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력
김병도 지음 / 해냄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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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실망스럽다. 특히 책이 출발하는 문제의식이 우리 경제가 현재의 수준을 넘어서 더 발전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진지한 고민없이 엉성한 논리로 대충 250여 페이지를 채워서 "서울대 교수"라는 평판에 기대고 "최고의 경영학자"라는 광고로 책 장사하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김교수에 따르면 우리 나라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도전정신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각자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고, 높은 목표를 세우고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정부는 세금을 낮추고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 자주 듣던 이야기라 전혀 새롭지 않다. 우리 실정에 근거한 상세한 분석 대신에 내적 일관성도 없이 그저 남들이 하는 이야기만 나열하고 있다.

김교수가 정부규제의 예로 들고 있는 업무시간 제한이 기업혁신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업무시간 제한은 우리 실정에서 경쟁을 촉진하며 이는 혁신을 위한 최고의 조건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도서정가제가 가격경쟁을 위한 혁신을 제한하는 것은 사실이라하더라도 다른 모든 혁신도 제한할까? 아마존에서 책을 찾으면 호기심을 야기하는 책이 함께 나오지만 알라딘은 생뚱맞은 책이 대부분이다. 진지한 분석과 고민이 없이 대기업의 주장을 반복하는 것은 한국 경제 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김교수는 주요국 중앙은행의 양적완화(QE)가 국민들의 도전정신을 저하시켰다는 주장을 인용한다. 양적완화 정책으로 비효율적인 기업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경영을 잘못한 기업이 불황을 통해서 청산되어야 새로운 회사가 시장에 진입할 수 있고 경제의 역동성이 살아난다는 주장이다. 미국 대공황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Mellon이 했던 주장으로 일부 보수적 경제학자들만 동의하는 내용이다. Keynes 이후 경제학계에서는 이런 주장을 청산주의(liquidationism)라고 부르며 경제의 불황을 지속시키는 정책으로 간주하고 있다. 인용은 김교수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정확히 보여준다.  
 
책에서 가장 읽을만한 부분은 장강명의 "표백"이라는 소설의 일부 인용이었다. 기성세대는 청년의 말에 대답해야 한다.
도전정신이 그렇게 좋은 거라면 젊은이고 나이 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다 가져야지, 왜 청년들한테만 가지라고 하나요? ... 오히려 오륙십 대의 나이 든 사람들이야말로 인생 저물어 가는데 잃을 게 없지 않나요. 젊은 사람들은 잃을 게 얼마나 많은데 ... 도전이라는 게 그렇게 수지맞는 장사하면 왜 그 일을 청년의 특권이라고 양보합니까? 척 보기에도 승률이 희박해 보이니까 자기들은 안 하고 청년의 패기 운운하는 거잖아요.
김교수이 책을 읽고 청년들이 도전정신으로 무장할 것 같지는 않다. 꼰대는 입을 다물라고 하지나 않을까? 우리 경제가 현단계에서 미국과 같은 수준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노동자가 더 열심히 일해야 하는 것 대신에 과학지식과 기술수준이 높아져야 한다. 과학지식에는 인문학이나 경영 경제학이 포함된다. 하바드 대학 교수가 이런 수준의 책을 쓰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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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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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교양 함양을 위한 인문 도서로 선정하여 나누어 준 책이다. 동시대를 살아서인지 공감하는 에세이가 많다. 무엇보다 깊은 사색과 폭넓은 독서로 단련한 명확한 글쓰기가 돋보인다. 

현직 판사인 저자에 따르면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는 개인주의가 확립되지 못한데 비롯한다. 그래서 저자는 맑스의 공산주의자 선언을 빗대어 외친다. 
만국의 개인주의자들이여, 싫은 건 싫다고 말하라. 그대들이 잃을 것은 무난한 사람이라는 평판이지만 얻을 것은 자유와 행복이다. 똥개들이 짖어대도 기차는 간다. (p. 57)
그러나 제목과는 달리 저자는 그리 개인주의자가 아니다. 오히려 개인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존재이며 공동체를 이루어 상부상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책은 "우리는 서로의 아이를 지켜주어야 한다.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서 말이다"라고 끝맺고 있다. 

저자가 개인주의자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이유는 아직까지 우리 사회의 전근대적 집단주의 때문이다. 법조계도 최근 밝혀지고 있는 비리를 보면 일반인의 집단주의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국가의 사법체계를 이용하여 사익을 취하는 부정의는 엘리트 집단이라는 선민의식에 기초하고 있다. 짖어대는 똥개들 사이에서 무난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들으며 살아온 판사의 에세이인 셈이다.  

