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규칙
다카하마 마사노부 지음, 하야시 유미 그림, 임민정 옮김 / oldstairs(올드스테어즈)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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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덕분에 저자의 책을 몇 권 접했더니 표지에 보이는 그의 얼굴이 친숙하게 느껴진다.

아이와 부모가 모두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그의 새 책이 나와서 아이와 함께 읽어보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생활습관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만 이를 '꼰대'느낌 없이 해내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요즘 들어 인터넷에서 기본 매너에 속하는 것들을 지적하면 오히려 '진지충, 선비충'이라고 비꼬거나 '꼰대'라고 비하하는 모습들을 보면 확실히 타인에 대한 배려는 지능의 문제가 맞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의 책은 아이의 사회적 지능을 효과적으로 높여주는 느낌이다.

이번 작품 역시 '인사를 잘 하는 것이 좋다', '차려 준 밥에 불평하지 말고 감사한 마음으로 먹어라' 등 아이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조언들이 무려 50가지나 담겨 있다.

전작인 '인생의 규칙'도 그렇지만, 본 작품 역시 타인과 함께 살아갈 때 지켜야 할 것들은 물론, 내가 스스로를 대하는 방법에도 초점을 맞춘 느낌이다.

배우지 않았음을 변명하지 않는 것, 한 방 역전을 노리지 않는 것, 어떤 일이라도 진심을 다 하는 것 등은 사실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에게도 살아가면서 매우 중요한 덕목들이다.

특히나 코인이니 파이어족이니 하면서 이른 나이에 떼돈을 벌겠다고 욕심을 부리는 사람들에게 아래 페이지를 읽어보라고 권해주고 싶었다.

(pg 66-67)

내용은 꽤 '꼰대' 느낌이 날 법한 것들이지만 그림이 워낙 귀엽고 재미있는 데다 글씨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라서 초등학교 저학년도 충분히 재미를 느끼며 스스로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띠지에 적힌 것처럼 아이가 꼭 1%의 리더가 되길 바라지는 않지만(물론 되면야 좋긴 하겠지;;) 기본을 잘 지키는 사람만은 되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바람이다.

물론 우주의 시간에 비하면 인생은 찰나와 같이 짧다.

하지만 개인에게 인생이란 꽤 긴 시간이다.

책 표지에 적힌 '이 책을 소장하고 1년에 한 번씩 읽어라!'라는 문구가 단순한 마케팅용 문구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누구나 살다 보면 어릴 적 다짐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지고 그저 눈이 떠지니 하루를 시작하고 어제와 다를 바 없는 오늘을 살다 하루를 마감하게 마련이다.

비록 어린이들을 위한 책이지만 그 속에 담긴 메시지들은 나와 같은 부모 세대에도 꽤 깊은 울림을 주기 때문에 아이 옆에서 같이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은 책이었다.

("이 리뷰는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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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쉬운 과학 수업 반입자 - 미적분의 역사부터 디랙 방정식까지 노벨상 수상자들의 오리지널 논문으로 배우는 과학
정완상 지음 / 성림원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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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지식을 쉽게 풀어주는 커뮤니케이터들의 전성기가 열린 것 같다.

영상은 말할 것도 없고 수식 없이 쉽게 쓰인 책도 쏟아져 나오는 터라 양자역학 관련 책들을 몇 권 읽었더니 이제 양자역학 관련 영상 정도는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그러다 보니 내 분수를 잠시 잊었던 모양이다.

'반입자? 세상에서 가장 쉽다고?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라는 마음으로 쉽게 손에 들었던 책이지만 한 30페이지 정도 읽고선 '아..나 수학 손 놓은지 20년이 넘었지'라는 생각에 허탈해진 책이다.

후미의 주석을 제외하면 약 250페이지 정도의 분량인데 여기에서 디랙과 반입자의 등장은 200페이지부터다.

그전까지는 뉴턴이 정립한 미적분 소개부터 현재까지의 양자역학 발견사를 수식을 기반으로 설명하고 있다.

