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회(同懷) 40년 - 문화과학 신서
임춘성 지음 / 문화과학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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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강사 시절 이웃 학과 노교수의 정년 퇴임 축하 자리에는 기념논문집 봉정이 빠지지 않았다. 제자와 후배 교수들이 스승과 선배 교수의 정년 퇴임을 축하하는 마음으로 글을 모아 논문집 또는 단행본을 만들어 봉정한 것이다. 문자 그대로 논문 모음집이었고 때로는 주제를 정해 기획 구성한 단행본 형식을 갖추기도 했다. 간혹 논문집 봉정을 마뜩잖게 여겨 마지막 학기 강의를 주제 특강으로 기획해 각 주제 전문가를 초빙해 연속 강의를 진행하거나, 기념식을 생략하고 학술 세미나를 했다는 소식도 간간이 들려왔다. 나도 얼마 전까지 네다섯 차례 그런 글을 썼다. 65세 퇴임이 문자 그대로 정년(停年)은 아니지만, 대학원 입학부터 치면 40년 이상의 학술 생애를 일단락하는 계기임은 분명하다. 퇴임 후에도 연구실을 차리고 꾸준히 결과물을 내는 분도 적지 않지만, 막상 나날이 달라지는 체력과 심력(心力)의 저하를 체감하면서 적당히 멈출 때를 알아야겠구나(知止)’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코로나19 특별 방역 상황에도 불구하고, 20222월 말 29년 근무했던 대학을 떠나면서 학과를 뛰어넘어 동료 교수들의 과분한 환송을 받았고, 목포대 민교협에서는 고별 강연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목포에 거주하는 졸업생과 심포지엄에 참여한 학부생들 그리고 대학원생들과도 정겨운 시간을 보냈다. 또한 한국 중국현대문학학회에서 고별 강연 자리를 앞당겨 만들어주었고 학회의 절친한 후배들과 두어 차례 축하 모임을 했다. 문화/과학의 절친한 선배 부부도 특별한 축하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정년 퇴임을 축하해준 모든 분께 다시 한번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 책을 처음 구상할 때는 내 나름의 일단락이라는 생각이 먼저였다. 그동안 몇 권의 단독 저서를 내면서 거기에 수록하지 못했던 글 위주로 가능한 매년 한편을 골라 단행본으로 묶고자 했다. 지난 글들을 정리하며 추리다 보니 학술 논문 외에도 서평과 서평 답글, 책 서문, 강연 원고, 추천사, 영화평, 인터뷰, 학술대회 참관기, 사설 등 종류가 꽤 많았다. 특히 이메일로 주고받은 글은 갈무리하면 그 분량이 상당할 것 같았지만 제외했다. 선인들의 문집을 보며 다양한 장르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쓴 글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학술적인 글은 함께 내는 다른 책에서 비판적 중국연구의 여정이라는 명목으로 묶은 만큼, 이 책은 가능한 학술 논문을 제외한 다른 글들을 중심으로 선별했다. 그리고 내 생각과 느낌을 드러낸 글을 매년 한 편의 기준으로 골랐다. 물론 이 기준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과거에서 거슬러오기보다는 최근부터 되돌아가는 형식을 취했다. 모든 글은 가능한 발표 당시의 원상태를 유지했고, 맞춤법과 외래어 표기 그리고 문맥을 다듬는 수준에서 교정했다. 간혹 추가한 부분은 각주로 표기했다. 부록으로 카카오톡 대화방에서 나눈 대화와 추모글 한 편, 그리고 단행본 목록과 정기간행물 게재 글 목록을 실었다. 목록은 일단락을 위해 필요하다 싶어 만들었는데 의외로 게재 글 쪽수 확인에 시간이 걸렸다.

                                                                   ---[책을 펴내며]에서


 

이 책을 처음 구상할 때는 내 나름의 ‘일단락’이라는 생각이 먼저였다. 그동안 몇 권의 단독 저서를 내면서 거기에 수록하지 못했던 글 위주로 가능한 매년 한편을 골라 단행본으로 묶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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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비판적 문화연구와 포스트식민 번역연구 문화과학 이론신서 82
임춘성 지음 / 문화과학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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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한국에서 사회주의 중국을 비판적으로 연구하기는 쉽지 않았다.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기본 정보의 수집조차 불가능했던 중화인민공화국 연구는 한편으로 사회주의 중국을 ‘죽의 장막’ 속 ‘뿔 도깨비’로 단정하게 만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금지된 것을 소망하는 수준에서 그것을 ‘인민 천국’으로 상상하게 했다. 그런 가운데, 반공 이데올로기의 금제 아래 사회주의 중국 연구의 물꼬를 튼 리영희(1977; 1983), ‘비판적 중국연구’의 깃발을 내건 정치학자 이희옥(2004)과 사학자 백영서(2012; 2023), 세계체계의 틀에서 중국을 고찰한 사회학자 백승욱(2008) 등을 비롯한 수많은 연구자의 성과가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자기 학문 영역에 사로잡혀 ‘학제적․통섭적 연구’에는 이르지 못했다. 오히려 ‘중국 특색의’ 제반 관행을 적시하며 ‘비판적 중국연구’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자고 제안한 문화평론가 이재현(2012a)의 문제제기가 그동안 중국에 매몰되었던 비판적 시야를 환기해주었다. 그럼에도 ‘비판적 중국연구’로 나아가는 여정은 지금도 험난하다.

