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우리의 직관 너머 물리학의 눈으로 본 우주의 시간
카를로 로벨리 지음, 이중원 옮김 / 쌤앤파커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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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매우 친절한 양자역학 책으로 만나봤던 카를로 로벨리의 대표 저서라 할 수 있는 책이다.

시간에 대해 물리학에서 밝혀진 내용을 저자 특유의 친절한 서술로 풀어내고 있다.



사실 시간이라는 개념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은 다른 책들을 통해 인지하고 있었다.

동물들은 미래를 예측하며 살지 않지만 인류는 내일의 날씨부터 태양과 달의 움직임 등 자연의 순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미래를 예측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문제는 우리에게 시간이란 반드시 1차원적으로만 움직이는 고정된 그 무언가로 보인다는 점이다.

직관적으로만 보면 시간은 과거부터 현재를 지나 미래로만 흐르고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현재가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이 지금까지 물리학으로 밝혀낸 바와 어떻게 상충되는지를 설명한다고 보면 되겠다.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시작하는 시간관념 변화의 역사는 뉴턴을 거쳐 아인슈타인으로 이어진다.

일단 상대성이론을 통해 시간과 공간은 분리될 수 없고, 질량과 속도에 따라 시공간 역시 변화할 수 있는 값이라는 점까지는 이전에 읽은 다른 과학 교양서들과 큰 차이가 없었기에 무리 없이 이해했다.

여기까지의 논의는 하단의 그림으로 종합할 수 있는데, 설명하면 일반적으로는 시간을 좌상단 그림처럼 인지하지만 실제로는 우하단 그림에 가깝다는 것이 핵심이다.

(pg 58-59)

여기까지는 평이한데, 저자의 전문 분야인 양자 중력이론으로 들어가게 되면서 난이도가 제법 상승한다.

시간과 공간은 분리할 수 없고 공간이 곧 질량을 가진 물질에서 나온다고 한다면 시간 역시 질량을 가진 그 무언가로부터 파생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 역시 최소의 입자에서 출발한다고 가정할 수 있을 텐데, 이를 플랑크 시간이라 한다.

이 역시 최소의 입자, 즉 양자이기 때문에 양자역학으로 설명이 가능하고, 저자가 양자역학의 가장 논리적인 설명이라 주장하는 관계론적 설명으로 시간의 정체도 설명할 수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양자중력 이론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를 설명하지는 않는다.

사물들이 다른 것들과 관련하여 서로 어떻게 변화하는지, 세상 사물들이

서로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설명한다. 그것뿐이다.

(pg 127)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굳이 시간의 흐름이라는 변수를 포함하지 않아도 양자역학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없다는 것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세상은 각각 별개로 존재하는 사물들로 구성된 것이 아니라 그 사물들의 관계가 사건을 만들어내야만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양자역학 역시 관계론적으로 설명할 수 있고, 시간 역시 이러한 관계 속에서만 설명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했다.

시간 변수가 없는 세상은 복잡한 세상이 아니다.

그것은 상호 연결된 사건들의 그물망이며, 여기에 작용하는 변수들은

우리가 믿기 힘들 정도로 대부분 잘 알고 있는 확률 규칙을 따르고 있다.

(pg 130)

그렇다면 제목처럼 왜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고 했던 것일까?

저자에 따르면 진짜로 변화하는 것은 엔트로피 뿐이다.

엔트로피는 무조건 낮은 상태에서 높은 상태로만 변화하는데, 이 때문에 미래의 흔적이란 존재할 수 없다.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과거의 흔적 뿐이다.

미래가 아닌 '과거의 흔적만' 있는 이유는 과거에 엔트로피가 낮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전혀 없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를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은 과거의 엔트로피가 낮았다는 것뿐이다.

흔적이 남으려면 무엇인가 정지해서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데,

이것은 되돌릴 수 없는 과정을 통해서만,

즉 에너지를 열로 변환시키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pg 174-175)

저자 역시 책 후미에 밝히고 있듯이 이 책에 담긴 모든 정보가 실험을 통해 100% 확인된 내용들은 아니라고 한다.

