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선 1 - 마음이 속상할 때는 몸으로 가라 참선 1
테오도르 준 박 지음, 구미화 옮김 / 나무의마음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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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자, 10년간의 묵언, 전강스님으로부터의 인가, 깨달은 선사... 용화사 송담스님을 수식하는 말들이다. 제방 안팎에서 위대한 선승으로 추앙받는 송담스님. 그리고 그 송담스님을 가장 가까이서 시봉했던 환산스님. 몇년전 불교 tv에서 환산스님이 좌선 강의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한국인 스님이 영어로 강의를 한다니 신기해서 알아봤는데, 하버드대를 나온 재미교포 스님이었다. 삶에 대한 공허, 권태, 무의미... 어쨌든 그런 것들이 결국 스님을 만든다. 그렇게 전도유망한 하버드대생은 모든 미래를 포기하고 젊은 날 머리를 밀고 송담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그렇게 30년이 흘렀고, 그는 환속을 했고,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냈다. 30여년이나 승려생활을 하고서 환속하는 일은 드물 뿐더러 또 그 과정의 이야기를 글로 옮긴 이는 더더욱 드물다. 때문에 내용은 차치하고 이 책 자체만 보자면 이것은 분명 드물고 귀한 책임은 틀림없다.


스님들은 자신들 속내를 잘 얘기하지 않는다. 이야기해봐야 절집 안에서만 돌고 돌 뿐이다. 그런 스님들의 속내를 가장 은밀한 곳까지 섬세하고 진솔하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드물다. 어쨌든 2권에 달하는 묵직한 책이 며칠도 안되어 다 읽혔다. 실존적 고민을 갖게 된 연유와 출가하게 된 계기, 그리고 환속, 환속 이후의 삶까지 아주 진솔하게 쓰여있다. 이 책이 참선을 다루는 책이 아니라 테오도르 준 박, 자신의 자전적 수필집으로만 국한되었다면 별 5점 만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본질이 '참선'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기에, 나는 별 2점을 주어야만 했다.


위대한 선승으로 알려진 송담스님 옆에서 30여년이나 선을 했고, 또 묵직한 두 권의 책을 냈기에 나는 그가 충분히 깨달았다고 생각했다. 인터뷰와 책 중간 중간 나오는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고 하는 이야기들은 많은 선지식들이 으레 하는 말과 같이 겸양의 일부인줄 알았다. 선가에는 석가모니도 아직 수행중이고 달마대사도 아직 좌선중이라는 말이 있으니까.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나는 그가 정말로 깨닫지 못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직도 선이 무엇인지 모른다. 선의 변두리만을 맴돌 뿐이다. 그래서 참선을 이야기하면서 감정을 다스리고 생각을 다스리고 하는 문제들에 치중한다. 참선은 그렇게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참선은 명상이 아니다. 명상이 참선의 일부가 될 수 있지만, 명상을 전부 선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선을 통해 마약과 알콜 중독에서 벗어나고, 더 선량한 사람이 되고, 더 맑은 정신을 갖게 된다고 이야기하며 이것을 선의 효험이라 떠벌린다. 그런 것들은 테라피 명상이지 선이 아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참선이란 감정, 생각, 신체의 생리적 변화 등에 국한되어있다. 그가 '이뭣고'를 하는 것은 정말 이것이 무엇인지 궁금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을 다스리기 위한 하나의 장치로 다루는 면이 강해보인다. 그는 참선을 이야기하면서 우리 모두가 사랑하기를 바라고, 세계가 조금 더 평화로워지기를 이야기한다.


