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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풍경 - 중국영화문화 1978-1998, 2006 영화진흥위원회 학술도서, 2009 대한민국학술원 우수도서
다이진화 지음, 이현복.성옥례 옮김 / 산지니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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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문화대혁명(이하 문혁)이 종결되고 2년여의 과도기를 거쳐 1978년 12월 ‘사회주의 현대화’를 구호로 내세운 덩샤오핑(鄧小平; Deng, Xiao-ping)의 개혁`개방이 시작되었다. 이후 30년 전후의 시간을 개괄하는 데 ‘포스트사회주의(post-socialism)’는 유용한 개념이다. 마오쩌둥(毛澤東; Mao, Ze-dong)의 ‘중국적 사회주의’의 극단인 문혁은 그 극복을 전제한 덩샤오핑의 ‘중국적 특색의 사회주의’ 시기에도 여전히 위력을 발휘했다.이 시기는 흔히 '개혁`개방시기'라 불렸고 그 주요한 구호는 '사회주의 셴다이화(現代化)'였다. 문화적으로는 1976년 상흔(傷痕)소설의 등장부터 '신시기(新時期)'라 부르기도 한다.

  베이징대학 중문학부(中文系)에 재직하면서 ‘문화연구(cultural studies)’를 수행하고 있는 다이진화(戴錦華; Dai, Jin-hua) 교수가 자주 쓰는 표현 중의 하나는 ‘탈주하다 그물에 걸림(逃脫中的落網)’이다. 시시포스(Sisyphus)를 연상시키는 이 말은 ‘곤경으로부터 탈출했지만 더 큰 그물에 걸린 격’인 중국의 사회`문화적 콘텍스트를 비유하고 있다. 1980년대의 ‘큰 그물’이, 문혁으로부터 탈출했지만 그 ‘문화심리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국가권력이었다면, 1990년대의 ‘큰 그물’은 전지구적 자본에 포섭된 시장이다.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은 탈식민 문화(post-colonial culture)의 현장이기도 한데, ‘안개 속 풍경’과 ‘거울의 성’은 그에 대한 상징적 레토릭이다.
『무중풍경』은 3부 1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장은 독립된 글이면서 상호 연계를 가지고 있다. 다이진화는 1978-98년의 중국영화를 해석하면서 세대(generation)`성별(gender)`도시(urban)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책을 읽노라면 마치 ‘줌업(zoom-up)’하는 카메라가 느껴진다. 1978년 이후 중국의 사회`문화적 배경이 ‘안개 속 풍경’처럼 그려지다가, 중국영화라는 파노라마에서 5세대로 좁혀지고 다시 장이머우(張藝謀; Zhang, Yi-mou)와 천카이거(陳凱歌; Chen, Kai-ge)에 초점을 맞추다가 마지막에는 화면 가득 장이머우로 채워지는 느낌이 그것이다. 장이머우는 다이진화가 감독한 작품인 이 책의 주연인 셈이다.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의 사회·문화적 콘텍스트와 중국영화라는 텍스트 사이를 오가는 다이 진화의 분석대상은 4세대부터 6세대까지다. 그 중심에 놓인 5세대는 “1982년 중국영화사에 나타난 최초의 청년촬영제작팀과 1983년 말과 1984년에 조용히 작품을 발표하여 흥미와 경이를 불러일으킨 청년창작집단”을 가리킨다. 이들의 의미는 영화사적 그것에 그치지 않는다. 문혁이라는 ‘문화적 재앙의 유복자’로서, 그들은 1980년대의 역사·문화적 ‘반성[反思]’ 운동에 참여했고 영화를 통해 당대 중국문화에 전면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중국 역사와 담론의 주체가 되었다. 그리고 그 핵심에 장이머우와 천카이거가 있다.
  저자의 표현대로 장이머우는 중국영화계의 ‘복장(福將)’임에 틀림없다. 이는 수많은 국제영화제 수상경력에서 비롯된 말이지만, 핵심은 그가 포스트사회주의 중국의 영화계와 문화계의 흐름을 잘 타 왔다는 데 있다. 초기의 자유로운 실험, 국내외적으로 적절한 시점에서의 국제영화제 수상, 국가권력의 주선율과 시장화의 이중압박에서 해외자본의 투자유치 그리고 최근의 중국식 블록버스터 제작, 2008년 베이징올림픽 총감독 등의 도정은 그를 단순한 영화감독으로 자리매김하기 어렵게 만든다. 다이진화의 장이머우론의 핵심은 이렇다. 장이머우는 ‘탈식민 문화의 잔혹한 현실’을 누구보다 잘 인지했고 세계무대로 나가기 위해서는 ‘동방적 경관(oriental spectacle)’이 필요함을 인식하여 ‘이중적 정체성(dual identity)’ 전략을 활용해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교묘하게 동방과 서방, 중국과 세계를 봉합했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장이머우의 성공이 가져온 결과는 세계로 향하는 창이라기보다는 그 시야를 가리는 거울이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대국으로 굴기(崛起)하는 중국이 아니라 서양이라는 타자에 의해 구성된 동방의 이미지였고, 서방 남성관객이 요구하는 욕망의 시선에 영합한 동방의 여인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코 중국의 본토문화일 수 없는, 상상되고 발명된 중국의 이미지인 것이다. 저자가 명명한 ‘내재적 유배’는 ‘셀프 오리엔탈리즘(self-Orientalism)’의 다른 표현이다.
  그런 점에서 천카이거는 중국영화의 또 다른 거울이다. 그가 초기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대범함과 명석함은 <아이들의 왕(孩子王)>이 1987년 깐느영화제에서 고배를 든 후 사라졌고(같은 해 장이머우는 베를린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거머쥐었다), 천신만고 끝에 1992년 <패왕별희>로 깐느영화제를 석권했지만 그것은 추락으로 얻은 구원이자 굴복과 맞바꾼 면류관이었다. 천카이거가 고심해서 재현한 중국본토문화는 탈식민문화라는 콘텍스트 안에 내재화(internalization)된 서양문화의 시점(視點)과 절묘하게 결합됨으로써 소실되어버렸다. <황토지>에서 함께 출발한 장이머우와 천카이거가, 이후 각자의 방식으로 전지구화의 지표인 ‘블록버스터’로 귀결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들은 역사와 문화의 ‘큰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성실하거나 그다지 성실하지 않은 역사의 아들”이었던 셈이다.
  페미니즘은 다이진화의의 주요 연구영역이다. 여성해방은 사회주의 중국의 커다란 성과의 하나로 일컬어지지만, 다이진화는 ‘당다이(當代)’ 중국 영화 속의 여성을 다루는 장에서, 1949년부터 1979년까지 여성해방 담론의 핵심을 무성화(無性化)로 파악한다. 중국 혁명은 여성이라는 특수성에 기초하여 양성 평등을 이뤄낸 것이 아니라 여성을 버림으로써, 다시 말해 여성을 남성화함으로써 남성과 동등하게 사회적`담론적 권력을 향유케 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에 중국에는 여성은 없고 남성만 존재했던 셈이다. 이는 또 다른 방식의 억압이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여성해방을 성취했다고 평가받았던 사회주의 중국에서, 여성은 다시 할 말을 잃고 실어증을 강박 당했으며, 여전히 국가와 남성이 주도하는 혼인 방식이 주는 구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다이 교수의 커다란 미덕은 끊임없이 텍스트와 콘텍스트를 오간다는 점이다. 그녀는 섬세한 왕복운동 속에서 누구도 보지 못하는 부분을 보아내고 아무도 말하지 못한 것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5세대, 특히 장이머우의 문화적 의미는 다이 교수의 해석을 통해 풍부하고 두터워졌다. 아쉬운 점은, 문학 작품의 영화화에서 영화는 분명 문학 원전에 빚진 부분이 있을 터인데, 그것을 변별해 논하지 않고 모두 감독의 몫으로 평가한 것이다.
  난해하기로 소문난 다이 교수의 글을 친절한 역주와 함께 ‘그대로’ 옮기려 노력한 것은 이 번역본의 미덕이다. 다만 의미가 애매한 부분이 몇 군데 눈에 띈다. 예를 들어, 번역본에서 사용된 ‘동일시’라는 용어는 ‘認同’의 역어인데, 동사적 용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identity'에 해당하는 ‘정체성’으로 번역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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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과 홍콩인의 정체성
임춘성 지음 / 학연문화사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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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2003년도 협동연구의 연구결과물이다. 연구자들은 1997년 이후 홍콩과 홍콩인 정체성의 지속과 변화라는 대주제하에 홍콩과 홍콩인 정체성을 역사, 소비문화, 장례풍습, 문학작품과 영화 텍스트 등을 통해 다각도로 조명하고자 했다. 이 책은 서론을 포함하여 3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에서는 <홍콩인 사회의 문화와 역사>라는 주제 하에 이 책의 전체 서론에 해당되는 내용으로 “서론: 1997년 7월 1일 이후 홍콩과 홍콩인의 정체성,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글과 “홍콩인 사회의 생성과 변화”를 다룬 글을 함께 실었다. 전자는 1997년 이후 홍콩과 홍콩인 정체성의 문제를 다룰 때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측면이 갖는 문화적 의미를 홍콩 사회라는 맥락에서 다룬 글이며, 후자는 역사적 관점에서 홍콩인 사회의 형성과 변화과정의 의미를 분석한 글이다.