이데올로기 지형이 자유로워진 오늘날의 한국에서 ‘비판적 중국연구’를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쟁점과 과제가 가로놓여 있지만, 그 가운데 근본적인 것은 모던 이후 세계를 지배해온 ‘유럽중심주의’를 비판하는 것과 그에 대한 반발로 제출된 ‘중국중심주의’를 경계하는 것이다. 초우(Rey Chow, 周蕾)는 ‘비판적 중국연구’가 직면한 두 가지 과제를 제시했다. 하나는 중국의 외부, 즉 서양과 미국의 중국학자들에게 공통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중국 내부, 즉 토착적 중국학자들이 공유하는 내셔널리즘에 대한 비판이다(초우, 2005). 오리엔탈리즘은 문화제국주의의 유산이고 내셔널리즘은 나르시시즘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결국 보편주의와 특수주의가 상호 강화하는 메커니즘을 구성하면서 지금껏 비판적 중국연구의 발전을 가로막았다. 중국 외부로는 오리엔탈리즘을 비판하고, 중국 내부로는 내셔널리즘과 내부 식민지를 극복하는 것, 바꿔 말하면 보편주의와 특수주의의 문제점을 파악해 문화제국주의의 맥락 안에서 나르시시즘적 가치생산의 문제를 규명하는 일이야말로 비판적 중국연구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유럽중심주의와 중국중심주의가 심층에서 은밀하게 작동하고 있다면, 일반 대중이 쉽게 접하는 것은 유럽중심주의의 프리즘으로 왜곡된 중국관이다. 이는 끊임없이 ‘중국위협론’과 ‘중국위험론’을 부추겨 반중(反中)과 혐중(嫌中) 정서를 조장해왔다.

이 책은 2017년 한국연구재단 우수연구학자 지원 사업의 결과물이지만, 집필하다 보니 지난 40년간 ‘비판적 중국연구’의 길을 걸어온 필자의 학문적 여정을 집성(集成)하게 됐다. 문학연구가 내 공부의 기반을 구성하고 있다면, 1990년대 시작한 문화연구와 그 연장선상의 도시문화 연구, 2010년대 후반에 시작한 사이노폰 연구, 그리고 문화연구와 사이노폰 연구 사이 어느 시점에

관심을 두게 된 포스트식민 번역연구는 개인 차원에서 비판적 중국연구로 나아가는 여정의 중요한 지점들이다. 그리고 동아시아 담론, 홍콩과 상하이의 문화정체성 연구, 에스노그라피,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의 비판사상 등도 여정의 중요한 구성요소다. 그 외에도 ‘비판적 중국연구’의 여정을 뒷받침해준 수많은 공부가 존재한다. 마르크스주의,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식민주의, 포스트사회주의, 인지과학, 포스트휴먼, 적녹보라 패러다임 등등이 그 목록이다. 이 목록은 ‘새로운 대륙’(루이 알튀세르)이라 일컫기에는 부족하지만 ‘비판적 중국연구’로 나아가는 여정에서 필자가 만나 도움받은 영역들이다. 여기에서는 ‘비판적 중국연구’를 위한 접근법으로 ‘비판적 문화연구’와 ‘도시문화 연구’ ‘포스트식민 번역연구’와 ‘사이노폰 연구’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 책에서 다룬 접근법과 과제가 ‘비판적 중국연구’에 뜻을 둔 문학연구자와 문화연구자에게 도움이 되기를 기대한다.

                                                                            ---[책을 펴내며]에서

이 책은 2017년 한국연구재단 우수연구학자 지원 사업의 결과물이지만, 집필하다 보니 지난 40년간 ‘비판적 중국연구’의 길을 걸어온 필자의 학문적 여정을 집성(集成)하게 됐다. 문학연구가 내 공부의 기반을 구성하고 있다면, 1990년대 시작한 문화연구와 그 연장선상의 도시문화 연구, 2010년대 후반에 시작한 사이노폰 연구, 그리고 문화연구와 사이노폰 연구 사이 어느 시점에 관심을 두게 된 포스트식민 번역연구는 개인 차원에서 비판적 중국연구로 나아가는 여정의 중요한 지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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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자와 그의 소유 아카넷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648
막스 슈티르너 지음, 박홍규 옮김 / 아카넷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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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양 근현대 철학사를 섭렵하고 있는 루쉰의 방대한 독서량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가운데 익숙지 않은 한 이름에 주목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막스 슈티르너(Stirner, Max). 왕후이는 흔히 알려진 대로 루쉰이 니체의 영향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와 다른 맥락에서 슈티르너의 영향을 상당히받았음을 여러 차례 지적하고 있다. 특히 왕후이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루쉰의 개체성 원칙은 상당 부분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 소유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왕후이의 판단이다. 루쉰은 1922「『노동자 셰빌로프를 번역하고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들 중에는 가끔 내가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내게 대단히 불가사의하다. 이유는 지극히 간단한데, 나는 니체를 읽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내가 보다 익숙하고 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는 이는 슈티르너(Max Stirner)이다.