미적분으로 시작하는 만큼 저자 역시 서두에서 책의 30%만 이해해도 대단한 것이라 할 정도로 이 책에는 수식의 분량이 상당하다.

고등학교 때 배운 미적분과 삼각함수 개념이 기억나지 않는다면(나처럼) 시작부터 좌절감을 맛보기 쉽다.

그런 사람들은 좌절하지 말고 양자역학의 역사에 이름을 남긴 과학자들의 소개와 그들의 이론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위주로 읽으면 된다.

개인적으로는 물체의 질량이 단순히 '물체의 무게'가 아니라고만 배웠지 그래서 정확히 어떤 양을 가리키는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는데 이 책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물체의 관성질량은 물체가 가속도에 저항하는 정도를 나타내는 양이다.

사람들은 흔히 관성질량을 '물체에 함유된 재료의 양' 정도로 이해하고 있는데,

직관적으로는 이것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재료가 많을수록 물체를 가속시키기가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힉스 메커니즘은 질량을 완전히 다른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입자에 함유된 양은 '입자와 힉스장의 상호작용을 통해 생성된 질량에 의해

가속운동이 방해받는 정도'이다.

(pg 115)

이 책은 이론물리학과 실험물리학의 관계도 잘 보여준다.

이론물리학자들이 수학을 통해 무언가 새로운 입자가 있어야만 수식이 성립하게 됨을 증명하면 실험물리학자들이 실험을 통해 그 입자를 발견하기도 하고, 반대로 실험물리학자가 실험 중 예상과 다른 무언가를 관측했다면 그 물질이 무엇이며 왜 발생하는지를 이론물리학자들이 증명해 내곤 한다.

디랙이 예언한 반입자는 전자의 경우이다.

디랙은 수학을 통해 에너지가 음수인 입자가 존재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일부 물리학자들은 에너지가 마이너스인 입자가 있다는 것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실험을 통해 전자의 반입자인 양전자가 발견되면서 모든 입자에 반입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고 한다.

디랙의 쌍생성 및 쌍소멸 이론은 전자와 양전자에 국한하지 않고 일반화되어,

모든 입자는 자신과 질량은 같고 전하량은 반대인 반입자를 가지며 이들이 만나면

빛으로 사라진다는 사실이 나중에 알려준다.

디랙의 구멍이론에 따라 어떤 입자가 있으면 그의 짝인 반입자가 있으며,

입자의 에너지가 양이면 반입자의 에너지는 크기가 같고 부호는 음이 된다.

(pg 242)

물론 수학 끈이 짧아서 책의 10%나 이해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만큼 도전적인 책이었지만 그래도 읽고 나서 남는 것이 뭐라도 하나 있다는 것에 만족한다.

비교적 쉬운 책들로 상처받은 마음을 좀 달랜 후 다시 도전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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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가능성의 우주들 - 다중우주의 비밀을 양자역학으로 파헤치다
로라 머시니-호턴 지음, 박초월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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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식 이해도 못 하면서 양자역학 좀 공부해 보겠다고 이런저런 교양서들을 읽고 있는데, 읽으면 읽을수록 이해는 힘들어도 외워지기는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번에 읽게 된 책은 양자역학으로 우주의 기원을 찾는 책이다.

외국 저서들의 경우 마케팅을 위해 국내 이름을 본문과 전혀 다르게 붙이는 경우가 간혹 있는데, 이 책은 원제와 다르면서도 내용에 부합하는 제목을 잘 뽑아낸 것 같다.

원제는 'Before the big bang', 직역하면 '빅뱅 이전의 우주' 정도의 제목을 가지고 있는데 이에 대한 저자의 대답을 국문 제목이 잘 요약하고 있다.

저자는 양자역학의 최신 이론들을 바탕으로 우주의 기원을 탐구하고자 하는 물리학자다.

양자역학에도 여러 해석이 있는데, 저자는 그중에서도 초끈이론과 다세계 해석(다중우주론이라고도 한다)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저자는 인류가 우주의 시작과 끝에 대한 명쾌한 답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이유가 지금까지의 연구가 단 하나의 우주를 전제로 연구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는다.

