가 된 숱한 표현들도 셰익스피어의 솜씨가 빚은 것들이 많다. 특히 19C에 와서 영국은 그리스, 로마의 텍스트에서 벗어나 영어로 쓰인 문학 작품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셰익스피어는 학교와 대학교의 집중 교육 대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셰익스피어를 보는 것과 영국인들이 셰익스피어를 보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셰익스피어는 영국인들에게 언어 그 자체일 수도 있을 테니까.

  셰익스피어의 완역본들을 읽어보면 산문이라기 보다는 운문에 가깝다. 실제 운율에 맞추어 시처럼 쓰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번역이 불가능하다. 거꾸로 김소월의 <진달래>를 영어로 번역한다고 생각하면 단번에 이해할 수 있다. 뜻은 번역할 수 있지만 그 단어의 맛깔스러움과 정겨움 혹은 회한 따위는 어떻게 바꿔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의 셰익스피어와 영국인의 셰익스피어는 같을 수가 없다. 외국의 고전이 때로 그 이름값에 미치지 못하게 느껴지는 것에는 이런 이유도 한몫을 할 것이다.

 

 

  『오셀로』는 원작이 있다. 요즘 같으면, 원작 누구, 각색 누구 이렇게 명기하지 않으면, 표절로 몰리겠지만, 그 당시에는 저작권 개념이 없었다. 『오셀로』뿐만 아니라 다른 셰익스피어 작품들도 순수 창작물이라기보다는 다른 작품에서 따 왔거나 떠도는 이야기, 전설 따위를 각색하여 쓴 것이 많다고 한다. 그래도 누구도 문제 삼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이야기들은 다 반복이다. 누군가 했던 이야기,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 일어났던 사건들을 나름대로 버무리고 거기에 자신의 가치관을 투영해 내는 것이다. 가치관이라는 것도 자신만의 것은 없다. 고대로부터 축적되어 온 철학들과 사상들, 당대의 패러다임 같은 것들이 밑바탕이 된 것이다. 지적 소유권, 저작권, 특허권 따위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오래 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사적 소유권의 하나로 인정되었을 테니 아마도 자본주의의 산물일 것이다. 지금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들이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인류가 축적해 온 지식이 어느 개인에게 독점적으로 귀속되는 것이 정당한 것인지 질문해 봄직도 하다.

 

 

 

 

  『오셀로』의 완전한 제목은 ‘The Tragedy of Othello, the Moor of Venice' 이다. ’the Moor of Venice'는 그 자체로 오셀로가 역설적인 인물임을 나타낸다. 이 작품에서 무어인은 아프리카 흑인과 동일시된다. 그러나 무어인은 유전적으로 흑인이 아니라 백인에 속한다고 한다. 국어사전에는 ‘8세기 경 이베리아 반도를 정복한 아랍계 이슬람교도를 부르는 말’ 로 정의된다. 브리태니카에 의하면, 요즘 영어권에서는 모로코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고 하는데, 아랍의 안달루시아 문명을 창조한 무어인이 11~17C에 북아프리카에 피난민으로 정착했기 때문인 것 같다. 무어인이 아랍인이든 흑인이든 여하튼 베니스인으로 상징되는 서구 문명인이 아니라, 야만인이라는 것이다. 사이프러스를 공격하는 터키인 역시 무어인과 동일하게 취급된다. 이 당시 유럽인들은 터키인, 무어인, 아프리카인을 사실상 구분하지 않았다. 아마도 서구 문명인이 아니면 모두 다 야만인으로 보았을 것이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 개척사를 보면 그들의 인식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오셀로는 양립할 수 없는 두 문화를 구현한 역설적 존재다. 베니스인인 동시에 이방인이며, 서구 문명 속의 야만인이다. 터키인의 공격으로부터 사이프로스 섬을 지켜낸다는 것 자체가 자신의 종족을 배신하는 행위이다. 오셀로의 비극은 ‘the Moor of Venice’에 함축되어 있다. 더 인종주의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선과 악의 공존이다. 베니스의 장군으로 찬연하게 빛났던 선은 이아고의 뱀과 같은 유혹에 넘어가 무어인으로서의 악마적 본성을 폭발시켜 버린다. 오셀로의 마지막 대사를 보자 “예전에 알레포에서 터번을 두른 고약한 터키 놈이 베니스인을 때리고 베니스 정부를 비방했을 때, 제가 그 할례 받은 개 같은 놈의 멱살을 잡고 이렇게 찔러 죽였다고.(스스로를 찌른다.)”  할례 받은 개 같은 터키 놈은 무어인인 오셀로 자신이다. 그 멱살을 잡고 찔러 죽인 오셀로는 다시 베니스인이 된 선한 오셀로다. 내가 무어인이라면, 인도를 셰익스피어와 바꾸지 않겠다는 것보다 더 모욕적일 것 같다. 셰익스피어가 인종차별주의자 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무어인을 베니스의 장군으로 설정하고 고귀한 품성을 부여했다는 것 자체가 셰익스피어와 인종차별주의를 연관시킬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서구 중심주의적 관점에서 비 서구인을 야만인으로 묘사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16C 말에서 17C 초를 살았던 셰익스피어에게는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민주주의의 원형처럼 칭송되는 아테나이조차도 여자와 노예는 폴리스의 시민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는 제국주의의 식민지 개척이 서구 열강을 휩쓸기 시작하던 때였다. 셰익스피어라고 시대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현대 독자의 눈에 거슬리는 것 역시 당연하다. 더구나 제3세계 국민에게 찜찜함이 없다면 그것이 더 이상하지 않을까.