인상에 남는 몇 구절을 옮겨 본다.  
우리가 서구에서 수입한 민주주의는 바로 이런 개인들을 전제로 성립되어 있다. 우리 사회 존립의 근거인 가장 근본적인 사회계약, 즉 우리 헌법 질서의 근간이 그렇다. 이건 모두 유치원 때부터 배워온 지루할 정도로 상식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슬플 만큼 이 사회에 내면화되어 있지 못한 이야기다. (p. 25)
아름다운 윤리와 당위만으로는 현실을 바꿀 수 없다. 인간의 이기심, 욕망을 있는 그대로 일단 인정하고 그걸 출발점으로 타협할 지점을 찾는 냉정함이 현실적이다. 세상이 복잡하다고 생각하기를 거부하고 신념과 분노에만 의지하다가는 좋은 의도를 가지고도 최악의 결과만을 가져올 수 있다. 의심하고, 근거를 찾고, 다시 생각하고, 아니다 싶으면 주저없이 결론을 바꾸는 노력 없이는 세상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 깨어 있어야 한다. (p. 204)
지금 그 사회에서 다수의 의견이라고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만약 다수의 의견이 늘 옳다면 인류는 아직도 천동설을 믿고 잔인한 사적 보복을 허용하며 인종간 결혼은 금지하고 성적 소수자를 박해하고 있지 않을까. 다수결의 원칙을 중시하는 민주주의에서 다수에 대한 정교한 견제장치도 같이 마련하고 있는 이유다. 대의제, 법률보다 개정이 어려운 헌법, 권력 분립과 견제, 표현의 자유 보장 ... 하지만 이런 장치만으로는 부족하다. 사회 구성원들이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폭넓게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내면화하려면 끊임없이 대화하고, 토론하고, 잘못된 생각들과 싸워야 한다. (p. 246)
팔짱 낀 채 '한계' '본질' '구조적 문제' 운운 거창한 얘기만 하며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진짜 용감한 자는 자기 한계 안에서 현상이라도 일부 바꾸기 위해 자그마한 시도라도 해보는 사람이다. 어떤 통속적인 미국 드라마를 보다가 아래 대사를 듣고 그 통찰력의 깊이에 놀란 일이 있다. Anyone can be cycical. Dare to be an optimist. (p. 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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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옳다 -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정혜신 지음 / 해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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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조현 기자의 휴심정 기사를 보고나서 호기심이 생겨 그녀의 유튜브 강연을 보았다. 짧은 비디오 클립에서 그녀는 차분하고 호소력이 높은 목소리로 "공감"이 무엇인지를 설명했다. 50년을 살면서도 공감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온 나를 발견하고서 깜짝 놀랐다. 


정혜신씨의 글은 한겨레와 경향에서 몇번 읽었지만 사회적 약자를 껴안는 정신과 의사 이상으로 생각해보지 못했다. 책을 읽으니 그녀는 정신과 의사를 넘어서 우리 사회를 연구하는 사회학자이며 심리학자라는 생각이 든다. 

책에서 정혜신씨는 공감한다는 것은 먼저 상대방에게 맞추어 주는 정신노동이 아니라고 말한다. 친절을 배푸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방법은 아니다. 지속가능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친절을 배푸는 사람의 정신을 고갈시키고야 만다. 공감은 잘못된 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공감은 정신노동에 비해 훨씬 어려운 일이다. 공감은 상대방에게 자신의 온 몸을 던지는 것이다. 상대방의 모든 것을 궁금해 하며 답하기 곤란한 점을 묻고 그가 대답하는 긴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개별자로 고유하며 존중받기를 원한다. 인간은 공감 받기를 원하며 공감 받아야 살아갈 수 있다고 한다.

얼마전 한겨레에서는 문대통령님이 책을 읽고서 페이스북에 "내가 생각했던 공감이 얼마나 앝고 관념적이었는지 새삼 느꼈다"고 쓰셨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분다운 겸손함이다.