많은 선사들이 선을 이야기하고 깨달음을 이야기하며, 이 선의 정신으로 세계의 전쟁과 가난과 범죄를 불식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상에 만연한 갈등이 선으로 융해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선사들은 정신을 개벽하자고도 이야기했고, 깨달아서 이 세계를 극락정토로 만들어야 한다고도 이야기했다. 글쎄, 나는 이런 이야기들에 조금 회의적이다. 일본의 깨달음을 얻은 선사이자 스즈키 다이세츠의 스승이었던 소엔은 톨스토이의 러일전쟁 반전운동 제의를 거절했다. "양립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 조화를 일으키는 수단으로 살생과 전쟁은 필요한 것이오." 소엔은 그렇게 살인과 전쟁을 정당화했다. 실제 태평양전쟁 당시 꽤나 많은 '깨달은' 선승들이 군국주의를 찬양하고 전쟁을 선전했다. 삼보교단의 창시자였던 야스타니 하쿤 선사 또한 대표적인 군국주의자였고, 별로 보지도 못했을 지구 반대편의 유대인들을 극렬히 증오하기도 했다.


깨달음이 한적한 산사가 아닌 변화무쌍한 현실 앞에 놓였을 때,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예측 불가의 형태로 전개될 수 있다. 때로 그 전개는 선의 모습을 갖기도 하고 악의 모습을 갖기도 한다. 어째서 그럴까? 깨달음의 속성에는 선도 악도 없기 때문이다. 선은 본래의 직관적 통찰을 통해서 언어의 왜곡으로부터 벗어나 실존의 날 것을 목격한다. 그리하여 삶과 죽음에 관한 불안의 문제는 해소된다. 그럼, 그 다음에는? 그러한 통찰 뒤에도 삶 자체는 언어를 통해 꾸려진다. 삶의 선과 악을 그려나가는 것은 언어의 영역이다. 깨달음은 단지 그 언어의 영역에 대한 실체없음을 직관하게 할 뿐이다.


삶에 있어선 오로지 양자택일이다. 선을 택하든가, 악을 택하든가. 어제 선택한 선이 오늘의 악이 될 수도 있고, 오늘 선택한 악이 내일의 선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깨달음은 선에도 속하지 않고 악에도 속하지 않는다. 선과 악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깨달음은 하나의 만병통치약처럼 작용하는 것 같다. 깨달음만 얻으면 문득 이 세상의 모든 문제가 불식될 것 같은, 그런 막연한 상상. 그래서, 깨달은 선사들은 세상을 얼마나 바꾸었나?…. 이제는 입장정리를 확실히 해야만 한다. 세상의 영역을 애써 깨달음의 영역으로 끌어와선 안된다. 깨달음은 깨달음이고, 삶은 삶이다. 각자의 영역이 있을 뿐이다. 깨달음은 삶의 공함을 꿰뚫는 것이지 삶을 공하게 만들지 않는다. 깨달음은 삶의 몫이 아니다. 그래서 설사 지구의 모든 인간들이 참선을 해 깨달았다 할지라도, 사람들은 여전히 스타벅스에 갈 것이고, 페이스북을 할 것이다. 여전히 사치를 할 것이고, 불륜을 저지를 것이고, 모략을 꾸미고, 질투를 하고, 출세를 욕망하며, 전쟁을 일으킬 것이다. 나는 그럴 것이라 믿는다.


이 외에도 미국에서 전법한 (깨달은) 선승들의 성추문 스캔들은 우리에게 깨달음의 효용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갖게한다. 미국에 티벳불교를 전한 초걈 트룽파 린포체는 술과 여자를 끼고 살았다. 그는 결국 환속했고, 어린 영국 여성과 결혼한 뒤에도 불륜을 하고 난교를 즐겼다. 그는 오십이 되기 전에 요절했는데, 그 사인은 알콜 중독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그의 전법제자 오셸 텐진은 서양인으로선 최초로 티벳불교를 계승한 사람인데, 애석하게도 에이즈에 걸린 뒤 그 사실을 숨기고 제자들과 성관계를 맺다가 발각되기도 했다. 그렇다고해서 초걈 트룽파의 깨달음이 부정당했냐하면 그것은 전혀 아니다. 트룽파 린포체는 영적 물질주의를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미친 지혜’라는 그의 독특한 사상을 주장했는데, 이는 아직까지도 널리 회자되고 있다. 사실 그의 방탕한 삶 조차도 미친 지혜의 일환이었다고 한다.