 

루쉰의 언설은 때로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위 인용문에서 니체에 대한 언급이 그러하다. 루쉰이 받은 니체의 영향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 성과가 나와 있으므로 굳이 여기에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위의 인용문으로부터 우리는 최소한 루쉰이 슈티르너의 영향을 깊이 받았음을 인정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슈티르너는 니힐리즘, 실존주의, 정신분석 이론, 포스트모더니즘, 그리고 아나키즘, 특히 개인주의적 아나키즘의 선구자로 간주된다.” 그는 서유럽 사상사의 현대적 맥락에서 스스로 형이상학을 제거한 첫 번째 인물일 뿐 아니라 마르크스가 철저하게 인간주의를 벗어나 역사유물론의 과학혁명으로 나아가는 데 직접적인 영향력을 미쳤다.”(장이빙 2018, 583)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 소유󰡕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유적 본질의 논리적 질곡으로부터 해방되었다.”(장이빙, 608) 여기에서 그의 전체 사상을 살펴볼 여유는 없고, 루쉰의 개체성 원칙과 관련된 부분을 영문 번역본(Stirner 2017) 및 중문 번역본(施蒂纳 1989)과 장이빙(2018)을 중심으로 고찰해보도록 하자.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 소유나는 무(, Nichts)를 내 삶의 기초로 삼는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는 포이어바흐와 헤스, 그리고 청년 마르크스가 제기한 인간은 인간에 대해 최고 본질이라는 인간주의의 슬로건에 대해, 현실 존재로서의 개인인 나는 모든 것보다 숭고하다라는 명제로 문제를 제기했다. 슈티르너의 키워드는 ’, ‘이기주의’, ‘유일자(the unique)’. 이 세 가지의 대표인 유일자의 사명은 ()’. 그의 는 정치적인 무정부일 뿐 아니라 존재론(ontology)적 의미에서의 철저한 소멸과 자유이며 전통적 형이상학에 대한 최초의 근본적 전복이다. 그리고 는 어떤 대상이 어떤 총체적 관계로부터 의지하지 않는 현실의 개인이다. 슈티르너의 유일자는 니체의 초인에 영향을 주었고 새로운 인간주의의 입장에서 고전 인간주의의 본질을 반대하는 개인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를 본질로 하는 유일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일컫는 개인과 주체 그리고 사형을 선고받은 저자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이렇듯 슈티르너 사상의 의미는 역사적인 맥락을 초월해 당대성도 가지고 있다.

유일자와 그 소유는 인류(humanity)와 소유(ownness)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장에서 슈티르너는 인류 개체의 발전을 세 단계로 나누었다. 첫째 단계 유년 시기는 인간이 사물 대상과 관계를 맺는 초보적 리얼리즘 시기이고, 둘째 단계 청년 시기는 이상주의 관점의 시기이며, 셋째 단계 성인 시기에서 성인은 이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익에 따라 세계에 대응한다. 이것이 바로 슈티르너가 긍정하는 자기중심으로 사람을 대하는 2의 자기 발견이며 사물에 얽히지 않고 객관적 실재에서 출발하는 현실적 입장이기도 하다. 슈티르너는 고대인의 관념은 유년기의 산물이고, 중세 이후 모든 근대 관념은 성숙하지 못한 청년의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정신결정론이라 비판하면서, 자신의 관념만이 진정한 성인의 성숙한 사상을 대표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나아가 부르주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도 반대했다. 부르주아 자유주의는 봉건 전제에서 벗어난 것이고, 사회주의의 자유는 자본의 통치에서 해방되어 나온 것이라고 하지만, 슈티르너가 보기에 이들 자유는 허구라는 것이다. 슈티르너가 보기에 중세시대와 비교했을 때 자유주의는 또 다른 개념을 화제로 제시했을 뿐이다. , 신을 대체한 것은 인간이라는 개념이고 교회를 대체한 것은 국가라는 개념이며 신앙을 대체한 것은 과학이라는개념이다. 요컨대 생경한 교조와 계율을 대체한 것은 현실적 개념과 영원한 법규다.”(麥克斯施蒂纳 1989, 103) 자유주의는 중세의 신과 교회와 신앙을 인간과 국가와 과학으로 대체했을 뿐, 그 본질이 억압이라는 점에서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기독교의 계율을 부르주아 법규로 대체했을 뿐이다.

슈티르너가 보기에 사회주의는 사회적 자유주의(social liberalism)에 불과하다. 그것은 개인이 재산을 점유하지 못하게 하고 모두가 재산을 점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무산자가 희망하는 대로 빈부 격차를 소멸시킨 사회를 건립한다면 그는 유민이 될 것이다.”(麥克斯施蒂纳, 126) 유민은 부르주아혁명이 시민으로 치켜세웠던 것과 비슷하게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유민은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고 사회만이 재산을 가지게 되는데, 사회추상적 권력이기 때문이다. 그 앞에서 모든 유민은 평등하게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

정치적 자유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에 대한 슈티르너의 결론은 이렇다.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어떤 사람도 명령을 발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자유주의에서는-인용자) 어떤 사람도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또한 (정치적 자유주의에서-인용자) 국가만이 명령권을 가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자유주의에서는-인용자) 사회만이 재산을 가지게 된다.”(麥克斯施蒂纳, 125) 둘 다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처럼 부르주아 자유주의 및 그 대안으로 제시된 사회주의까지 부정하는 슈티르너의 유일자개념의 핵심은 대체 불가능한 유일자로서의 개인이다.

그간 슈티르너는 마르크스에게 비판받으면서 많은 이들에게 잊혔지만,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도 재평가의 움직임이 있다. 이를테면 에티엔 발리바르는 다음과 같이 논하기도 했다.