 

 

 

 

  『오셀로』에서 가장 매력적인 인물은 단연 이아고로 꼽힌다. 실제 이아고의 대사가 오셀로 보다 300행이나 많다고 한다. 사건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이아고다. 오셀로는 질질 끌려 다니다 파멸하고 마는 꼭두각시다. 그러나 나는 이아고 보다 에밀리아가 더 마음에 든다. 얼마 되지 않는 대사지만 결혼한 여자의 탄성을 자아내는 후련함이 있다.

 

 

  「에밀리아: 글쎄, 우리도 성깔이 있잖아요. 물론 우린 얌전한 여자들이지만, 우리에게도 복수심이 있어요. 남편들도 자기 아내들이 자기들과 똑같은 감각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죠. 남편들과 마찬가지로 아내들도 시각과 후각을 갖고 있고, 달콤한 것과 신 것을 맛볼 수 있는 미각을 갖고 있어요. 남편들이 우리를 다른 여자들과 바꿔보는 이유가 뭐죠? 재미삼아 그러는 걸까요? 그렇다고 생각해요. 연정 때문에 그러는 걸까요? 그렇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실수를 하는 건 나약함 때문일까요? 그렇기도 해요. 그렇다면 우리는 남편들처럼 연정을 품지 못하고, 재미를 바라지도 않고, 나약하지도 않은가요? 그러니 남편들이 우리에게 잘 해야죠.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못된 짓이 우리를 가르쳐 우리도 못된 짓을 하게 된다는 것을 남편들도 알아야죠.」

 

  현대 드라마들이 열심히 그려내고 있는 소위 ‘맞바람’의 논리적 근거가 이미 셰익스피어에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대부분의 드라마들은 ‘성깔 있는’ 여자들을 흐지부지 순치시켜 버림으로써 도덕적 통념과 타협하고 만다. 그래서 제대로 붙어 보려는 <네 이웃의 아내>, 이제 막 시작한 <따뜻한 말 한마디>가 어떤 결론에 이를지 상당히 흥미롭다.

  에밀리아에 비하면 데스데모나는 너무 밋밋하다. 도대체 왜 캐시오 부관의 복직을 그렇게 열렬히 졸라대는지, 그러면서도 정작 자신의 결백에 대해서는 제대로 말조차 못하는지 답답하다.

  오셀로의 의외성은 그가 데스데모나의 부정을 확신하고 내뱉는 경악스런 대사에 있다. 아무리 사랑이 증오로 변했다 해도, 고귀한 품성의 소유자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말들이 아니다. 오셀로의 고귀한 품성의 이면은 바로 야만성임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오셀로는 베니스의 무어인인 것이다.

 

 

  몇 가지 기억에 남는 대사가 있는데, 모두 이아고의 것이다. 믿을 수 없는 기억력 대신에 여기에 덧붙여둔다.