그가 선심초심을 저술한 일본의 스즈키 순류 선사와 절친 사이였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스즈키 선사를 말했으니 하는 말이지만, 스즈키 선사의 전법제자 리처드 베이커는 성추문과 예산횡령 문제로 선원에서 추방당했다.


타이잔 마에즈미 선사 또한 미국에서 조동종의 선을 전파했는데, 그는 이미 임제종, 조동종, 삼보교단 세 군데서 모두 인가를 받은 공인된 깨달은 선사였다. 그는 대처승으로서 아내가 있었음에도, 수많은 여성제자들과 암암리에 불륜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그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는 알콜 중독이었다. 그는 결국 선원에서 자신의 알콜 중독을 시인하고 치료소를 찾기도 했다. 그리고 1995년, 일본에 잠시 귀국한 그는 욕조에서 술에 취한 채로 익사했다. 미국 현지에서는 그의 문란한 사생활로인해, 인가받은 제자들이 그와 결별을 선언하기도 했지만 그의 깨달음까지 부정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의 가르침은 그의 제자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져 지금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한다.


프로비던스에서 관음선종을 만들어 선을 전파한 숭산스님 또한 스캔들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다. 숭산스님은 두 명의 여성 제자와 성적 관계를 맺어왔고, 이 일로 두 번의 참회식을 치러야만 했다. 굳이 불교뿐 아니라 남방 힌두교 구루들의 사생활 또한 할 말이 많다. 다만 오늘은 여기까지만 이야기를 해야겠다.


어쨌든, 불교를 믿든 안믿든 세상은 참선에 관해, 깨달음에 관해 너무나 뿌리깊은 환상을 갖고 있다. 선은 의외로 우리의 욕망을 건드리지 않으며, 우리의 인격을 다듬지도 않는다. 그것은 단지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실존적 불안만을 해결해줄 뿐이다. 물론 스스로의 깨달음을 공표하고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지도자의 입장에선 어느 정도의 사회적 도덕과 윤리적 의무의 책임을 다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의 본질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불교적 깨달음은 불안이라는 근본적 괴로움만을 다룰 뿐이지, 우리를 군자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인격자가 되고 싶다면 인격수양을 해야 할 것이다. 몸과 마음을 닦고, 예의범절을 배우고, 인의예지의 도리를 깊이깊이 숙고하고 익혀야 한다. 물론 그것은 유교이지 불교가 아니다.


저자는 참선을 통해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리 큰 열정이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보다는 오히려 참선이라는 수단으로 삶을 변화시키려는데 노력하는 듯하다. 그러나 참선이란 삶의 바탕을 깨닫는 일이지, 삶을 바꾸는 일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가 공한 것을 깨닫는 것이 참선이지, 있는 그대로를 공하게 만드는 것은 참선이 아니다. 본질을 알지 못하니 현상에 오도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저자는 계속해서 부정적 감정, 생각, 생리적 변화들만 물고 늘어진다. 그가 환속 후 왜 요가에 관심을 갖는지 알 것 같다. 그가 바라는 현상적 변화를 충족시켜주기엔 참선은 너무나 '본질적'이다. 필자가 보기에 그는 참선을 이해하지 못했다. 때문에 환속을 했을 것이다. 이해하지 못한 참선을 남들에게 가르치려는 자기 자신이 이율배반적인 모습이었을테니까. 그런데 그 똑같은 실수를 여기서도 반복하고 있다. 그는 스스로 참선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명상이라는 그럴듯한 수단들로 참선을 이야기하고 있다. 참으로 안타깝다. 옛 선가에는 '불법을 잘못전해 납자들의 안목을 멀게 한 이에게는 눈썹이 나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다. 저자는 자신의 눈썹이 잘 붙어있나 살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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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야 2019-12-15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기 드문 양질의 서평 감사합니다.

