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스트 타이드 Waste Tide 마로 시리즈 (Maro Series) 9
천추판 지음, 이기원 옮김 / 에디토리얼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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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삼체'를 읽고 감동의 여운이 아직 남아있을 무렵, '류츠신은 신이었어'라는 생각마저 들 때쯤 그가 추천한 작품이라는 마케팅 문구가 눈에 띄었다.

보통 이런 문구에 혹해서 읽게 된 책들의 경우 실망하기 쉬운데, 이 책은 기본적으로 SF로 분류되어 있기도 해서 취향에는 맞지 않겠나 싶어 집어 들게 되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의 추천은 틀리지 않았다.)

웬 붉은 산이 표지에 그려져 있나 싶겠지만 제목을 보면 저게 다 쓰레기라는 사실을 금세 알아챌 수 있다.

이 작품은 표지처럼 쓰레기 더미 속에서 희귀한 물질을 채취해 재활용하는 중국의 한 쓰레기 섬을 배경으로 한다.

이 섬에서 희귀하고 값비싼 희토류를 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채취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섬을 둘러싸고 세 개의 세력이 서로 견제하며 부를 축적하고 있었고, 여기에 미국의 회사가 뛰어들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려내고 있다.

작품의 중반까지는 이 작품이 딱히 SF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쓰레기 더미를 뒤지며 하루하루 연명하는 사람들(작품 속에서는 이들을 '쓰레기인간'이라 부른다)에 대한 다큐를 본 적이 있었는데 그 다큐에서 본 모습과 이 작품의 초반부가 상당히 비슷했기 때문이다.

단지 작품 속 사람들이 작업하는 쓰레기가 좀 더 진보된 기술로 만들어진 쓰레기라는 점이 다를 뿐이다.

당연히 극심한 환경오염과 빈부격차가 뒤따른다.

쓰레기를 분리하는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네트워크 데이터의 속도조차도 제한된다.

이들은 터무니없는 현실의 부조리 속에서 자연히 현실보다는 내세나 정령 등 무속적인 신앙에 의지한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불공평한 부분을 발견하면 가능한 한 모든 증거를 찾아내

스스로를 위로하려 했다.

하늘이 그들에게 지위, 부, 미모, 재능, 건강을 주었다면

분명 다른 무언가를 대가로서 취했을 것 같았다.

그런 증거들을 도저히 찾을 수 없을 때 사람들은 '윤회'라는 이론을 발명하여

완벽한 등가를 이루는 시간 단위를 무한대로 늘렸다.

카이종은 과거에 이런 운명의 보존법칙을 비웃곤 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그러한 이론이 필요한 건,

그것이 사실이라서가 아니라 그들의 제한된 삶에 위안을 주어서일 것이다.

(pg 109)

중반 이후 세력가 중 한 명의 아들이 정체 모를 병으로 쓰러지게 되고 여기에 한 쓰레기인간 소녀가 휘말려 희생될 위기에 처한다.

이 소녀가 굉장히 극적인 능력을 발휘하면서 위기에서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 능력이 발현된 원인들이 밝혀지면서부터는 SF의 느낌이 물씬 풍기게 된다.

세상은 더 이상 어버이 세대가 지켜 오던 세상이 아니었고,

신은 그들이 믿던 신이 아니었다.

이제 사람들은 정직, 친절, 미덕보다도 힘을 훨씬 더 숭배했다.

그는 이제 무엇이 진리에 더 가까운지 알 수 없었다.

(pg 336)

이때 발현된 능력이 뇌에 작용하는 일종의 바이러스 같은 개념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재미난 점은 저자가 이러한 바이러스가 일종의 새로운 슈퍼 자아 같은 것을 만들 수 있고, 이 자아가 본래의 자아와 한 육체 안에서 공존할 수 있다고 설정했다는 점이다.

마치 하나의 뇌를 공유하는 샴쌍둥이처럼 두 인격이 하나의 육체에 존재하는 느낌을 잘 묘사하고 있다.

물론 물리적인 뇌는 하나뿐이므로 이 두 인격이 동일인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으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질문도 당연히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육체와 정신이 별도로 존재할 수 있다고 가정한 점 역시 재미난 지점이다.

물론 그녀 안에 자리 잡은 또 다른 자아가 네트워크를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반드시 육체와 정신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을 가정했다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정신이 다시 신체로 들어간 이후를 묘사한 구절이 있다는 점에서 저자가 육체와 정신이 서로 분리될 수 있는 개념이라고 보았다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추론일 것 같다.

어쨌든 쓰레기인간들에게는 마치 모세를 떠올리게 하는 메시아로 그려진 그 소녀는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았고 또 많은 사람들을 구하고 스러진다.

작품의 스케일이 작지 않음에도 사건의 전개나 봉합 방법이 억지스럽지 않게, 신파스럽지 않게 잘 펼쳐져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재미있게 읽었다.

신은 자기 모습 대로 인간을 창조했다.

인류는 세상의 신비를 탐구하고, 이론을 발명하고, 과학과 기술을 창조했다.

인간은 과학기술이 생명을 모방하여 창조주에 더 가깝게 진화하고

피라미드의 정점에 도달하기를 원했지만,

그 후 인간은 자기 미래를 기술에 맡기고 그에 기생하며 정체된 행보를 보였다.

(pg 433)

사건들이 후반부에 몰아치는 느낌이라 뒤로 갈수록 더 흥미로워지는 작품이었다.

개인적으로 두 번째 접하는 중국의 SF였는데 두 작품 모두 놀라울 만큼 '중국뽕'이 없다는 점도 재미있다.

오히려 중국의 역사나 사회의 경직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편이니 중국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는 독자들이라 하더라도 SF를 좋아한다면 만족스럽게 읽을 수 있을 작품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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