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자, 내 아이를 해치는 달콤한 유혹
안병수 지음 / 국일미디어(국일출판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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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보면 간단한 이야기다. 과자만드는 회사에서 근무하던 저자는 이유없이 몸이 아팠고 그 이유가 과자를 비롯한 가공식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회사를 그만두고 가공식에 관해 공부하게 되면서 자연히 자연주의자가 되었다는 애기다. 전부 다 알지만 끊기는 어려운 가공식품 이야기이다. 나로서는 조엘 샐러틴의 말이 떠올랐다. 환원주의가 토양을 망친다고. 기계론적인 관점이(예를 들면 NPK 농법같은) 자연을 망친다는 것이다. 원자나 분자로 대상을 분해하는 게 아니라 상호작용을 하는 전체로서 자연을 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런 면에서 NPK 농법은 토양을 망친다. 토양의 복잡한 상호작용에 대해서 우린 아직 잘 모른다. 조엘 샐러틴은 자신의 농장을 그런 상호작용이라는 관점에서 순환방목시킨다. 재미있는 것은 저자가 영양소를 바라보는 관점도 그런 상호작용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연에서 특정 성분을 추출해서 가공식품에 집어넣으면 우리 몸에 해를 끼친다. 하지만, 그 성분을 원래 있던 자연의 다른 성분과 함께 섭취하면 해가 없다. 우리가 토양의 상호작용을 잘 모르 듯 이러한 상호작용을 잘 모른다. 과학은 그저 한 가지 단면만을 파악하고 그걸 단서로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 그래서, 비타민 같은 특정 성분의 보조식품이 오히려 해로울 수 있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포텐거의 고양이 실험이다. 유해 성분을 고양이에게 투입했더니 당대 뿐 아니라 당대에 영향이 없어도 그 후대에까지 인과응보처럼 영향을 미치고 결국에는 씨까지 말라 절멸하더란 애기다. <칠드런 오브 맨>이란 영화가 생각났다. 올드독이 추천하다던데, 인류의 씨가 말라  지구상에 남은 단 한명의 아기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활극이다. 그러고 보면 스티븐 호킹도 언젠가 인류는 멸망할 거라고 했다던데 아마 화학물질이 인류멸망의 <히든카드> 아닐까. 수영장을 쌀로 가득 채운 후 그 쌀 한톨 크기의 유해 성분으로도 인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이 쯤되면

정말 <슈퍼 히든 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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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 때려라! - 뇌가 휴식하고 재정비하는 바로 그 시간
신동원 지음 / 센추리원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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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대학에서 시험보면 답안지 한장을 두 장으로 부풀려 제출하곤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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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동안의 거짓말 - 식품과 약이 어떻게 당신의 건강을 해치고 있는가?
랜덜 피츠제럴드 지음, 신현승 옮김, 김양중 감수 / 시공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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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 읽지 마세요. 한여름에 읽어 보세요 소름이 오싹 끼쳐요 피서에 제격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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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농부의 순전한 기쁨
조엘 샐러틴 지음, 유영훈 옮김, 방원기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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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많다. 불만도 많다. 확신은 넘친다. 마이클 무어가 농촌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이런 모양새가 아닐까. 조엘 샐러틴의 주장은  크게 두자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생산자의 측면과 소비자의 측면에서이다.

 

생산자의 측면에서 그는 거대 식품산업을 비판한다. (마이클 폴란의 말을 빌면 "산업적 음식 사슬" 쯤 된다.) 식품 산업이 환경을 파괴하고 식품의 질을 저하시키기 때문이다. 아니 이런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지 모른다. 어쩌면 "환경"이나 "자연", "식품"에 대한 정의가 양자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산업화에 근거해 기계화,표준화,단일화 등을 이룬 식품산업은 자연을 개별 단위로 구획하고,대량생산을 통한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여 비용을 절감하고, 이윤을 달성한다. 그 결과 우리는 구두약보다 싼 음식(더 이상 먹을 게 없다 중)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조엘 샐러틴이나 마이클 폴란은 여기에 숨은 비용이 있다고 주장한다. 환경파괴를 보전하기 위한 납세자의 비용이나 생물다양성 상실 등이 그것이다. 반면 조엘 샐러틴은 자연의 유기적인 상호관계와 다양성을 따라 농장을 운영한다. 자연의 싸이클을 따르기 때문에 환경파괴 없이 지속적으로 질 좋은 음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더불어 자본의 착취도 피할 수 있다.