저자는 우리의 우주가 유일한 우주라는 관념이 너무도 오랜 시간에 걸쳐 확고하게 다져진 것이어서 여기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론물리학자에게 가장 좋은 시나리오는 열 번 제안한 생각 중에서

아홉 번만 틀리는 것이다.

맞을 때마저도 자신이 옳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가 십 분의 일밖에 안 된다.

이론물리학자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관측으로 검증할 기회는 드물기 때문이다.

(pg 194)

게다가 '우리우주'라는 것이 결국은 빛을 쏘아 도달할 수 있는 거리, 즉 우리가 관측할 수 있는 우주라는 개념이기 때문에 우리우주 외에 다른 우주가 있다는 사실은 실험적으로 증명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우리우주가 아닌 다른 우주가 있다고 치더라도 근본적으로 그 우주는 과학의 대상이 아니라고 보는 시각이 우세했다고 한다. (옮긴이는 '우리나라'를 붙여 쓰듯 '우리우주'를 일부러 붙여서 썼다. 맞춤법에는 어긋나지만 옮긴이의 의도를 존중하여 이를 준용했다.)

하지만 저자가 수학적으로 증명한 바에 따르면 우리의 우주는 유일한 우주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다.

오히려 우리의 우주가 단일하다고 가정하면, 우리 우주와 같은 우주가 발생할 확률이 수학적으로 볼 때에는 말도 안 되게 낮은 확률(그냥 0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작은)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우리 연구팀은 다음과 같은 점을 보여주었다.

첫째, 펜로즈의 추정과 달리 우리우주의 기원은 매우 가능성이 높다.

우리의 시작은 특별하지도, 유일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둘째, 우주의 기원 이야기는 이제 단순히 가정으로만 남아 있지 않고

자연법칙을 토대로 계산을 통해 도출해낼 수 있었다.

(pg 225)

물론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다중 우주가 우리에게 친숙한 영화 속 다중 우주와 같은 모습은 아니다.

그저 우리의 우주가 생겨날 때를 이론적으로 추적하다 보면 우리 우주처럼 다른 우주도 얼마든지 생겨날 가능성이 크다는 결론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당연히 그 다른 우주가 우리우주와 비슷한 모습일지 어떨지는 저자의 논의 대상이 아니다.

그저 저자는 "우리우주가 유일한 우주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라는 것을 이론적으로 검증했을 뿐이다.

우주 파동함수의 갈래들은 다양한 에너지 경관 진공에 자리를 잡고

에너지를 받아서 개별 우주로 진화한다.

그런 다음 결어긋남 과정을 거쳐서 얽힘을 풀고 고유한 정체성을 획득한다.

마지막으로 인플레이션을 통해 고전우주로 성장한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다음과 같다.

양자 경관에서 탄생할 가능성이 높은 우주는

고에너지에서 시작하는 원시우주라는 것이다!

천체물리학적 관측과 인플레이션 우주론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우주처럼 말이다.

(pg 240-241)

이렇게 다중 우주를 주장하는 과학자가 저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여러 모형이 있고, 모형마다 일련의 논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저자의 모델이 매력적인 이유는 관측을 통해 상당 부분 사실일 수도 있다는 것이 검증되는 단계에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이론이 향후 유력한 우주 모델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있고 여러 관측 과학자들도 이를 검증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물론 우리 같은 일반인들이야 과학자들이 다 밝혀낸 후 이 책처럼 쉽게 풀어주면 이를 외우기에도 급급하겠지만 말이다.

굉장히 어려운 개념을 소개하고는 있지만 수학을 배제하고 다양한 예시를 들어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읽기에 아주 도전적인 책은 아니다.

300페이지 초반으로 분량도 그리 길지 않고 저자의 개인 성장 이야기도 많이 곁들여져 있어서 일반적인 과학 교양서에 비하면 읽는 재미가 있는 편이었다.

그러면서도 양자역학으로 밝혀낸 우주의 기원을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는 좋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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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내버려둬
전민식 지음 / 파람북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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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독특한 제목과 표지를 가진 국내 SF 소설이다.