  제2부는 <홍콩인의 문화적 정체성과 장례 풍습>이라는 주제 하에 3개의 글이 포함되어 있다. “홍콩인의 문화적 정체성의 지속과 변화: 전통 사회조직의 기능과 의미를 중심으로”에서는 홍콩인의 문화적 정체성 문제를 경제적, 사회적 측면, 특히 전통 사회조직의 기능과 의미라는 측면에서 홍콩인의 문화적 정체성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1997년 이후 홍콩인 정체성의 지속과 변화: ‘홍콩인 정체성 만들기’의 문화적 의미”라는 글은 홍콩인의 문화적 정체성 문제를 ‘홍콩인 정체성 만들기’의 정치경제학과 그 문화적 의미를 통해 1997년 이후 홍콩 경제의 변화에 따라 홍콩인 정체성의 의미가 가변적이고 유동적이라는 점을 기술, 분석한 글이다. 이를 통해 홍콩인 정체성의 문제가 정치경제적, 문화적 맥락에 따라 매우 다양하고 복합적인 양상을 띠고 전개될 수 있음을 다양한 사례를 통해 밝히고 있다. “장례 풍습의 변천을 통한 홍콩인의 의식변화”는 홍콩의 장례 풍습에 대한 민족지고고학적 접근방식을 활용하여 홍콩인들의 장례 풍습에 대한 의식 또는 인식이 어떻게 변화되었으며, 그 의미는 무엇인가를 분석한 글이다. 

제3부는 <텍스트를 통해본 홍콩인의 정체성>의 문제를 다룬다. 여기에는 모두 3편의 글이 포함되어 있는데, “홍콩영화를 통해본 홍콩인의 문화적 정체성-<동사서독>과 <차이니즈 박스>를 중심으로”라는 제목의 글은 홍콩인의 문화적 정체성 문제를 홍콩영화, 그 중에서도 특히 <동사서독>과 <차이니스 박스>라는 영화를 통해 조명한 글이다. 홍콩인의 정체성이 영화 속에서 어떻게 재현되는가의 문제 제기를 통해 홍콩인 정체성의 유동적이고 가변적인 특성을 강조한다.

“홍콩문학의 정체성과 탈식민주의”는 홍콩문학과 탈식민주의와의 상관성에 주목한 글이다. 홍콩사회의 변화가 홍콩문학에 미친 영향을 논의하면서 홍콩문학의 정체성이 홍콩의 사회변화, 특히 탈식민적 사회 분위기의 형성과 어떠한 관련을 맺고 있는가의 주제를 텍스트를 통해 분석하고 있다. “홍콩영화에 재현된 홍콩인의 정체성과 동남아인의 타자성”은 먼저 웡카와이(王家衛)와 프룻 찬(陳果)의 영화를 통해 홍콩인의 정체성과 홍콩 뒷골목의 민족지의 모습을 고찰한 후, 홍콩인들이 바라보는 동남아인의 모습은 어떠한 것인가를 분석한다. 홍콩영화 속에서 동남아인은 하나의 타자로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홍콩인의 동남아인에 대한 타자화는 영화 텍스트의 재현 방식을 통해 재생산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협동연구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연구성과물의 출판 이외에 가외의 소득이었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문학, 역사학, 고고학, 문화인류학 전공자들이 홍콩이라는 하나의 지역과 정체성 문제라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각 전공의 고유한 영역과 분야의 이론과 접근방법을 활용하여 공통의 주제의식으로 수렴되어 가는 과정 자체가 거의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학제간 연구의 실마리라도 발견한 것 같은 기쁨을 주었음을 이 자리를 빌어 고백하고자 한다. 학제간 연구 또는 공동연구의 이상은 여전히 높아 가야할 길이 멀게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번 홍콩연구의 결과를 한권의 책으로 엮어내는 과정에서 경험한 즐거움을 통해 조금이나마 가까이 갈 수 있는 가능성은 존재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확인한 것 자체가 공동작업의 소득이라면 소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적지 않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다. 우선 불원천리 남도까지 달려와 목포대 아시아문화연구소의 <동아시아 학술포럼>과 <홍콩 콜로키엄>에서 좋은 글을 발표해주셨던 인천대의 장정아 교수와 백석대의 유영하 교수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마음을 한다. 아울러 현지조사 과정에서 여러 가지 협조를 아끼지 않았던 홍콩대학의 웡슈룬(Wong, Siu-lun, 黃紹倫) 교수와 추인와(Chu Yin-wah: 朱燕華) 교수, 홍콩중문대학의 매튜(Gorden Mathews) 교수와 에릭 마(Eric Ma) 교수, 그리고 링난(嶺南)대학의 렁핑콴(Leung, Ping-kwan: 梁秉鈞) 교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끝으로 홍콩 관련 도서가 아직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 독서계의 상황을 무릅쓰고 출판을 흔쾌하게 수락해준 학연문화사의 권혁재 사장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이 책을 깔끔하게 다듬어준 편집부 식구들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홍콩의 역사와 사회, 문학과 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모든 이들의 관심과 질정을 바라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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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현대문학과의 만남 - 중국현대문학@문화 1
한국 중국현대문학학회 지음 / 동녘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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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한국인에게 중국은 ‘선택’이 아닌 ‘필수’로 다가오는 거대한 텍스트이다. ‘중국현대문학@문화’ 시리즈는 현대 중국에 대한 심층적이고 대중적인 이해를 목적으로 기획되었다. 그동안 ‘한국 중국현대문학학회’는 여러 권의 연구서를 내면서 결실을 맺은 전문적인 연구 결과들을 일반 독자들과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를 고민해왔다. 학회에서 ‘중국현대문학@문화’ 시리즈를 처음 기획한 것은 2004년 하계수련회에서였다. 그 해 7월에 편집출판위원회를 꾸렸고, 그 뒤 2005년 11월까지 매월 한 차례씩 만나 목차와 필자를 조정하는 과정을 거쳤다. 2005년 7월에 필자들에게 원고를 의뢰했고, 이제 그 결과물을 내놓게 되었다. 기획부터 꼬박 두 해가 걸린 셈이다.

위원회의 논의를 거쳐 첫 기획으로 ‘중국현대문학’, ‘영화로 보는 중국’, ‘중국영화’, ‘중국현대문화’ 네 분야를 선정하고, 각 권의 기획위원을 위촉했다. 기획위원이 주도하여 각 권의 목차를 확정한 뒤 집필을 희망하는 회원들에게서 신청을 받았다. 신청을 토대로 위원회에서 될 수 있으면 필자가 중복되지 않도록 집필위원을 선정했다. 이 시리즈가 급변하는 현대 중국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국에서 중국현대문학이 독립적인 학문 분야로 인정받은 1980년대부터 그에 관한 수많은 저서와 번역서가 출간되었다. ≪중국현대문학과의 만남≫은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각 분야 전문가들이 깊이를 담보하면서도 대학생 및 일반 독자들과 공유할 수 있도록 기획되었다. 이를 위해 서른두 명의 전문가가 공동 집필에 참여했다.

