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내버려둬
전민식 지음 / 파람북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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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독특한 제목과 표지를 가진 국내 SF 소설이다.

제목은 비틀즈의 'Let it be' 가사를 국문으로 옮긴 것으로 작품 속에서 큰 역할을 한다.

거대한 도시, 모든 것이 궤도로 돌아가는 공간이 있다.

궤도들은 자전거처럼 생긴 페달을 통해 매일 일정한 시간을 굴려야만 하고 이 궤도가 도시에 전력과 동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궤도를 굴리기 위해 페달을 밟아야 하는 '페달러'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작품은 우수한 페달러인 '탁수'라는 한 남성의 시각으로 전개된다.

매일 일정한 시간에 정해진 노동을 수행하고 다음 날의 노동을 위해 휴식하는 나날들이 이어진다.

하지만 그는 언제부턴가 자신이 일상생활에서 겪은 일들의 대부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인간이 모든 걸 기억할 수도 없는 일일 것이다.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는 기억은 남겨둘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기억에 남아있지 않겠지. 그런 거겠지.

(pg 23)

그러다 같은 궤도에서 일하는 한 남성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죽은 자의 후임으로 한 여성이 부임한다.

선배 페달러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녀의 어린 시절 기억이 자살한 그 남성의 어린 시절과 상당히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서 작품은 후반을 향해 달려간다.

다 읽은 소감은 다소 복잡하다.

일단 저자가 구상한 디스토피아의 세계는 매우 매력적이다.

인간의 기억을 지배할 수 있는 사회이면서도 구식 방식인 인력으로 페달을 밟아 궤도를 돌려야만 돌아가는 도시는 여타의 SF 작품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독특하면서도 개성 있는 배경이었다.

다만 결말이 꽤 아쉽다.

무언가 감춰진 것들이 있다는 것을 찾아낸 후 그냥 끝나버려서 결국 그 도시의 정체는 무엇인지, 왜 사람들의 기억을 통제한 채 그곳에 가둬야 했는지, 이 모든 일의 목적은 결국 무엇이었는지 등등 읽는 동안 머릿속에 떠오르는 수많은 질문들에 대해 전혀 답해주지 않은 채 끝이 난다.

사실 초중반을 지나면 이 도시 외에 무언가 다른 현실이 있을 것이고 등장인물들이 그 세계를 찾아갈 것이라는 전개는 쉽게 예상할 수 있는데 거기에서 이야기가 끝나버리니 다소 힘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체제 유지를 위해 기억이 통제되고 있고, 이를 어느 정도는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구성원들이 현재에 안주하는 것이 훨씬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는 모습은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매트릭스' 같은 영화에서도 현실이 가상 세계보다 더 끔찍하다면 굳이 현실로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200페이지 초반으로 얇고 글씨도 큰 데다 저자의 문장이 매우 간결하기 때문에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몰입감은 상당히 좋았던 책인데 조금 더 정밀한 세계관을 구축해서 독자들이 가질법한 의문들에 대한 대답을 더 보여주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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