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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 정병모 교수의 민화읽기 1
정병모 지음 / 다할미디어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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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책이란게 손보다는 발로 완성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옛날 책이지만 이중환의 <택리지>를 볼 때가 그랬고, 그 맥을 이은 신정일의 <신 택리지>에서도 그랬으며, 널리 알려진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이렇게 몇 십년을, 혹은 평생을 바쳐가며 발로 찾고, 경험하고, 채집해 온 이야기들에는 지력과 상상력으로만은 엮어낼 수 없는 특별한 힘이 있다. 고매한 것으로 치면 영-혼-육의 순으로 나열된다는데, 이런 책에서 만큼은 육의 지극함이 영의 위치를 뛰어넘고도 남음이 있다. 

<무명화가들의 반란, 민화>도 발을 통해 완성된 책이다. 저자는 지난 10여년간 우리 민화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주저않고 발길을 재촉했으며 국내는 물론 해외 각지에 흩어져 있는 민화들을 모아 무명화가들의 얼을 이 책에 담았다. 일반적으로 민화는 평범한 사람들이 그린 격조 낮은 속화라고 알려져 있고 대표적인 작품 몇 점 외에는 접할 기회가 흔치 않지만 실상 옛 시대에는 그림 수요의 90%를 담당할 만큼 제작이 빈번했으며 현재 남아있는 작품들도 예상 밖으로 다양하고 수량도 많았다. 이처럼 그 시대의 대중문화를 담당했던 민화가 다시금 주목을 받는 까닭은 민화가 가진 상상력과 추상성의 힘 때문이다. 현대미술에 필적할 만큼 대담한 추상성과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펼치는 민화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하며, 해외에서는 벌써 여러 차례 민화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그동안 '격식', '품위', '고급'이라는 잣대로 폄하되었던 무명화가들의 설움이 드디어 위안을 얻고 진가를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궁중화나 문인화에 비해 민화가 가진 특성은 소박하고, 단순하고, 평면적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 민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반적인 민화가 갖는 특성이며, 우리 민화의 경우 보다 고요하고 내적인 충실성을 갖춘 것이 두드러진다. 같은 모란이라 할지라도 우리 민화 속의 모란은 단아하고 고요한 자태를 가지고 있으며 향기 없는 모란 곁에 나비 한 쌍을 하늘거리게 하는 상상력과 수석의 깔끔한 기하학적 패턴이 돗보인다. 반면 우리나라 궁중화 속의 모란은 만개의 절정에 달해있는 모습이고 수석도 패턴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윤곽을 묘사했다. 또한 가급적 화려하게 장식하기 위해 여백없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자연의 순리에 따라 상상의 나비를 불러 오는 일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중국 민화의 모란을 보면 민화로서의 순진함이나 상상력은 돗보이지만 우리 민화의 고요함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며 강렬한 색채와 패턴에 보다 집중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민화도 장식적이고 패턴에 집중된 작품들이 있지만 색채의 활용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확연한 차이가 있음이 전달되 온다. 