땡땡 2019-12-17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이 참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Brie 2019-12-18 00: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한 편의 책을 들쳐본줄 알았습니다.

Brie 2019-12-18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서평 감사드립니다.그리고 궁금해서 여쭤봅니다.그럼 참선은 어떻게 하는건가요?

Brie 2019-12-18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명상하는 방법과 다른가요

2022-04-24 09:35   좋아요 1 | URL
인류는 죽음의 문제, 실존의 불안이라는 문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갖가지 시도를 했습니다. 몇 가지는 실패했고, 몇 가지는 성공했죠. 그중 성공 사례의 하나가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고대 인도 수행자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 가르침은 2천년이라는 긴 시간을 이어오며 다양한 방식으로 진화했습니다. 그렇게 고타마의 법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래되고, 중국의 선사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선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면서 선불교가 자리 잡았죠. 중국의 선사들은 죽음의 문제가 생각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정확히 캐치했습니다. 그들은 생각의 테두리를 부숨으로 죽음의 문제에서 벗어났습니다.

오늘날 선불교를 창시했다 알려진 달마대사는 특별한 수행법을 지도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제자이자 선종의 두 번째 조사인 혜가대사가 스승 달마와 주고받은 안심법문은 이미 너무도 유명합니다. 어느 날 혜가가 물었습니다. “제 마음이 너무도 불안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달마는 답했습니다.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아무리 찾아도 그 마음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그대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선종의 조사들은 이처럼 대화를 통해 불안의 근원을 해결하였습니다. 선불교 조사선의 전통은 이런 ‘대화성’에 있습니다. 대화성의 전통은 그대로 이어져 여섯번째 조사인 혜능대사에게서 활짝 꽃 피웁니다. 혜능대사에 이르러서는 걸출한 선사들이 우후죽순으로 배출되었고, 오가칠종이라는 선의 7개 종파가 생겨났죠. 그 중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종파는 임제종과 조동종 뿐입니다.

임제종은 임제선사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임제선사의 스승은 황벽이었는데, 그 위의 계보들은 여기서 다 이야기할 것이 아니니 생략토록 하겠습니다. 임제선사는 지금으로치면 국경지역에 주석하며 가르침을 펼쳤는데, 법문을 듣는 사람들이 대부분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함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법문했습니다. 오늘날 선문답과 법거량을 하면서 “할!”, “억!”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은 모두 이런 임제선사의 가풍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어쨌든 그런 가풍은 차치하고, 임제선사의 실질적 가르침은 ‘수행하지 말라’ 였습니다. 깨달으려 하지 말라, 수행하려 하지 말라, 수행하고, 깨닫고자 하는 바로 그 놈이 모든 문제의 원흉이다. 뭐 그런 이야기들입니다.
그렇다면 임제선사는 어째서 수행하지 말라 했을까요? 어떤 수행이든 그 수행을 하려 한다면 이미 수행하려는 자기 자신이 전제되어있기 마련입니다. 수행하는 자기 자신이 있고, 수행이라는 대상이 있게 됩니다. 이런 수행은 보통 어떤 대상에 의식을 집중하는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이런 방식으로 어느 정도 마음의 고요를 얻을 순 있습니다. 초걈 트룽파는 이를 일러 ‘정신적 체조 훈련’이라고 했는데, 저는 이 표현이 참 적절하다고 봅니다. 어쨌든 이런 이분법적 수행은 자기와 세계라는 두 가지 상황 전체를 한꺼번에 상대하지 않기 때문에 언제나 주체와 객체가 분리됩니다. 그 주객의 분리는 ‘나’와 ‘나 아닌 것들’이라는 관념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죠. 때문에 깨닫지 못한 상황에서 ‘나’로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은 결국 ‘나’가 노력하는 것이 됩니다. 에고로부터 벗어나려는 시도를 에고가 하는 이 역설로 인해,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의 모든 수행은 본질적으로 무용합니다. 그래서 조사들은 수행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조사들은 그저 날이면 날마다 제자들을 앉혀놓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렇게 앉아있는 그 놈이 무엇인지, 그렇게 망상을 굴리는 그 놈이 무엇인지. 단지 의심하고 의심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거기에는 단계를 밟아 올라가는 차제 수련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초기 선불교의 수행 아닌 수행이었습니다.