후반부로 갈수록 저자 자신이 볼 때에 설득력 있다고 '생각하는' 내용들을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읽는 난이도 역시 함께 상승하는 구조이다. (역시 사람은 자신이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분야는 쉽게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쉽게 쓰려고 부단히도 노력한 흔적들이 엿보이며 이 책을 선택할 사람들이라면 질겁을 할 수식도 책을 통틀어 단 두 줄 등장할 뿐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미래에 대한 예측 가능성은 생존의 기회를 늘리는데,

진화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뇌 구조를 선택해왔다. 우리가 바로 그 선택의 결과물이다.

과거의 사건과 미래의 사건 사이에 존재하는 이 선택이 우리 정신 구조의 핵심이다.

이 선택이 우리에게는 시간의 '흐름'인 것이다.

(pg 186)

그러면서도 인류가 지금까지 밝혀온 시간에 대한 지식, 특히 물리학 뿐 아니라 고대 철학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영역에 이르는 지식을 불과 200여 페이지 정도의 책으로 맛볼 수 있다는 점은 다른 책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가치다.

세상을 사건과 과정의 총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세상을 가장 잘 포착하고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다. 상대성이론과 양립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세상은 사물들이 아닌 사건들의 총체이다.

사물과 사건의 차이는 '사물'은 시간 속에서 계속 존재하고,

'사건'은 한정된 지속 기간을 갖는 것이다.

'사물'의 전형은 돌이다. 내일 돌이 어디 있을 것인지 궁금해할 수 있다.

반면 입맞춤은 '사건'이다. 내일 입맞춤이라는 사건이 어디에서 일어날지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세상은 돌이 아닌 이런 입맞춤들의 네트워크로 이루어진다. - 중략 -

실제로 잘 살펴보면, 매우 '사물다운' 사물들은 장기간의 사건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아주 단단한 돌의 경우, 우리가 화학과 물리학, 광물학, 지질학, 심리학에서

배운 바로는 양자장의 복잡한 진동이고, 힘들의 순간적인 작용이다.

돌은 짧은 순간 동안 자신의 형상을 유지하고, 다시 먼지로 분해되기 전 자체적으로

균형 상태를 유지하는 과정이다.

(pg 105-106)

읽을 때는 거짓말처럼 술술 책장이 넘어가지만 다 읽고 나서는 '난 대체 지금까지 뭘 읽은 걸까?'라는 자괴감이 함께 찾아오는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론)도 있고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론)도 있어' 등등 나열식인 여타 물리학 책들과는 다르게 '내 생각엔 이 이론이 맞는 것 같아'라는 방식으로 쓴 책이라 논리가 일관적이고 혼란의 여지가 적어서 좋았다.

태생적 문과인으로서 물리학 교양서들과의 만남은 언제나 도전이다.

하지만 저자를 비롯해 많은 과학자들이 일반 대중들을 위해 쓴 책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서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교양 수준의 지식은 쌓을 수 있는 시대가 된 것 같아 기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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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 1~3 세트 - 전3권
류츠신 지음, 이현아 외 옮김 / 자음과모음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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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놀라운 작품을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까.

지금까지 꽤 많은 SF 작품들을 읽었고 개중에는 명작이라 불리는 작품들도 많았는데 이 작품 역시 그 칭호로 불려야 한다는 점에는 이견이 생기기 어려울 것 같다.

평범해 보이지만 무슨 뜻인지 언뜻 짐작하기 어려운 제목에 개인적인 반중 감정이 더해져 구매 버튼을 누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 작품을 읽지 않았다는 것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다.

제목인 삼체는 말 그대로 세 개의 물체를 의미하는 물리학 개념이다.

질량이 비슷한 물체 두 개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움직이고 있다고 할 때, 그 두 물체의 질량과 속도를 알고 있다면 미래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그 물체가 세 개가 되면 그 세 물체는 카오스적으로 움직여서 미래의 움직임을 예측하기가 쉽지 않다. (수학적으로는 이미 일반해를 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밝혀졌다.)

이 작품은 태양을 세 개 가진 행성이 존재하고, 그 안에 지적 생명체가 살고 있는 우주를 가정하고 있다.

그 세계를 삼체 세계라 부르는데, 이 세계의 문명인(삼체인)들은 당장 내일의 날씨조차도 예측하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끊임없이 적응하며 기어코 항성 간 이동이 가능한 수준의 과학기술 발전을 이뤄낸다.