1부는 시기별·지역별 문학사론이다. 먼저 ‘근대 전환기의 중국문학’에서는 그동안 고대문학으로 취급하던 ‘진다이(近代)’ 부분을 전환기로 읽어내면서 현대문학과의 관련성을 강조했다. ‘5·4문학혁명’, ‘좌련’, ‘항전’ 등은 1920년대, 1930년대, 1940년대로 나누어, 문학과 사회의 관계, 즉 문학이 혁명․이데올로기․전쟁 등과 직면할 때 어떤 모습을 보여주었는지 그에 대한 사례를 제시했다. 사회주의 시기(1949~1976)를 하나로 묶은 것은 사회주의 개조 및 건설이라는 시기적 지속성을 중시한 기획 의도를 반영한 결과이다. ‘문화대혁명’이 종결되고 시작된 ‘신시기’는 1980년대의 과도기를 거쳐 1990년대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새로움을 획득한다.

2부와 3부는 장르론과 작가론이다. 전자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시, 소설, 산문, 희곡 네 분야로 나누었다. 장르별 큰 흐름과 작가론에서 다루지 못한 주요 작가들을 살펴볼 수 있도록 안배했다. 후자에서는 중국현대문학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루쉰부터 최근 작가 왕숴까지, 그리고 타이완과 홍콩의 작가 천잉전, 위광중, 진융을 배치했다. 절망과 좌절을 깊이 맛보았으면서도 그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은 나그네 루쉰, 개인의 자유를 추구한 위다푸와 저우쭤런, 로맨티스트 쉬즈모, 불굴의 여성 (혁명)작가 딩링, 대지의 시인 아이칭, 무정부주의자 바진, 인성을 노래한 선충원, 중국현대극의 개척자 차오위, 근현대 중국의 비극을 대표하는 후펑, 저항시인 베이다오, 지식인 작가 왕멍, 도시통속소설 작가 장아이링, 상저우(商州) 지방문화의 뿌리를 추구하는 자핑와, 사회주의 체제에서 일탈한 신세대를 묘사한 왕숴, 중국인의 오랜 숙원인 노벨상을 수상했으면서도 중국인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망명 작가 가오싱젠, 무협소설을 통해 새로운 중국을 상상한 홍콩작가 진융, 타이완이라는 냉전의 잔해 속에서 고뇌한 지식인 작가 천잉전, 그리고 현실과 상상을 넘나들며 타이완을 노래한 시인 위광중.

마지막으로 에필로그에서는 서유럽의 모던을 참조 체계로 삼아 ‘동아시아의 근현대’의 가능성을 점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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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대사상사론 한길그레이트북스 71
리저허우 지음, 임춘성 옮김 / 한길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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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춘추(春秋) 전국(戰國) 시기와 ‘근대(近代)’ 80년(아편전쟁~‘5․4’)은 “5․4 이전 중국의 수천 년의 사상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연구할 가치가 있는 두 시기”(李華興 1988, 『中國近代思想史』, 1쪽)라는 언급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춘추 전국 시기에 중국 사상의 원류(源流)라 할 수 있는 유가(儒家)와 도가(道家) 등의 사상이 정형화(定型化)되었다면, ‘근대’ 80년은 효력을 상실하여 무용지물이 되다시피 한 전통 사상을 대체할 새로운 사상체계의 수립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전통적 사상체계와 새로운 서양의 사상체계가 그들 앞에 놓여 있었고, 그들은 각자 취사선택하였다. 그들의 취사선택은 개인의 기질과 취향에 영향을 받았지만, 그 속에는 시대적 과제와 맞물린 역사의 흐름이 내재해 있었다.

‘전통의 창조적 계승’과 ‘외래의 비판적 수용’이라는 과제는 어느 시공간에서건 항상 함께 작동해야 할 기제(機制)이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었다. ‘전통의 지속’이라는 측면에서 세계사에서 다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중국의 경우 대규모의 외래문화 수용은 두 차례 있었다. 한 번은 인도 불교문화의 수용이었고 또 한 번은 서양문화의 수용이었다. 인도 불교문화의 수용은 한당(漢唐)시대의 거대한 문화적 사건이었다. 그것이 중국의 철학과 문학예술에 미친 영향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이 시기의 중국 문화는 가히 세계 최고 수준이었기 때문에 외래문화에 대해 관용적이고 주동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었다. 위진(魏晉)시대의 현학(玄學)의 흥성, 불경 번역 및 그 번역과정에서의 한자의 특성에 대한 인식, 그에 기초한 성운학(聲韻學)의 발달과 당시(唐詩)에 미친 영향, 불교 포교를 위해 구상된 변문(變文), ‘둔황(敦惶)문화’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인도 불교문화에 대해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대체로 무리없이 수용되었고 ‘중국화’되어 ‘중국적 특색을 지닌’ 선종(禪宗)으로 발전시켰으며, 송대(宋代)에는 유학(儒學)과 불학(佛學)을 접목시켜 성리학(性理學)이라는 동양문화를 탄생시켰다.

이에 반해 ‘근대’로의 이행기에 들어온 서양문화는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과 함께였다. 그러므로 불교문화에 대해서 대체로 환영과 수용의 태도를 취했던 중국은 서양문화에 대해서는 우선적으로 거부와 저항의 태도를 택하였다. 2천년이 넘도록 자신을 세계의 중심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문화를 세계 최고라고 여기던 중국이 서양문화에 대해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완강한 거부의 태도를 취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류짜이푸(劉再復) 등은 이런 심리상태를 ‘천조심태(天朝心態)’라고 하였고, “서방 사상과 문화적으로 접촉하고 사회가 불가피하게 근대화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근대 중국인의 천조심태가 강렬한 도전을 받았다”(劉再復․林崗 2002,『傳統與中國人』, 251쪽)고 평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서양문화에 대한 거부와 저항은 명말 천주교가 전래된 이래 ‘5․4’시기까지 모두 5차례에 걸쳐 나타났다고 한다. ‘명말청초의 사정(邪正)의 논쟁’, ‘아편전쟁 및 양무운동 시기의 이하(夷夏)의 논변’, ‘무술유신 전후의 중학과 서학의 논쟁’, ‘5․4 전후의 동서방 문화 문제의 논전’, 그리고 ‘중국은 어떤 문화를 채용해야 하고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에 관한 논전’이 그것이다. 그 가운데 이 글에서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중학과 서학의 논쟁, 즉 ‘중체서용’설과 관련된 부분이다.



      2.



리쩌허우(李澤厚)는 ‘근대(近代)’ 사상사를 논하면서, 구제도를 비판하며 봉건 지주의 정통 사상과 대립하였던 세 가지 선진적 사회사조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것들은 서로 다른 역사시기에 처하고 세 가지 서로 다른 유형에 속하며 세 가지 서로 다른 특색을 가지고 있으면서 상호 전후 연속되어 있고 지양(止揚)하면서 보다 높은 단계로 매진하면서 중국에서의 맑스주의의 전파와 발전을 위해 길을 청소하였다. 이 세 가지 시대사조는 ‘태평천국 농민혁명 사상’과 ‘개량파 자유주의의 변법유신 사상’ 그리고 ‘혁명파 민주주의의 삼민주의’ 사상이다.(『中國近代思想史論』, 457쪽)


중국 ‘근대’의 사조․유파를 논할 때, 완고파(또는 보수파)-양무파-유신파-혁명파의 흐름에 비추어보면, 리쩌허우의 ‘개량파 자유주의의 변법유신 사상’은 궁쯔전(龔自珍)을 선구자로 삼은 광범한 의미의 ‘유신파’에 해당함을 알 수 있다. 완고파에 대한 문제 제기가 태평천국 운동으로 드러났다면, 양무파는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하면서도 그들의 문제 제기를 일정 정도 수용하였다 할 수 있다. 그것이 양무운동으로 표현되었고, 그 양무운동이 한계에 달했을 때 양무파 내부에서 개량파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개량파 역시 우파, 중도파, 좌파로 나눌 수 있으며 훗날 급진 좌파가 점차 개량파에서 이탈하여 혁명파로 전환하였다.