이후 송대에 와서는 이러한 선불교 전통의 ‘대화성’이 조금 사그러듭니다. 원오극근의 제자였던 대혜종고는 이 ‘대화성’에서 모티브를 따와 간화선이라는 새로운 수행법을 만들어내죠. 그것은 스스로 언어를 통해 언어를 여의는, 또 다른 방식의 수행 아닌 수행이었습니다. 역대 조사들과 제자들이 주고받은 선문답 중에서 하나를 골라, 그 의심가는 어구를 참구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부처를 묻는 제자에게 스승은 뜰 앞의 잣나무라 이야기했습니다. 간화선을 하는 수행자는 이제 이 ‘뜰 앞의 잣나무’를 참구합니다. ‘부처를 물었는데 어째서 뜰 앞의 잣나무라 했을까?’ 간화선은 이런 의심을 통해서 ‘생각’을 향해 돌아섭니다. 의심을 통해 생각을 끊고, 생각의 공백을 만들고, 생각의 근원을 향해 돌아섭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의 바탕을 목도하는 순간이 오게 됩니다.)

이렇게 선불교의 대화성을 그나마 보존하고 있는 것이 임제종이고, 조동종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조동종은 대화를 치워버렸죠. 대신 그 대화의 목적을 믿고 갑니다. 생각이 내가 아니라는 것, 스스로가 이미 바탕이라는 것, 공백이라는 것, 뭐 그런 사실들을 굳게 믿고서 일단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앉아서 무엇을 하냐. 호흡을 보는 것도 아니고, 화두를 의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관법을 하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조동종의 수행법은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단지 앉아 있는 것뿐입니다. 이것을 성엄선사는 ‘무방법의 방법’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이 말 또한 참으로 적절하다고 봅니다. 조동종에서는 단지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의 수행을 합니다. 깨닫고자 앉는 것이 아닙니다. 깨닫고자 앉는다면 이미 주객이 갈라진 어긋난 수행입니다. 그래서 조동종의 좌선법은 ‘그저 앉아있음‘입니다. 깨달음도 필요없고, 깨닫지 못한 나도 필요 없다. 그냥 앉아있을 뿐이다. 이것을 지관타좌라고 합니다. 그렇게 그냥 앉아서 모든 것들을 방치하는 순간, 몰록 모든 것의 바탕이 드러나는 때가 옵니다. 물론 그 드러남의 순간은 각자의 근기와 기연과 절박함에 따라 천차만별이지요.

오늘날 임제종과 조동종의 수행법은 아이러니하게도 중국에선 소멸하고, 한국과 일본을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한국은 고려 때 원나라 몽산화상과 고봉화상의 영향을 받은 간화선 수행법이 그대로 보존되어서 내려오고 있는데, 때문에 조계종을 위시로 한 한국 선불교는 동북아의 유일한 간화선 종주국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일본에선 여러 개의 공안들을 수차례 참구하는 방식으로 약간 변형이 된 간화선 참구가 이뤄지고 있죠. 사실 일본에선 화두를 참구하는 임제종보다도 지관타좌를 하는 조동종이 더 활발합니다. 일본의 조동종은 13세기 도겐 선사가 중국에서 천동여정 선사의 법맥을 이어받아 오면서 시작되었는데, 중국의 묵조선법과는 뉘앙스가 약간 다른 지관타좌를 수행법으로 삼습니다. 근대에 야스타니 하쿤 선사는 임제종의 화두선과 조동종의 묵조선 수행법을 합쳐 ‘삼보교단’이라는 수행 공동체를 새로 창설하기도 했죠. 지금 해외에 흥행하는 선센터는 대부분 일본 조동종과 삼보교단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중국과 대만의 선수행은 정토종의 염불선과 임제종의 화두선이 결합된 방식입니다. 염불하면서 염불하는 이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고 참구하는 염불시수 화두 수행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참선의 역사에 관해 개략적으로 이야기해드렸지만, ‘참선이란 무엇인가?‘를 조금 더 본질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직접 참선의 장에 뛰어드는 수밖에 없습니다.