 

슈티르너는 어떤 믿음도 어떤 [대문자] 관념도 어떤 거대 서사, 그러니까 [대문자] , [대문자] 인간, [대문자] 교회, [대문자] 국가의 거대 서사도 원하지 않으며, 또한 동시에 [대문자] 혁명의 거대 서사도 원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현실적으로en effet 인권공산주의 사이에 아무런 논리적 차이가 없듯이, 기독교chrétientié, 인류, 인민, 사회, 민족nation 또는 프롤레타리아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차이가 없다. 이 모든 보편적 통념은 실제로는/현실적으로는effectivement 추상물일 뿐이며, 이 추상물은 슈티르너의 관점에서는 허구들일 뿐이라는 점을 의미한다.(발리바르 2018, 1145. 강조-원문)

 

즉 슈티르너는 기독교 신학과 계몽 정신 그리고 시민의식으로부터 급진적인 인간주의와 공산주의까지 포함해 모든 ()적 존재총체를 허구(fiction)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슈티르너는 개인에 대한 ()적 존재총체의 압박을 반대하면서 당시 유럽에 존재하던 거의 모든 사상과 논쟁을 벌였다. 슈티르너는 신학에서 헤겔까지, 헤겔에서 다시 포이어바흐까지의 변화가 시간의 추이에 따라 신성한 정신이 절대 관념으로 변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고, 이 절대 관념이 또 여러 가지로 변해 인류애와 합리성, 시민 도덕 등등 여러 가지 관념을 낳았다고 비판했다.

슈티르너는 오직 눈에 보이는 개체의 존재만을 믿었다. 이런 개인을 슈티르너는 유일자라고 일컬었다. 슈티르너에게 있어 유일자는 삶의 기초가 되는 창조자이고 그것은 영원불멸하지 않은 무()이다. “내가 유일자인 나 자신을 내 삶의 기초로 삼는다면, 내 삶은 자신을 소비하는 일시적이고 사멸하는 창조자에게 의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무를 내 삶의 기초로 삼았다.”(Stirner 2017, 377) 슈티르너의 유일자는 루쉰의 개체성 문화철학의 근간이 되고 있다. 


## 막스 슈티르너의 원저는 184410(책에는 1845년으로 표시) 라이프치히에서 출간되었다(Stirner, Max, 1845, Der Einzige und sein Eigentum). 1907년 아나키스트였던 스티븐 빙톤에 의해 영어로 번역되었고(Stirner, Max, 1907, The Ego and His Own, translated by Steven T. Byington, Benj. R. Tucker Publisher, New York), 같은 판본이 1995년에 다시 출간되었다(Stirner, Max, 1995, The Ego and His Own, edited by David Leopold, translated by Steven T. Byingt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그리고 2017년 월피 랜드슈트라이허에 의해 새롭게 번역되었다(Stirner, Max, 2017, The Unique and Its Property, translated by Wolfi Landstreicher, Underground Amusements). 한편 중국에서는 1989년 번역 출간되었다(施蒂纳, 1989, 唯一者及其所有物, 金海民译, 商务印书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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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하미학 - 중국의 전통 미학 인문과 지혜 3
리쩌허우 지음, 조송식 옮김 / 아카넷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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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역정』이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라면, 『화하미학』은 미학 사상의

논리화를 지향하고 있다. 그의 논리화는 역사적인 것과 동떨어져 있지

않고, 중국 미학의 역사와 더불어 자신의 논리를 구축하고 있다.

화하(華夏)미학은 유가 사상을 주체로 하는 중국의 전통 미학을 가리킨다.

유가는 오랫동안 깊고 넓은 사회적·역사적 기반을 다져 왔으며, 끊임없

이 다양한 학파의 주장을 흡수하고 동화하여 자신을 풍부하게 발전시킴

으로써 중국 문화의 주류와 기본을 이루었다(리. 쩌허우 2016, 4)

이것이 중국 전통 미학 사상을 바라보는 리쩌허우의 기본 입장이다.

유가 미학은 비(非)디오니소스적 ‘예악’ 전통을 역사적 근원으로 삼고,

‘호연지기’와 ‘천인합일’을 기본 특징으로 삼고 있다.

화하미학의 핵심인 유가 미학의 장점은 체계적 피드백 구조로 다양

한 사조와 문화, 체계를 흡수하고 동화함으로써 자신을 개혁하고 발전

시킨 점이다. 그것은 위로 ‘예악’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 도가의 소요

유(逍遙遊) 정신을 수용·보완하고, 굴원(屈原)과 위진 현학(玄學)의 깊은

감정과 성찰을 받아들이며, 선종(禪宗)의 형이상학적 추구를 통해 영원

함과 묘오(妙悟), 운미(韻味)와 충담(沖淡)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나

아가 명대 중엽 이후 인간의 본능적 욕망과 성령(性靈)을 각성하고 서

양 미학을 받아들여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다. 아래에서 구체적으로 살

펴보자.

『화하미학』(1994a)의 목차를 보면, ‘제1장 예악 전통’부터 ‘제6장 근

대를 향하여’까지 종적 구조를 가지면서도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단순

한 시간의 변화를 기록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전구조로 되

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적전구조란 ‘제1장 예악 전통’이 ‘제2장 공문(孔

門) 인학’에 적전되고, 다시 제1장과 제2장의 주요 내용이 ‘제3장 유가

와 도가의 상호 보완’에 적전되는 구조를 가리킨다. 여기에서 ‘공문’은

‘유가’와 차이가 있다. ‘공문’이 공자에서 시원하고 맹자와 순자가 발전

시킨 ‘원시 유가’를 가리킨다면, ‘유가’는 한대 이후 선진 제자백가 사

상과 한대 유행한 음양오행 사상이 적전된 사상 체계를 가리키는 것이

다. 이처럼 중국 미학은 선진 시대부터 근현대까지 지속적으로 적전되

었다는 것이 리쩌허우의 판단이다.

