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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 - 하루 한 장만 보아도, 하루 한 장만 읽어도,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현암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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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인상은 가슴뭉클 하면서도 불친절했다. 풍류에 취한 듯 일렁이는 서문은 어느 강팍한 마음에라도 시심(詩心)을 지필 만큼 매혹적이었지만 책을 열기 전부터 궁금했던 '옛 생각'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득도한 수도승이 알쏭달쏭 선문답만 남겨놓고 홀연히 사라지는 느낌이랄까. '옛 생각'에 대해 운만 슬쩍 띄워놓고는 읽는 이로 하여금 '굽이굽이 옛 사람의 붓 농사'(p.7) 사이를 헤메게 하는 것이 꽤나 짓궂다.

그러나 첫 그림 <매화초옥도>를 만나면 옹기종기 산세 사이로 점점이 흐드러진 매화에 반해 야속했던 마음은 이내 사라진다. 다음에는 낮술 자신 어르신의 발그스레한 볼과 주저앉은 품새가 애처러운 <꽃 아래 취해서>인데, 자세히 보니 홀로 앉아 꽃가지로 (몇 잔을 마셨는지) 셈을 하고 있어 그 애처러움이 더해지는 장면이다. 그런가하면 느닷없이 교태로운 양귀비와 나비가 등장한다. 비록 빛바랜 옛 그림 속의 꽃과 나비이지만 자태와 빛깔이 어찌나 곱고 고혹적인지 바랜 갈빛이 무색할 정도로 생동감이 있다.

어느덧 책 속의 시간이 봄을 지나 여름에 다다랐을 무렵 나는 드디어 '옛 생각'의 정체에 대해 감을 잡기 시작했다. 웅대한 자연을 묘사한 진경산수화나 명성을 자랑하는 한국화의 대표작들 보다는 유독 소소한 동식물과 인물, 근경을 위주로 한 그림들에서 보다 삶과 밀착된 소박한 정취, 그것에 대한 향수가 아련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밭갈이>, <빨래하는 여인>, <오이를 진 고슴도치>, <탁족>, <수박 파먹는 쥐>, <짖는 개>, <서생과 처녀>, <꿩잡는 매>,<차가운 강 낚시질>, <쏘가리> 등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십장생이나 사군자같은 고고한 동식물 보다는 생활 속의 친근한 동식물과 사물들이 등장하고 사람살이의 모습에서도 서민적이고 진솔한 모습들이 더 두드러진다.

하지만 모든 그림들이 일상의 소재와 생활상을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문인들의 사군자나 풍경화도 볼 수 있고, 고사나 싯구를 묘사한 그림도 있다. 그렇지만 이들 작품 역시 예사롭지 않은 독창성과 순박함를 갖추고 있으며 풍경에서도 한가로운 정취나 은둔자의 모습을 다루고 있어 속세를 벗어난 듯 여유롭기 그지없다. 이에 더해 옛스런 정감이 물씬 풍기는 글들은 고어나 순 우리말이 아니더라도 읽는 이를 과거의 시간 속에 불러들일만큼 천연덕스럽고 감칠맛 난다. 사실 어떤 면에서는 옛 단어들을 사용한 것이 오히려 걸림돌이 되기도 했는데, 물론 단어들에 대한 친절한 풀이가 각 장마다 실려있어 이해를 돕고 있었으나 이를 일일히 확인하고 다시 글 속으로 들어가다 보니 감상의 흐름이 끊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이럴 때면 청산유수로 저만치 앞서가는 저자의 흥취가 다시 또 야속해지곤 했다.

그럼에도 계절을 따라 그림 속에 노닐며 옛 시간에 홀연히 빠져드는 묘미는 무척이나 쏠쏠하다. 그림을 화가별로 혹은 시대별로 보지 않고 이렇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모아 놓으니 진정 과거의 시공에서 한 해를 보내는 듯 현실의 시간을 잊는다. 뿐만아니라 그 안에서 어우러지는 다양한 계절의 정취와 각 화가의 개성있는 필치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새로움을 더해준다.

마지막으로 각 계절에서 훔쳐온 그림 한 점씩을 자랑스레(?) 전리품처럼 내놓아 본다. 먼저 임희지가 그린 <난초>는 정형화된 봉안, 파봉안에 얽매이지 않고 유난히도 교태로운 긴 잎새를 낭창거리며 설레이는 여심(女心)처럼 봄을 노래한다. 언제나 선비정신이 서려있던 사군자에 이리도 파격적인 면모를 담을 수 있다니! 그 자유로운 발상이 무척이나 감탄스럽다. 또한 조선시대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은 산수(山水)의 장관 뿐만 아니라 제 곁에서 울어대는 매미처럼 소박한 정취를 그리기도 했다. 매미 앞에서 내리 뻗던 나뭇가지를 슬쩍 멈춰세운 탓인지 매미가 더 살포시 나려앉은 듯 하고 투명한 매미의 날개와 푸른솔이 어우러져 무척 산뜻하다. 어쩌면 김두량의 <숲속의 달>은 '한국화'하면 떠올릴 수 있는 대표적인 느낌 중 하나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기법이나 소재면에서 크게 튀는 것은 아니지만 스산한 가을의 정취가 생생하게 전달되기에 꼽아보았다. 김홍도의 <표피도>는 마치 오늘날의 텍스타일 디자인을 보는 것처럼 상당히 현대적인 느낌이다. 흔치 않은 소재(일상적이지만 한국화로 접할 기회가 드문 소재)들이 돋보이는게 이 책의 특징이었지만 가장 특이한 소재를 꼽으라면 이 그림이 제일 먼저 생각난다.




이처럼 <옛 그림 보면 옛 생각 난다>에는 주류보다는 비주류의 개성이, 격식보다는 자유로움이, 관념보다는 소박한 일상이 두드러지는 가운데 알지 못했던 옛 그림과 만나는 즐거움, 그리고 옛 시간의 향수 속으로 빠져드는 경이로움을 오롯이 담고 있다. 온종일 행복한 그림 이야기라더니, 그 말이 허세는 아닌 듯 하다. 다만 그 행복의 여운이 깊지 않았음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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