땡땡 2019-12-19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닭님이 설지님이신가요? ㅇ_ㅇ 서평이 너무 좋아서 서평에 있는 첫 책인 ˝무력한 깨달음˝ 주문했어요. 다만 POD 책이라서 좀 기다려야 되네요. 최소 1주일 이상이라 아직도 못 받아봤고 아마 다음주중으로 도착할꺼 같습니다. 책을 주문하면서 저자를 검색했지만 아무런 정보도 없어서 그냥 닭님만 믿고 주문했거든요. 다 읽으면 사인 받으러 가도 될까요? ㅎㅎㅎ
˝질문이 멈춰지면 스스로 답이 된다.˝는 책도 잘 읽었습니다. 좋았습니다.

keispigel(케이) 2020-02-16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력한 깨달음을 읽고 좋아서 참선일기까지 읽고 있는데 역시 너무 좋습니다.(알라딘에 리뷰도 썼어요 ㅎㅎ)..쉽고도 명징하게 얘기해주시는데, 공감이 많이 갑니다. ..깨달음에 관심을 가지고도, 일상의 분주함에 깊이 파고들지 못하고 항상 맘에 걸렸었는데.. 이 두 권의 책을 통해 다시 그 자리에 대한 그리움이 깊어집니다. 감사드립니다. 좋은 글 써주셔서..

blueocean 2020-03-15 2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가 송담스님 아래서 30년을 있었는데 참선을 제대로 배우고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송담스님 또한 제대로 모른다는 걸까요 아님 저자의 이해가 부족한 탓일까요??

그리고 깨달음은 오직 실존적 불안을 해결해 주는 것에만 목적이 있는 건가요?

스님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출가하는데 그것과 스님의 인격은 별개로 봐야한다는게 조금 어렵게 다가옵니다. 그럼 삭발은 왜 하고 주색을 멀리하는 건 왜인지 모르겠어요. 율법과 절차는 왜 그렇게 많고 ㅜㅠ.. 예시를 든 서양에서 일어난 성추행이나 알콜중독도 깨달음과는 별개라는 말씀인 것 같은데 그런듯 하면서도 갸우뚱 해지는 부분이 있네요.

2020-03-16 06:39   좋아요 0 | URL
1) 저자가 언급을 하기도 하지만.. 한국의 큰스님들은 참선수행에 관한 세세한 지도를 따로 하지 않습니다. 한국의 간화선 자체가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해나가는 수행이기 때문인데요... 아무래도 공부 방편의 문제가 큰 것 같습니다.

2) 저의 견해는 그러합니다. 다만 불교 안에는 수많은 불교가 있고, 그 불교가 그리는 깨달음의 이상향은 저마다가 다릅니다. 남방불교(초기불교)에선 깨달음을 윤회의 절멸이라 표현하는가 하면, 대승불교에서는 끝없는 윤회를 통해 중생구제 함을 깨달음의 목적이라 봅니다. 정토불교에서는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고 서방정토에 이르는 것을 목적이라 하는가 하면, 선불교에서는 스스로의 바탕을 깨쳐 삶과 죽음의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깨달음의 목적이라 합니다.