 

유기농농부로 시작했다가 제너럴밀스의 부사장이 된 진 칸의 말처럼 "그래봐야 이건 음식일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음식을 소비하는 방식에 따라 전체적인 사회구조가 바뀐다. 식품산업에서 이윤을 얻으려면 대량생산으로 비용을 절감하면서 대량소비가 필요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무역을 통한 "세계화"가 필수다. 또한 대량생산에는 거대한 자본이 필요하기 때문에 다국적기업이 등장하게 된다. 거대한 자금력을 가진 다국적기업이 대량생산을 주도하고 지역 소농을 병합한다.(책에는 닭 파는 타이슨푸드와 농부와의 관계가 나온다) 그리고 그 과정에 깔린 것은 언젠가 없어질 값싼 석유에너지의 사용과 대량생산에 걸맞게 동식물을 개조하는 것이다.전국적인 규격화를 위해 정부의 전체적인 통제가 이루어지고, 아르헨티나의 물품을 미국인이 소비하기 때문에 상품을 매개로만 관계가 이루어지는 자본주의가 필요해진다. 반대로, 조엘 샐러틴은 4시간 이상 거리가 걸리는 곳에는 고기를 팔지 않는다. 신선도를 유지할 수 없고 산업식품사슬에 동조하는 거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전국적인 수요를 감당할 수 없는 다품종 소량재배는 철저히 지역밀착형이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밀착형 관계를 중시하며 공동체를 중시한다.(호모 코뮤니타스를 쓴 고미숙씨가 생각난다) 정부의 규제는 짐이 되기 때문에 그는 공무원을 엄청 싫어한다.

 

나라면 폴리페이스 농장에 한표 던지겠다. 하지만, 몇 가지가 걸린다.

사료를 먹인 닭과 방목해서 소똥 속의 지렁이를 잡아먹으며 큰 닭 중 어떤 것이 나에게 더 좋을

까? 나는 지렁이를 먹은 닭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이런 걸 지저분하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다. 조엘 샐러틴은 시종일관 공장식 사육을 공격한다. 동물들을 불행하게 하고, 불결하다는 것이다. 공장식사육의 불결함을 막기 위해 닭에게 항생제를 먹이고 돼지 꼬리를 자른다. 여기에 항생제생산회사나 사료생산회사 등이 얽히면서 판이 커지게 된다. 반면 반대론자들은 샐러틴의 닭들이 야생의 새들과 어울리면서 조류독감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비판한다. 공장식사육이 동물을 안전하게 하는 방법이라는 것과 동물을 불행하게 만들 뿐이라는 주장도 비슷한 대립이다.

 

박이문 교수님의 철학에세이에서 이런 뜻의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정확한 문장은 잊어버렸지만 "인간과 자연의 구분도 결국엔 인위적인 것이다"라는 것이다. 한참 안드로메다로 가서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를 떠올려보자. 온몸이 사이보그이고 뇌의 일부만이 인간인 상황에서 구사나기 소령은 마지막에 인형사와 결합해 전혀 새로운 생명으로 진화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데카르트적 의미도 있지만, 글자 그대로 물리적인 내가 누구인가라는 의미도 있을 수 있다. 만약 인간인 구사나기가 자동차를 타면서 그 자동차와 기계적으로 완전히 결합한다면 자동차도 구사나기일까? 과연 어디까지를 "자연"이라고 해야 할까? 샐러틴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처럼 자신의 농장이 자연의 순환을 재현하고 있는 것처럼 애기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샐러틴만큼의 확신을 가지진 못하겠다. NPK 농법도 처음 등장했을 때 방향은 다르지만, 샐러틴 류의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그럼 면에서 마이클 폴란은 훨씬 신중했디.( 우리가 이 음식 사슬을 설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잡식동물의 딜레마" 중)

 

생명은 샐러틴의 말대로 대량화, 산업화 하기에 부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생명은 상품이 아니기 때문이다.(예전의 통큰치킨 논란이 생각난다. 닭 한마리에 몇 천원,몇천원하던 그 때 나에게 떠오른 건 닭은 닭일 뿐이라는 것이다) 상품으로서만 길러진 생명은 아마 먹기에 부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설국열차>에서처럼 고기를 실험실에서 배양해서 먹는 시대가 온다면 나는 어떻게 이걸 받아들여야 할까? 아니 이 책에서는 이미 단지 먹히기 위해 태어나는 소,닭들이 등장하고 있다. 이들은 품종교배를 통해 태어났다. 단지 성장을 위해 자신의 몸까지 갉아먹도록 태어날 때 부터 프로그램되어 있다. 이미 "자연"은 어느정도 변화한 것 아닐까?

