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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리의 계보 - 마쓰모토 세이초 미스터리 논픽션 ㅣ 세이초 월드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최근에는 독자가 이해할 만한 동기를 생각해 내지 않아도 대충 얼버무릴 수 있는 획기적인 수법으로 사이코패스가 유행하기도 했지. 고맙다 사이코패스, 멋지다 사이코패스. 목격자, 가족, 수사원 죄다 죽여버리니까, 귀찮으면 어째서 그 녀석이 사이코패스가 됐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돼. - 온다 리쿠, 흑과 다의 환상上 중
온다 리쿠의 『흑과 다의 환상』의 한 구절이다. 하나는 안심해도 되겠다. 적어도 온다 리쿠는 사이코패스 만만세로 글을 마무리 짓지 않겠군(온다 리쿠는 질척한 감정 곡선을 캐릭터에 심는 것을 선호하니 당연한 말이다). 몇 년 전 부턴가 사이코패스라는 말이 -도시괴담도 아니라- 유행처럼 번져 이제는 일상어가 되었다. 사이코패스 테스트라는 것도 있다고 들었는데 정작 사이코패스는 이 테스트를 해볼리 없을 것 같으니 다소 팬시적인 꽤 위악적인 현상이 아닌가 싶다. 더불어 소시오패스라는 표현도 흔해졌다. 물론 (다소간) 좋은 현상이다. 십 년 전, 백 년 전, 천 년 전, 기원 전에도 어쩌면 인간은 악의 근원을 찾았고 마찬가지로 그 때에도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의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이러한 -어떤- 분류나 탐구적 자세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바다. 그러나 다소 도식적인 접근이 아닌가 여겨질 때도 있다. 온다 리쿠의 말처럼 '사이코패스 만만세'라는 식으로 모든 범죄나 사건 사고의 원인을 한 인간의 설명할 수 없는 악이라고 치부해버리는 것. 편의적인 사고가 아닐 수 없다.
세상에는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적 성향을 지닌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 중에서 극악한 범죄를 저지른 이가 상당부분 차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모든 범죄나 악이 사이코패스와 소시오패스에게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정말로 그들이 어떤 유전적인 영향이나 사회적 혈통에 의해 탄생된다고 가정했을 때, 그들이 가진 칼은 처음부터 벼려진 칼이다. 반면에 보통의 사람들이 보통의 규율에 의해서 살다가 어떤 과정에서 뚝 부러져 칼을 집게 된다면 그 칼은 본디 무뎠던 칼을 더 예리하고 정교하게 깎는 과정을 반복한다. 본디 날카로운 칼과 갈고 닦아 길들여진 칼. 어떤 것에 더 섬벅 베이게 될지 모르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어느 쪽 칼이 더 자주 쓰였는지도 확인 불가능하다.
일본의 추리소설은 크게 두 계류로 나뉜다. 요코미지 세이시의 정통추리파와 마쓰모토 세이초의 사회파. 전자의 구조는 단순하고 익숙하다. 어떤 고립된 섬이나 별장, 여행지 같은 곳에 초대된 사람들이 있고 그 안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전화는 끊기고(자연재해나 위치상의 난점인 경우, 혹은 범인에 의한 의도적 파괴가 많다) 외부인의 유입이 불가해지고 점잖던 사람들의 인간관계나 애증이 드러난다. 탐정역할을 맡은 이는 꼭 인물이 죽을만큼 죽은 후에야 "범인은 당신이야"를 외치고 희한하게도 사람들은 한 자리에 모여 탐정 캐릭터의 이야기를 친절하게 듣고 범인은 자백하거나 자해를 하기 일쑤다. 그제야 날은 개고 경찰이 온다, 는 식의 <소년탐정 김전일>이나 <명탐정 코난>류다. 후자는 범행동기나 목적을 일차적 인간관계나 내면의 불충족보다는 좀 더 확대시킨 시선을 갖는다. '사회파'라는 표현답게 한 사회가 혹은 집단이나 공동체, 인간성이 어떻게 사람을 파멸시키고 자멸시키는 지, 그 파멸당하고 자멸한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어떻게 공격하는지를 조명한다.