3) 선불교의 특성입니다. 미얀마, 태국 등 남방불교에서는 계율을 엄수하고 욕망과 부정적 감정들을 극히 경계합니다. 비유를 들어 이야기하자면,, 남방불교에선 꿈이 꿈인줄 알아도 되도록이면 좋은 꿈을 꾸고자하는 노력이 있습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사람들이 꿈을 깨기보다는 좋은 꿈을 꾸고자 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선불교에서는 좋은 꿈이든 나쁜 꿈이든 상관치 않죠. 오직 꿈은 꿈일 뿐이라는 것을 자각하는데 중점을 둡니다.

겉으로 보면 남방불교의 계율엄수나 욕망, 부정적 감정을 초극하고자 하는 수행 방식이 이상적으로 보일 수 있으나 현실적 수행에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상당히 부자연스럽죠... 물론 선불교 선사들의 성추문이나 알콜중독 등이 자연스럽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선불교가 내리막 길을 걷게 된 것이 동양인 선사들의 성추문 때문이었습니다..

blueocean 2020-03-15 2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불교를 모르고 책을 읽었는데 닭님 글 읽어보면서 문득 또 떠오른 것은 제가 간혹 지나쳤던 많은 사찰은 수능100일 기도니 무슨 기도니 하면서 현수막을 걸어놓던데 그걸 보면 기복신앙 느낌이 너무 강합니다. 왜 현실의 절은 여타 불교를 말하는 책의 느낌과 너무나 다를까요?

2020-03-16 06:46   좋아요 0 | URL
불교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였습니다. 인도, 중국을 거쳐 고구려 대에 처음 불교가 국교로 선포됨에 따라 국왕이 내건 캐치프레이즈는 ‘불도를 믿어 복을 구하라‘ 였죠. 현자의 사상이 널리 퍼져 민간에 유행하면, 권력자는 그것을 주워모아 다시 민간을 통치하는 도구로 활용합니다. 국가는 백성들의 결속을 위한 도구로 종교를 이용하죠. 이런 과정에서 종교의 기복신앙화는 피할 수 없는 필연적 과정입니다.

이러한 기복신앙적인 영역은 불행하게도 사원경제와 직결되고 있습니다. 불교신자의 팔할은 기복신앙으로서의 불교도들입니다. 절에서 기복신앙을 철폐한다면 그 많은 불교도들은 절을 떠날 것이고... 사찰경영에는 큰 타격이 오겠죠..

noomy 2020-07-10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깊이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문장도 너무나 좋네요. 쓰신 책 꼭 한번 읽어볼게요~

상선약수 2022-12-02 14: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또한 말장난.소위 언어의 영역.

니콜 2023-01-10 1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글 잘 읽었습니다. 지금 참선 책을 읽다가 우연히 나무위키로 인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참선의 역사나 참선에 대해서 속 시원히 잘 적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불교가 좋다 (보급판 문고본)
나카자와 신이치 외 지음, 김옥희 옮김 / 동아시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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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교학자도 아니고 불교도도 아닌 인문학자 둘이서 불교에 관한 대담을 나눈다. 불교에 대한 가벼운 호의로 시작한 대담은 이런저런 다양한 주제들을 건드리며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풀어놓는다. 다만 인문학자가 바라본 불교라는 한계점이 있다. 인문학적인 관점에서의 불교적 소양은 있지만, 그 이상의 것은 없다. 불교도나 스님들 입장에서, 바깥사람들이 불교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살펴볼 관점으로는 꽤나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지만, 불교, 부처의 가르침에 대한 깊은 통찰은 조금 부족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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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이전 자리에 앉아라 - 참선지남, 한산사 용성선원장 월암스님의 완전한 행복을 위한 참선수행 지침서
월암 지음 / 보문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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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 요지를 간결 명료하면서도 적확하게 드러낸 책. 보통 참선을 이야기하면 고답적인 불교 한문 용어들로 뒤범벅되있기 마련인데, 본서는 현대적인 용어로 선이 다루는 가장 중요한 문제인 '생각'에 초점을 맞추었다.


