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살면서 조금더 일찍 만났더라면...
아쉬움을 토로 할때가 있다.
<죽은 숙녀들의 사회>를 읽고 난 지금의 감정이 그렇다.
조금더 일찍 이러한 책을 만났더라면 적어도 지나간 시간이 답답하진 않았을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은 더 능동적이고 주체적으로 내 삶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40대중반 언저리에 도착한 내 시간
이제야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이제야 주체적으로 삶을 선택하며 능동적인 움직임을 하고 있다.
물론, 늦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난 지금은 조금더 지나온 시간에 대해 아쉬움이 남아 안타까울 뿐이다.
그리고
더 아쉬운건 책을 읽으면서 한 번도 발 디뎌보지 못한 여행지에 대해 지리적 위치며 정보를 찾아야 했던 시간이다.
그곳에서 말하는 죽은 숙녀들 (예술가들) 또한 생소한 인물들이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중요한건 그곳을 몰라도 그들을 몰라도 말하고자 하는건 분명 알 것 같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결국, 여성과 남성 이분법적인 구분의 삶이 아닌 ‘사람‘의 삶을 말한다.
자신의 삶에 있어 수동형이 아닌 능동형, 늘 움직이는 ‘동사‘인 삶을 말한다. 그래서 기록되어지는 여자가 아닌 기록하는 여자로 남고 싶고 누군가의 연인이 아닌 그들 자신의 이야기인 주체적 삶을 사는 여자를 말한다.
난 과연, 내 삶은 ...
내가 얼마나 주체적일까 ?능동적일까?
예나 지금이나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많은 장애물과 어려움이 있다. 사회적 환경 , 문화적으로 너무나 제약이 많아던 과거와는 달리 지금은 많이 바뀌어 나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 많은 어려움과 달라지지 않은 의식의 문제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이분법적 기준으로 스스로를 ‘여성‘이라는 틀 속에 가두어 버리는 자행들 특히 착함 , 여성스러움등 숙녀가 되기 위한 수많은 틀로 스스로를 규정지어 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선 그러한걸 말하고 있다.
너무 솔직하고 당당하게 거침없이 자기 감정을 말할땐 내속에서 일어나는 당황스럼,거북함, 불편함, 시원함등 오만가지 감정들을 경험해야 했다.
난 결코 페미니스트는 아닌가 보다.라는 결론과 함께 피식 웃기도 ..
제사 크리스핀은 외로움과 절망의 끝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이들은 죽은 사람들 예술가였다.
그들이 여자로 어떻게 살아 남았는지 ...어떻게 버텼는지...알고 싶었다.
맘 둘 집을 찾아 떠난 것이다. 하지만 끝내 집은 찾지 못한다.
그렇지만 여러 여행지와 죽은 숙녀들의 삶에서 세상을 발견한다.
클로드 카엉이 살았던 저지섬에서 ...
‘‘절망과 외로움에서 나를, 또 내가 아닌 누군가를 구해줄 유일한 수단은 공동체와 사회의 감각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를 구하는건, 스스로에게 들려줄 수 있는 다르게 사는 방법의 이야기다. ‘‘
그래서‘‘ 글을 쓰는 행위와 인생의 어느 시점에 목숨을 구해준 철학자, 이야기꾼들로 앙상한 가계도를 채우는 행위는 중요하다.‘‘ 말한다.
어쩌면 해법은 스스로를 자기 경험과 생각을 담는 용기로 규정하지 않는 것일지도 ..해법은 자신의 경계를 격렬하게 밖으로 밀어내는 것, 자신의 모순을 찾아내고 자신을 다른 것들과 분리시키는 무언가를 이와 발톱으로 파괴하는 걸지도 모르다고 ...
또 다른 방황을 시작하며 또 다시 시작한다.
이 책을 읽은 지금, 생각해본다.
내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이분법적인 규범들속에서
내 스스로가 만들어 놓은 나의 틀을 조금씩 깨고 나가는 자신을 찾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