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혼
배명훈 지음 / 북하우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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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사랑 이야기에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제목만 봤을 땐 쓱 지나쳤던 책인데 저자 이름을 본 후 '배명훈은 못 참지' 싶어 집어 들게 된 책이다.

이전에 나온 '미래과거시제'라는 단편집을 읽고 너무 좋아서 주변 지인들에게 추천했던 기억이 난다.

이번 작품 역시 SF 장르라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기대가 되었다.

핑크색 바탕에 달달한 제목이어서 연애소설 같겠지만 이 작품의 주제는 우주 전쟁이다.

작품은 우주에 함대를 보낼 수 있으며 광속으로 발사할 수 있는 광선 무기가 개발된 시대를 배경으로 한다.

우주 궤도에서 외부의 침략에 대비하는 우주군을 '데 나다'라는 걸출한 사령관이 이끌고 있고 작품의 화자는 이 사령관을 보좌하는 관찰자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특이하게도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어서 처음에는 마치 연애편지를 보는 듯하지만 이내 이어지는 전투가 주요 이야기라고 보면 되겠다.

저자가 현실 세계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우주 공간에서의 전투가 어떤 모습일지를 상당히 진지하게 고민한 흔적들이 여럿 보인다.

먼저 광속으로 공격해오는 무기로 공격을 당하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서로 광속이라는 속도로 상대를 겨눈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상세히 묘사한다.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일이 늘 조난당한 기분인 이유는 주위의 빈 공간에 비해

우리가 차지하는 공간이 너무 작기 때문이야.

지구 크기의 공간에 우주선 딱 두세 대니까.

행성 크기의 공간에, 그러니까 누군가에게는 세상 전부일 수도 있을 만큼

거대한 공간에 홀로 남겨져 있다는 것. 그래, 그건 조난이야.

무언가에 깊숙이 잠겨버리고 만다는 뜻이지.

어둡고 고요하며 거대하고도 막막한 무언가에.

(pg 58-59)

빛의 속도로 쏠 수 있는 무기가 있다면 당연히 적이 육안에 들어오는 즉시 죽음이라는 의미가 된다.

적이 방출하는 빛이 내 눈에 도달하는 시간이나 그 적이 쏜 무기가 내 함선에 도달하는 시간이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어도 30광초(빛이 30초간 날아간 거리) 이상의 거리에서 사격을 하게 되는데, 발사된 빛이 이동하는 30초 동안 함선 역시 상당한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결국 전투의 승패는 상대의 움직임을 얼마나 잘 예측하느냐에 달렸고, 때문에 함선이 상대가 예측하지 못하는 궤적(카오스적인)을 그려야 한다.

이러한 전투에서의 움직임이나 광속이라는 절대적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웜홀의 개념을 활용하는 등 우주 전쟁이라는 허구의 이야기에 현실성을 부여하기 위한 노력들이 이어진다.

작품 속 침략자는 그 정체가 명확하지 않다.

다만 선제공격을 해오기에 반격하지 않을 수 없을 뿐이다.

게다가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이 신출귀몰한 기동력을 자랑한다.

중반 이후 적의 정체에 관한 힌트가 등장하지만 사실인지 아닌지 밝혀지지 않기에 그저 가설에 머문다.

작품 후반에 이르면 적들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나타나고 사라질 수 있는지에 대한 비밀이 밝혀지지만 전쟁은 승리라고도, 패배라고도 하지 못할 상태로 끝이 난다.

작품의 화자는 미지의 공간에 있는 미지의 적을 향해 나아가면서 결국 계획했던 청혼을 미루고 만다.

연인과 함께할 시간조차도 이겨낼 수 없는 유혹이 바로 미지의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었다.

작품의 마지막은 간단하지만 정말 큰 임팩트를 주는 아래의 문장으로 끝이 난다.

우주 저편에서 너의 별이 되어줄게.

(pg 154)

작품 속에서는 같은 인간이지만 지구에서 태어난 자들과 우주에서 태어나 한 번도 중력을 받은 적이 없었던 자들이 대립한다.

행성 간 이동은 물론 빛의 속도로 상대를 궤멸시킬 수 있는 무기가 개발될 정도로 과학이 발달해도 인간은 같은 인간조차도 믿지 못한다.

오히려 그렇게까지 발달했기 때문에, 상대의 총구가 언제 나를 향할지 모르기 때문에 더 못 믿는 것일지도 모른다.

저자는 우리의 과학이 지금의 속도로 발전할 때 필연적으로 다가올 미래를 꽤나 현실감 있게 상상해 내고 있었다.

역시나 저자의 명성에 걸맞은 굉장히 재미있는 작품이었다.

150페이지 정도로 매우 짧은 편이라 아쉬움이 느껴질 정도였지만, 짧은 만큼 전개가 빠르고 군더더기가 없어 읽으면서 지루할 틈이 없었다.

달달한 로맨스를 기대했던 사람들에게는 다소 아쉬울 수 있겠지만, 저자가 SF 작가라는 것을 알고 선택한 독자들에게는 후회 없는 독서 경험이 되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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