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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범생이가 ㅣ 시공 청소년 문학
이상권 지음 / 시공사 / 2018년 11월
평점 :
#01. 어떤 범생이가
기본적으로 성장소설은 어느 정도 정형화 된 구조를 따른다. 어린 나이의 주인공, 그런 주인공에게 깨달음을 주는 조력자적 존재, 불우한 가정환경과 라이벌 구도를 만드는 형제 혹은 자매. 내가 본 성장소설들은 대개 그랬다. <데미안>, <앵무새 죽이기>, <호밀밭의 파수꾼>, <완득이> 등
<어떤 범생이가> 이 책은 약간 다르다. 성장소설보다는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주인공은 '선비'라는 중학생으로, 불우한 가정환경과 생각없는 형, 누나가 더해져 항상 미래를 걱정하는 '애늙은이' 같은 성격을 지녔다.
보통 성장소설은 주인공의 '성장'이 있지만 <어떤 범생이가>엔 오히려 '형'과 '누나'의 성장이 나온다. 주인공의 정신적 성숙이야 이미 익을대로 익어있었으니. 주인공의 가족은 고양이 '깜박이'를 중심으로 일련의 사건을 겪게되고 소설은 약간은 열린 결말로 끝났다. (굳이 표현하자면 반쯤 열려있다.)
등장인물들이 주고 받는 대사는 요즘 청소년들을 생각하면 리얼리티가 조금 떨어지긴 한다. 이 위화감을 어린 나이의 화자 입장에서 쓰여진 '중학생 시선의 문장'들이 커버한다. 아무래도 성인이 청소년 소설을 쓰면 '성인의 생각'으로 쓰여진 문장들이 눈에 띄게 마련인데 이 소설은 그런 부분이 몇몇을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
#02. 총평
나쁘지 않았다. 가독성이 높아 빠르게 읽을수 있었고 이야기로서의 완성도는 높았다고 생각이 된다. 중간중간 좋은 표현들이 눈에 많이 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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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59>
선비가 어렸을 때만 해도 어머니는 반찬 씹는 소리를 거의 내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턴지 어머니의 입에서 반찬 씹는 소리는 아무런 통제를 받지 않았다. 어머니는 그것을 꼭 붙잡고 있다가 어느 순간에 놓아 버린 것 같았다. 어머니의 나이가 마흔이 넘어가고, 아버지가 무기력해지고, 식구들의 밥 먹는 속도가 빨라지고, 식구들이 남기는 반찬이 많아질수록 어머니의 위아래 턱은 입으로 들어온 반찬들을 더욱 단호하게 씹어 댔다. 그래야만 살 수 있다고 위아랫니들이 강조하는 것 같았다.
<p.95>
결국 어머니가 뭔가를 마구 집어 던지면서 흐느끼자, 그제야 둘은 으르렁거림을 멈췄다. 어머니는 비닐처럼 펄럭이는 그림자를 끌고 밖으로 사라졌다. 아무도 그런 어머니의 그림자를 보지 않았다. 선비만이 신발장 앞에서 한 시간이 넘도록 제 그림자를 밟아 대고 있을 뿐이었다.
<p.101>
아침부터 내리던 비가 그치자 이 세상 모든 된장잠자리들이 쏟아져 나왔다. 대단한 굿판이었다. 선비네 집으로 통하는 골목은 잠자리들 세상이 되어 버렸다. 녀석들은 인간들의 상상력이 닿을 수조차 없는 어느 비밀스러운 뜰에서 군무연습을 한 모양이었다.
<p.110>
선비의 눈에는 길을 걷는 사람들 얼굴도 하얀색이었고, 하늘과 땅도 하얀색이었다. 택시를 탔다. 솔비는 오른쪽 세상만 보았고, 선비는 왼쪽 세상만 보았다. 병원이 보이자 차창 속에 있는 작은 남자아이의 가슴이 끓어올랐다.
<p.122>
선비의 기억 속에서 새롭게 걸어 나온 아버지는 뜻밖이었다. 농담을 자유자재로 부리고 수다스러울 정도로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선비가 생각해 온 아버지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어쩌다가 아버지는 당신의 색깔을 다 잃어버렸을까. 그렇게 아버지가 잃어버린 색깔이 하나씩 떠오를 때마다 슬픔이 조금씩, 조금씩 선비의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p.137>
"개병신! 정말 그렇게 생각해?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잊혀져? 정말? 뭐가 잊혀져? 넌 아버지에 대해서 뭘 아는데? 뭐 아는 게 있어야 잊고 말고 하지. 이 바보야, 네가 그래서 수학을 못하는 거야. 원리를 알려고 하지 않고 정답만 찾으려고 하니까. 아버지를 알아 가는 건, 실은 우리가 서로를 알아가는 거야. 우리가 하나의 완전한 원소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알아야 하고, 서로를 알아야 하는 거야. 넌 나에 대해서 뭘 알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노래를 좋아하는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고 가리는지, 내 혈액형이 뭔지 알고 있어? 너랑 나랑 교집합이 뭐야? 공통점이 뭐냐고? 이 바보야, 나도 너 몰라! 네가 내 형인지 외계인인지 전혀 모른다고! 그래서 같이 가자는 거야, 이 멍청한 기름병 새끼야! 아버지랑 어머닐아 기름병이랑 외계인일아 고양이랑 뭐가 달라? 다 유령이잖아?"
: 가장 좋았던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