하지만 과학이 그 정도로 발달해도 삼체문제는 여전히 해결할 수 없었기에 삼체인들은 행성을 버리고 새로운 행성으로 떠나려 한다.

그 무렵 지구에서도 한참 외계 생명체를 찾겠다며 SETI 프로젝트 같은 것들을 가동하기 시작했고 중국에서도 비슷한 시도를 한다.

그중 한 시도가 삼체 세계에 도달하게 된다.

태양이 하나뿐인 이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삼체인들은 지구로 원정을 결정한다.

삼체 세계와 지구는 4광년 떨어져 있었고, 삼체의 함대가 지구에 도달하기까지 약 400년의 시간이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된 지구인들은 삼체인들에 맞설 준비를 시작한다.

재미있는 점은 삼체 세계와의 만남이 인류와 삼체인의 배신자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처음 신호를 받은 삼체인은 추가적인 메시지가 도착할 경우 삼체인들이 해당 행성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 때문에 추가적인 회신을 하지 말라고 충고함으로써 동족을 배신한다. (물론 아래에 서술할 삼체인의 특징 때문에 곧바로 붙잡혀 처벌을 받는다.)

하지만 메시지를 보낸 인류의 배신자는 문화대혁명 때 인류의 바닥을 이미 경험한 뒤여서 차라리 외계 문명에 의해 멸망하는 편이 좋다고 판단하여 기어코 추가적인 회신으로 그들을 태양계로 초대한다.

여기까지가 대략 1권 후반부 정도의 내용이고, 1권이 3권 중 가장 얇다.

아마도 인간과 악의 관계는 대양과 그 위에 떠 있는 빙산의 관계로,

둘은 동일한 물질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빙산이 눈에 잘 띄는 이유는 그저 형태가 다르기 때문이고,

그것의 실체는 거대한 물 중 아주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듯 인간 스스로 도덕적 자각을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려면 인간 이외의 힘을 빌려야 한다.

(1권, pg 114)

줄거리를 다 요약하기에는 너무나 방대한 양이니, 삼체인과 인류의 전쟁을 설득력 있게 표현하기 위해 작가가 설정한 것들을 간단히 정리해 보고자 한다.

먼저 400년 동안 인류가 삼체인들과 유사한 수준으로 과학기술을 진보시킬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고 있다.

작가는 이를 위해 삼체인들이 양자(더 정확히는 양성자)에 AI 컴퓨터를 이식하여 지구로 보낸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지는 작품에서 확인하도록 하고, 결론만 말하면 이 양성자 AI의 가장 큰 역할은 인류 활동의 전반적인 감시와 지구의 양자역학 수준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이 양성자 AI는 빛의 속도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에 지구에서 그 누가 언제 양자로 실험을 하더라도 개입해 방해를 할 수 있다. (다시 생각해도 정말 기가 막힌 발상이다.)

따라서 작품 속에서는 400년이 지나도 양자역학 수준은 현재와 다를 바가 없어진다.

작가가 참 똑똑한 접근법을 택했다는 생각인데, 현시대의 양자역학을 이해하기도 버거운 마당에 400년 뒤의 세계를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품 속 인류는 고정된 양자역학 수준 안에서 발버둥을 쳐야 한다.


"삼체인들이 인류의 문화유산을 보전할까요? 그들은 인류의 문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잖아요."

"그들이 우리를 벌레라고 칭하기 때문에요? 그건 달라요. 다른 민족이나 문명을 존중하는 최고의 방식이 뭔 줄 알아요?"

"그게 뭐죠?"

"바로 멸종시키는 거예요. 그건 문명에 대한 최고의 존중이에요."

(2권, pg 248)

공정한 게임(?)을 위해 작가가 인류에게만 핸디캡을 준 것은 아니다.

삼체인 역시 독특한 점이 있는데, 바로 언어와 사고가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인류처럼 사고를 음성이나 글로 변환해야만 진행되는 의사소통이 아니라 정신 그 자체로 소통하기 때문에 떠오르는 사실 그대로 여과 없이 소통이 가능하여 거짓말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는 문명인 것이다.