자타공인 추리소설의 여왕, 미야베 미유키는 단연 후자다. 미야베 미유키의 이름은 너무나 친숙해도 마쓰모토 세이초의 이름이라면 많이들 모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장녀, 라고 표현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마쓰모토 세이초. 그는 누구인가. 라고 말했으니 그의 이력을 읊어야하지만 그의 이력은 상당히 독특하면서도 길고 길기에 여기서 여러분은 책표지의 앞날개를 살피거나 구글링을 하길 권하는 바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이력을 읽다 보면 정말 이것이 한 사람의 이력인가 의심스럽다. 요 네스뵈를 보고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24시간을 48시간처럼 살기도 하나보다. 하지만 세이초의 이력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는다. 소설을 쓰고 취재를 하고 글을 연재하려면 아무리 집중력이 좋고 끈기가 있어도 어쨌거나 물리적인 시간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24시간 중 가장 기본적인 생리현상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글에 쏟아야 가능할까. 그렇다손쳐도 불가능하다. 때문에 세간에는 수많은 문하생을 거느리고 그들이 대필을 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사실 그 쪽이 더 그럴 듯 해 보인다. 예컨대 허영만 작가나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조직화 된 역할을 분담하는 공장같은 작업실이라면 가능할 작업량이라는 것에 수긍이 간다. 하지만 30년 동안 그의 담당편집자였고 현재 마쓰모토 세이초 기념관장인 후지이 야스에 씨는 세이초가 직접 교정을 본 수정원고 등을 토대로 그의 대필론에 대해서 일축시켰다. 어쨌든 그는 놀라운 사람임이 분명하다. 만약 대필을 했다 하더라도(어디까지나 가정 아래) 그의 글은 전체적으로 흐트러짐 없이 일관되기에 분명 그는 교정 이상의 작업을 했으리라 생각하고 어딜보나 자신의 글이 아닌 면을 내보이지 않는다. 그가 대필을 하지 않았다면 더욱 놀랍다. 예술적이면서도 대중적인 글을 함께 쓰는 것도 그러하지만 그는 작업시간을 조금이라도 아끼고 글에 매진할 수 있도록 여러 작품을 함께 쓰는 교환방식을 썼다고 하니 말이다. 게다가 그는 이러한 -방대하다고 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어마어마한 글들을 써내면서도 84세로 일기를 마쳤다 하니 건강관리는 물론 참으로 여러모로 운도 좋은 분이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그 명성에 비해 국내에 소개가 늦은 작가다. 허나 현재는 많은 소설들이 번역이 되어있고 이 책 『미스터리의 계보』를 비롯, 논픽션 또한 차례대로 출간되고 있으며 사담私談이 다소 길었으니 이 부분은 과감히 생략토록 하자. 『미스터리의 계보』는 세이초의 논픽션이다. 논픽션Nonfiction. 그 뿌리는 실화에 있되 줄기와 가지는 소설로 이루어진 나무다. 세 편 중 가장 핵심적인 이야기라고 할 만한 「어둠 속을 내달리는 엽총」의 경우를 살펴보자. 이것은 1938년 5월 21일 일본 오카야마 현 쓰야마 시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으로 자살한 범인을 비롯 무려 31명이 사망한 일이다. 범인은 도이 무쓰오라는 21세 남성으로 범인의 이름을 따 '무쓰오 사건' 내지는 '쓰야마 사건' 등으로 불리고 있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이 사건을 논픽션으로 재구성했다. 논픽션이므로 어떤 부분은 취재에 의해 모은 사실(fact)일 것이고 어떤 부분은 상상에 의해 가설된 픽션(fiction)일 것이다. 팩트와 픽션은 적절히 혼재되어 있고 어쩌면 어떤 부분이 다른 한 부분보다 기울어지게 더 많은 부피를 차지할 수는 있지만 어쨌든 논픽션이라는 라벨은 하나다. 마쓰모토 세이초는 마을의 정경을 묘사하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라고 밝히며 마을의 풍경과 그곳의 관습, 악습과 구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을 단지 한 마을이 아닌 일본이라는 거대한 틀 속에 다시 녹여낸다. 다시 줌 인. 마치 세이초는 도이 무쓰오라는 청년의 머리 위에 앉은 유령 같다. 그는 머리 위에 있으므로 모든 정경을 볼 수 있고 몸 밖에 있으므로 더 멀리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러나 그의 몸에 속해있기 때문에 마치 청년에게 빙의된 듯 보이기도 한다.