 

이제 소비자의 측면에서 보자. 샐러틴은 엉터리 음식을 먹는 소비자 때문에 우리 농업이 이런건지, 우리 농업이 엉터리라서 소비자들이 엉터리음식을 찾는 건지 모르겠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비싼 자신의 달걀을 돈 때문에 못 먹는게 아니라 음식 자체를 비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선순위라는 표현을 쓴다) 가공식품의 영향은 장기적이어서 인과관계가 불분명하다고 한다. 글쎄, 그러면 인과관계가 없는 거 아닌가?  나라면 첨가물이 범벅된 음식을 먹진 않겠지만 이런 주장이 설득력이 있을까? 가공식품은 마치 담배가 처한 상황과 비슷한 것 같다. 막연히 의심하고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지만 이미 일상에 스며들어 사람들은 그것을 특별한 것으로 인지하지 못한다.가격애기를 할 때 샐러틴은 약간 어그러진다. 소비자한테는 제 값주고 사 먹으라고 하면서, 돈이 중요한 가치가 아니라고 하면서 농부의 소득을 말할 때는 소득이 너무 낮다고 탄식한다. 물론 나 역시 소득문제 때문에 귀농이 망설여지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 읽다보면 오히려 절망감이 드는게 사실이다. 미국의 농촌문제과 한국의 농촌문제가 놀랄 정도로 흡사하기 때문이다. 인구감소, 인재유출,저소득 등... 미국조차 어쩔 수 없구나하는) 자신이 자본주의자이고 사회주의자는 없으면 없을 수록 좋은 존재리고 하지만 식품산업을 등장시킨 것이 자본주의였다.

 

10여년 전에 읽은책에 <더 이상 먹을 게 없다>라는 책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마이클 폴란이나 조엘 샐러틴이 제기한 문제가 이미 그 책에 제기되어 있었던 것 같다. 오염은 전방위적이며 공장식 생산은 부적절하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더욱 산업화로 나간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 과자에서 황색1호니 ,2호니 하는 문구를 본 기억이 있지만, 요즘은 정말 음식의 "UN 로테이션"이다.(이 말은 박찬호가 뛰던 다저스 선발진을 가리키던 말이다) 한번 라면봉지의 구성성분을 보라. 미국산부터 시작해서 칠레산, 페루산..... 우리집의 들깨는 인도산이다. 예전에 맥도날드는 음식을 조리하는게 아니라 조립한다고 비판받았는데 요새는 일반 음식점이라고 해서 얼마나 다를까 싶다. 무려 10년 동안 나빠진게 이것만은 아닐 것이다.

 

p.s. : 책을 출판해준 출판사에게 고맙다. 하지만, 책 만듦새가 오버해서 고급스러운 것 같다. 굳이 두꺼운 종이를 쓸 필요가 있을까. 줄 간격이 커서 보기에 편하긴 하지만 살짝 오바에다 책은 더 무거워 졌다. 참고로 책 겉표지에 나온 사람은 조엘 샐러틴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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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하는 이유 -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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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리가 없잖은가. 만약 이 책 한권으로 그런 것이 찾아진 다면 그건 저자가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논리전개나 문장의 밀도는 전작 고민하는 힘보다 더 떨어진 느낌이었다. 왜 이렇게 살기 힘들어졌을까?  그런데 우리는 왜 위기감을 느끼지 않는 걸까?  우리의 일상이 계속되리라고 왜 우리는 기대하는 걸까? 여기서 오히려 필요한 것은 맑스류의 정치경제학이거나 사회학인지도 모른다. 저자도 비슷한 시도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저자의 본래 필드는 아닌 것 같다. " 태도" 를  중시하는 태도(?) 는 나에게 스토아 철학을 연상시켰다 (세상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말한 모 스토아 철학자)  그리고, 세상이 던진 물음에 대답하는 것이 삶이라는 문장은 니체류의 위버멘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 저자는 신이 죽은 이후 삶의 의미를 인간은 스스로 찾아야 하는 어려움에 처했으며 그런 의미는 타자와의 마주봄을 통해서만 이루어 질 수 있다고 본 것 같다(차라리 다시 신을 살릴까?)  타자와의 진지함에 대한 공명 (이건 불교를 나에게 연상시켰다. 최근에 읽은 불교 구루들이 하는 말이다  "만물에게 공감과 협동이 함께 하기를!). 하지만, 저자가 말한 "독아론과 커뮤니케이션의 충돌"은 나에게 난제이다. 아닌게 아니라 만약 타자가 내가 동의할 수 없는 가치관과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면 나에게 그런 타자 뿐이라면 타자를 통해 나의 의미를 정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더 근본적인 질문- 왜 저자는 삶이 선이라는 전제하에 모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걸까. 아 물론 나도 삶이 선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그걸 논리적으로 증명하진 못하겠다, 저자의 모든 주장은 삶이 선이라는, 말미의 역자의 문장 -죽지마라-라는 의도하에 쓰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난 (아직까지는) 죽지 못한다. 나의 몸이 그걸 거부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두 번 읽었지만 아직 모호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저자의 통찰은 여전히 빛나는 것 같다,

여담 하나.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의 공통된 생각- 일본의 학생운동은 한번도 진지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하루키는 상실의 시대에서 간접적으로 그런 생각을 드러냈고 류는 십년도 더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그런 말을 했다. 이제 강상중도 같은 말을 한다, 세번이나 같은 말을 들으니 어째 그게 사실인 것 같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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