한 가지 재미있는 현상은, 유신파의 변법사조가 시대 사상의 주류로 나타났을 때 양무파는 완고파와 연합하여 유신파에 반대했다는 사실이다. 사실 “완고파는 맹목적으로 배외하고 우매하게 보수적이었다. 그들의 사상과 주장은 당시 지배적 지위를 점하던, 대다수 지주와 사대부들이 신봉하던 사회 이데올로기였다.”(『中國近代思想史論』, 79쪽) 그렇지만 변법 주장의 고조 속에서 완고파도 마지못해 각종 개혁 조치에 동의하고 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 양무파는 완고파를 자신의 진영으로 아우르면서 거짓 ‘변법’ 주장을 제창하였다. 그리하여 유신파 대 양무․완고파라는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그 속에서 유신파의 변법 방안과 양무파의 가짜 변법 방안이 투쟁하였고, 유신파의 민권 평등, ‘탁고개제(托古改制)’ 등 계몽주의적 사회 정치적 이론․사상과 봉건주의 통치자의 ‘중체서용(中體西用)’설이 대립하였다.

‘중체서용’이란 ‘중학위체(中學爲體), 서학위용(西學爲用)’의 약칭으로, 아편전쟁 이후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는 서양문화에 대한 중국의 대응 논리라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중학(中學)은 유교 경학(經學)과 그것에 기초한 봉건 예교(禮敎)를 가리키고, 서학(西學)은 과학기술->정치 제도->사상 의식의 순차적이고 층위적인 단계를 거치는 서양문화를 가리킨다. 그것은 중국의 전통을 본체로 삼되, 이전에는 업신여기던 서양의 정신적․물질적 문화를 부분적으로 수용하겠다는 태도였다. 체(體)와 용(用)이라는 가치 평가를 염두에 둔다면, 중체서용은 중화주의 또는 중국중심론의 변형이라 할 수 있다.

최초로 중체서용을 주장한 동시에 그 대표자로 평가되는 장즈둥(張之洞)의『권학편(勸學篇)』은 광쉬(光緖) 황제로부터 “논리 전개가 공정하고 통달하였으므로 학술과 인심에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라 칭찬 받았고 그로 인해 “조정의 힘을 빌려 전파되고 빠르게 국내에 퍼졌으며”(梁啓超) 그 영향이 매우 넓었던, 양무파의 거짓 변법론의 전형적인 대표작이었다. 장즈둥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다시 살아난다 하더라도 어찌 변법의 그릇됨을 논의하겠는가?”(張之洞, <變法第七7>,『勸學篇外篇』)라고 하면서 자신이 변법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각종 주장을 내놓음으로써 자신도 진보적인 변법유신주의자임을 드러내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한 ‘변법’의 특징은, “몇몇 지엽적인 주장을 제출하되 절실한 의의가 있는 당면 변화 문제의 주요 관건이었던 의회 개설과 정치 법률 제도의 개혁을 근본적으로 반대하였고 당면한 구체적인 실제 요구(厘金 폐지, 관세 부가 등)에 대해 가능한 언급을 회피하였다”(『中國近代思想史論』, 80쪽)는 점에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유신파 인사들은 이를 강렬하게 비판하였다. 특히 허치(何啓)와 후리위안(胡禮垣)은 별도로 책을 지어 조목조목 반박함으로써 그 지배 계급적 입장의 본질을 폭로하였다.

장즈둥은 변법유신의 구체적 문제에 대해서는 유신파를 가장하는 속임수를 썼지만, 보다 관건적이었던 유신파의 민권 평등의 이론․사상에 대해서는 진보적인 사상을 정치적으로 박해하고 이론적으로 공격함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폭로하였다. 사실 양무파는 부르주아 민권평등 사상을 두려워한 점에서 완고파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들은 이 사상이 인민을 선동․현혹시킴으로써 더 이상 충효와 절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게 하고 기강이 흐트러져 노예와 병졸들이 귀족과 관리의 위에 군림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통치를 수호하려면 수천 년간 내려온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운(君君臣臣父父子子)” 사회 질서와 사회 의식이 동요되지 않도록 진력해야 하였다.


중학은 내학이고 서학은 외학이며, 중학은 심신을 다스리고 서학은 세상사에 호응한다. 모든 것을 경문에서 찾을 필요는 없지만 반드시 경의(經義)에 어그러지지 말아야 한다. 그 마음이 성인의 마음이고 성인의 행동을 행하며 효제와 충신을 덕으로 삼고 군주 존중과 백성 비호를 정(政)으로 삼는다면, 아침에 자동차를 운전하고 저녁에 철로를 달리더라도 성인의 제자됨에 해가 없을 것이다.(張之洞, <會通第十三>,『勸學篇外篇』)


이것이 바로 유명한 양무파의 ‘중체서용’설이다. 그것이 의식적인 강령으로 제출된 것은 본래 캉유웨이(康有爲) 등의 민권평등의 이론을 겨냥한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와 이후, 심지어 오늘날까지도 커다란 영향을 끼쳤지만, 당시부터 유신파 사상가들의 소박하면서도 신랄한 조소를 만났다.


체용(體用)은 한 사물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소의 본체가 있으면 무거운 짐을 지는 작용이 있으며, 말의 본체가 있으면 멀리 달리는 작용이 있다. 소를 본체로 삼고 말을 작용으로 삼는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중학과 서학의 다름은 중국인과 서양인의 면목만큼이나 다르고 억지로 비슷하다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중학은 중학의 체용이 있고 서학은 서학의 체용이 있다. 그것을 분별하면 함께 설 수 있지만 그것을 합하면 둘 다 망한다.(嚴復)


옌푸가 비판하는 기준은 체용불이(體用不二)의 관점이다. 흔히 양무파의 핵심이라고 하는 ‘중체서용’설은 유신파가 시대의 주류가 된 시점에 유신파의 민권평등 사상을 비판하기 위해 장즈둥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것은 표면적으로 유신파가 제기하는 변법의 내용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하는 듯이 보였지만, 사실상 핵심적인 측면에서는 그것을 거부하였다. 다시 말해, ‘본체’와 ‘작용’을 나눌 수 없고 부르주아 민권평등과 변법유신이 일치한다는 유신파의 주장과는 달리, 민권평등은 반대하되 선박과 철도는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천연론(天演論)』을 번역하고 서양의 경험론 철학을 소개하였으며 ‘자유를 본체로 삼고 민주를 작용으로 삼았다(以自由爲體, 以民主爲用)’라는 평가(『中國近代思想史論』, 269~276쪽)를 받고 있는 옌푸(嚴復)는 체용불이의 관점에서 장즈둥의 ‘중체서용’을 예리하게 비판하였던 것이다.

리쩌허우는 이 시기의 사상사적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캉유웨이와 탄쓰퉁(譚嗣同) 등의 ‘탁고개제(托古改制)’, ‘삼세대동(三世大同)’의 사상은 ‘중체서용’ 사상과 얼마나 본질적인 차별이 있었는지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전자는 ‘공자의 도’라는 성인의 외투 속에 성도(聖道)와 괴리되는 일련의 신선한 부르주아 사상을 주입하였고(이는 거꾸로 ‘西體中用’이라 할 수 있다), 후자는 오히려 봉건 성교를 사력을 다해 수호하기 위해서 서양의 황금으로 도금하여 강화 보호하였다. 그러므로 ‘중체서용’ 이론이 가장 일찍 사상 영역에 반영되어 봉건체제라는 강시(僵尸, 즉 ‘본체’)를 완고하게 끌어안고 놓지 않았다.(『中國近代思想史論』, 83쪽)