제목은 비틀즈의 'Let it be' 가사를 국문으로 옮긴 것으로 작품 속에서 큰 역할을 한다.

거대한 도시, 모든 것이 궤도로 돌아가는 공간이 있다.

궤도들은 자전거처럼 생긴 페달을 통해 매일 일정한 시간을 굴려야만 하고 이 궤도가 도시에 전력과 동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궤도를 굴리기 위해 페달을 밟아야 하는 '페달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작품은 우수한 페달러인 '탁수'라는 한 남성의 시각으로 전개된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정해진 노동을 수행하고 다음 날의 노동을 위해 휴식하는 나날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는 언제부턴가 자신이 일상생활에서 겪은 일들의 대부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이 모든 걸 기억할 수도 없는 일일 것이다.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는 기억은 남겨둘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기억에 남아있지 않겠지. 그런 거겠지.

(pg 23)

그러다 같은 궤도에서 일하는 한 남성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죽은 자의 후임으로 한 여성이 부임한다.

선배 페달러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녀의 어린 시절 기억이 자살한 그 남성의 어린 시절과 상당히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서 작품은 후반을 향해 달려간다.

다 읽은 소감은 다소 복잡하다.

일단 저자가 구상한 디스토피아의 세계는 매우 매력적이다.

인간의 기억을 지배할 수 있는 사회이면서도 구식 방식인 인력으로 페달을 밟아 궤도를 돌려야만 돌아가는 도시는 여타의 SF 작품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하면서도 개성 있는 배경이었다.

다만 결말이 꽤 아쉽다.

무언가 감춰진 것들이 있다는 것을 찾아낸 후 그냥 끝나버려서 결국 그 도시의 정체는 무엇인지, 왜 사람들의 기억을 통제한 채 그곳에 가둬야 했는지, 이 모든 일의 목적은 결국 무엇이었는지 등등 읽는 동안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질문들에 대해 전혀 답해주지 않은 채 끝이 난다.

사실 초중반을 지나면 이 도시 외에 무언가 다른 현실이 있을 것이고 등장인물들이 그 세계를 찾아갈 것이라는 전개는 쉽게 예상할 수 있는데 거기에서 이야기가 끝나버리니 다소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체제 유지를 위해 기억이 통제되고 있고, 이를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현재에 안주하는 것이 훨씬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는 모습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매트릭스' 같은 영화에서도 현실이 가상 세계보다 더 끔찍하다면 굳이 현실로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200페이지 초반으로 얇고 글씨도 큰 데다 저자의 문장이 매우 간결하기 때문에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몰입감은 상당히 좋았던 책인데 조금 더 정밀한 세계관을 구축해서 독자들이 가질법한 의문들에 대한 대답을 더 보여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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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스트 타이드 Waste Tide 마로 시리즈 (Maro Series) 9
천추판 지음, 이기원 옮김 / 에디토리얼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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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삼체'를 읽고 감동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을 무렵, '류츠신은 신이었어'라는 생각마저 들 때쯤 그가 추천한 작품이라는 마케팅 문구가 눈에 띄었다.

보통 이런 문구에 혹해서 읽게 된 책들의 경우 실망하기 쉬운데, 이 책은 기본적으로 SF로 분류되어 있기도 해서 취향에는 맞지 않겠나 싶어 집어 들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추천은 틀리지 않았다.)

웬 붉은 산이 표지에 그려져 있나 싶겠지만 제목을 보면 저게 다 쓰레기라는 사실을 금세 알아챌 수 있다.

이 작품은 표지처럼 쓰레기 더미 속에서 희귀한 물질을 채취해 재활용하는 중국의 한 쓰레기 섬을 배경으로 한다.

이 섬에서 희귀하고 값비싼 희토류를 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채취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섬을 둘러싸고 세 개의 세력이 서로 견제하며 부를 축적하고 있었고, 여기에 미국의 회사가 뛰어들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려내고 있다.

작품의 중반까지는 이 작품이 딱히 SF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사람들(작품 속에서는 이들을 '쓰레기인간'이라 부른다)에 대한 다큐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다큐에서 본 모습과 이 작품의 초반부가 상당히 비슷했기 때문이다.