엽총 소리는 매우 크다. 그런데 그걸 듣지 못했다. 정적이라는 형용사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산촌의 깊은 밤이었다. 그 정적은 엄숙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총성을 깨닫지 못했다.
그는 무쓰오라는 청년의 삶을 치밀하게 써내려간다(특히 그의 소학교 성적표는 혀를 내두를 정도다). 이웃 주민들의 평가, 누이의 증언, 그의 담임 교사들의 회상, 무쓰오가 실재로 했을법한 생각 등등. 그에 못지않게 마을의 폐쇄성과 성적 방만, 악습에 대해서도 자세히 기술한다. 이 과정에서 그는 어떤 쪽도 옹호하거나 연민하지 않는다.
엽총을 든 도이 무쓰오는 가랑비를 맞으며 도키모토 다이지로의 집 문 앞에 도착했다. 그 엽총은 방금 일곱 명을 사살했다. 일본도는 세 명을 참살했다. 총구는 뜨겁고 칼은 피투성이였다.
단지 '기술'할 뿐이다. 무쓰오가 범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은 물론 그의 살해방법과 범죄 행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머리 위에 앉아 무쓰오와 함께 움직이며 모든 참상을 지켜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말하는데도 그 생생한 표현에 어조라고는 없다. 때문에 읽는 이로 하여금 사건 현장에 대한 오감을 상상케 하고 피바다와 내장이 터져나오고 목이 잘린 시체들 사이로 유영하게 만든다. 어떤 순서대로 누가 어떻게 찔려서(터져서, 갈려서, 찍혀서 등등) 죽었는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차근차근 설명한다. 독자의 울렁이는 속은 작가의 설명에 금방이라도 토악질이 될 것 같다.
「어둠 속을 내달리는 엽총」외에 두 편을 보자. 「전골을 먹는여자」는 의붓딸을 죽여 (가죽은 벗길 수 없었단다, 예상외로 질겨서. 겉은 시꺼먼 땟국물이 흐르는데 그래도 속살은 뽀얗고 부드러웠단다) 인육을 먹은 자신의 아이들과 남편에게 먹인 여자의 이야기이다. 「두 사람의 진범」은 도무지 접점이 없는 두 사람이 한 여인의 살해 사건의 범인이라고 자백한 과정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루었다. 세 이야기 모두 묘사는 생생하고 표정은 덤덤하며 피가 그득하다. 이것만으로도 마쓰모토 세이초의 문장력과 구성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허나 마쓰모토 세이초는 하드고어 영화의 제작자가 아니다.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부 혹은 창시자 같은 명명은 누구에게나 붙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가 대단한 것은 이 꼼꼼함과 세밀함, 피해자와 가해자를 가리지 않는 상상력과 끈기에도 있겠지만 특히 이 책에서만큼은 시선에 의미를 두어야겠다. 세이초는 잔인할만큼 냉정하게 사건을 다루고 있고 그 잔인한 사건을 또다시 냉정하게 상상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그는 과연 범죄의 근원이 단지 악이나 어떤 유전적 형질에 있을까? 라는 질문을 되풀이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이초는「전골을 먹는 여자」에서 첫째로 근친혼을 지적한다. 근친혼이 남아있는 시절, 혹은 지방에서 어떤 무지의 소지로 근친혼은 계속해서 자행되고 있다, 고 말하며 대代가 내려갈수록 근친혼에서 오는 문제의 골은 깊어진다는 것이다. 피의자인 여자와 피해자인 여자, 피의자의 남편이자 피해자의 아버지인 남자 모두 근친혼이라는 파동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나병에 인육을 먹는 것이 효과가 있다는 것을 믿은 어떤 남자의 살인도 (광의로 해석할 때) 악습의 영향에서 멀지 않다. 「두 사람의 진범」은 경찰과 검찰, 사법부의 병폐를 지적한다. 공적인 권력이 무고한 인간을 얼마나 철저하게 범죄자로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사형제도의 주효에 대해 되묻는 것이다. 「어둠 속을 내달리는 엽총」에서는 폐쇄성을 지닌 마을과 성 풍속을 직시한다.