책을 읽으며 돌이켜 보니 나는 그저 기능적으로 살아온 듯하다. 머리가 나쁘지 않은 반면 모험심은 없어서 안전한 길만 걷다보니 억울하거나 불편한 일을 경험하지 않았다. 어쩌다 운도 좋아서 우울증에 빠지거나 심리적 공황을 경험하지 않고 무던하게 50년을 살았다. 그러나 가까운 가족조차 공감하며 지내오지 못한 것 같다. 아니 공감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살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책은 실용적인 안내서처럼 구성되어 있다. 임상경험을 제시하며 이럴 때에는 이런 방법을, 저럴 때에는 저런 방법을 써야 한다고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공감"에 익숙하지 않다보니 책만 읽고서 실제로 적용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가끔씩 책장에서 뽑아서 다시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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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의 만리장성 - 그림자 금융, 유령 도시, 대규모 부채 그리고 중국 경제 기적의 종말
디니 맥마흔 지음, 유강은 옮김 / 미지북스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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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경제가 머지않아 위기를 겪을 것이라는 예언은 많다. 부동산 버블, 과잉 생산설비, shadowing banking 확대에 따른 금융시스템 부실, 부채급증에 따른 기업과 가계의 취약성, 미중무역갈등 등 위기 원인으로 지목되는 리스트는 길다. 이런 점에서 책 "빚의 만리장성"은 다가올 위기를 예측하는 다른 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월스트리트저널의 기자로서 오랫동안 중국에 머물렀던 저자가 기자다운 감각으로 구체적인 관찰에 바탕을 두고 예언하고 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맥마흔에 따르면 중국의 문제점은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는 시장기구가 작동하지 않고 사회갈등을 해결하는 정상적인 정치기구를 갖추지 못한 상황이 빚어낸 결과이다. 지금까지의 중국 경제성장은 자생적인 혁신 능력보다는 선진국으로부터의 기술을 이전해 노동력을 결합하여 생산성을 높인 데 기초하고 있다. 생산성 향상에 따른 잉여는 혁신을 촉진하도록 분배되기 보다는 투기와 협잡을 초래했다. 공무원은 부패를 통해서, 기업은 노동자 착취를 통해서, 가계는 부동산투기를 통해서 잉여를 더 얻고자 분주하다. 

문제는 앞으로의 성장잠재력이 급속히 낮아지고 있다는 데 있다. 선진국과 격차가 축소됨에 따른 낮아지는 생산성 향상 속도를 시장원리에 기초를 둔 자원배분과 혁신으로 보완해야 한다. 그럼에도 중국은 혁신 대신에 과거의 방식을 확대하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다. 욕망과 성장에 대한 환상을 기반으로 신용이 확대되고 그 결과 양적성장은 이루고 있지만 대신에 생산 효율성은 저하되고 부실은 쌓이고 있다. 맥마흔은 "그들의 경제 기적이 고통스럽고 불확실한 종언을 겪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책을 끝맺는다. 

저자의 분석 가운데 중국의 1990년대말과 현재 상황을 비교는 눈에 띈다. 1990년대말 아시아 외환위기를 지켜보며 많은 분석가들은 중국도 비슷한 운명에 처할 것으로 예견했었다. 당시 중국은 은행부실 누적, 생산성 저하, 경제개혁 전망부재로 침체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많은 분석가들의 예측과는 달리 중국은 장쩌민과 주룽지의 지도하에 기적처럼 성장의 길을 걸었다. 장쩌민과 주룽지가 발견했던 해법은 "주택 시장을 자유화해서 20년에 걸친 도시화의 문을 열었고,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을 처리해서 수출부문에 엄청난 힘을 실어주었"던 정책이었다. 이제는 이런 묘책이 존재하지 않는다. 시진핑은 비전으로 수입대체라는 공급측 개혁을 제시하고 있으나 실효성은 의심스럽다. 상명하달식 관료주의적 정책은 당면한 중국의 문제를 되려 키울 가능성이 크다. 

사실 맥마흔이 지적하는 중국의 문제점은 한국이 경험하였고 아직도 상당 부분 지니고 있는 이슈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은 중국에 비해 규모가 작고 저자가 지적하고 있는 문제들을 조금 빨리 맞이했
을 뿐이다.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는 정치도 한국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는지는 의문이다. 민주화된 정치가 계층간 갈등을 조정하고 자원배분을 원활히 하기보다는 분노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꾸준히 변화와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한국의 경험을 돌아볼 때 중국 경제는 폭발하기보다는 추세적으로 성장률이 떨어지는 가운데 간헐적으로 가속과 정체를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 

책을 읽다가 발견한 흥미로운 논의 가운데 하나는 맥마흔이 제시한 중국의 개혁방안이다. 저자는 시진핑의 공급주도 정책을 비전통적인 경제학 이론이라고 비판한다. 반면에 그는 "정통 경제학 이론에서는 경제의 수요 측면-즉 가구와 개인-으로 부를 이전해서 사람들이 더 많이 소비를 하면 성장이 진작된다고 주장한다"라고 쓰고 있다. 문재인 정권에서 말하는 소득주도성장과 그리 다르지 않다. 