민화를 주제별로 구분하면 책거리, 문자도, 까치와 호랑이, 용, 십장생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 중 일반적으로 친근하고 익숙한 것은 책거리, 그리고 까치와 호랑이 정도를 들 수 있겠는데, 너무나 다채로운 작품들을 감상하다 보면 그동안 익숙하다 느꼈던 책거리, 까치와 호랑이라도 마냥 새롭기만 하다. 우리나라의 모든 까치와 모든 호랑이를 모아놓은 듯 갖은 표정과 몸짓을 취하고 있는 까치와 호랑이도 인상깊었지만 가장 흥미롭고 변화의 폭이 넓었던 것은 책거리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양반들의 전유물인 책거리 그림이 어째서 민화일까?'라는 의문이 문득 떠올랐는데, 이 책은 친절하게도 질문의 실마리가 될 상세한 설명을 아끼지 않는다. 양반도 아닌 민화 화가들이 책이 잔뜩 쌓여있는 책거리를 그리게 된 까닭은 일차적으로 주문에 의해서였다. 사실 책거리는 궁중에서 학문을 장려하기 위해 제작된 적도 있으며, 양반집에서는 기복(과거 급제, 건강 등)과 장식을 위해 선호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책거리에 묘한 장난기가 섞이며 풍자와 해학이 가해져 책거리는 사랑받는 민화의 주제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특히 책거리들 사이에 살포시 얹혀있는 여인의 옷은 얼핏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전후 상황을 떠올려 본다면 상당히 과감하고 해학적인 그림임에 틀림이 없다(대체 선비는 먹을 갈다 말고 여인과 뭘 하고 있는 것일까? 은근한 에로티시즘의 극치이다). 현재 외국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민화는 책과 장식물이 럭셔리하게 가득 채워진 책거리 민화라는데, 그들이 수집하고자 하는 품위있는 책거리보다는 이 묘하기 짝이 없는 상상적인 책거리가 훨씬 특별하게 다가온다.



책에 실린 민화들을 감상하다 보면 혹시 민화는 당시 만화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묘사에 독특한 점이 있다. 어떤 그림은 후세의 누군가가 민화에다 만화로 낙서해 놓은 것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인물들의 형태나 눈맵시에서는 현대의 만화에서 나타나는 풍부한 감정이 돗보이고, 스르르 사라질 듯한 용은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상상력이 넘쳐난다(앨리스의 체셔 고양이 같지 않은가!). 또한 호랑이 그림은 부숭부숭한 털만 가지런히 정리한다면 박수동의 고인돌 만화에 삽입해도 별로 무리가 없을 듯하다. 이처럼 그림의 단순화에 있어 파격적이고 예측불가했던 그림이 민화라니, 정말 놀랍기만 하다.



우리 민화가 주목을 받게 되면서 국내외의 많은 미술연구가들과 미술가들이 민화에 관한 찬사의 정의를 내려왔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한 예술', '자연의 꿈', '추상적 환상'. 어느 하나 우리 민화를 얘기하는데 손색없는 아름다운 표현들이다. 그런데 민화 전문가 김철순은 민화가 '누나의 자수'와 같다는 신선한 정의를 내리고 있어 그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민화는 현재, 현세의 아름답고 환상적인 꿈으로 보았다. 여기서의 꿈은 이룰 수 없는, 바랄 수 없는 것에 걸어보는 기대가 아니다. 어린이들이 누나의 자수를 들여다보듯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본 어른들의 꿈이 바로 한국 민화의 꿈이었다. 그들의 인생과 자연 자체가 큰 꿈이고 예술이 바로 꿈이라고 믿고 있어서 사람과 인생 자체를 아름다운 꿈으로 표현했다."(p.26)

참 신기한 일이다. 비록 민화를 그린 화가가 무명이라 할지라도 대부분이 남자였음에는 틀림이 없는데 어째서 '누나의 자수'와 같은 여성적인 물건과 비교했을까? 이에 대해 저자는 장식용이었던 민화가 갖는 평면적 패턴을 들어 설명하는데, 민화 느낌은 형태의 단순화와 패턴화를 추구할 수 밖에 없었던 자수의 특성과 유사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학문적 설명에도 불구하고 김철순의 설명에는 그 이상의 것이 있다. 바로 삶과 꿈과 예술이 잇닿는 아름다운 경지이다. 이것은 어떤 한계를 초월하여 그림에서 금시조가 날아오르는 득도(得道)와는 또 다른 차원이다. 춤으로 치면 흥겨운 몸짓 하나가 악사들의 악기에 소리를 오르게 하고, 한 사람 두 사람 모여들어 마침내는 커다란 무리가 공감하는 경지. 그 자유롭고도 강렬한 미의 본능이 바로 민화의 힘이자 민중의 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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