왜 불안한가? 생각 속에 있기 때문이다. 생각을 벗어나야 한다. 생각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생각 밖으로 나와야 한다. 생각 밖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생각 이전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밖으로부터 오는 잡다한 인연들을 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생각을 바라보아라. 생각은 분명 내가 아니다. 생각과 나를 동일시하지 말라. …생각이 없다는 것은 생각해도 생각의 장애가 없는, 즉 생각해도 생각에 휘둘림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것을 생각해도 생각하지 않는 무념이라고 말한다.


월암스님, 「생각 이전 자리에 앉아라」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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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심결 : 간화선 수행, 어떻게 할 것인가
수불 지음 / 김영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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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간화선을 접한 입문자가 읽기에 적당한 간화 개론서. 선수행에 관한 배경지식이 전무한 상태에서 읽으면 조금 어려울 수도 있고, 이미 선수행 중인 재가수행자나 제방 수좌스님들이 읽기에는 익숙한 이야기들이다. 조계종 출판사에서 펴낸 <간화선>이나 월암스님이 펴낸 <간화정로>와 맥을 같이 한다. 다만 눈여겨 볼 것은, 전국 선원의 간화선 풍토가 수년간 오래 오래 참구하는 분위기라면, 수불스님은 간화선이란 단기간에 타파해야 함을 강력히 역설한다는 점.


화두는 '짧고, 빠르게, 확!' 한 번에 들어서 타파할 수 있어야 한다. "좌복 위에서 끝까지 화두 놓치지 마라"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활구만 들리면 짧은 시간 내에 화두를 타파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10년, 20년 화두 들어도 의심을 깨트리지 못하면서, "다음 생까지 화두를 계속 들고 가라"고 말한다. 발심한 학인으로서 이 말에 속으면 공부를 그르치고 말 것이니 조심해야 한다. 그런 주장은 화두의 원리도 모르면서 그저 화두를 금과옥조로 떠받들기만 하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오해일 뿐이다. 화두는 짧고 빨리 들수록 좋은 것이지, 길게 오래 드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 그것은 간화선의 요지를 모르는 것이다.


화두는 빨리 깨닫도록 장치된 수단이다. 그것을 질질 끌고다니면서 "화두 들고 의심하다 죽어야지, 다음 생에도 수행하는 모습으로 거듭난다"라고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참으로 허망한 짓이다. ----- p. 13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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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 뇌과학자의 뇌가 멈춘 날, 개정판
질 볼트 테일러 지음, 장호연 옮김 / 윌북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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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자가 뇌졸중을 경험한 흥미로운 이야기. 좌뇌가 만들어내는 언어의 부작용을 언급할 땐 그것이 마치 선zen의 그것과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 다만 언어의 재잘거림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제시한 해결책은 일시적 미봉책에 가깝다.


뇌졸중이 일어났던 날을 되돌리자면 달콤하면서 씁쓸한 기분이 든다. 좌뇌의 정위연합 영역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자 신체 경계를 인식하는 능력이 피부 끝까지 미치지 못했다. …이제 정상적으로 정보를 처리하는 세상과는 멀어진 듯 보였다. 나는 신경이 파괴되는 재앙에서 살아남지 못한 게 분명했다. 질 볼트 테일러는 이날 아침에 죽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누구일까? 내 좌뇌가 파괴되었다면 오른쪽 나는 누구지?


"나는 질 볼트 테일러야. 신경해부학자이고 이 주소에 살며 연락처는 이렇게 되지" 하고 말하는 언어 중추가 침묵하자 더 이상 내가 그녀여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참으로 기이한 인식의 변화였다. 나에게는 그녀가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알려주는 감정 회로와 그녀의 비판적 판단 패턴을 알려주는 자아 중추가 없어졌다. 나는 더 이상 그녀처럼 생각하지 않았다. 실질적으로 만만치 않은 양의 세포가 파괴되었으므로 다시 그녀가 되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될 수도 없었다.


질 볼트 테일러, 「나는 내가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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