국내의 보수 언론과 학자들은 소득주도정책이 비전통적 경제학에 근거하고 있다고 비판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의 소득주도정책보다 혁신경제정책이 오히려 현대 경제학 주장과 거리가 멀다. 그리고 혁신경제정책은 박근혜씨의 창조경제정책 또는 박정희의 산업정책과 비슷하다. 사실 한국의 경제발전은 경제학이 추천하는 정책을 따른 결과가 아니다. 정책은 이론과 현실을 고려하되 적절성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은 오직 실용성에 있을 뿐이다. 빈수레가 요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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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전병근 옮김 / 김영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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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오늘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부제를 단 하라리의 책은 일관된 주제를 논증하기보다는 21개의 단상을 유려한 문체로 담고 있다. 21개의 단상은 기술, 정치, 민족주의, 미래, 종교, 자아 등 다양하다. 21개의 단상은 관통하는 주제는 인간은 세상을 이야기로 인식하고, 이야기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Thaler는 최근 AER 논문에서 
성경을 빗대어 "In the beginning there were stories"로 시작하고 있다. 하라리도 첫번째 주제를 시작하며 "인간은 사실과 숫자, 방정식보다는 이야기 안에서 생각한다. 이야기는 단순할수록 좋다"라고 시작하고 있다. 개인이 믿는 이야기는 생의 의미를 부여하고, 사회에서 공유되는 이야기는 구성원을 조화롭게 만든다. 


그러면 우리 인류는 지금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살고 있는가? 20세기 인류는 최종적으로 “자유주의”라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의미를 찾고 싶어 하면서도 우주에 관해 이미 다 만들어진 어떤 이야기에 자신을 맞추려고 한다. 하지만 세계에 관한 자유주의의 해석에 따르면 진실은 정확히 그 반대다. 우주가 내게 의미를 주는 게 아니다. 내가 우주에 의미를 준다. 이것은 나의 우주적인 소명이다... 다른 모든 우주의 이야기처럼, 자유주의 이야기 역시 서사의 창조와 함께 시작된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창조는 매 순간 일어나며 창조자는 나 자신이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의미를 만드는 것이다. 
Life of Pi에서 태평양을 건넌 이야기를 들려준 Pi는 작가에게 'So which story do you prefer?'라고 묻는다. 그러나 현재 인류가 당면한 문제는 인공지능, 빅데이터, 생명공학의 발전으로 자유주의 이야기가 더이상 설득력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자유주의는 노동에 근거를 둔 철학이고 이야기였다. 기존의 관행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무엇을 창조하는 것이야말로 의미를 가졌다. 그런데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는 인간의 창조능력을 앗아갈 것으로 예상된다. 20세기 들어서 마차를 끌던 말이 아무런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사라졌듯이 노동자는 사회에 무관한 계급으로 간주되고 궁극적으로는 사라질지도 모른다. “자유주의” 이야기는 다가올 실업문제에 아무런 대답을 주지 못한다.

자유주의가 기초하는 인간의 “자유”란 개념도 허구일 뿐이라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어떤 새로운 철학적 논쟁이 이를 설득력 있게 증명했다는 주장이 아니다.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느낌, 감정, 계산을 근거로 각자 자신이 주체적으로 내렸던 판단을 자유라고 간주한다. 빅데이터, 인공지능, 생명공학은 우리보다 더 우리 취향에 맞는 음악을 잘 고르고 우리보다 더 도덕적인 알고리듬에 따라 운전을 한다. 인공지능이 우리보다 글을 잘쓰고 그림을 잘그리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부를 때 인간의 자유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머지않아 자유주의에 기초한 민주주의도 끝이난다. 근대의 종말이다.

새로운 이야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자유주의가 파산한다면 과거 자유주의와 경합했던 민족주의나 종교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최근 Brexit 또는 Trump 현상을 보면 자유주의가 후퇴하는 반면 민족주의 내지 국가주의 또는 종교가 부흥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진다. 하지만 기후변화, 프라이버시문제, 핵전쟁 위협 등 현재의 인류가 직면한 대부분의 문제는 전 지구 차원의 문제이다. 민족주의는 문제 해결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의 일부일 뿐이다. 그리고 종교는 근대이래 문제 해결책이 요구될 때 변명거리를 내세웠고 앞으로도 무능할 것이다. 종교는 종교간 갈등이라는 혹을 덧붙이고 있을 뿐이다. 어리석고 무지한 인간의 특성을 감안할 때 민족주의와 종교는 인류 파멸의 길로 안내하는 지름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대안인가? 이에 대해 하라리는 그의 명확한 글쓰기에 대조적으로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고 있다. 대신 자신이 체험한 불교와 명상에 관해 들려준다. 그는 이야기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명상을 말한다. 

부처에 따르면, 생에는 의미가 없다. 사람들은 어떤 의미를 만들 필요도 없다.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럼으로써 우리의 집착과 공허한 현상을 자신과 동일시하는 데서 비롯하는 고통에서 해방된다. 

그가 쓰고 있듯이 "80억 인류가 정기적인 명상을 시작한다고 해서 세계 평화와 전지구적 조화가 도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야기는 인류 문명을 창조하는 원동력이었다. 이제 문명은 어떻게 되는가? 하라리는 선사가 되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인류는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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