역사적 의미에서의 중체서용설은 ‘천조심태’라는 무의식의 표현이자 변형된 중국중심론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유신과 개량이 주류가 된 시대에 봉건 예교를 사수하기 위해 서양의 문화를 빌어 도금함으로써 거짓 변법을 주장하던 사람들의 주장이었던 것이다. 그 대표인 장즈둥의 ‘중체서용’의 본질은 유가의 기본 학설을 따르고 유학과 공맹(孔孟)의 기본정신에 충실하고자 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후술하겠지만, 이는 중국 ‘문화심리구조의 보수성’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중체서용론을 ‘중학과 서학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그것을 외래문화 수용과 연계시킨 민두기의 논의는 흥미롭다. 민두기는 <중체서용론고>에서 ‘중체서용’론에 대한 일반적인 이해에 의문을 표시하면서 그것을 양무파와 유신파를 아우르는 논리로 확장시키고 있다. 그에 의하면 “중체서용론은 체계를 달리하는 서양문화를 받아들이기 위한 것으로서 청말(淸末) 사상사의 경우 이른바 윤상(倫常)을 강조하는 양무론이나 공교(孔敎)를 강조하는 변법론을 다 포함해야”(閔斗基 1985,『중국근대개혁운동의 연구』, 52쪽)한다고 하면서, 중학과 서학의 관계맺기라는 관점에서 중체서용론을 이해해야 한다고 하였다. 중학과 서학을 각각 독립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서학이 물밀듯이 들어오던 시기에 중학과 서학을 연결지으려는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中)’이라 불리우는 자기 주체의 확인 및 기존가치질서의 보존, 서양문물의 수용을 연결시키고자 한 것이 중체서용론인데, ‘중’과 ‘서’의 관계는 체용(體用)이란 철학적 용어가 갖고 있는 엄격한 의미를 의식하고 사용된 경우는 별로 없고 거의가 선후(先後), 주보(主輔), 심지어 양(量)의 다소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 중요한 것은 ‘서’의 내용이며 어떻게 ‘서’를 수용할 것인가 하는 방법이었지, 체용의 논리관계가 아니었던 것이다.”(閔斗基 1985, 52쪽) 그러므로 그것은 “이질적 문화를 받아 그것을 수용해야 하는 상황에서 거의 보편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논리구조”(閔斗基 1985, 53쪽)라고 맺은 결론은 그야말로 탁견(卓見)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보면 중체서용론은 19세기 중엽부터 본격화된 중서 문화 교류에 대해 중국인들이 취한 외래문화의 수용 논리라 할 수 있다. 오로지 중화만을 고집하고 그밖의 것은 외이(外夷)로 규정하여 수용하지 않았던 기존의 관례를 염두에 둔다면, 중체서용론은 “서학, 서구문화가 중학, 중국문화와 필적하는 체계적 학문 또는 문화의 하나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임을 뜻한다.”(조병한 1997,「19세기 중국 개혁운동에서의 ‘中體西用’」)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체서용론은 이 시기 “(중학과 서학의-인용자) 모순의 틈을 비집고 서학의 수용을 위한 공간을 마련한 것이며, 따라서 이 시기의 그 실천적 의의는 ‘중체’보다는 오히려 ‘서용’에 있는 것”(李時岳 胡濱 1988,『從閉關到開放: 晩晴洋務熱透視』)이라는 평가까지 나올 수 있다. 예를 들어, 캉유웨이(康有爲)의 ‘탁고개제(托古改制)’ 사상은 이 시기 중체서용론의 대표적인 것으로, 중학의 대표자인 콩즈(孔子)를 빌어 그도 제도를 개혁하려 했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서유럽의 부르주아 자유주의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물론 캉유웨이 등의 사대부 계급적 한계를 무시해서는 안되겠지만, 캉유웨이의 ‘탁고(托古)’는 ‘개제(改制)’를 위한 전술․전략으로 이용되었던 점은 중세서용의 실천적 의의를 ‘서용(西用)’에 두고 있다는 주장의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으로 중체서용론을 중학과 서학의 관계맺기, 즉 자신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외래를 수용하는 논리로 파악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체(體)와 용(用)이라는 외피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중학과 서학에 대등한 지위를 부여하면서 상호 배척하기도 하고 상호 조화되기도 하는 것으로까지 확대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확대 해석이 가능하다면, 중체서용론은 전환기 중국의 ‘계승(繼承)과 수용(受容)의 논리(論理)’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즉 완고한 중화사상의 억압 아래 새로운 서양의 문물을 들여오기 위해 전술적으로 체용론의 외피를 입혀 반발과 압제를 완화시키면서 중학과 서학의 관계맺기를 탐색하는 ‘근현대화(近現代化)와 민족화(民族化)의 시대적 패러다임’으로서의 가능성도 부여할 수 있겠다.



      3.



민두기와는 다른 각도에서, 리쩌허우는 ‘중체서용론’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서슴지 않는다. ‘중학’이 가지는 강고한 전통의 힘이 ‘서학’을 뒤덮은 것이 근현대 중국의 역사과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그러므로 ‘문화심리구조’와 ‘실용이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전통을 재해석하면서 역으로 ‘서체중용’을 내세운다.

리쩌허우는 <중국인의 지혜 시탐(試探中國人的智慧)>에서 ‘자아의식의 반사사(反思史)’라는 전제 아래, “중국 고대 사상에 대한 스케치라는 거시적인 조감을 거쳐서 중국 민족의 문화심리구조의 문제를 탐토(探討)하는 것”(『中國古代思想史論』, 294쪽)을 자신의 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사상사 연구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인간들의 심리구조 속에 침전되어 있는 문화전통으로 깊이 파고들어 탐구하는 것이다. 본 민족의 여러 성격 특징(국민성, 민족성) 즉 심리구조와 사유모식을 형성하고 만들고 그것들에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한 고대 사상의 관계를 탐구하는 것이다.”(『中國古代思想史論』, 295쪽) 리쩌허우는 바로 그런 과정을 거쳐 중국의 지혜를 발견하고자 한다. 중국의 지혜란 “문학, 예술, 사상, 풍습, 이데올로기, 문화현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그것은 “민족의식의 대응물이고 그것의 물상화이자 결정체이며 일종의 민족적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의 ‘지혜’의 개념은 대단히 광범하다. “사유능력과 오성”, “지혜(wisdom)와 지성(intellecture)”을 포괄하되, “중국인이 내면에 간직한 모든 심리구조와 정신역량을 포괄하며, 또 그 안에 윤리학과 미학의 측면, 예컨대 도덕자각, 인생태도, 직관능력 등을 포괄한다.” 중국인 사유의 특징은 바로 이 광의의 지혜의 지능구조와 이러한 면들이 서로 녹아 섞인 곳에 존재한다는 것이다.(『中國古代思想史論』, 295쪽)

지혜의 개념은 그의 또 다른 핵심어인 ‘문화심리구조’와 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화심리구조’는 리쩌허우의 학술 체계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의 하나다. 그것은 유가학설을 대표로 하는 전통문명과 더불어 이미 일반적인 현실생활과 관습․풍속 속에 깊숙하게 침투하여, 구체적인 시대나 사회를 초월하는 것이다. 그것은 ‘가정 본위주의’, 즉 ‘혈연적 기초’에 기원을 가지고 있고, 소생산 자연경제의 기초 위에 수립된 가족 혈연의 종법제도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혈연 종법은 중국 전통의 문화심리구조의 현실적인 역사적 기초이며, ‘실용이성’은 중국 전통의 문화심리구조의 주요한 특징이다. 황성민은 문화심리구조를 방법론의 총합으로 본다. “구조주의적 문화인류학의 성과를 받아들이고, 칸트의 선험적 인식론과 피아제의 발생인식론 등을 역사적 유물론과 결부시켜 이해하고 해석한 이론도 수용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니덤 이후 중국철학연구의 중요한 방법으로 도입된 유기체이론 및 현대과학이론의 하나인 체계이론 등 다양한 분야를 하나의 관점에서 종합하여 제기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황성민 1992,「전통문화에 대한 반성과 서체중용론」,『현대중국의 모색 - 문화전통과 현대화 그리고 문화열』, 377쪽). 또한 실용이성은 이렇게 해설한다. “실용이성(혹은 실천이성)은 경험적인 실용성을 중시하는 이성이다. 이성이라고 해서 감성적인 것을 전혀 도외시하지 않고 감성의 지나침과 모자람을 적절히 조절하는 작용도 한다. 따라서 이 실용이성은 중국인이 광신적인 종교에 빠지거나 현실을 허무적인 것으로 보지 않게 하여 자기 생존을 유지케 하는 방법이자 정신이 되었다.”(황성민 1992, 378쪽).

