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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끝나도 음악은 남아있다 - 고형욱의 영화음악 오디세이
고형욱 지음 / 사월의책 / 2010년 11월
평점 :
"음악이 없는 영화는 뭐랄까 연료가 떨어진 비행기 같아요.
당신의 음악은 우리 모두를 고양시키고, 우리를 날아오르게
만들어요. 우리(배우)들이 모든 걸 단어로 말하거나 행동으로
보여주지 못할 때도, 당신은 이미 우리를 잘 표현해주었어요."
(p.122)
오드리 헵번이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음악을 맡았던 헨리 메시니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저자는 '영화 음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핵심이 여기에 잘 표현되어 있다고 소개하였는데, 잠시 음악이 없는 영화를 상상해 본다면 '연료가 떨어진 비행기'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예를들어 <조스>에서 상어가 나타날 때 그 음산하고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음악이 흐르지 않는다면 디스커버리 채널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사랑과 영혼>의 마지막 장면에서 데미 무어의 크고 맑은 눈동자가 스르르 눈물을 떨어뜨리는 순간 애틋하고 순결한 'Unchained Melody'가 함께하지 않는다면 사랑하는 이의 '영혼'과의 이별이라는 환상은 사라지고 그저 흔히 접하는 남녀간의 이별 정도로만 여겨질 것이다. 이처럼 영화에 있어 음악이란 우리를 현실로부터 날아 오르게 하고 무한한 영화적 상상에 생동감을 불어넣는 연료가 된다.
그런데 영화 음악에 대해 햅번이 깜빡 잊은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을 굳이 복잡하게 표현하자면 인간의 회고본능을 자극해 감동을 재생시키는 영화음악의 힘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영화의 감동이 유달리 큰 날은 엔드 크레딧(End Credits)에 깔리는 음악이라도 부여잡고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이고, 극장을 나와서는 곧장 음반가게로 달려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제목 역시 같은 맥락에서 추억 속에 가라앉았던 영화의 감동을 다시 날게 하고픈 욕구를 자극한다. '영화는 끝나도 음악은 남아있다!' 아름다웠던 장면을 다시 음미하고 싶은 이들에게 얼마나 희망이 되는 메시지인가!
책 속에는 빽빽한 CD 전집처럼 50개의 추억의 영화들이 연도별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세어보니 50편 중 내가 본 영화는 31편, 보지는 못했어도 대략 내용이나 제목만 알고 있는 영화는 7편이었다. 처음엔 추억의 명화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오래된 영화들이기에 영화 매니아가 아닌 나로서는 이 책을 공감하기 쉽지 않겠다 생각했는데 의외로 많은 영화들이 친숙해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더불어 CD에 담긴 음악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익숙한 곡인지라 CD만 듣고 있어도 내 맘대로 영화의 추억과 상상속에 잠기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50가지의 영화를 표현하는 글은 기본적인 영화의 내용에서부터 배우, 수상경력, 작곡가, 관련된 에피스드와 같은 사소한 이야기들, 영화가 담고 있는 시대상이나 관객들의 시선과 같은 분석적인 이야기들을 아우르고 있으며 가장 주된 것은 (물론) 영화의 장면을 고조시키는 음악에 대한 해석, 그것으로 표현되는 감흥, 인물들의 심리적 묘사, 그리고 원곡, 편곡 등에 얽힌 내용들이다. 하지만 너무 많은 영화들을 소개하다보니 하나의 영화에 깊이 빠져드는 묘미는 상대적으로 덜한 느낌이었다. 고전에 속하는 <티파니에서 아침을>을 통해 현대인의 욕망과 도시에 대한 인문학적 해석을 가하고, 같은 O.S.T지만 LP로 들을 때와 CD로 들을 때의 목차 구성에서 오는 미묘한 감상의 흐름을 짚어내는 저자라면 충분히 신선하고 심도있는 견해들을 더, 더 보여줄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닥터 지바고'편이나 '라스베거스를 떠나며'편에서 발휘됐던 보다 음악적인 감성과 주관적 해석이 뭍어나는 글들이 참 좋았는데 늘 짤막하여 아쉬웠다.
'라라의 테마'는 라라의 캐릭터를 대변한다. 그러나 라라를 위해서 작곡된 음악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전체 분위기를 아우르는 보편성이 있다. 멜로디는 낭만적이면서도 떨림이 있다. '라라의 테마'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러시아 민속악기 발랄라이카를 뜯으면서 내는 울림은 러시아다운 정조와 함께 간절한 사랑의 느낌을 고조시킨다.(p.149/닥터 지바고)
주제곡인 'Ben And Sara'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피아노곡이다. 다른 음악들이 나른하고 우울한 분위기만을 자아내는데 비해 이 곡의 피아노 소리는 밝다.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희망이 약간 있는 것 같아서 오히려 더욱 절망적이다. 현실은 이제 돌이킬 수가 없기 때문이다.(p.326/라스베커스를 떠나며)
마지막에 단 한편 소개된 한국영화 역시 불만이 되는 요소였다. 다음 저작의 주제가 한국 영화음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우리의 추억'이라 덧붙이고 <별들의 고향>만을 소개한 것은 의외의 마침표이며 어떤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지 당혹스러운 느낌까지 들었다. 전반적으로 추억의 명화들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음악을 통해 감동을 되살려본 시간은 즐거웠으나 좀 더 영화속에 깊이 침투되는 맛을 선사했다면 더 좋았으리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