세이초에게 있어 범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겠다. 하나는 개인적인 선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범죄이고, 다른 하나는 유전적 기질이나 사회적 압력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범죄다. 이때 세이초는 정확히 전자에는 소설이라는 형식을, 후자에는 논픽션이라는 형식을 부여한다. 바꿔 말해, 전자의 경우 범죄 행위가 그것을 저지른 자에게 절대적으로 귀속되지만, 후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기 때문에 등장인물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소설)과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 본 책 해설에 실린 문학평론가 조영일 씨의 글 중
이 책에도 잠깐 등장하는 트루먼 카포티의 『인 콜드 블러드』는 -벌써 몇 년 된 인상이지만- 권장할만한 논픽션은 아니었다. 흡입력이나 주목성, 기발함에는 별점을 줘야 마땅하지만 이 책에는 기묘한 꺼림칙함이 있었다. 아마도 그건 작가 자신도 인지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는 이 책을 쓰면서 양가적인 감정에 동시에 시달린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범인에게 다가가면서 진심으로 동조하는 한편 그를 이용해 상업적 성공을 열망했던 것 같기도 하다(실제로 카포티는 가난할 때조차 언제나 지나치게 옷을 잘 입었다고 하고, 여러 면으로 미루어 사회적 지위나 돈에 대한 탐욕이 강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때문에 피의자를 연민하면서도 그가 처형되길 바랐던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 그는 지나치게 감정을 이입했다. 그가 피의자를 이해하려 노력할수록 동조될수록 독자는 그 과정을 흥미있게 지켜보는 한편 피의자에게 -어떤 반대심리로- 반감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는 논픽션 작가로서 지켜야 할 지점을 몰랐거나 흡입력이 높은 '소설'을 쓰고 싶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세이초는 다르다. 그는 냉철하고 냉정하고 냉담하다. 마치 로봇처럼 또는 컴퓨터처럼. 지난 자료를 보고하듯이 세밀하고 기민하면서도 그지없이 덤덤하다.
이렇게 묻는 듯 하다. 나는 사건의 추이를 기록했고 사후事後의 여파를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범죄의 밑면에서 출렁이던 바닷물도 떠왔습니다. 이제 당신 차례입니다. 사후의 여파에 감정을 이입하시겠습니까? 사건 자체(인물)에 집중할 건가요? 아니면 바닷물을 맛보시겠습니까? 갈림길이 보인다. 미스터리의 계보가 보인다.
* 제목은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에서 따왔다. 일차적으로 팩트이지만 픽션이기도 하다는 것을 비틀고 싶기도 했고 논픽션이 아니라 믿고 싶을만큼 소설이었으면 하는 무서운 이야기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차적으로 마그리트의 그림에 관한 어떤 해석의 여지와 닿아있다고 감히 주제넘게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