단지 작품 속 사람들이 작업하는 쓰레기가 좀 더 진보된 기술로 만들어진 쓰레기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당연히 극심한 환경오염과 빈부격차가 뒤따른다.

쓰레기를 분리하는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네트워크 데이터의 속도조차도 제한된다.

이들은 터무니없는 현실의 부조리 속에서 자연히 현실보다는 내세나 정령 등 무속적인 신앙에 의지한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불공평한 부분을 발견하면 가능한 한 모든 증거를 찾아내

스스로를 위로하려 했다.

하늘이 그들에게 지위, 부, 미모, 재능, 건강을 주었다면

분명 다른 무언가를 대가로서 취했을 것 같았다.

그런 증거들을 도저히 찾을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윤회'라는 이론을 발명하여

완벽한 등가를 이루는 시간 단위를 무한대로 늘렸다.

카이종은 과거에 이런 운명의 보존법칙을 비웃곤 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러한 이론이 필요한 건,

그것이 사실이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제한된 삶에 위안을 주어서일 것이다.

(pg 109)

중반 이후 세력가 중 한 명의 아들이 정체 모를 병으로 쓰러지게 되고 여기에 한 쓰레기인간 소녀가 휘말려 희생될 위기에 처한다.

이 소녀가 굉장히 극적인 능력을 발휘하면서 위기에서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 능력이 발현된 원인들이 밝혀지면서부터는 SF의 느낌이 물씬 풍기게 된다.

세상은 더 이상 어버이 세대가 지켜 오던 세상이 아니었고,

신은 그들이 믿던 신이 아니었다.

이제 사람들은 정직, 친절, 미덕보다도 힘을 훨씬 더 숭배했다.

그는 이제 무엇이 진리에 더 가까운지 알 수 없었다.

(pg 336)

이때 발현된 능력이 뇌에 작용하는 일종의 바이러스 같은 개념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재미난 점은 저자가 이러한 바이러스가 일종의 새로운 슈퍼 자아 같은 것을 만들 수 있고, 이 자아가 본래의 자아와 한 육체 안에서 공존할 수 있다고 설정했다는 점이다.

마치 하나의 뇌를 공유하는 샴쌍둥이처럼 두 인격이 하나의 육체에 존재하는 느낌을 잘 묘사하고 있다.

물론 물리적인 뇌는 하나뿐이므로 이 두 인격이 동일인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도 당연히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육체와 정신이 별도로 존재할 수 있다고 가정한 점 역시 재미난 지점이다.

물론 그녀 안에 자리 잡은 또 다른 자아가 네트워크를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육체와 정신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정신이 다시 신체로 들어간 이후를 묘사한 구절이 있다는 점에서 저자가 육체와 정신이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개념이라고 보았다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추론일 것 같다.

어쨌든 쓰레기인간들에게는 마치 모세를 떠올리게 하는 메시아로 그려진 그 소녀는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았고 또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스러진다.

작품의 스케일이 작지 않음에도 사건의 전개나 봉합 방법이 억지스럽지 않게, 신파스럽지 않게 잘 펼쳐져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신은 자기 모습 대로 인간을 창조했다.

인류는 세상의 신비를 탐구하고, 이론을 발명하고, 과학과 기술을 창조했다.

인간은 과학기술이 생명을 모방하여 창조주에 더 가깝게 진화하고

피라미드의 정점에 도달하기를 원했지만,

그 후 인간은 자기 미래를 기술에 맡기고 그에 기생하며 정체된 행보를 보였다.

(pg 433)

사건들이 후반부에 몰아치는 느낌이라 뒤로 갈수록 더 흥미로워지는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 두 번째 접하는 중국의 SF였는데 두 작품 모두 놀라울 만큼 '중국뽕'이 없다는 점도 재미있다.

오히려 중국의 역사나 사회의 경직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편이니 중국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독자들이라 하더라도 SF를 좋아한다면 만족스럽게 읽을 수 있을 작품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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