‘예’(禮)와 ‘악’(樂)은 “원시 시대의 토템 가무와 무술 의례가 더한층

정비되고 분화”(리쩌허우 2016, 29)된 것으로, 주공(周公)이 그 중심적인

제정자이고 공자는 확고한 옹호자이며, “유가는 바로 이 역사적 전통

의 계승자이며 유지자이며 해설자다”(리쩌허우, 31). 이렇게 볼 때 공자

는 원시 시대의 토템 가무와 무술 의례를 제도화한 예악 전통을 유가

에 접목한 인물이다. 공자는 예악 전통에 인학(仁學)이라는 자각 의식

을 부여하고, 현실 인생에 집착한 실용이성을 주장함으로써, 동시대의

정치적 교화와 윤리, 인간관계의 조정, 사회질서의 구축에 직접 공헌하

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 뒤를 이은 맹자와 순자의 두 흐름은 약간의

차별점이 있었다. “맹자가 선험적 도덕으로써 인간의 감성을 주재하고

통괄하여 ‘인성(사회적 이성)이 선하다’라고 주장했다면, 순자는 현실적

질서와 규범으로 인간의 감성을 개조하여 ‘인성(생물적인 자연 감성)이

악하다’라고 주장했다.”(李澤厚 1994a, 271) 그러나 맹자와 순자의 주장

이 겉으로는 달라 보이지만, “어떻게 개인의 감성이 사회적 이성에 적

전할 것인가 하는 공문(孔門) 인학의 공통 명제로 귀결된다”(李澤厚, 272)

라는 점에서 상통하고 있다.

‘유학 4기설’의 유학과 마찬가지로, “유가 미학은 중국 미학의 기

초이자 주류로, 심후한 전통 연원과 심층적인 철학 관념을 가지고 있

고, 그 체계론의 피드백 구조는 또한 각종 사조와 문화 그리고 체계를

흡수하고 동화하여, 자신을 혁신하고 발전시키는 데 뛰어났다”(앞의

책, 281). 『화하미학』 제3장에서 리쩌허우는 유가 미학과 도가・초사(楚

辭)・선종이 어떻게 충돌하는 가운데 융합되었는지에 대해 논술하고

있다. 리쩌허우는 우선 유가와 도가가 “비(非)디오니소스적인 원시적

전통에 근원한다”(리쩌허우 2016, 149)라는 사실을 지적한 후 양자의 관

계가 ‘대립적 보완’임을 밝힌다. “도가와 장자는 ‘인간의 자연화’라는

명제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예악’ 전통과 유가의 인학이 강조하는 ‘자

연의 인간화’와 바로 대립하면서도 보완한다”(리쩌허우, 151)라는 것이

다. 총체적으로 보면, 장자는 유가에 흡수되어 심미적 측면에서 사용되

었다. 장자는 유가의 미학이 인생과 자연과 예술에 대해 진정한 심미

적 태도를 세우는 데 일조했다

리쩌허우는 유가와 도가의 상호 융화와 보완에는 정치적인 길과 예

술적인 길이라는 두 가지가 있다고 설파한다. 먼저 정치적인 길은, “곽

상(郭象) 등을 대표로 삼을 수 있고, 유가 학설로 장자를 주석하고 명교

(名敎)가 바로 자연이라 인식하면서, 장자의 학설에서 소외를 반대하

는 해방 정신과 인격 이상을 제거했다”(李澤厚 1994a, 308). 다음 예술적

인 길은, “도연명(陶淵明)의 시와 산수화・화조화(花鳥畵)다. 그것은 확실

히 ‘안빈낙도’의 세속을 따르는 일면이 있지만, 주로 세속 인간관계에

대한 항의와 초월 그리고 해탈이다”(李澤厚, 308). 도가의 부정적 논단과

세속을 초월한 형상은 현실 생활과 문예・미학에서 유가의 긍정적 명

제와 독립적 인격으로 전환한다. 자연은 생활, 사상과 감정, 인격이라

는 세 방면에서 인간의 최고 이상이 되었으며, 그것들은 ‘인간의 자연

화’가 전면적으로 전개된 것으로서, 유가와 도가의 상호 보완이 구체

적으로 실현된 것이다.(앞의 책, 309)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미학 사상에서 굴원의 역할에 대한 평가다.

대표작 「이소」(離騷)를 읽어 보면 굴원이 유가적 전통의 영향을 받았음

을 알 수 있는데, 리쩌허우는 국가 관념이 희박했던 전국시대 당시 초

나라에 연연하고 수도가 함락되자 바위를 안고 멱라수(汨羅水)에 투신

한 굴원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굴원은 죽음을 선택한 고양된 인간성과 감정적 태도, 즉 추악한 현실에

대한 철저한 부정과 인생의 이상에 대한 동경으로써, 후대 사람을 감염(感

染)시키고 개발하고 교육했다. 굴원은 죽음을 통해, 삶과 죽음・인생과 생

활에 대한 예악 전통과 유가 인학의 철리적 태도를 전에 없던 깊이 있는

감정의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앞의 책, 328)