(스타크래프트 세계관이 익숙하다면 칼라를 잘라낼 수 없는 프로토스 같은 느낌이라고 보면 된다.)

이 점을 이용하여 '면벽 프로젝트'라는, 오로지 인류만이 가능한 기만전술의 극치를 활용하여 삼체인에게 저항하는 단계가 2권의 주요 내용이다.

유일하게 막을 수 없는 것은 시간이다.

시간은 서슬 퍼런 칼날처럼 단단한 것이든 무른 것이든

소리 없이 베어버리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간다.

그 무엇도 시간의 발걸음을 흔들 수 없지만 시간은 그 무엇도 다 바꾸어 놓는다.

(2권, pg 426)

2권에서 꽤나 설득력 있으면서도 짜릿하게 결말이 나기 때문에 3권이 대체 무슨 내용으로 전개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저자의 저력은 3권에서 빛을 발한다.

말 그대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그의 우주적 상상력의 집합체를 3권에서 만나볼 수 있다.

5000년 동안 미친 듯이 달려온 문명이었다.

끊임없는 진보가 더 빠른 진보를 부추기고, 수많은 기적이 더 큰 기적을 만들어냈다.

인류가 신처럼 위대한 힘을 가진 것 같았다.

하지만 결국 진정한 힘을 가진 건 시간이며 발자취를 남기는 것이

세상을 창조하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3권, pg 664)

사실 SF 작품들의 시발점은 모두 허황된 상상이다.

본 작품 역시 상상력의 스케일 면에서는 기존의 그 어느 작품들과 견주어도 부족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하드 SF의 매력을 최대한 살려 어마어마한 상상력을 꽤나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가 상상으로도 떠올리기 힘든 차원의 이동을 이렇게까지 상세하게 글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읽어볼 가치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모든 지적 존재의 문명은 결국 그들이 가진 생각의 크기만큼 발전한다.

(3권, pg 791)

넷플릭스에서 영상화가 이루어져서 본 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데, 개인적으로도 소설을 너무 재밌게 봐서 영상이 어떻게 뽑혔는지 정말 궁금하다.

총 세 권이라 짧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페이지로는 약 2천 페이지 정도로, 300페이지 정도의 보통 책이라면 5-6권에 해당하는 분량이라 생각보다 짧지 않다.

하지만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잠을 줄여가며 읽을 정도로 재미있었고 읽으면서 생각할 거리도 많이 던져주는, 근래 읽은 문학 작품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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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규칙
다카하마 마사노부 지음, 하야시 유미 그림, 임민정 옮김 / oldstairs(올드스테어즈)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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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개발 코너에 꽂혀 있을 것 같은 제목이지만 놀랍게도 어린이용 서적이다.

서점에 갔다가 아이가 사달라고 했던 책 중에 '나는 약속을 지켜요'라는 책이 있었는데 아이도 재미나게 잘 읽었고 내용도 바람직한 것들이어서 꽤 마음에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 역시 저자와 그림 작가가 그 책과 동일하기 때문에 믿음을 갖고 아이와 함께 읽어보게 되었다.



학습, 건강, 친구 관계 등등 사실 육아를 하면서 신경 써야 할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생활습관이다.

지식적인 측면이야 얼마든지 살아가면서 습득할 기회가 많지만 생활습관은 건강과도 직결되는 부분이 많고, 어려서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면 커서도 쉽게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성인이 되어서도 갖고 있는 많은 좋지 않은 습관들은 대체로 어렸을 때부터 반복해온 것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활습관을 잡아주는 데 도움을 주는 책들은 부모 입장에서는 무조건 읽히고 싶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아이가 좋아하느냐' 하는 점이다.

생활습관에 대한 책들은 태생적으로 '꼰대 같은' 말들을 많이 하게 마련이라서 아이들이 먼저 원해서 읽고 싶은 장르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책들은 아이가 스스로도 읽고 싶어할 정도로 그림이나 구성이 중요하다.

이 책의 저자는 확실히 스타일이 있다.

먼저 아이들이 지켜야 할 사회적인 약속들이 왜 중요한지를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알려준다.

그러면서도 그런 약속들을 지키는 것이 타인에 대한 배려의 측면뿐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는 점을 반드시 상기시켜준다.