‘실용이성’은 혈연(血緣), 낙감문화(樂感文化), 천인합일(天人合一)과 함께 중국의 지혜의 하나이다. 혈연이 중국 전통사상의 토대의 본원이라면, 실용이성은 중국 전통사상의 성격상의 특색이다. 그것은 선진(先秦)시기에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선진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은 당시 사회 대변동의 전도와 출로를 찾기 위해 제자들을 가르치고 자기 주장을 펼쳐, 상주(商周) 무사(巫史)문화에서 해방된 이성을, 그리스의 추상적 사변이나 인도의 해탈의 길이 아니라, 인간 세상의 실용적 탐구에 집착하게 하였다. 장기간의 농업 소생산의 경험론은 이런 실용이성을 완강하게 보존되게 촉진한 중요한 원인이었다. 중국의 실용이성은 중국 문화, 과학, 예술의 각 방면과 상호 연계되고 침투되어 형성, 발전하고 장기간 지속되었다. 중국의 실용이성은 중국의 4대 실용문화인 병(兵), 농(農), 의(醫), 예(藝)와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다. 병, 농, 의, 예는 광범한 사회민중성과 연관되어 있을 뿐 아니라 생사(生死)와 관련된 엄중한 실용성과 관련되어 있고 아울러 중국 민족의 생존과 직접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중국 실용이성의 전통은 사변이성의 발전을 저지하였을 뿐 아니라 반(反)이성주의의 범람을 배제하였다. 그것은 유가사상을 기초로 삼아 일종의 성격-사유 패턴을 구성하여 중국 민족으로 하여금 일종의 각성하고 냉정하면서도 온정이 흐르는 중용(中庸) 심리를 획득하고 승계(承繼)하게 하였다.(『中國古代思想史論』, 301~302쪽)

중국의 실용이성은 불학을 수용할 때 “감정적인 고집에 사로잡히지 않고, 기꺼이 그리고 쉽사리 심지어는 자기와는 배척되는 외래의 사물까지도 받아들”(『中國現代思想史論』)이게 하였고, ‘5․4’시기에 “다른 민족의 문화에서는 나타난 적이 없었던 종류의 전반적인 반전통적 사상․정감․태도와 정신”이 나타나게 하여 “중국 현대의 지식인들은 아무런 곤란 없이 마르크스를 공자 위에 올려놓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러한 전반적인 반전통적 심태는 바로 중국 실용이성 전통의 전개이기도 하다.”(『中國現代思想史論』)

그러나 이 ‘문화심리구조’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직관적이고 원시적이며 미성숙한 우주론 체계모델(앞의 오행론 체계모델)이 그곳에 자리잡으면서 완성되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고 본다. 이 우주론 체계모델은 반복적이며 변동이 거의 없는 농업소생산(순환성), 자급자족이라는 폐쇄적인 자연경제(폐쇄성), 강고한 종법혈연의 규범(질서성) 등을 중국사회에 장기적으로(현재까지) 지속케 하는 원인이 되었다.(황성민 1992, 380쪽)

문화심리구조는 전통의 다른 표현이다. 그것은 “때로는 전통의 우량한 정신이 새로운 사회로의 진입에 활기를 불어넣고 때로는 전통의 열등한 정신이 이를 저해하는 순환적 과정이었지만 결국 이러한 움직임이 귀착하는 곳은 문화심리구조의 보수성이었다.”(황성민 1992, 381쪽) 그러기에 우리는 ‘옛날부터 가지고 있었다(古已有之)’라든가, ‘선왕을 모범으로 삼는다(法先王)’ 라는 등의 교조에 얽매어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개인적인 주관성의 범위를 벗어나 사회의 경제, 정치, 문화라는 복잡한 관계 속에서 형성․유지”되어와 “중국인이 서양 내지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약”(황성민 1992, 388쪽)해왔다는 점이다. 이 점을 해결하기 위해 리쩌허우는 새로운 대안으로 ‘서체중용’을 제시하게 된다.


만일 근본적인 ‘체’는 사회 존재, 생산양식, 현실생활이라고 인정한다면, 그리고 현대적 대공업과 과학기술 역시 현대 사회 존재의 ‘본체’와 ‘실질’이라고 인정한다면, 이러한 ‘체’ 위에서 성장한 자아의식 혹은 ‘본체의식’(혹은 ‘심리본체’)의 이론 형태, 즉 이러한 ‘체’의 존재를 낳고 유지하고 추진하는 ‘학’이 응당 ‘주’가 되고, ‘본’이 되고, ‘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물론 근현대의 ‘서학’이며, 전통적인 ‘중학’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에서 여전히 ‘서학을 체로 삼고 중학을 용으로 삼는다’라고 다시 말할 수 있는 것이다.(『中國現代思想史論』)


맑스주의, 과학기술 이론, 정치․경제관리이론, 문화이론, 심리이론 등 갖가지 다른 사상․이론․학설․학파도 포함한 서학을 체로 삼고, 중국의 각종 실제상황과 실천활동에 어떻게 적용하고 응용하는가 하는 것을 용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리쩌허우가 중체서용론을 검토하면서 우려한 것은, 모든 ‘서학’이 중국의 사회존재라는 ‘체’, 즉 봉건적인 소생산적 경제기초와 문화심리구조 및 실용이성 등의 ‘중학’에 의해 잠식될 가능성이었다. 중국 근현대사의 진행과정에서 그것은 사실로 판명되었다. 태평천국운동이 서유럽에서 전래된 기독교의 교리를 주체로 삼고 중국 전통 하층사회의 관념․관습을 통해 그것을 응용한 것으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중체서용’이었다. 이때의 ‘중학’은 전통사회의 소생산 경제 기초 위에서 자라난 각종 봉건주의적 관념․사상․정감이었다. 이 때문에 여기서의 ‘서학’은 한꺼풀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농민전쟁은 그 자체의 법칙을 가지고 있으며, 홍슈취안(洪秀全)이 들여온 서유럽의 기독교는 그 ‘중국화’ 속에서 합법칙적으로 ‘봉건화’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는 사회주의 혁명과정에서 맑스주의를 ‘중국화’하여 ‘중국적 맑스주의’ 또는 ‘중국적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로 바꾼 것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4.



우리가 특정한 역사 사건을 고찰할 때, 당연히 사건의 역사적 맥락과 더불어 보편적 논리로의 승화 가능성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중국 근현대의 역사과정에서 흔히들 양무파의 핵심 주장이라고 알려진 ‘중체서용’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것이 명확하게 구호로 제창된 역사적 맥락은 캉유웨이 등의 유신파의 민권평등 이론을 비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범위를 확대해 보면, 아편전쟁 전후부터 본격화된 외래 수용의 문제는 수많은 선각자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고, 그들은 여러 가지 차원에서 서학을 학습하는 문제를 고민하였다. 그들이 관심을 가지고 고민했던 문제의식을 우리는 ‘중체서용적 사유방식’이라 개괄할 수 있을 것이다. 웨이위엔(魏源)의 ‘오랑캐의 장기를 배워 오랑캐를 제압하자(師夷長技以制夷)’라는 주장은 그 효시라 할 수 있다. 이후 양무운동의 주축이었던 리훙장(李鴻章)의 막료였으면서도 “개량파 사상의 직접적인 선행자였고 1830~40년대부터 1870~80년대 사상의 역사에서 중요한 교량”(『中國古代思想史論』, 47쪽)이라 평가되는 펑꾸이펀(馮桂芬)을 거쳐 왕타오(王韜), 정관잉(鄭觀應), 그리고 캉유웨이 등의 개량파 사상가들이 모두 ‘중체서용적 사유방식’을 운용하였다.

중체서용의 실천적 의의가 ‘서용(西用)’에 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면, 리쩌허우의 ‘서체중용’을 이해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그는 근현대 중국의 역사과정에서 중국의 전통이 가지는 강고한 힘이 외래(外來)를 압도했다고 본다. 그러므로 그의 과제는 전통을 해체하고 재해석하는 것이다. ‘문화심리구조’, ‘실용이성’ 등은 이 과정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그리고 현대적 대공업과 과학기술을 현대 사회 존재의 ‘본체’와 ‘실질’로 인정하여 그것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은 전통적인 ‘중학’이 아니라 근현대의 ‘서학’인 것이다.