훗날 유가 전통의 지배 아래 굴원의 자살을 본받은 지식인은 많지

않았지만, 죽음에 대한 깊은 체득과 감정적 반성으로 실제적 죽음 행

위를 대체했다. 그러므로 중국인은 “벚꽃처럼 순간적으로 왕성하게 피

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매화・국화・소나무・대나무처럼 오랫동안 참

아 내는 것을 이상적 상징으로 삼은 것이다”(리쩌허우 2016, 248). 이 지

점에서 리쩌허우는 죽고 사는 현상 분석에 그치지 않고, 굴원처럼 죽

음을 선택하지 않았더라도 죽음 앞에서 나온 심후한 ‘현존재’의 감정

그 자체를 높게 평가한다. “굴원과 같은 감정과 절조가 오히려 대대로

중국 지식인의 영혼을 배양했으며, 아울러 항상 생활과 창작의 원동력

이 되었다.”(리쩌허우, 248) 그러므로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지만, 치욕을

견디면서 『사기』 저술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짊어졌던 사마천의 인생

이나 죽림칠현의 일원이었던 혜강(嵇康)과 완적(阮籍)의 비분과 애상도

“죽음이 임박하여 비로소 최대로 표출될 수 있었던 ‘존재’의 의의를 가

장 잘 드러냈다. 그것들은 죽음에 대한 감정적 사유를 통해 발휘되는

‘존재’의 빛이다”(앞의 책, 249). 이처럼 굴원 정신의 전통은 후대 사대

부 지식인들에게 계승되어 유학 전통의 ‘정감-이성 구조’ 내면에 깊은

생사의 의미를 부여했다. 이렇게 “굴원과 유가・도가는 서로 스며들어

융화하여, 감정을 핵심으로 하는 위진 시대 문예-미학의 기본적 특징

을 형성했다”(앞의 책, 262). 나아가 이 세 갈래 물줄기는 위진 시대에 하

나로 합류(合流)해서 “화하 문예와 미학의 근본적인 심리 특징이자 ‘정

감-이성 기제’를 만들어 냈다”(李澤厚 1994a, 338). 이후 중국 문학사의

대부분 작가는 유가・도가・굴원의 세 요소가 융화하여 이룬 심층적인

정감과 이성의 만남이라는 ‘문화심리구조’를 기반으로 삼아 작품을 창

작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위진 시대에 중국에 들어온 불교가 유가와 만나는 과정 또한 화하미

학 사상 형성에서 중요하다. “유학을 위주로 하는 중국의 문화 전통이

어떻게 불교에 대응하고 교류했는가의 문제는 수백 년간 이데올로기

의 주요과제가 되었고 다양하고 찬란한 양상을 야기했다. 예술에서 문

학에 이르기까지, 신앙에서 사상에 이르기까지 불교를 배척하기도 하

고, 흡수하기도 하고, 귀의처로 삼기도 하고, 변조하기도 하고, 장자를

끌어들여 설명하기도 하고, 유교와 서로 겨루기도 했다.”(李澤厚 1994a,

359) 불교 또한 인생 경계(境界)의 추구라는 점에서 유가와 소통했고 유

가는 불교의 형이상학적 측면을 수용해 외연을 확장할 수 있었다. 선

종(禪宗)이 전자의 예라면, 성리학은 후자의 사례라 할 수 있다. “유학

전통은 장자・굴원・현학이라는 단서를 흡수하면서도 새로운 걸음을

내디딘 상황을 계승했다 할 수 있다. 특히 미학사적 관점에서 보면 그

러하다.”(李澤厚, 359)

리쩌허우는 중국의 전통 의학인 사상(四象)으로 미학 사상을 분류한

바 있다.

유가는 강건함을 미로 여기고 그 속에 부드러움이 있으므로 ‘태양’(太陽)

에 속하고, 도가는 부드러움을 본체로 여기고 그 속에 강함이 있으므로

‘태음’(太陰)에 속하며, 굴원은 부드러움 속에 강함이 있으므로 ‘소양’(少

陽)에 속하고, 선(禪)은 겉은 강하지만 속이 부드러우므로 ‘소음’(少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음’은 유가의 웅건하고 강건한 미학 전통과 확

실히 거리가 있다. 선은 본래 인도 불교가 중국 네이션의 문화심리구조에

의해 개조되고 창작된 것이다. (앞의 책, 377)

단, 중국인은 출가해서 중이 되는 것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의식과 문화 영역에도 불교가 그리 많이 반영되지는 않았고, 선은 궁

극적으로 유가와 도가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이렇게 볼 때, 리쩌허우는

중국의 불교, 즉 선종이 미학 차원에서는 심리로 전환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를 대표하는 시인이 바로 소식(蘇軾)이다. 리쩌허우는 『미의 역

정』에서 소식을 이전 작가들과 대비해 아래와 같이 품평한 바 있다.