아이들이 '내가 왜 꼭 남을 위해줘야 해?'라는 반발감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을 '아, 이렇게 하면 나한테도 좋은 거구나'라고 깨달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제목이 다소 거창하지만 아이들을 위한 책이기 때문에 내용이 어렵지는 않다.

조금만 새롭거나 익숙하지 않은 활동을 하려고 하면 일단 겁부터 먹는 우리 딸에게는 두 번째 규칙인 '바로 “싫어.”, “못 해.”라고 말하는 건 자신의 세계를 좁히는 일이다.'라는 규칙이 특히 유용할 것 같았다.

(pg 12-13)

아동용 책이지만 의외로(?) 어른들에게도 좋을, 살아가면서 가끔씩 되새겨봄직한 규칙들도 많이 있다.

'나와 안 맞는 사람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자기만의 시간을 가진다.', '먼저 자기 자신이 행복해지고 그다음에 남을 행복하게 한다.'와 같은 규칙들은 비단 어린이뿐 아니라 인생의 궤적 내내 유용할 충고였다.

글씨가 그리 많은 편은 아니라서 한글을 익힌 아이라면 혼서서도 쉽게 읽을 수 있고 내용도 꽤 좋기 때문에 아이에게 선물하기에 좋을 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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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기린 바다숲 놀이터
메르트 아리크 지음, 후세인 손메자이 그림, 김정한 옮김 / 놀이터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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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책을 좋아한다고 하면 다른 부모들이 꽤 부러워한다.

하지만 아이가 보는 책이 대체로 만화책이라는 건 굉장한 고민거리다.

물론 요즘은 '그거라도 보는 게 어디냐'라는 시선이 지배적인 것 같지만 개인적으로는 만화를 읽는 건 TV를 보는 것과 그리 차이가 없다고 보는 편이라 아이의 독서 수준을 높여주는 것이 요즘 육아의 가장 큰 고민이다.

이럴 때 아이가 좋아할 만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글의 양이 좀 되는 책들로 독서 방향을 유도해야 하는데 그러기 좋을 것 같아 보이는 책을 찾아서 아이와 함께 읽어보게 되었다.

공기 저항에 굉장히 불리해 보이는 기린이 비행기를 타고 있는 표지부터가 흥미를 끈다.



표지를 자세히 보면 비행기의 선체가 골판지 상자로 되어 있다.

진짜로 하늘을 나는 기린이 등장하는 책이 아니라 아이들이 기린이라는 주제로 상상의 날개를 펴는 내용이라고 보면 되겠다.

진짜 비행기 조종사인 기린이 등장하는 이야기라면 유아용 책 정도의 수준일 것 같은데, 상상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이야기이니 아무래도 초등학생 이상 정도에게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pg 8-9)

주인공인 모니는 미술 시간에 기린을 그려보는 수업을 받는데 완벽한 기린, 정말 기린처럼 보이는 기린을 그려야만 한다는 생각에 좀처럼 그림을 시작하지 못한다.

그러자 선생님이 반 친구들의 모습이 모두 각기 다르듯 기린도 모두가 똑같이 생길 필요는 없다며 상상하는 그대로를 그려보라고 독려한다.

그 말을 들은 모니의 상상력이 폭발해 각종 기상천외한 기린 그림들을 그려나간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아이를 키우다 보면 처음부터 잘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 할 때가 많다.

틀려도 괜찮다거나 정답 같은 건 없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기본 성향에 완벽주의가 있는 아이들이면 그러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아이들에게는 훌륭한 교훈이 될 책이었다.

페이지당 글씨가 살짝 많기는 하지만 분량이 길지는 않기 때문에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면 혼자서 읽을 수 있을법한 책이라 독서 수준을 높여주고 싶은 부모라면 좋은 선택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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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혼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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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사랑 이야기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제목만 봤을 땐 쓱 지나쳤던 책인데 저자 이름을 본 후 '배명훈은 못 참지' 싶어 집어 들게 된 책이다.

이전에 나온 '미래과거시제'라는 단편집을 읽고 너무 좋아서 주변 지인들에게 추천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작품 역시 SF 장르라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가 되었다.

핑크색 바탕에 달달한 제목이어서 연애소설 같겠지만 이 작품의 주제는 우주 전쟁이다.

