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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 읽기 - 전체주의의 탐험가, 삶의 정치학을 말하다 ㅣ 산책자 에쎄 시리즈 8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 산책자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나는 요즘 극장가의 화제가 된 일종의 반전(反戰)영화를 세 편 가량 연이어 보면서 거기에 담긴 정치사회적 주제를 읽어내는 데 애를 쓰고 있었다. 그것들이 영화적으로 비슷한 화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개인의 역사가 전체의 역사가 되는 식의 얼개를 가지고 전지구적인 메시지를 설파하고 있는 점은 분명했다. 특히 그 작품들 ㅡ <인 어 베러 월드>, <그을린 사랑>, <사라의 열쇠> ㅡ 모두 이야기를 매듭짓는 과정에서 지금 이 땅에 발딛고 서 있는 우리가 지나간 시간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고심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제 잘못된 역사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진부하다. 그 해답은 사회구성원이 행할 수 있는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과 같은 문제를 처음으로 인식하고 <전체주의의 기원>을 출간하게 된 20세기 중반에도 사회적으로 핵심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의 학자들 대부분은 그것을 깊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탐험가로서 고민을 거듭했던 것이다.
그동안 학계에서도 전쟁과 같은 이데올로기가 야기하는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서 노력을 등한시하지 않았으나 우리는 여전히 그 문제에 대해서 무기력할 따름이다. 그런데 최근에 한나 아렌트가 새롭게 조명되고 각국에서 그녀의 저서가 다시 번역되면서 이 책의 제목과 마찬가지로 '아렌트 읽기'가 시작됐다. 세계 곳곳의 갈등을 다루면서 불편한 진실을 끄집어내는 영화에서도 아렌트를 읽으려는 시도가 엿보이는 것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영화에서나 현실에서나 이 시대가 요구하는 인간의 행동 ㅡ 거대한 역사와 크나큰 집단에 맞서는 ㅡ 이 한나 아렌트와 엘리자베스 영-브루엘이 아렌트적 인물에게 기대하는 모습으로 수렴한다는 것이다. 아렌트적 인간이란 무엇일까.
아렌트는 나치와 스탈린 전체주의 체제가 저지른 무고한 생명의 학살이 지금까지 되풀이되고 있다고 말한다. 반유대주의나 민족주의의 잔재, 이데올로기와 테러에 기초한 신종 통치 형태가 바로 그것이다. 전체주의 체제는 이데올로기를 동원하여 하나의 집체적 정체성을 만들어 내고, 시민 개개인의 개별성을 그 아래 복속시킨다. 그래서 그녀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대국가 역시 이런 전체주의적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경고한다. 대중민주주의에서 시민들 대다수는 정치로부터 소외되어 있으며 상품의 소비와 향락 산업 따위에서 삶의 의미를 찾을 뿐이다. 또한 전체주의 체제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가족 관계와 같은 사적인 영역의 파괴를 목격하고도 진실의 왜곡이나 은폐에 무감각하다. 아렌트는 그 이유로 무사유성을 들었다. 이는 개인의 작은 범죄 행위에도 곧잘 드러나는 특성이다. 사이코패스라고 호명되는 범죄자들도 날 때부터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지 않는 것 역시 일종의 무사유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원인과 해결책이 <인간의 조건>과 <정신의 삶>에 각기 다른 방식으로 녹아 있다.
개별 시민의 사유 행위가 보편타당한 정치 행위를 견인하게 된다는 전제 하에 사유의 정치적 중요성을 강조한 아렌트의 관점은 오늘날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그의 사상이 뒤늦게 빛을 발한 이유는 타인과 좋은 관계를 맺는 일이 갈수록 어렵고 복잡한 지구촌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이념이 다문화주의의 맥락을 재해석하는 아렌트주의와 맞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영화들 ㅡ 세계 곳곳에서 건너온 최신작 ㅡ 이 대부분 아픈 역사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침묵을 깨부수는 위대한 진실에의 의지를 보이는 것은 아렌트가 기성의 정치학적 범주와 관행에 맞서서 새롭게 정의한 개념들이 작금의 현상을 분석하는 잣대로서 적실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문화적 실례라고 볼 수 있겠다. 그리하여 나는 아렌트적 코즈모폴리턴이 그리는 장밋빛 미래가 도래하길 조심스레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