여기(소식의 문장 — 인용자)에는 굴원과 완적의 근심과 울분이 없고, 이백

과 두보의 호방함과 성실함도 없으며, 백거이의 명랑함과 다르고 유종원

의 고고함과도 다르며, 한유의 안하무인의 오만한 기세와는 더더욱 다르

다. 소식이 미학에서 추구한 것은, 질박하고 꾸미지 않으며 평담(平淡)하

고 자연스러운 정취와 운미(韻味)였고, 사회를 멀리하고 세상을 꺼리는

인생 이상이자 생활 태도였다. 그는 가식과 조작, 장식과 조탁(彫琢)에 반

대했으며, 이상의 모든 것을 철저한 깨달음의 철리적 수준으로 끌어올렸

다.(앞의 책, 157)

여기에서 리쩌허우는 소식의 작품을 ‘송명 이학이 선종을 흡수한 해

석학적 산물’(앞의 책, 385)로 설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송명 “이학

자가 순수철학 영역에서 선종과 불학을 경유하여 다시 유학으로 돌아

왔을 때 자신을 최대한 풍부하게 하고 심미로 종교를 대신하는 형이상

학적 본체 경계를 구축”(李澤厚 1994a, 386)한 것과 대체로 비슷하다. 여

기에 리쩌허우는 산수화의 예를 추가한다. 그에 따르면, “송명 이학의

고조기가 대체로 중국에서 산수화가 가장 성했던 시기라는 것이다”(李

澤厚, 386). 철학적 사변과 예술적 취미의 이러한 동보성(同步性)은 경제

발전과 예술발전의 불균등성과 연관해서 고찰해 볼 만한 토픽임이 틀

림없다.

리쩌허우는 『화하미학』의 마지막 장인 ‘제6장 근대를 향하여’의 서

두에서 번영과 쇠락의 순환을 언급한 후, 전통 유학과 문예・미학의 상

황을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새로운 뜻을 지니는 사상 경향과 예술 창작은 오히려 언제나 유학의 정통

을 등지거나 심지어 이를 위반하는 방향을 지향했다. 그러나 ‘다투어 벗

어나려는’ 어떤 의향이나 전망을 표현할 수 있을지라도, 그것은 단지 ‘지

향’일 뿐, 그 자체로 유학의 울타리를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성숙

하지도 철저하지도 못했다. 특히 이론면에서는 더욱 그러했다.(앞의 책,

388)

명 중엽, 유학의 정통에서 ‘다투어 벗어나려는’ 의향 또는 전망은 바

로 갑작스레 출현한 ‘인간의 욕망’[人欲]이었다. 모두 알다시피, 인간

의 욕망은 우선 남녀 간의 성욕으로, 오랜 기간 예술의 주제였다. 그러

나 중국의 예악 전통과 유교적 교양의 영향 아래 “성애(性愛) 자체는 문

예와 심미에서 독자적 지위를 제대로 얻지 못했으며, 특히 개체의 감

성 존재와 서로 깊이 연관된 독립적 지위도 얻지 못했다”(앞의 책, 389).

명 중엽 이래 전에 없던 상공업의 번영과 도시의 소비 발달에 힘입어

사회 풍상(風尙)이 바뀌었고, 성애(性愛)소설이 유행했으며 전통 예속(禮

俗)이 붕괴하기 시작했다. 이를 대표하는 것이 ‘삼언’(三言)7과 ‘이박’(二

拍)8이다.

사회 조류의 커다란 변화와 관련해 리쩌허우는 철학, 심미적 취미와

기교 형식의 세 가지를 제기했다. 첫째, 철학에서 말할 때 이러한 새로

운 경향은 왕양명(王陽明) 심학(心學)의 해체 과정에 반영되었다. 이것은

감성적인 것이 인정되고 긍정되며 강조되는 것으로 나타났다.(리쩌허

우 2016, 374) 둘째, 동일한 시기에, 서위(徐渭), 탕현조(湯顯祖), 원굉도(袁

宏道)와 같이 이지(李贄)와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인물이 시문과 회화

분야에서 개성과 자아를 핵심 또는 특징으로 하는 창작론과 예술론을

각각 발표했다.(리쩌허우, 379) 셋째, 그 시대에 몇몇 작가와 예술가들이

형식이나 기교를 규범화하고 고찰했던 것은 오히려 매우 자각적이라

할 수 있다. 문예-심미의 자체적 규율이나 법칙에 대한 일찍이 없었던

중시와 진지한 추구는 근대로 나아가는 표현이었다.(앞의 책, 395; 李澤厚

1994a, 400)

리쩌허우는 제6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서양의 이론 프레임으로 중

국 문학 이론을 형이상학론, 결정론, 표현론, 기교론, 심리론, 실용론으

로 분류한 류뤄위(劉若愚)9와, 서예 이론을 사실파, 순조형파, 감정지상

파, 윤리파, 자연파, 선의파로 나눈 슝빙밍(熊秉明)10을 비판하면서, 자신

의 초보적 구상을 아래의 표로 제시하고 있다.

도표 3• 중국 전통 미학 사상의 범주와 연변(演變)

리쩌허우는 위의 표가 인상식의 현상 묘사이자 직관적 태도일 뿐,

근대적 언어분석의 과학성이 결여되어 모범으로 삼기 부족하고 다만

출발점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면서 겸양하지만, 우리는 이 표

를 통해 전통 미학 사상의 몇 가지 범주의 역사 흐름과 상호 구분을 이

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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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역정 현대의 고전 6
리쩌허우 지음, 이유진 옮김 / 글항아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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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의 역정』은 중국 미학사인 동시에 중국판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라

할 만하다. 3000년이 넘는 중국 미학의 역사를 관통하는 흐름을 유가

전통으로 설정하고, 그것의 시대별·장르별 흐름의 특색을 잡아내고

있다. 벤야민은 1930년대 파리를 관찰하기 위해 ‘산책자’(the Flâneur)