작품은 우주에 함대를 보낼 수 있으며 광속으로 발사할 수 있는 광선 무기가 개발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우주 궤도에서 외부의 침략에 대비하는 우주군을 '데 나다'라는 걸출한 사령관이 이끌고 있고 작품의 화자는 이 사령관을 보좌하는 관찰자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특이하게도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처음에는 마치 연애편지를 보는 듯하지만 이내 이어지는 전투가 주요 이야기라고 보면 되겠다.

저자가 현실 세계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우주 공간에서의 전투가 어떤 모습일지를 상당히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들이 여럿 보인다.

먼저 광속으로 공격해오는 무기로 공격을 당하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서로 광속이라는 속도로 상대를 겨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상세히 묘사한다.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일이 늘 조난당한 기분인 이유는 주위의 빈 공간에 비해

우리가 차지하는 공간이 너무 작기 때문이야.

지구 크기의 공간에 우주선 딱 두세 대니까.

행성 크기의 공간에, 그러니까 누군가에게는 세상 전부일 수도 있을 만큼

거대한 공간에 홀로 남겨져 있다는 것. 그래, 그건 조난이야.

무언가에 깊숙이 잠겨버리고 만다는 뜻이지.

어둡고 고요하며 거대하고도 막막한 무언가에.

(pg 58-59)

빛의 속도로 쏠 수 있는 무기가 있다면 당연히 적이 육안에 들어오는 즉시 죽음이라는 의미가 된다.

적이 방출하는 빛이 내 눈에 도달하는 시간이나 그 적이 쏜 무기가 내 함선에 도달하는 시간이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어도 30광초(빛이 30초간 날아간 거리) 이상의 거리에서 사격을 하게 되는데, 발사된 빛이 이동하는 30초 동안 함선 역시 상당한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결국 전투의 승패는 상대의 움직임을 얼마나 잘 예측하느냐에 달렸고, 때문에 함선이 상대가 예측하지 못하는 궤적(카오스적인)을 그려야 한다.

이러한 전투에서의 움직임이나 광속이라는 절대적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웜홀의 개념을 활용하는 등 우주 전쟁이라는 허구의 이야기에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들이 이어진다.

작품 속 침략자는 그 정체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선제공격을 해오기에 반격하지 않을 수 없을 뿐이다.

게다가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이 신출귀몰한 기동력을 자랑한다.

중반 이후 적의 정체에 관한 힌트가 등장하지만 사실인지 아닌지 밝혀지지 않기에 그저 가설에 머문다.

작품 후반에 이르면 적들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나타나고 사라질 수 있는지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지만 전쟁은 승리라고도, 패배라고도 하지 못할 상태로 끝이 난다.

작품의 화자는 미지의 공간에 있는 미지의 적을 향해 나아가면서 결국 계획했던 청혼을 미루고 만다.

연인과 함께할 시간조차도 이겨낼 수 없는 유혹이 바로 미지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작품의 마지막은 간단하지만 정말 큰 임팩트를 주는 아래의 문장으로 끝이 난다.

우주 저편에서 너의 별이 되어줄게.

(pg 154)

작품 속에서는 같은 인간이지만 지구에서 태어난 자들과 우주에서 태어나 한 번도 중력을 받은 적이 없었던 자들이 대립한다.

행성 간 이동은 물론 빛의 속도로 상대를 궤멸시킬 수 있는 무기가 개발될 정도로 과학이 발달해도 인간은 같은 인간조차도 믿지 못한다.

오히려 그렇게까지 발달했기 때문에, 상대의 총구가 언제 나를 향할지 모르기 때문에 더 못 믿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우리의 과학이 지금의 속도로 발전할 때 필연적으로 다가올 미래를 꽤나 현실감 있게 상상해 내고 있었다.

역시나 저자의 명성에 걸맞은 굉장히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150페이지 정도로 매우 짧은 편이라 아쉬움이 느껴질 정도였지만, 짧은 만큼 전개가 빠르고 군더더기가 없어 읽으면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달달한 로맨스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다소 아쉬울 수 있겠지만, 저자가 SF 작가라는 것을 알고 선택한 독자들에게는 후회 없는 독서 경험이 되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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