리쩌허우와 류짜이푸는 1989년 ‘6․4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을 떠나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20세기 중국’에 대한 심층적이고 종합적인 대화를 나눌 기회를 가진다. 두 사람은 20세기 중국을 혁명의 시대라고 규정하면서 혁명보다는 이성적인 개량이 필요했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 혁명의 핵심에 자리했었던 마오쩌둥(毛澤東)의 공과(功過)를 논하면서 그의 비극의 핵심을 “경제가 근본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이데올로기를 맹신했던 점과 평화시기라는 것을 무시하고 전쟁의 경험을 맹신했던 점”(『고별혁명』, 233쪽)으로 요약하였다. 두 사람은 마오쩌둥의 비극의 연원을 개인으로만 국한시키지 않고 중국 근현대사의 본질적 특성과 연계시켰다. “1895년, 갑오해전에 패배한 이후로 중국은 줄곧 ‘혁명의 길’과 ‘개량의 길’ 사이의 논쟁에 휘말려 있었다. 전자는 ‘돌변(突變)’ 즉, 계급투쟁이라는 극단적인 방식(폭력수단)으로 국가기구를 전복시켜 역사의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고, 후자는 ‘점변(漸變)’ 즉, 계급협력의 비폭력 수단으로 국가적, 사회적 자아의 경신을 추구하자는 것이다.”(『고별혁명』, 7쪽) 특히 리쩌허우는 1958년 ꡔ캉유웨이와 탄쓰퉁의 사상 연구ꡕ를 출간할 때만 해도 “캉유웨이를 중심으로 하는 변법자강운동의 개량사상이 20세기 초의 혁명에 반대하면서 점차 ‘반동적이고’ ‘역사의 진보를 가로막는’ 것이 되었다는 관점을 인정”(『고별혁명』, 448~9쪽)하였지만, 20세기를 관통하며 진행되었던 혁명이 격정적인 정서에 휩싸였다는 점을 인식하면서 ‘과도한 격정의 혁명’보다는 ‘이성적인 개량’이 중국에 필요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5.


중국 근현대사 시기구분에 관한 리쩌허우의 견해도 유연하다. 모두 알다시피 리쩌허우는 ‘사상사론’ 시리즈를 내면서 ‘고대’, ‘근대’, ‘현대’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그는 도처에서 ‘근대’와 ‘현대’를 하나로 묶어 ‘근현대’라 칭하면서 그에 대한 시기구분을 시도하였다. 미리 알아둘 것은 그의 시기구분이 하나만을 고집하지 않고 관점과 대상에 따라 유연한 유동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근현대에 대한 ‘개괄적인 시기구분’(Ⅰ)을 보자. 그는 “중대한 역사 사건은 의당 그 사건이 계급투쟁 총형세의 전환점을 체현하였는가라는 의미에 엄격하게 제한하여야만 사회 발전 추향의 계급적 성격을 표지할 수 있다”고 하면서 중국 전체의 근현대를 “(1) 1840~1895, (2) 1895~1911, (3) 1911~1949, (4) 1949~1976, (5) 1976 이후”의 다섯 단계로 나누었다(『中國近代思想史論』, 278쪽). 이는 ‘근대’의 시기구분을 설명하다가 그 상위 기준을 언급하면서 제기한 것이기에 그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생략되어 있다. 위의 시기구분에서 눈에 띄는 것은 1919년의 5․4 운동이 분기점에서 빠진 점이다. 아마도 ‘계급투쟁’의 관점에서는 5․4 운동이 신해혁명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세대별 또는 문예사의 시기구분에서는 달라진다.

루쉰의 사상을 논술하면서 리쩌허우는 중국 근현대 ‘지식인의 세대구분’(Ⅱ)을 시도한다. 그에 의하면, (1) 신해 세대, (2) 5․4 세대, (3) 대혁명 세대, (4) ‘삼팔식’ 세대이다. 이에다가 (5) 해방 세대(1940년대 후기와 1950년대)와 (6) 문화대혁명 홍위병 세대를 더하면 중국 혁명의 여섯 세대 지식인이다. 그리고 (7) 제7세대는 완전히 새로운 역사 시기일 것이라 했다. 이는 물론 루쉰 이전 세대(아편전쟁 세대, 양무 세대, 유신 세대 등), 즉 (Ⅰ-1)은 제외한 세대구분이다. 이를 첫 번째 시기구분과 연계시켜 보면, (Ⅱ-1)은 (Ⅰ-2)에 해당하고, (Ⅱ-2, 3, 4)는 (Ⅰ-3)에 해당하며, (Ⅱ-5, 6)은 Ⅰ-4)에 해당하고 (Ⅱ-7)은 (Ⅰ-5)와 동일함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부분에서는 신해혁명이 실패한 후 지식인의 세대구분(Ⅲ)을 세밀하게 하기도 했다. (1) 계몽의 20년대(1919~27), (2) 격동의 30년대(1927~37), (3) 전투의 40년대(1937~49), (5) 환락의 50년대(1949~57), (6) 고난의 60년대(1957~69), (7) 스산한 70년대(1969~76), (8) 소생의 80년대, (9) 위기의 90년대. 이는 10년 단위로 근현대사를 이해하기 좋아하는 중국인의 문화심리구조를 염두에 둔 개괄로 보인다.

「20세기 중국(대륙)문예 일별」에서  ‘지식인의 심태(心態) 변이(變異)’(Ⅳ)를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구분했다. (1) 전환의 예고(1898 戊戌~1911 辛亥), (2) 개방된 영혼(1919~1925), (3) 모델의 창조(1925~1937), (4) 농촌으로 들어가기(1937~1949), (5) 모델의 수용(1949~1976), (6) 다원적 지향(1976년 이후).

사실 1990년대 중국 근현대문학 연구의 전환점을 이루었던 ‘20세기 중국문학’ 개념은 리쩌허우의 자장권 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20세기 중국문학의 대표 논자인 천쓰허(陳思和)는 그 영향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이 글(「중국 신문학 연구 정체관」)의 6개 문학 층위에 관한 묘사는 리쩌허우 선생의 ꡔ중국 근대 사상사론ꡕ 「후기」의 영향을 받은 것 … 그의 수 세대 인물에 관한 사로(思路)는 나를 계발하였고 나로 하여금 중국 신문학에 대해 금세기 초부터 신시기까지를 하나의 유기적 총체(整體)로 삼아 고찰하게끔 촉진하였다.”(『黑水齋漫筆』, 111쪽) 또한「20세기 중국문학을 논함」의 주집필자인 첸리췬(錢理群)도 1993년 서울에서 개최된 중국 현대문학 국제 심포지엄에 참가했을 때 사석에서 ꡔ중국 근대 사상사론ꡕ으로부터 받은 계발을 피력하면서 이 책이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사실에 의아해하기도 했다.

크게 네 종류의 시기구분을 요약하면서 리쩌허우의 유연한 유동성을 다시 실감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확실한 사실은, 시기구분의 기준이 계급투쟁이 되었건, 세대가 되었건, 아편전쟁은 그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중요한 분기점이라는 사실이다. 문예의 시기구분에서 ‘20세기’라는 표현을 쓴 것은 아편전쟁 이후의 변화가 심태(心態)에 반영된 것이 19세기 말 20세기 초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유명사 표기와 리쩌허우의 시기구분에 대해 요약하는 것이 필요할 듯하다.