 

 

1. 천성이라고? 쳇! 우리가 이렇게 저렇게 되는 것은 다 우리 자신 탓이오. 우리 육신은 우리의 정원이고, 우리 의지는 정원사란 말이오.

 

 

2. 시간의 자궁 속에는 많은 사건들이 있으니 때가 되면 세상에 태어날 거요.

 

 

3. 그 계략이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데, 아직은 혼란스러워. 악행의 참모습은 행해질 때까지 드러나지 않는 법이지.

 

 

4. 내가 악당 짓을 한다고 말하는 자 누구인가? 내가 해주는 충고는 순수하고, 솔직하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고, 정말 무어놈의 마음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 아닌가? 진심으로 간청하면 마음 약한 데스데모나를 움직이기는 참으로 쉬운 일이지. 그 여자는 너그러운 천성을 타고 났으니까. 그리고 나서 그녀가 무어놈을 설득하는 거지. 속죄의 징표이자 상징인 세례를 포기하는 일이 있더라도, 그의 영혼은 그녀에게 속박되어 있으니,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거야. 그녀의 욕망이 그의 쇠약한 기능 위에 신처럼 군림할 테니까. 그렇다면 내가 왜 악당이지? 캐시오에게 직접적으로 이익이 될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가? 이게 바로 지옥의 선심이라는 거지! 악마들이 가장 훌륭한 죄를 꾸밀 때에는, 처음에는 천사의 모습으로 권고를 하지. 지금 내가 하는 것처럼 말이야.

 

 

5. 비록 저는 명령에 따라야 할 의무는 있지만, 노예에게도 자유로운 것, 즉 제 생각을 말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6. 베니스에서는 여자들이 남편 앞에서는 감히 보여 주지 않는 못된 장난을 하느님 앞에서는 거리낌 없이 보여 준답니다. 그들에게 최선의 양심이란 못된 짓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들키지 않게 하는 것이지요.

 

 

7. 공기처럼 가벼운 사소한 것들이 질투에 사로잡힌 자에게는 성서만큼이나 강력한 효력을 지닌 증거물이 되거든. 이 물건이 뭔가 해낼 수 있을 거야. 무어 놈은 벌써 내 독약을 먹고 변하고 있어. 위험한 상상은 그 자체가 독약이지. 처음에는 그 불쾌한 맛을 잘 알지 못하지만, 혈액에 조금만 작용을 하게 되면, 유황 광산처럼 불타오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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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강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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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찰리와 초콜릿 공장>에 원작이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고, 물론 그 저자가 로얄드 달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맛』은 당연히 내가 처음 읽는 로얄드 달의 소설이다.

 

  단편 10개로 묶인 소설집이지만, 사실은 하나의 소설과 같다. 같은 빵틀에  재료만 바꿔 구운 여러가지 맛의 붕어빵처럼. 하나같이 맛있긴 한데, 네개, 다섯개, 여섯개를 넘어가면 슬슬 질리기 시작한다. 다행히 배터져 죽기 전에 끝나지만, 첫 맛의 강렬함은 더부룩한 속 때문에 벌써 잊혀버렸다.

 

  나이가 들면서 뷔페나 코스 요리가 별로 먹고 싶지 않다. 한 배에 양식,일식,한식,중식까지 우겨 넣고 배를 두드리노라면 잘 먹었다는 만족감 보다는 미련한 짓이라는 후회가 앞선다. 코스 요리도 비슷하다. 배가죽이 빵빵해 질때까지 먹기는 하는데, 숟가락을 놓고 물러 앉을 때쯤엔 쾌감 보다 불쾌감이 앞선다. 소화력이 약해져서 그런지, 단품 요리나 일식 삼찬 정도가 제일 좋다.  그 고유의 맛을 집중해서 잘 느낄 수 있고 오래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맛』은 속이는 자가 어떻게  속는자가 되는가에 대한 다양한 변주이다. 잘난척하는 사람, 영리한척하는 사람, 교양있는척하는 사람들 모두, 자기가 놓은 덫에 걸려든다. 덫에 가장 잘 걸려드는 사람은 의심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의심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그 여러가지 사례들이 『맛』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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