의 시점을 선택했지만, 3000년이 넘는 중국이라는 시공간을 관찰하기

에 산책자의 어슬렁거림은 안이해 보인다. 리쩌허우는 부득불 거시적

조망의 방식을 선택하게 된다. 물론 부분적으로 산책자의 여유를 보이

기도 하지만, 주요하게는 조감자(aeroviewer)의 시선을 취하고 있다. 조

감자의 시선은 우선 예술사회학의 관점에서 3000년이 넘는 대하(大河)

물줄기의 본체에 초점을 맞춘다. 리쩌허우는 선진(先秦) 시대에 형성된

‘이성주의 정신’을 중국 미학사의 특징으로 꼽는다. 이어서 시대별 특

색에 눈길을 주는데, 이는 왕조 변천사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다. 하

지만 리쩌허우는 단순하게 왕조의 변천을 따라 시기를 구분하지는 않

는다. 진(秦)의 제도를 계승했다는 한(漢)을 초(楚)와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고, 똑같은 당(唐)임에도 불구하고 성당(盛唐)과 중당(中唐)을 미학적

으로 다른 시기로 분류하며, 나아가 한족의 송(宋)과 몽골족의 원(元)을,

그리고 한족의 명(明)과 만주족의 청(淸)을 하나로 묶는 등의 시기 구분

은 리쩌허우의 독창적 안목을 드러내고 있다.

리쩌허우는 중국 미학사를 10시기 — 상고(上古), 청동, 선진, 초한,

위진, 불교 예술, 성당, 중당, 송원, 명청 — 로 나누고, 그 가운데 비교

적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네 시기를 꼽는다. 첫째는 백가쟁명(百家爭

鳴)·백화제방(百花齊放)의 선진 시대다. 둘째는 위진(魏晉) 시대로, 철리

적(哲理的) 사변의 색채를 많이 띠었고 이론 창조와 사상 해방이 두드러

졌다. 셋째는 중당에서 북송까지로, 문화와 사상의 모든 영역에서 다양

하고도 전면적인 개척과 성숙이 이루어지면서 사대부(士大夫)라는 세

속 지주가 후기 봉건사회의 기초를 공고히 다졌다. 넷째는 명대 중엽

으로, 시민 문학과 낭만주의 사조가 자본주의라는 근대 의식의 출현을

상징한다.(리쩌허우 2014, 343)

이렇게 10시기로 나눈 리쩌허우는 다시 시대를 주도한 장르에 주목

한다. 이는 각각 그 시대 예술 정신의 응결 지점이었다.(리쩌허우, 307)

이를테면 한대의 공예와 부(賦), 육조(六朝)의 조소(彫塑)와 변문(騈文),

당대(唐代)의 시가와 서예, 송원의 회화와 사곡(詞曲), 명청의 희곡과 소

설 등이 바로 그것이다. 리쩌허우는 한발 더 나아가 그 시대의 예술 정

신을 응집시켜 각 장의 표제로 삼고 있다. 상고 시대의 토템과 원시 가

무, 청동 시대의 도철(饕餮)과 종정문(鐘鼎文), 선진 시대의 시가와 건축,

초한의 이소(離騷), 위진의 풍도(風度), 불교 예술, 성당의 시가·산문·서

예, 중당의 운외지치(韻外之致), 송원 산수의 의경(意境), 명청의 시민 문

예 등등이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를 거시적으로 조감할 때 예술사회

학의 방법을 동원했다면, 시대를 주도한 장르를 분석할 때 리쩌허우는

심미심리학의 방법을 가지고 온다. 전자가 예술과 경제・정치 발전의

불균형, 그리고 예술 각 부류 간의 불균형 등에 초점을 맞추어 문예의

존재 및 발전에 내재적인 논리를 발견하는 것이라면, 후자는 고전 작

품 속에 응결된 중국인의 심미적 취향과 예술 스타일이 왜 오늘날 중

국인의 느낌과 애호에 여전히 부합하고 친밀감을 주는가에 초점을 맞

춤으로써 예술작품의 영원성의 비밀을 풀려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미의 역정』의 백미는 성당(盛唐)에 대한 분석이다. 리쩌허우는 이 시

기를 ‘낡은 것을 타파’[破舊]하고 ‘새로운 것을 수립’[立新]한 전환점으

로 파악했다. 이백(李白)과 장욱(張旭) 등에 초점을 맞추면, ‘성당’은 옛

사회 규범과 미학 기준에 대한 파괴와 돌파가 일어난 시기로서, 그 예

술적 특징은 내용이 형식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넘쳐나 형식의 어떠한

속박과 제한도 받지 않는다. 그것은 미처 형식이 확정되지 않은 모방

할 수 없는 천재성의 발로다. 한편 두보(杜甫)와 안진경(顏眞卿) 등에 초

점을 맞추면, ‘성당’은 새로운 예술 규범과 미학 기준을 확정·수립한

시기로, 그 특징은 형식을 중시하며 형식과 내용의 엄격한 결합과 통

일을 요구함으로써 학습하고 모방할 수 있는 격식과 본보기를 세운 것

이다. 전자가 낡은 형식을 돌파했다면 후자는 새로운 형식을 수립한

것이다.(李澤厚 1994a, 135) 그러기에 리쩌허우에게 성당은 이백과 장욱

의 성당과 두보와 안진경의 성당 두 종류다. 그것은 두 종류의 서로 다

른 ‘의미 있는 형식’으로, 서로 다른 사회적·시대적 내용이 각각에 간

직되어 있고 적전되어 있다. 이로써 각자의 풍격상의 특징, 심미적 가

치, 사회적 의미를 지닌다(.리쩌허우 2014, 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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