지난 연말 <중국학센터>(http://www.sinology.org/)에서 ‘중국어 한글 표기’에 대한 논의가 벌어진 적이 있었다. 기조 발제자인 엄익상 교수가 기존의 ‘최-김안’과 ‘정부안’(문화체육부 고시 제1995-8호(1995.3.16) 외래어 표기법)을 검토하면서 자신의 안을 내놓고, 그에 대해 여러 논자들이 각각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여기에서 세 가지 안의 장단점을 논할 겨를은 없다. 이 책을 내면서도 중국어 한글 표기 문제로 6개월 이상의 씨름을 거쳤다는 사실만 말하기로 하자. 그 결과가 ‘정부안’을 따르는 것이었다. 1995년의 ‘정부안’은 그동안 떨쳤던 악명에 비해서는 무난한 편이다. 다만 여전히 납득하기 어려운 몇 가지 문제가 존재하고 있다. 자세한 것은 <일러두기>를 참조하기 바란다. 고유명사는 처음에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하다. 중국 최고 지도자 가운데 장쩌민(江澤民)까지는 ‘강택민’이라는 한자 독음이 혼용되었지만, 후진타오(胡錦濤)에 이르러서는 ‘호금도’라고 부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듯하다. 매스컴에서도 모두 원음 표기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매스컴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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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근대사상사론 한길그레이트북스 71
리저허우 지음, 임춘성 옮김 / 한길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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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책상 위에는 3권의 ꡔ중국 근대사상사론ꡕ이 놓여 있다. 베이징 인민출판사본(1979년)과 안후이(安徽) 문예출판사본(1994년), 그리고 톈진(天津) 사회과학출판사본(2003년). 10여 년 간격으로 판본을 거듭하여 재출판되었다는 것은 개혁․개방 시기의 중국에서 이 책이 지니는 무게를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처음 책이 출간되고 25년이 넘었으니 한국에서 이제 번역․출간된다는 것은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늦은 봄 꽃 수풀에 앉아서 마른 국화를 비벼 코에 대는” 격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사실 한동안은 이 분야의 전공자들이 빨리 번역해주어서 이 책을 읽는 개인적인 수고를 덜 수 있기를 은근히 바랐다. 그러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는 격으로 조금씩 번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워낙 난해한 문장이 많아 우리말로 옮겨놔야만 내용의 구석구석이 명료하게 와 닿는 아둔한 내 공부방식의 탓도 있었으리라.

처음 이 책을 번역하면서는 연구관심 영역을 사상쪽으로 넓히는 것과 시기적으로 ‘근대’로 거슬러올라 간다는 의미를 부여하여 나름대로는 자못 고무적이었다. 그러나 번역하는 동안 곳곳에서 암초에 부딪혔고, 그때마나 원고를 던져두었다 다시 잡곤 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처음 중국문학에 입문할 때 류다제(劉大杰)의 영인본『중국문학발전사』를 보면서, 제자백가서와 역사서가 문학사에서 서술될 수 있다는 사실이 퍽 경이로웠고, 그 경이로움으로 석사과정 첫 학기에『사기』(史記)를 연구대상으로 삼았다. 선진(先秦)시기와 진한(秦漢)시기의 문장을 읽어내는 일이 간단하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독회를 통해 원전들을 읽어나갔다. 돌이켜보면 박사과정 수료 직후 근현대문학으로 방향을 바꾸기 전까지, 대학원 시절 대부분의 시간을 원전강독과 씨름하면서 보낸 셈이다. 그것을 밑거름으로 삼아 문사철(文史哲)을 경계 없이 넘보고자 했으며, 나름대로 오늘날 중국 및 중국학에 대한 커다란 그림 한 가닥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지금도 ‘중국학의 기본은 문사철의 통합적 이해’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리고 이런 사고가 바탕이 되었기에 과감하게 이 책을 번역․출판하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집중적으로 번역한 때는 1998년 9월부터 1999년 8월까지 옌타이(煙臺) 대학에서 연구년을 보내던 시기였다. 돌이켜보면 그 기간은 나에게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이 책의 번역작업 틈틈이 손에 잡은 책이 진융(金庸)의 작품이었고, 그것을 계기로 무협소설 연구에도 손을 대고 계속 영화로 이어지는 등 대중문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옌타이 대학에서 안식한 그 1년은 내게 무척이나 소중한 시간이자 이 책의 번역에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다. 개인적인 관심으로 량치차오(梁啓超) 관련 문장을 번역한 것은 1995년 무렵이었고, ꡔ중국 근대사상사론ꡕ을 우리말로 모두 번역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은 1997년 한길사의 제안을 받았을 때였다. 꼬박 10년이 걸린 더딘 작업이었다. 김태성 선생의 소개로 홍콩에 가서 류짜이푸(劉再復) 선생을 만나 밤이 이슥하도록 근현대 중국의 역사와 혁명을 논한 것이 2002년 가을이었고, 류짜이푸 선생의 주선으로 미국에 체류하는 리쩌허우 선생에게서 출판동의를 받았다. 곳곳에 벌겋게 표시를 해두었던 요령부득의 문장을 가지고 리쩌허우 선생과 여러 차례 편지와 전화를 주고받으면서 번역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리쩌허우의 문장은 난해하다. 그의 3부작이라고 하는『중국 고대사상사론』,『중국 근대사상사론』,『중국 현대사상사론』가운데 나의 경우는 유독『중국 근대사상사론』이 난해했다. 그 난해한 원인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는데, 첫째는 문장의 호흡이 지나치게 길다는 점이다. 둘째는 인용하는 원전을 단장취의(斷章取義)하여 자신의 논의 전개에 종횡으로 배치하되 그 출처가 명시되어 있지 않은 날것이 많다는 것이다. 셋째는 도치문을 빈번하게 사용한 데서 오는 난해함이다. 이런 문제들에 대한 해결방법은 번역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몇 가지로 수렴되었다. 첫째, 원문의 맥락을 해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한 문장을 여러 문장으로 과감하게 나누었다. 둘째, 명확하게 인용문 출처를 밝힌 것을 제외하고는 원전에 있는 수많은 인용 표시를 생략하여 문장 안에 흡수하여 번역하되, 가능한 한 원전을 거의 확인하고자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필자의 인용 오류 혹은 인쇄상의 오류 확인도 적지 않았다. 이는 필자와 상의 후 정정했다. 셋째, 문장의 도치는 레토릭의 일종이거나 필자 특유의 문체이므로 최대한 존중하되 우리말로 옮겼을 때 어색한 경우에는 문장 구문을 정치(正置)시켰다. 그리고 근현대문학 연구를 하면서 별다른 필요를 느끼지 않던 자전을 다시 꺼내 들었다. 특히 ꡔ漢語大詞典ꡕ(1~12, 漢語大詞典編纂委員會 漢語大詞典編纂處 編纂, 漢語大詞典出版社)의 도움은 거의 절대적이었다.


1999년 가을, 번역의 초고를 마쳤을 때는 이 책을 김명호 선생의 주관 아래 출판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 즈음에 김 선생은 <마르코 폴로 총서>를 기획하고 있었는데, 옮긴이에게 여러 가지 유익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다. 이 자리를 빌려 그때의 따뜻한 성원에 감사를 드린다. 이 책의 출판과 관련하여 유세종 교수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유세종 교수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 책은 빛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번역 초고를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고 교정했다. 이 과정을 통해 적지 않은 오역을 발견하여 바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직역 위주의 문어투를 자연스러운 우리말로 바꿀 수 있었다. 특히 ‘아름다운 한국어’를 고집하는 그는 문장의 리듬과 단어의 선택에서 거의 소모적이리만치 나와 피곤하게 논쟁하기도 했다. 탄쓰퉁 부분을 교정하면서 울었다고 하는 그는 수시로 날카로운 비판과 격려로 나를 지지해주었다. ‘난해한 암초’를 만나 내가 너무 오래 딴전을 피우고 있으면, 이 번역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라고 하면서.


최근 나의 연구와 관련된 교류는 주로 목포대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학술공동체를 지향하는 아시아문화연구소의 동아시아학술포럼은 내가 주로 노니는 중국현대문학학회 이외의 또 하나의 학문적 둥지다. 그곳에서 학제간 연구의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고 분과학문에 매몰되기 쉬운 연구의 균형감각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인문관 교수들의 공부모임인 ‘문학/문화 이론연구회’는 부족한 공부를 서로 채찍질해주는 유쾌한 시공간이다. 몇몇 동료 교수는 이 책의 출간이 늦어지는 것이 나의 게으름 탓이 아닌가 하고 충고와 격려를 마다하지 않았다. 10년을 헤아리는 시간을 함께해온, 그리고 앞으로도 함께할 동료 교수들에게 두루 감사의 말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처음 번역을 제안하고 오랜 시간을 기다려준 한길사의 김언호 사장님께 감사를 드린다. 난삽하고 방대한 원고를 꼼꼼하게 교정하고 우아한 책으로 꾸며준 한길사 편집부의 안과 밖 식구들에게도 모두 감사를 드린다. 옮긴이의 불성실로 인한 오류와 문제점에 대해서는 강호제현의 날카로운 비판과 충고로 계속 수정 보완할 것을 기대한다.

이 책은 안후이 문예출판사본(1994년)을 저본으로 삼았고 베이징 인민출판사본(1979년)과 톈진 사회과학출판사본(2003년)을 참고하였다.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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